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연애시를 읽다 - 3천 년의 연애학,『시경詩經』의 비밀을 파헤치다
류둥잉 지음, 안소현 옮김 / 에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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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경을 다시 읽는다. 시경을 다시 읽으니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우선은 기원전 3000여년전에서부터 2500여년전까지 존재했던 시를 공자님이 가려뽑은 305편의 시가 시경이라는 이름을 달았다는 점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인류의 보편적 교훈이 되는 글. 공자님의 말대로 '낙이불음, 애이불상'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니 이는 단순히 사랑의 열정에 불타오르다 재만 남고 모두 홀랑 태워버리는 사랑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즐겁지만 음란하지 아니하고 슬프지만 몸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풀이처럼 사랑의 순수성이 있어 오늘날의 사랑이라는 말과 어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사랑의 감정을 바라보는 공자님의 깨친 마음의 경계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공자님 생전의 시들을 가려뽑았으니 그 시경에 담긴 평범한 청춘남녀의 감정을 순수하게 그대로 옮겼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유학의 기초는 수신에 있다. 그 수신은 몸마음 모두를 수양하는 것에 있다. 우선 한 인격체 안의 몸마음 수양이 된 후에라야 비로소 제가할 수 있고 능히 제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치국할 수 있고 나아가 평천하할 수 있다 한다. 그러하니 수신은 자신의 순수한 감정과 맑은 마음이 드러나 순수하고 맑은 사랑의 감정으로 표현되고 그것이 나아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랑하게 되고 가정을 이루니 그 첫 출발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비로소 나는 시경 300여편 중에 사랑을 읊은 시가 90여편으로 절대적으로 그 비중이 큰 이유를 다시 짐작하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능히 제가 할 수 있는 자는 이미 수신이 된 자이므로 치국 평천하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하니 나에게서 펼처져 상대방에게 가는 것은 절대적 숫자 1이 2로 나아가는 질적인 변화인 것이다. 그 다음 3이나 4나 그 밖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이미 1과 2의 의미가 다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한편 이 시경의 사랑의 시편들이 지금에서야 다시 읽히는 이유는 바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든지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는 '사랑'의 감정인 데에 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려고 했다. 살아있음의 가장 깊은 의미인 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시경의 시편을 읽어보면 저절로 가슴 속에 어떤 꿈틀거림이 느껴지는 감정을 매만질 수 있다. "구욱 구욱 물수리소리 모래톱은 다정스럽고 아름다운 요조숙녀는 군자의 배필이라네"라는 시편이나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이여, 아득하고 아득한 나의 그림움이로다"라는 문장을 읽고 있으면 이 메마른 중년의 가슴에서도 설레임이 솟구쳐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삶은 늘 첫사랑의 설레임같은 것일 수 있을 때 깨이고 열린 마음으로 순간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다음 시경의 문장들에 나타난 사랑의 언어들을 보면 그 시대의 남녀 사랑이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들이 자유롭게 연애하고 또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녀들이 감정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또 간절하고 애절한 사랑의 감정을 담은 시편들이 많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박하지 않고 그 욕망이 거칠지 않다. 그것은 그녀들이 표현하는 사랑에는 무거움과 절제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자유연애를 권장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할지라도 한 번 선택한 배필에 대해 인생의 끝까지 함께하려는 의지가 또한 거침없는 욕망의 한 편에서 보이지 않게 그 감정을 절제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교와 유학이 지향하는 사랑 이후의 가정의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여 끝내 사회질서와 가정의 구조를 정절로서 지켜내려고 하는 유교정신으로 이어졌을 터이다. 그러니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잡는 것처럼 위태로운 욕망의 말고삐를 절제와 균형으로 잘 돌려서 나의 수신과 가정의 안정과 나아가 치국과 평천하의 반석을 쌓아갔던 것이 아닐까?

 

  요즈음의 사랑의 치정으로 인한 범죄들의 기사를 볼 때면 우리들의 삶이 물질적으로는 달라졌다 하여도 정신적으로는 시경의 감정을 넘어서지 못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추구하였던 정신적 세계가 무언가에 따라 삶의 질은 달라진다. 그것이 시경을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에서도 뭇사람들이 읽어야 하고 또 뭇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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