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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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문트의 성장을 통한 감각적 인식과 정신적인 인식의 성장과 그 의미를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 비추어볼 수 있게 해주는 원형적인 작품이다. 골드문트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길은 지성을 통해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게 잃어버린 어머니의 형상을 쫓아 어머니의 모습을 한 여자들의 육체를 탐닉하면서 감각적인 세계인식을 통해 그 좌절과 허무를 경험하고 삶의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그런 길이었다. 사실 우리들에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 인간 속에 내재한 동전의 양면적 모습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헤세는 50즈음이라는 나이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쓴다. 그에게는 이 작품이 자신의 성장과정을 되돌아보는 작품이자 인생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난 후 그 인생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시 명징화시켜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인생이란 단지 금욕적이고 정신적인 지성의 추구에 의해서 온전히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노벨상 수상작인 유리알 유희에서도 같은 맥락의 스토리 전개가 이어지듯이 그는 삶에 있어서 인간이 가지는 감각적인 측면과 그 감각을 통해 배우는 인간 삶의 불완전함을 온전한 자신이 경험하지 않고서는 삶의 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때로는 정신적인 이성과 지성이 분별없는 감각적 쾌락을 제어하고 그 감각이 추구하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듯이 보이지만 감각적 체험이 결여된 정신적 지성의 추구 또한 허무하고 공허한 것임을 그는 강조한다. 삶을 인간의 몸으로써 주어진 그대로 온전히 느끼며 그것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미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헤세가 그의 온갖 굴곡을 거친 인생에서 깨우친 교훈은 나에게도 커다란 이정표가 되어 준다. 사실, 나에게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내가 가진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삶에서 온전히 그 몫만큼 배우지 못한다면 나의 삶은 기형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의 말대로 깨우침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길이 어떠한 것이든 나에게 주어진 운명적 삶의 한 장면 장면이 나에게 온전히 그 의미를 다하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어쩌면 인생의 굴곡에서 내가 배워야 할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넘기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선악이 공존하는 모순 속에 우리의 삶이 던져졌고, 그것은 인간이 내리는 구분 기준일 뿐 사실은 그 선악의 모든 것이 신이 내리는 깨달음의 축복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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