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 가슴을 도려내는 듯 아름다운 우리 문장 43
장하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무상(無常)

/이은상


   ‘아니디아!’ 어허 천지가 무상하구나. 과연 무상인고.

   아침 새 창 머리에 와서 노래하는가 하면 석양이 마당에 비껴 저녁 그늘을 누이니 이것이 무상인가.

   뜰 앞에 심은 복숭아 나뭇가지에 향기로운 꽃송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돌아서서 그 나무 아래 어지러이 날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니 이것이 무상인가.

   견우와 직녀 같이 웃으며 손목 잡고 사랑하다가 삼성(參星)과 상성(商星) 같이 등지고 헤어져선 원수가 되고, 어느 때는 한자리에 같이 앉지도 아니하다가 다시 보면 어깨 겯고 같이 웃는 시시변전(時時變轉)의 인정 그것이 무상인가.

   저 이릉(李陵)이 하량에서 소무(蘇武)와 이별하며 인생의 덧없음을 일러 아침 이슬이라 하였던 말이 오늘은 뉘게나 상식같이 되었지마는 보라 어찌 인생뿐이랴. “나고 죽는 온갖 것 속에 자연만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하고 소동파는 외쳤지마는 슬프다 그 사람 자연도 무상한 줄 몰랐었구나.

   산도 헐어지고 물길도 돋아나고 고목은 굽어 썩어지고 새솔 나 자라나고, 이라형 왕국도 변하고 역사도 바뀌고 천지도 옮기나니 이것이 무상인가.

   그렇다. 염염찰나(念念刹那)에 나고 머무르고 달라지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던가. 우주가 통히 그대로 무상밖에 다시 또 무엇이랴.

   ‘아니디아!’ 자정이 넘어 깊은 밤. 소리도 없이 오시는 눈이 어깨랑 가슴 위에 내려 쌓이는 밤. 구트나 슬픈 기억을 한 아름 안고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찾아 돌아왔다.

   희미한 등불아래 앉았으나 멀고 멀다! 아득한 마음을 감아 거둘 길 없다.

(ref. 아니디아 : 범어로 Anity. 무상이라는 뜻.)


   .....................

 

 

 

 

   아우야. 이 밤이 지새도록 어디 가 놀며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새벽바람이 차구나. 네 병이 더치리니 어서 왜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빈방이 너를 기다린다. 돌아오너라. 지금 이 아름다운 달빛이 너를 찾아왔구나. 돌아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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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이 기운다. 산 넘어 달이 기우네. 너무도 적막하여 미칠 것만 같구나.

   저 지공(指空)이 입멸(入滅)했을 때 나옹선사 생사에 대한 자기의 소견을 말한 그 노래,


   나는 것이란 맑은 바람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맑은 못에 달이 잠기듯

   고요히 서산을 넘어 꺼져 가는 달빛


   이제 내 앞에 ‘만사가 다 그만이라’는 큰 교훈을 내리고 있다.

   한 자, 반 자, 한 치, 반 치, 낮추낮추 꺼져 가는 저 서산의 달은 참으로 죽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광경이다. 가버린 내 아우는 다시 불러올 수 없는 것같이, 지금 깜박하고 꺼져버린 저 달도 영원히 건져 올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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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프다. 이 영원한 고난을 헤어날 길이 어디메 있나. 내 가슴은 창검으로 찔리고 벤 것 같구나. 능엄경에 저 세존이 친히 아난(阿難)을 불러 이르되 “네 마음이 본시는 묘하고 밝고 깨끗했으나, 스스로 미혹하여 본시를 잃고 윤회를 받아, 생사 중으로 늘 뜨락 잠기락한다” 하였다.

   그러나 여기 무슨 방법으로 이 고난의 경지를 벗어나 밝고 맑은 본심을 도로 찾을지 나는 둔하여 알지 못한다.

   이 인생을 구원할 길이 어디 있는고. 캄캄한 내 눈 앞을 쓸어줄 사람이 없는가. 삼라만상이 고요할 뿐! 다만 적막이 천지에 찼을 뿐이다.

<이은상作, ‘無常’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장하늘著, 다산초당刊 中>



   “배재고보 5학년이던 노산의 아우(正相)가 졸업을 앞두고 20살의 젊음으로 꺾였다. 동경 가서 고학하는 친구와 ‘독립’을 논하던 편지가 발각되어 용산경찰서에 구속, 석 달이나 당한 고초 끝에 병을 얻어 입원했는데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말았다.

   운명하며 남긴 돈 7원 3전! 모교의 장학금으로 써달라는 유언대로 ‘정상장학회’를 세우고, 많은 기부금과 함께 기념사업이 벌어졌다. 수필집 ‘무상’의 인세 역시 모두 장학회에 바쳐졌다.”

/장하늘 後記


얼마 전 김성우의 수필집 ‘돌아가는 배’ 中, ‘동백꽃 필 무렵’을 옮겼다.

이은상의 수필 ‘無常’의 일부를 옮긴다.

동생의 죽음에 극도의 슬픔에 젖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의 심정이다.

20세기 한국의 名文 중, 수필 부문에 속하는 글들이다.


閑士

                                                                                                                                 Ha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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