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새 봄'을 기다리며 그녀를 기억하다
레이첼 카슨 평전 - 시인의 마음으로 자연의 경이를 증언한 과학자
린다 리어 지음, 김홍옥 옮김 / 샨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레이첼 카슨은 무슨 대중 운동에 불을 지필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독을 소중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고 싶어 했다. 조직 활동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그녀는 마치 애초부터 증언을 위한 사람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만 같다.”


장장 774페이지에 이르는 레이첼 카슨 평전의 저자 린다 리어가 쓴 ‘머리말’이다. 1962년 남성중심주의 생태환경에 '도전의 불'을 지핀 레이첼 카슨. 그녀는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듯이 개인적이고 조용한 성품의 사람이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호들갑 떨지 않고 걷는 사람. 하지만 그 발걸음은 생태계 혼란으로 신음하는 지구의 축을 흔들어 놓았으니 ‘선지자’라는 표현을 헌사한 일은 과장이 아니다.『침묵의 봄』을 두려움으로 읽고나서 나는 그녀의 일생이 알고 싶었다. 당연하다. 인간과 지구의 틀에 경각의 지팡이로 탕 두들긴 거장의 다큐멘터리는 한 편의 불꽃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역경을 견디며 피운 한 여자의 열정 앞에 숙연함을 넘어서 경외감까지 든다. 평전 읽기라는 속성을 분석해 볼 때 이 책은 그 많은 오문과 오역에도 불구하고 대단하다. 한 사람이 남긴 울림을 어색한 문장 몇 개와 엉성한 조합으로 짜 넣은 글자 몇 개로 감할 수 없다. 지속적으로 괴롭힌 경제적 가난과 불우한 가족사, 성(性)차별의 장벽과 지병을 통과하며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독자도 긴 여정에 한숨을 쉬고 책을 덮는다. 죽는 일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아름답다고 말하며 그녀는 제왕나비처럼 자연의 순환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 개인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레이첼 카슨의 생명사랑은 환경에 대한 인식의 재편성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논의 하나를 던져 놓아보자. 그렇다면 2007년 현재 우리는 자연환경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는 정치, 경제적 요소와 더불어 문화와 주거환경 등 인간이 숨쉬고 먹고 자고 배설하며 유희하고 생계수단으로 삼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포괄적인 질문이다.


질문은 내 글의 특성상 자주 사용하는 버릇으로 이 리뷰의 말미에 그 답변을 제시하겠다. 우선 이 책에 관한 분석, 지극히 주관적인 해체방식을 통하여 레이첼 카슨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어렸을 때 이미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소녀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는 숲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산책을 나갔다. 함께 놀만한 친구가 없는 외딴집의 고독한 아이는 야생의 새나 동물들과 함께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늘 품는 생각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충분한 위로를 받지 못한다. 인간의 위로는 한계가 있고, 쌍방통행이다. 온전하게 인간을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상처받은 소심한 아이는 자연에서 벗을 구하고 상심을 치료한다. 그러나 평생 레이첼 카슨의 주변에 머물며 그녀를 열렬히 지지해 온 어머니와 출판 대리인 마리 로델, 생물학자인 메리 스콧 스킨커, 도로시 프리먼 같은 친구는 은총이다. 이 특별한 축복의 힘으로 레이첼 카슨은 고단한 항해를 견뎠다. 그 중에서 어머니는 레이첼 카슨의 중심세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어린 나이에 가정경제를 책임지며 학업을 해야 하는 딸에 대한 최대의 배려였을 것이다. 여성에게 과학을 진지하게 가르칠 필요가 없는 시대에 딸의 생물학 공부를 지지했으며 딸에게 결혼제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기를 강조했다. 자녀가 부모의 꿈을 대리만족으로 이어주는 존재라면 이 경우, 그 말은 완벽하다. “나는 글쓰기를 숭상한다. 그렇다. 이게 바로 나의 고민이다”라고 말하는 대학 3학년짜리 딸의 소망을 지지했으며, 결혼과 출산으로 자신의 삶을 진행하는 당시 여성관에 “과학을 전공하게 되어 너무 좋아!”라고 들뜬 모습에도 함께 환호를 해줬다. 자신의 상실한 꿈을 달래기 위해 숲으로 산책을 다닌 어머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굴뚝새와 줄다람쥐와 야생화를 만난 어린 딸. 모든 꿈의 출발은 작은 우연의 것으로부터 준비된다. 레이첼 카슨의 불꽃같은 삶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불을 지피게 해 준 새벽의 신이며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준 대지의 여신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위대할 수 없다. 어머니라는 이름만으로 낭만적 감성으로 치장할 수 없는 부분도 반드시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 중 일부는 훌륭하고 일부는 평범하며 일부는 흉포하다. 레이첼 카슨의 어머니는 평범했지만 평범함으로 자녀의 비범함을 키웠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비범함이란 단순히 ‘명성’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레이첼 카슨의 비범함은 그녀가 장학생이었으며 정부 공무원 특채과정을 거치고 작가로서 성공한 부분만 조명되어서는 곤란하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레이첼은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오던 시를 버리고 현미경이 보여주는 신비한 세계를 택했다. 결단력 있는 선택과 자연환경에 대한 맹목적 무지를 겨냥한 학문의 탐구는 이 후 그녀의 삶을 고통으로 안내한다. 고통의 산물은 현실이다. 때로는 과거의 무게가 현실을 짓누르기도 하지만 유효성에 한계가 있다.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는 길로 묵묵히 나아가는 레이첼의 선택은 그녀가 준비한 비범함의 첫 단계였다. 1940년 첫 번째 책『바닷바람을 맞으며』를 출간하면서 ‘인간중심주의’의 세계관에 도발을 건다. 이 책은 여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좌초한 모험으로 끝났다. 1962년『침묵의 봄』이 캄캄한 인류의 뒤통수를 두들기기 전까진. 다시는 책을 써서 생계를 꾸리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그녀의 좌절은 심각했다. 해양생물학 연구 정부 공무원으로서 1946년 한 달 동안 경험한 미국 서부지역 여행은 레이첼에게 생태의식에 잴 수 없는 깊이를 더해 준 결정적 계기가 된다. 콜로라도 댐과 연어의 회귀, 태평양에 대한 조사, 조수관찰, 토지에 미치는 환경인자까지 두 번째 비범함은 한층 깊고 넓어진 영역으로 확장된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가 1951년 7월 2일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출간되면서 ‘대중적인 과학 글쓰기’ 작업은 재시도에 성공했다. 두 번째 책의 성공은 인기와 명성과 경제적 안정을 제공했다. 여성의 과학접근을 폄하하는 상황에서 이룩한 쾌거다. 86주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그 중 32주는 1위 자리를 지켰다. 엄청난 저작권 수입은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려온 한 여자의 불안한 삶에 안정을 부여했다. ‘글 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퇴직을 한다. 비로소 어머니와 자신의 꿈이 온전한 모습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집을 이사하고, 서재를 만들었다. 성능 좋은 타자기도 들여놨으며 본격적인 자료수집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레이첼의 비범함은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와 종종 오버랩 된다. 다섯 명의 부양가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문학의 꿈을 접었던 소녀시절부터 인세 수입에 생계걱정을 덜기까지 가족은 그녀에게 불가사리 같은 존재다. 끊임없이 빨아먹고 붙어 다니며 마음에 흠집을 새겨 넣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현장에 나가 몇 시간 동안 자연 속에 빠져있을 때다. 독자는 그녀의 일생동안 지속된 그 지겨운 가족문제에 냉정한 칼을 휘두르지 못한 부분에 내내 갑갑하다. 1964년 죽음을 맞이할 때 까지 가족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평생을 그녀에게 따라붙은 불행한 가족사에 위로수단으로 삼은 자연환경 탐구는 오히려 그녀의 비범함에 윤활유가 되었다. 불행을 하나의 방편으로 삼아 꿈을 이루는 일이라니. 살충제 살포를 방사능 낙진으로 비유한『침묵의 봄』은 이런 배경으로 탄생한다. 말할 것도 없이 화학물질 살포 문제에 물음표를 던진 대담한 여자의 도발에 기득권이 태연하게 인정할 리 없다.『침묵의 봄』이 1957년 농무부의 롱섬 불개미 박멸안에 관한 동기관찰로 출발한 후 살충제 논쟁은 불을 피웠다. 논쟁의 끝에는 권력과 비권력으로 나눠지고 개인간, 또는 단체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적과 아군으로 다시 나뉜다. 논객이 감춘 칼은 잉크가 묻어있지만 그 펜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독을 묻히고 있다.

레이첼 카슨의 비범함과 성실함의 결정체인『침묵의 봄』은 결국 제목처럼 그녀에게 ‘침묵의 봄’이 되고 말았다. 생명과 환경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은폐시키려는 많은 인간들에게 어둠의 밤을 밝혀주었지만 이 책은 논쟁의 한가운데 칼날을 디뎠다. 의심을 품고 문제 제기에 성공했지만 레이첼에게는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되었다. 지병으로 앓던 유방암이 악화되었고 그녀는 1964년 4월 14일 꽃피고 개똥지빠귀가 노래하는 새 봄에 세상을 떠났다. 생의 절정에서 맞이한 죽음이다. 그녀에게 마지막 헌사를 받친 이는 ‘나의 흰 히아신스’라고 부른 도로시 프리먼이다. 40년 후 2007년 평전의 마지막 책장을 덮은 독자는 처음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긴 서평을 맺는다. 수소폭탄이 있는 한 아무 걱정이 없으며, 몇 마리 작은 곤충의 죽음에 과민반응하지 말자고 하던 1962년 한 독자의 발언을 상기한다. ‘그깟 뒷 문’을 방치한 비잔틴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피의 멸망을 당했으며, 인류사의 학문은 수많은 의문부호를 주렁주렁 달고 나아간다. 깨물지만 말고 물어뜯으라고 토머스 울프는 말한다. 사물을 입체적 조감도로 보는 것과 평면적 단면도로 마주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편집자 E.B.화이트의 편지글로 대신한다.


“저는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해 비관적입니다. 너무나 치밀하게 스스로의 이익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사코 자연을 자신 앞에 무릎 끓게 만들려고 합니다. 만일 인간이 이 지구에 순응하고, 회의적이고 오만한 눈길이 아니라 겸허하고 감사한 눈길로 이 지구를 바라본다면 우리의 생존 가능성은 한층 더 커질 것입니다.”-(632쪽)


*부기*

평전은 한 인물의 출생부터(혹은 그의 조부모부터) 죽음까지 함께 이동하는 글이다. 그런 점에서 방대한 자료와 더불어 작가의 객관적 자세를 요구하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부딪친 시시콜콜한 밑그림에 지겨웠음을 고백한다. 속도위반 벌금으로 낸 5달러 기록까지 들추어낸 작가 린다 리어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옮긴이의 후기처럼 후덕한 관용의 공치사를 늘어놓지는 못하겠다. 평전의 세밀도에는 동의하지만 ‘레이첼은~’과 ‘카슨은~’을 교대로 왕복하며 사용하는 대명사의 오용에 대해선 불만이다. 일관성 없는 호칭문제와 원서를 확인할 수 없는 오문으로 짜증 났다. 논리가 감성에게 자리를 내 준『침묵의 봄』이 무색하다. 다만, 수록된 사진 자료와 레이첼 카슨이라는 한 인물이 인류사에 어떤 울림을 남겼는가에 우선 순위 관점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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