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인가, 부산국제영화제가 두 번째로 열렸을 때다.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 노릇을 하던 시절, 영화제 보러 간다고 큰맘 먹고 부산행 새마을호(!) 기차를 탔다(새마을호를 탄 건 이때가 처음일 거다). 천리안에서 동호회를 같이 하던 한 언니가 부산에 살아서, 내가 고른 영화 예매도 해주고, 집에 재워주고, 아침저녁까지 먹여주었다. ^^; 그때 씨네21이던가 컴퓨터 통신으로던가 아무튼 영화 소개 글만 보고 고른 영화 중에 <허우샤오시엔의 초상>이란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실은 허우샤오시엔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제목에 끌려 무작정 골랐다. 대만의 영화감독 허우샤오시엔의 성장 과정과 오늘날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주는 이 영화를 보고서 나는 그 사람이 <비정성시>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사람이라는 걸 비로소 알았다. 이 다큐멘터리 중간에 허우샤오시엔이 젊은이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서 “떼떼떼떼...” 하는 한국 노래(주주클럽이 불렀던)를 부르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
‘대만’은 자라면서 흔히 들어온 이름이면서도 내가 대만에 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대만 사람에게 어떤 인상을 느낀 적도 별로 없고. 그냥 장개석 나쁜 놈 이 정도. -.- 장개석은 대만 사람도 아니지만... <비정성시>란 영화를 봐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제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뒤 어느 날, 비디오로 빌려다 보았다.
그때는, 잘 모르겠다,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말하려는 걸 아직 잘 모르겠구나. 그저 영화 속 풍광이 참 아름답고, 양조위가 연기한 청각장애인 사진가가 예쁘다고 느꼈을 뿐.
참으로 오랜만에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다시 보았다. 두 번째 보아선지, 아, 이 영화는 일가족의 역사 이야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 처음 봤을 땐 양조위와 아름다운 풍광만 보였는데, 지금은 네 형제(중 한 사람은 한 번도 안 나오지만)가 다 보였다.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아들을 넷 두고 마을 유지 행세를 한다면 복 받은 집안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던 집안이 현대사의 흐름에 쓸려 비틀리고 무너지는 과정, 그러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듯이 이어지는 일상.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대만은 묘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청일전쟁에서 진 청나라가 일본에 대만을 넘겨, 대만은 51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군이 물러나자 다시 대륙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대만 사람들은 대륙의 중국인들과 동등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 영화에서, 큰형이 경찰에 끌려간 둘째를 빼내려고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협상을 하는 장면이 바로 대만의 묘한 위치를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이 장면에서 큰형이 대만어로 “최대한 협조하고 양보하겠다. 둘째를 도와다오.”(정확한 대사는 이게 아니지만 대충 기억하기로 -_-;) 하고 말하면, 큰형의 부하가 광둥어로 그 말을 그대로 옮긴다. 그러면 대륙 사람들 중 하나가 이 말을 다시 베이징어로 옮기는데, 앞뒤 다 잘라내고 “둘째가 풀려나게 해달라는데.”(이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는 식이다. 자신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상황.
상영 시간이 두 시간 반을 넘는다. 두 시간이 넘으면 무릎이 쑤신다. ㅠ.ㅜ 좀 짧았으면 싶기는 하지만, 영화가 이렇게 긴 이유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실시간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만의 5.18이라는 2.28 사건 때문에 교도소에 갇혔던 이들이 교도관의 호출을 받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구두를 신는다. 그 장면은 실제로 사람이 옷을 갈아입고, 구두끈을 맬 만한 시간 동안 이어진다. 구두끈을 매느라 고개를 숙인 사람 등 너머에서 우리의 양조위가 불안한 시선을 이쪽으로 보내고 있다. 나는 양조위와 눈을 맞추고 왠지 모르게 가슴을 졸인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나보다 한 서너 줄 뒤에 앉은 한 할머니가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다. 같이 울어주지 못해서, 왠지 미안했다.
비정성시(悲情城市 ; A City Of Sadness) / 1989
감독 허우샤오시엔(侯孝賢 ; Hou Hsiao hsien)
*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서 긁어온 <허우샤오시엔의 초상> 정보 *************************************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 1997 허우 샤오 시엔의 초상 | Portrait of Hou Hsiao-Hsi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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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비에 아싸야스 | Olivier Assayas |
| Taiwan / 1997 / 96min / 35mm / Co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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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중 한 사람인 타이완 출신 허우 샤우 시엔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만들었다. 아사야스의 기본적인 접근방식은 허우의 영화가 얼마나 미적인 천성을 흔들리지 않고 신념있게 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허우에 대한 초상은 그의 모든 작품에 근접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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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아싸야스
1955년, 파리에서 태어난 올리비에 아싸이야는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1978년에서 1985년까지 시나리오작가 겸 단편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1980년에서 1985년까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으로도 활동했다. 작품으로는 [무질서](86), [겨울의 아이](1989), [파리는 깨어난다](1991), [새로운 삶](1993), [차가운 물](1994), [이마 벱] (1996), [허우 샤오시엔의 초상](1997), [8월말, 9월초]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