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에 나는 인사동으로 외근을 나가야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어제 오후부터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행도 없이 인사동을 가면, 거기서 데이트를 했던 남자가 떠오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침까지도 이 울적함을 해결하지 못한 채, 최대한 밝은 음악을 고르는 정도의 조치를 취하고 자유로에 올라 서울을 향했다. 그렇게 계속 우울할 예정이었는데 뜻밖에도 금세 그 기분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자유로에서 강변북로를 잠깐 거쳐 마포구청 쪽으로 빠져서 인사동까지 오로지 직진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코스였고, 내 짧은 운전경력으로도 열다섯 번은 족히 다녀온 길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가는 길 내내 바닥에 하얀 스프레이로 표시된 접촉사고의 흔적들이 20미터에 한 군데씩 나타나더니 연대 앞에서 이대 후문에 걸쳐서는 아주 오작교 까치와 까마귀처럼 오밀조밀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흔적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는 운전자들은 지난 사고들에 오마주를 바치려고 일부러 그러는 듯 '아 저러면 사고가 나는구나' 하는 거친 운전을 과시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고 오마주 촬영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앞 차에 코를 너무 바짝 들이대지 않겠다거나, 깜박이를 켜겠다거나, 신호를 지키겠다거나 하는 낡아빠진 정신으로는 시대가 원하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교훈을 네꼬 씨에게 주기 위해 모든 차들이 일사불란한게 움직였다. 나는 아직 협상조건도 알려주지 않은 채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흉악범들에게 제발 이유만이라도 알려달라고 울부짖는 처절한 심정이 되어 차를 몰았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원하는 게 뭐죠? 인사동 주차장 입구, 관리인 아저씨의 얼굴을 보자 비로소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차를 댄 다음 잠깐 정신을 수습했다. 남자 생각따위는 할 겨를이 없었다.

햇볕과 바람이 적당한 인사동 거리는 평일인데도 관광객들로 꽤 붐볐다. 일을 마치고,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잠시 길가에서 땀을 식혔다. 인사동이 전 같지 않다고 불만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인사동은 과거 위에 현재가 입혀지고 상업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과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버무려지고,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어서 아름다운 곳이다. 내 눈엔 좀 허술해 보이는 열쇠고리들을 흥미로운 얼굴로 한참 들여다보는 서양인 아저씨들과, 목에 명찰을 건 채 밥 먹을 곳을 찾는 어여쁜 언니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다가 문득, 내가 여기서 데이트를 한 남자가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기분이 한결 더 상쾌해졌다.

돌아오는 길에 모르고 좌회전 차선에 들어선 나는 차선을 바꾸려고 깜박이를 켰다가 모든 것을 범인들의 뜻에 맡기는 심정으로 그냥 그 차선에서 얌전히 신호를 기다렸다. 뭐, 돌아서 가지. 룸미러로 보니 내 뒤엔 오토바이를 탄 경찰이 같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적어도 뒤에서는 지켜주겠지. 그때 저 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경쾌하게 신호를 무시하며 차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른 룸미러를 살피니, 경찰 아저씨가 놀라운 곡예를 본 관람객의 표정으로 "이야~" 하는 감탄사를 내뱉는 게 보인다. 내가 이런 나라에 사는구나. 아무튼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해 땀이 쪽 빠졌으니, 땡스 투 폭력운전자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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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8-10-07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촌스러운 거겠지만 저 인사동이라는 곳엘 한 번 가봤어요. 그것도 올해 여름에요..
첫 느낌은 '고풍' '고전' 그런건 아니었고 '복잡' '다름' 이었어요.
또 가고 싶은 맘은 당연히 들었구요 :)

난 데이트 할때 인사동에도 안가고 어디서 뭐 했지..? --a

네꼬 2008-10-08 09:12   좋아요 0 | URL
저도 뭔가 복잡하고 어수선한 듯하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인사동이 좋아요. 고급이든 싸구려든 기념품 가게들도 재미있고요. 이따금 좋은 전시를 보는 것도 즐겁고요. (그리고 골목골목 맛있는 음식점들도!)

어디서 무얼 하신 거예요, 응? 응? ㅋㅋ

도넛공주 2008-10-07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물에는 존재의 가치가 있다더니...........중얼중얼...........(그래도 확 엎어져버려라!확!그냥!확!)

네꼬 2008-10-08 09:14   좋아요 0 | URL
괄호 안의 말씀은 폭력운전자님들께 하시는 말씀이죠? (잠깐 후덜덜 했다는.) 적어도 어제는 그런 역할을 해주셨어요. 어휴. 근데 전 어제따라 왜 그리 벌벌 떨었을까요? 한번 당황하니까 점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_-a

mong 2008-10-0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자라도 날리셨음 차라도 한잔 하는건데...ㅎㅎ
그러면 두남자+조류 와의 데이트 기억으로 확대되어 어쩌구저쩌구
중얼중얼
근데 폭력 운전 나빠요 =3=3=3

네꼬 2008-10-08 20:15   좋아요 0 | URL
^^ 그러게. 몽님한테 문자라도 날려볼 걸 그랬네요. 바쁘실까봐.호홋. 근데 왜 두 남자?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꼭 두 사람이라는 편견은... ㅋㅋ

폭력운전 나빠요. 근데 스스로들은 그게 운전을 잘 하는 거라고 믿는 걸까요? 저 정말 너무 쫄았지 뭐예요. 흙.

mong 2008-10-09 13:51   좋아요 0 | URL
잘못했어요 ㅠ.ㅜ
(편견쟁이 몽 ioi)

네꼬 2008-10-09 18:18   좋아요 0 | URL
용서해드릴게요.

(하하하. 농담농담)

전호인 2008-10-08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안전운전을 하셨군요.
사고는 순간인 것 같아요,
사고 난 후 생각해보면 방심하는 찰나인 것이 많으니까요.
항상 안전운전하세염

네꼬 2008-10-08 20:16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 오래간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맞아요 항상 잠깐 방심한 사이에 일이 나죠. 조심 또 조심해야 돼요. 근데 그걸 다른 사람들도 좀 알아줘야 할 텐데. ㅜㅜ 우리모두 안전운전, 안전승차, 안전보행, 안전안전.

2008-10-08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8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8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9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9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10-0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면 세상에 불평 불만이 없겠죠~~~이쁜 네꼬님!
인사동은 한번도 가본 기억이 없으니 못 가본게 확실해요~ ㅜㅜ

네꼬 2008-10-21 00:55   좋아요 0 | URL
저랑 같이 가보세요, 순오기님.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드릴게요! (전 남자는 아니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것이 그곳의 개와 고양이를 만나는 것.



전주 한옥마을, 한옥스테이하는 집의 순한 개. 손님들이 만져도 성가신 표정 한번 짓지 않던 개. 입을 열면 전라도 사투리를 할 것 같았다.



담양 펜션에서 만난 털뭉치 강아지들. (알아보실 수 있겠어요?) 얼굴은 꼬질꼬질한 주제에 생긴 건 얼마나 귀여운지. 아하하하. 생각해도 웃음이 나네. 약간 바보 같은 강아지들이었어요. 못생겨가지고. 하하하하하.



그에 비해 같은 펜션에 사는 이 롱다리 개는 꽤 컸다. 아마 저 위 강아지 한 마리가 이 개 얼굴만했을 거다. 우리가 곁에 가도, 강아지들이 알짱거려도 짖지도 않고 무료하게 시선을 돌리던 하얀 개. 얘도 아마 사투리를 쓸 듯.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침 일찍 식사로 팬케익을 준비하는 동거녀(내 동거녀는 이런 사람이다)의 마음을 빼앗아, 팬케익가루+우유+달걀 반죽 그릇을 통째로 차지한....

 

 



....고양이!!!!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강아지들을 피해 어디 잡아보란 듯이 절벽으로만 사뿐사뿐 뛰어다니던 까만 아기 고양이. 저렇게 고개를 박고 반죽을 먹은 탓에 나중에 고개를 들었을 땐 얼굴이 온통 반죽 범벅이 되었던(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어요!)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아기 고양이. 아무도 모르게 반짝 집어서 배낭에 넣어올까도 생각했지만, 논밭 절벽을 누비던 통큰 영혼을 어떻게 아파트에 가둘까 싶어서 겨우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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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0-04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을 열면 전라도 사투리를 할 것 같았다.
라니. 하하하. 네꼬님. 너무 귀여워요.

(라면서 막 상상하는 중이에요)

네꼬 2008-10-04 20:33   좋아요 0 | URL
예를 들면 이런 것: "아따 어데서 온 인간들이 이 소란이다냐, 이?"

후훗. 웡웡 소리도 그렇게 번역해서 듣고 싶어요. 같이 상상해보아요.

순오기 2008-10-05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전라도 사투리를 할 것 같은 동물들~ '아따 참말로 거시기 하요이~ㅎㅎ'

네꼬 2008-10-05 22:39   좋아요 0 | URL
오호라, 사투리란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이로군요! 호홋 제가 까불었습니다요이~

치니 2008-10-05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이 매번 저를 지르게 하시는데 도가 트셨구나, 그런거구나 ~ 휴...
(저번 맥북도 그렇구)이제 본격 백수질 중인데, 이런 페이퍼를 잔뜩 올리면 어쩌십니까.
부산 가려고 했는데 국제영화제 보기엔 아무 준비도 안했구,
전라도 쪽으로 틀어? 막 이런 생각 드네요.
동거녀님의 또치 여행사, 자세한 일정표와 숙박 정보 좀...어케 안될까요. ^-^;;

네꼬 2008-10-05 22:42   좋아요 0 | URL
사실 맥북은 주이님 말씀 따라한 거예요. 절 원망하진 말아주세요. -_- 치니님 지금 동거녀가 옆에서 "불상의 미소"란 책을 읽으며 말하길, "내일 내가 여행일정 파일을 네꼬 씨에게 쏘아줄 테니 그걸 치니님께 드리시오." 하네요. ^^ 전라도 가세요. 아아 치니님 부러워!!!

다락방 2008-10-06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응? 저렇게 큰데 아기고양이예요?

전 도무지 고양이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후훗.

네꼬 2008-10-06 15:19   좋아요 0 | URL
하하 그래서 사람이 옆에 있는 사진을 올려야 크기 비교가 될 텐데... 동거녀와 하이디 씨의 초상권이 걸린 터라.

계속 이해하지 못해 주세요. 고양이는 그게 매력이거든!
 



해남 송호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저녁 바다. 이번 여행에서는 해남이 짱먹었다. 이 장면을 볼 때부터 내 그럴 줄 알았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일찍 땅끝을 찍고 미황사를 찾아가는 길. 운전을 위협하는 것이라곤 길바닥에서 마르고 있는 나락뿐인 동네를 행여 누가 될까 살금살금 지났다.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 바닷가의 공기, 벼가 좋아하겠다 싶을 만큼만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모든 것이 완벽했다. 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를 빼면. 풍경이 완벽한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마음이 자꾸 들었다. 어느 굽이를 돌든, 넓은 논과 낮은 집들이 나타났다. 층층이 단정하게 다듬어진 논들은 카스테라를 연상케했다. 익은 벼들이 가득한 들판과 그 끝의 집들을 보노라니, 이분들이 정말 부자구나. 이분들이 부자인 게 정상이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숙연해졌다. 그렇지, 쌀을 가진 분들이 진짜 부자이시지.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한구석에서 벼를 사진기에 담았다.



살살 기어서 도착한 미황사. 아아, 미황사를 가보지 못하고 산 지난 세월이 원통해라.






'남쪽의 금강산'이라는 별명을 가진 달마산도 아름답지만, 그 중턱에 꼭 알맞은 크기로 자리잡은 미황사는 두 눈으로 보면서도 현실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기품 있는 절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절도, 절에서 올려다보는 산도, 절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도 두루 절경이다. 스님들과 불자들이 예불 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행여 방해가 될까 살금살금 걸었지만 "와아.."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은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오늘 한겨레신문을 보니 18일(토)-19일(일) 1박 2일 일정으로 한겨레 조현 종교전문기자와 함께 미황사 답사 코스가 기획되었던데 기회가 되시는 분들은 꼭 가 보고 오셔서 내가 뻥을 친 게 아님을 밝혀주시길 바란다. (참고로 나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야 하는 일정을 소화할 자신이 없어서 포기를.)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전주에 들러서 경기전 일대 한옥마을과 전동성당을 둘러보았다. 하이디 씨와 B 씨는 전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을 내내 아쉬워하면서 다음에 한국에 오면 꼭 이곳에서 1박 이상을 하겠노라 다짐했다. 동거녀왈, "이렇게 여행 마지막 코스에 떡밥을 던지는 것이 또치 여행사의 특징입니다. 다음에 또 또치 여행사를 이용해주시면 전주에서 1박하며 문화체험을 하실 기회를...."



전주한옥마을은 전통을 현대화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저 뒤에 보기 싫은 큰 건물은 (무슨 병원이라고 한 것 같은데...) 빼고. 골목골목 예쁜 담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더 정겨운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년이든 언제든, 다음 여행에서 또 만나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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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0-04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미황사요? 휘둥글.
미황사를 처음 들어보는 무식한 세월이 원통해라 ㅠㅠ
입력해두겠어요 (그래서, 언제갈건데, 응?)

네꼬 2008-10-04 20:37   좋아요 0 | URL
저도 난생 처음 들어보았어요. 우리 넷 다 초행이었고요. 아 근데 정말로 끝내주더라고요.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미황사 찾아가던 길과 절의 절경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요. 웬디양님, 우리 유람단 만들어요. ㅠㅠ

paviana 2008-10-0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미황사는 첨이에요.그니까 여행사를 잘 골라야 되요.이제까지 헛다녔어요.
요근래에 간 절집중에서는 제일 좋았던 건 몇년전에 간 상원사였어요.투덜대면서 올라갔는데 풍광이 정말 좋았어요. 그 절이 좀 높은데 있거든요.

네꼬 2008-10-05 22:56   좋아요 0 | URL
여행사 하면 또치 여행사. 실비만 받아요. 게다가 밥도 해줘요. (혹시 비싸게 부르면 저한테 연락을...) 비록 손님을 좀 가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네꼬 씨 친구는 환영한다고 전해달랍니다. 하핫.) 상원사라니, 전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역시 절은 좀 올라가야 멋진 걸까요?

순오기 2008-10-05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남은 '고천암'이란 갈대숲을 제외하곤 제대로 가본 곳이 없어요.ㅜㅜ
전주 한옥마을은 언제나 가볼까요~ 부러워라!!

네꼬 2008-10-05 22:57   좋아요 0 | URL
전 고천암을 안 가본 걸요. 아아 해남에서만도 가볼 곳이 많아요. ㅠㅠ
전주 한옥마을은 순오기님 계신 곳에서 그리 멀지도 않으니 꼭 한번 가보세요. 하루 정도 보내는 것만으로도 아주 재미나실 듯.

2008-10-05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5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가 그랬더라? 화순 운주사에 다녀왔다고 했더니 "운주사 참 아스트랄하지." 그랬는데. 운주사는 입구부터 크고 작은 부처님과 다양한 패턴을 자랑하는 탑들이 서 있어 가히 "천불천탑"이 가능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등반 끝에 그 유명한 와불을 뵈었다.



감은 눈이 참 예쁜 부처님. 이 와불이 일어나시면 세상이 바뀐다지. 동거녀 왈, "네꼬 씨, 여기까지 와서 누군가를 벌해달라고 하면 벌 받을까?" 그 누군가가 MB라는 걸 잘 아는 나는, "속으로만 비는 건 괜찮지 않을까?"라고 답한 뒤 함께 와불 둘레를 돌며 그 누군가를....

 



넓은 운주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부처님들. 이 많은 불상들은 거북이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고, 거의 한 사람의 솜씨로 보이기 때문에 누군가 일생을 바쳤을 거라는 설도 있고, 이 운주사가 석공들의 연습장이었을 거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괜찮다면 첫번째 설이 맞았으면 좋겠다. 바다에서 꽤 멀어서 거북이들이 고생은 좀 했겠지만, 상상만 해도 아름답다.

화순에서 강진으로 넘어가는 길, 내내 나를 흥분시킨 것은 나주평야에 우뚝 선 월출산이었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나주평야. 곡창지대란 이런 것이구나, 약간 소름이 끼치려고 하던 찰나에 나타난 월출산은 그 포스가 어찌나 강렬한지, 산에 대해서 아는 바 전혀 없는 나조차도 "야, 이건 정말 명산이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운전을 하느라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야 근데 정말 굉장하네, 굉장해. 응? 굉장했죠? 역시 굉장해. 야 난 또 저런 건 첨 봤네, 굉장하죠? 응. 정말 굉장해. 와, 정말이지, 굉장해 굉장해. 월출산을 옆에 두고 가면서 나눈 우리 넷의 대화는 이게 다였다.

다산초당은 생각보다 높은 데 있었다. 바닥이 얇은 운동화를 신은 나는 할 수 없이 좀 투덜거리면서 산을 올랐다. 그 길에는 소나무 뿌리들이 땅 위로 올라와 자연스럽게 계단을 만들어주었는데, 정호승 시인이 "뿌리의 길"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단다.


다산초당. 지붕 위 나뭇잎에 묻은 햇빛과 마루 앞 그늘을 비교해보면, 이곳이 꽤 깊은 숲속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길 그냥 한번 더 해보자면, 원래 다산초당은 말 그대로 초가였는데 후손들이 복원하면서 기와집으로 꾸몄다고 한다. 조만간 초가로 다시 고쳐 지을 예정이라고. 역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긴데 그냥 한번 해보자면, 내가 가는 곳엔 반드시 적용되는 법칙이 있다. "모기가 있다. 네꼬씨가 물린다." 나는 이 깊은 산속에서 추운 계절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기들에게 무려 네 군데의 식사 포인트를 제공했다. '내가 청바지도 뚫는 전라도 모기인데 너 따위 티셔츠는 개콩으로 보인다' 하는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는 모기 가족에게 등짝을 고스란히 헌납. ㅠㅠ

사진에는 없지만 초당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설명하시는 분의 말에 의하면 다산은 이 연못에서 뛰노는 물고기들만 보고도 그날의 날씨를 맞혔다 한다. 슈퍼컴도 못하는 일을....

 



멀리 구강포가 보이는 천일각. 이렇게 저렇게 찍어봤지만 이 정자에서 평원과 바다를 내려다보는 개운함을 사진으로 담기엔 원망스러운 나의 고양이발. 내가 다산이었다면 초당보단 여길 더 좋아했을 것 같다. 뒹굴뒹굴 책을 끼고 놀다가 먼 데를 보다가, 빗소리를 들으면서 낮잠도 자고 모기에게도 물리고... 공부는 언제..? 그래서 나는 다산이 못 된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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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0-0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일각에...반했어요 ㅜㅜ

엉엉 우리나라 왜이렇게 좋은나라인거에요....ㅜㅜ 아스트랄한 운주사도 마음에 들고...

네꼬 2008-10-04 20:39   좋아요 0 | URL
응 근데 다산초당 올라가려면 트래킹화 정도는 신어줘야 돼요. 난 캔버스화 신고 발바닥 아파서 조금 고생했어요. 그러게 우리나라에 볼 데 왤케 많아. ㅜㅜ 남도는 정말 4박 이상 일정으로 잡고 답사를 해야 할 듯해요. 나 아주 결심하고 왔음.

마노아 2008-10-04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의 풍경, 저 각도, 저 그림자까지 모두 완소예요! 지금도 충분히 문학소녀, 아니 문학고양이인 사랑스런 네꼬님!

네꼬 2008-10-04 20:39   좋아요 0 | URL
호홋 문학고양이라. (좋아서 일단 한 바퀴 구르고...) 천일각에서 보는 풍경은 시 한 수 절로 읊게 하더이다. 마노아님이 가셨더라면 멋진 소설이 한 편 나왔을 거예요! >_<

paviana 2008-10-0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산초당을 3번정도 갔어요. 대학때 대학원때 그리고 그 누군가랑...
제일 기억에 남는건 대학 3학년때 답사로 과친구들이랑 왁자하게 떠들면서 올라가서 천일각에 앉아서 이렇게 경치좋은 곳으로 보내는게 귀양이야? 이 경치에서 어케 공부를 하고 책을 썼을까 하면서 수다떨었던 게 기억이 나네요. 그때까지는 구르는 낙엽만 봐도 웃을때 였잖아요. 거기다 여대라서 여자들만 우르르 몰려다녔으니...ㅋㅋ

네꼬 2008-10-05 23:00   좋아요 0 | URL
파비아나님 기억에 남는 건 답사일지 모르지만, 지금 제 기억에 남는 건 파비아나님의 "그 누군가랑"이에요. 누구예요 누구, 누구?

우리도 다산초당 가서 똑같은 말 했는데. 아니 여기서 공부를 어떻게 한담? 하여간 모범생들은 그런 데서도 공부가 깊어지는 모양이지요. -_- 누구냐고요, 누구! 엉!

순오기 2008-10-0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불님 사진을 기막히게 찍었네요~~ 역시 사진 실력이 좋으시군요.^^
다산초당보다 천일각에 반하는 건 앞이 탁 트였기 때문일지도~ 그 천일각에서 흑산도에 유배중인 형, 정약전도 생각했겠죠~~ ㅜㅜ
단풍으로 둘러싸인 다산초당도 가히 환상적이에요. 그 옆 연못에 비친 풍광도 예술이고요~

네꼬 2008-10-05 23:03   좋아요 0 | URL
아유 참, 순오기님도.. 별 말씀을... (아이고 나도 모르게 자꾸 으쓱대는 내 어깨.) 어떻게 찍어도 누워계신 모습이 한번에 들어오질 않아서 애먹었는걸요. 좀 전에 동거녀랑 나눈 이야긴데요, 그 형제들 그리 똑똑하니, 같이 있으면 다투지 않았을까요? (제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동거녀 왈, "순오기님 좋겠다, 광주 사셔서." 꼭 전해달래요. 실시간 중계.)

순오기 2008-10-09 23:04   좋아요 0 | URL
뒷북댓글~~ㅎㅎ 광주에 살아서 너무 좋아요. 광주 사는 덕에 여기 저기 참 좋은 곳을 많이 가봤어요. 다산초당도 계절 따라 가봤지요~~ ^^
11일엔 소록도 가야돼서 이청준님의 '당신들의 천국' 읽고 있어요.
동거녀에세 순오기가 광주댁으로 살아서 행복하다고 전해주세요.^^

네꼬 2008-10-21 00:57   좋아요 0 | URL
저도 뒷북댓글. ㅋㅋ 네 전해 드렸어요. ^^

BRINY 2008-10-0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답사 생각났는데, 역시 파비아나님 같은 코스로 ^^;; 그런데 전 다산초당 올라갈 때 어려워다는 생각한 기억이 없는데 그땐 젊어서 그랬을까요? 호호호~

네꼬 2008-10-05 23:04   좋아요 0 | URL
하하하. 브라이니님, 저 한참 웃었어요. 호호호. 그... 그럼 전.... (털썩)

Alicia 2008-10-0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남도는 참 볼 곳이 많죠. 음식도 맛있구요.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거예요 으흣) 소쇄원,미황사나 운주사 다산초당... 모두 어릴 때 가본곳들이라 지금가면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어요. 고교때 수학여행가서 천일각에서 담임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 지금도 앨범에 고스란히 간직되 있는데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어릴 때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좋구요.
즐거운 휴가 보내신것 같네요. ^^

네꼬 2008-10-06 12:13   좋아요 0 | URL
알리샤님 안녕하세요? 네 아주아주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왔습니다. 아니 근데 소쇄원 미황사 운주사 다산초당을 "어릴 때" 가보셨다니!!! 완전완전 부러운걸요. 천일각에서 담임선생님과 사진이라니. T.T (네꼬 씨 기억 속엔 무슨무슨 능에 가서 찍은 사진들만 줄창... 아 서울 어린이들 불쌍해.)전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경주로 갔는데 그때도 참 좋았지요. 근데 개인적으로 남도가 더 좋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사실은 100%) 음식 덕분. 잠시나마 알리샤님께 옛 기억을 가져다 드렸다니 저도 기분이 좋아요.
:)

파란여우 2008-10-08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출산은 억새가 흰 날개를 활짝 펼칠 즈음인 11월 초에 가면 근사해요, 바위와 흰 억새.
운주사의 호떡탑(입구에 둥글고 납작한 탑을 여우 맘대로 붙인 이름)도 잘 있죠?
네꼬님의 삘 받은 뻬빠를 읽으며 지나간 추억의 그림자를 들춰봅니다. 땅콩베리머취~

네꼬 2008-10-09 00:39   좋아요 0 | URL
하하 여우님. 제 동거녀 또치 씨도 그 탑을 제일 좋아해요. 그리고 또치 씨도 그 탑을 "호떡탑"이라고 불러요. 동거녀 왈 "너무 호떡탑이잖아." 잘 있더라고요. 맛있게. (응?)

바위와 흰 억새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저 월출산에 정말 반하고 왔어요. 거기 더 가을에 가야 더 좋다는데 ㅠㅠ 꼭 한번 올라보고 싶은 산이었어요.
 

첫 방문지는 우리나라 대나무의 4분의 1을 키우고 있다는 담양. 그중 소쇄원을 먼저 찾았다. 알라딘 이웃 중에는 지난 봄 이곳을 찾은 분이 여럿 계시니 내가 뭐라고 말을 보태봐야 군소리가 될 테지. 나는 몇해 전 겨울에 이곳을 찾은 적이 있는데 역시 나무와 물이 어우러진 정원을 보기엔 지금 이 계절이 더 좋은 듯했다.

소쇄원 건축 철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개울을 건너는 담장.


광풍각에서 개울을 바라보다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B씨.

 


죽녹원의 대나무 숲

역시 숲은 깊어야 제맛이지만, 죽녹원의 대나무 숲은 너무 어두워서 거기서 찍은 사진 중에는 건질 것이 없다. 가만 나무들을 흔들어보니 댓잎 부딪히는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사진은 못 건져도 된다.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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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0-04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소쇄원 저 담장, 너무 사랑스러워요
그런데 왜 네꼬님 사진은 없는거에요 네네?
동물편 위에 사람편 만들어줘요 네네?

네꼬 2008-10-04 20:41   좋아요 0 | URL
하하하. 사람편이래. 하하. 웃기겠다. 소쇄원은 전에 보고 오셨죠? 안 그래도 저기 가서는 여러 분들을 떠올렸다오. 그때도 함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요. 내 언젠가 유람단 꼭 조직하리. 최소 2박 3일이에요!

mong 2008-10-0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예~전 학생 때 소쇄원을 대지로 프로젝트 햇었는데
그 얘기도 언젠가 풀어 놓아야 겠어요
정말 꼬장배추님하고 셋이 유람 다니면 재미나겠다
나 나...하루 종일 종알종알 잘 떠드는데
한옥 말고 다른것도 잘 떠들어요 (그...그거 자랑이냐?)

네꼬 2008-10-05 23:06   좋아요 0 | URL
그 얘기 빨리 풀어주세요. 완전 궁금하다.

아아 잠시 상상해보았어요. 몽님과 꼬장배추님과 네꼬 씨가 함께 하는 여행이라. 얼마나 재미날까. 배추와 우드수톡과 고양이라니. 아흐읏. 그런데 음식은 제가 먹고 싶은 것으로 골라도 돼요? (응?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

paviana 2008-10-0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운전하는거 좋아해요.글고 길치도 아니에요. 그니까 저도 끼워주세요.네네?
소쇄원 참 옛날에 가봤는데 정말 다시 가보고 싶어요.
담양의 그 메타세콰이어 길도 다시 보고 싶고, 대숲의 그 사각사각하는 소리들.
아흐 생각만 해도 좋네요.

네꼬 2008-10-05 23:07   좋아요 0 | URL
(몽님, 여기 파비아나님도 추가요~) 운전도 안 하시고 길도 모르셔도 돼요. 얼마든지 끼워드리지. 저도 메타세콰이어길을 제대로 못 보았어요. 이번엔 다같이 제대로 씩씩하게 걸어보자고요. 아흐.

(저 근데요, "글고 길치도 아니에요"라는 문장을 "갈치도 아니에요"로 읽고 깜짝 놀랐어요. 저한테 실망하셨어요? ㅠㅠ)

순오기 2008-10-05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소쇄원 첫번째 사진 예술이네요. 멋져라~~~ 나도 담엔 저런 사진 찍어봐야지!
우린 같은 장소에서 행복을 맛봤어요, 그쵸 그쵸~~ 헤헤

네꼬 2008-10-05 23:08   좋아요 0 | URL
에.. 뭐.. 흔한 구도죠.. (긁적긁적) 어쩌다 보니... 뭐.. (하핫. 부끄러워라.) 네 우린 같은 장소에 있었던 거예요. 안 그래도 그 자리에서 그 생각 했는걸요. :)

다락방 2008-10-0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저 대나무 숲.

:)

네꼬 2008-10-06 15:18   좋아요 0 | URL
같이 갑시다. (덥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