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에 나는 인사동으로 외근을 나가야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어제 오후부터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행도 없이 인사동을 가면, 거기서 데이트를 했던 남자가 떠오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침까지도 이 울적함을 해결하지 못한 채, 최대한 밝은 음악을 고르는 정도의 조치를 취하고 자유로에 올라 서울을 향했다. 그렇게 계속 우울할 예정이었는데 뜻밖에도 금세 그 기분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자유로에서 강변북로를 잠깐 거쳐 마포구청 쪽으로 빠져서 인사동까지 오로지 직진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코스였고, 내 짧은 운전경력으로도 열다섯 번은 족히 다녀온 길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가는 길 내내 바닥에 하얀 스프레이로 표시된 접촉사고의 흔적들이 20미터에 한 군데씩 나타나더니 연대 앞에서 이대 후문에 걸쳐서는 아주 오작교 까치와 까마귀처럼 오밀조밀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흔적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는 운전자들은 지난 사고들에 오마주를 바치려고 일부러 그러는 듯 '아 저러면 사고가 나는구나' 하는 거친 운전을 과시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고 오마주 촬영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앞 차에 코를 너무 바짝 들이대지 않겠다거나, 깜박이를 켜겠다거나, 신호를 지키겠다거나 하는 낡아빠진 정신으로는 시대가 원하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교훈을 네꼬 씨에게 주기 위해 모든 차들이 일사불란한게 움직였다. 나는 아직 협상조건도 알려주지 않은 채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흉악범들에게 제발 이유만이라도 알려달라고 울부짖는 처절한 심정이 되어 차를 몰았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원하는 게 뭐죠? 인사동 주차장 입구, 관리인 아저씨의 얼굴을 보자 비로소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차를 댄 다음 잠깐 정신을 수습했다. 남자 생각따위는 할 겨를이 없었다.

햇볕과 바람이 적당한 인사동 거리는 평일인데도 관광객들로 꽤 붐볐다. 일을 마치고,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잠시 길가에서 땀을 식혔다. 인사동이 전 같지 않다고 불만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인사동은 과거 위에 현재가 입혀지고 상업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과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버무려지고,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어서 아름다운 곳이다. 내 눈엔 좀 허술해 보이는 열쇠고리들을 흥미로운 얼굴로 한참 들여다보는 서양인 아저씨들과, 목에 명찰을 건 채 밥 먹을 곳을 찾는 어여쁜 언니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다가 문득, 내가 여기서 데이트를 한 남자가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기분이 한결 더 상쾌해졌다.

돌아오는 길에 모르고 좌회전 차선에 들어선 나는 차선을 바꾸려고 깜박이를 켰다가 모든 것을 범인들의 뜻에 맡기는 심정으로 그냥 그 차선에서 얌전히 신호를 기다렸다. 뭐, 돌아서 가지. 룸미러로 보니 내 뒤엔 오토바이를 탄 경찰이 같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적어도 뒤에서는 지켜주겠지. 그때 저 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경쾌하게 신호를 무시하며 차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른 룸미러를 살피니, 경찰 아저씨가 놀라운 곡예를 본 관람객의 표정으로 "이야~" 하는 감탄사를 내뱉는 게 보인다. 내가 이런 나라에 사는구나. 아무튼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해 땀이 쪽 빠졌으니, 땡스 투 폭력운전자님들. :)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스탕 2008-10-07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촌스러운 거겠지만 저 인사동이라는 곳엘 한 번 가봤어요. 그것도 올해 여름에요..
첫 느낌은 '고풍' '고전' 그런건 아니었고 '복잡' '다름' 이었어요.
또 가고 싶은 맘은 당연히 들었구요 :)

난 데이트 할때 인사동에도 안가고 어디서 뭐 했지..? --a

네꼬 2008-10-08 09:12   좋아요 0 | URL
저도 뭔가 복잡하고 어수선한 듯하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인사동이 좋아요. 고급이든 싸구려든 기념품 가게들도 재미있고요. 이따금 좋은 전시를 보는 것도 즐겁고요. (그리고 골목골목 맛있는 음식점들도!)

어디서 무얼 하신 거예요, 응? 응? ㅋㅋ

도넛공주 2008-10-07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물에는 존재의 가치가 있다더니...........중얼중얼...........(그래도 확 엎어져버려라!확!그냥!확!)

네꼬 2008-10-08 09:14   좋아요 0 | URL
괄호 안의 말씀은 폭력운전자님들께 하시는 말씀이죠? (잠깐 후덜덜 했다는.) 적어도 어제는 그런 역할을 해주셨어요. 어휴. 근데 전 어제따라 왜 그리 벌벌 떨었을까요? 한번 당황하니까 점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_-a

mong 2008-10-0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자라도 날리셨음 차라도 한잔 하는건데...ㅎㅎ
그러면 두남자+조류 와의 데이트 기억으로 확대되어 어쩌구저쩌구
중얼중얼
근데 폭력 운전 나빠요 =3=3=3

네꼬 2008-10-08 20:15   좋아요 0 | URL
^^ 그러게. 몽님한테 문자라도 날려볼 걸 그랬네요. 바쁘실까봐.호홋. 근데 왜 두 남자?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꼭 두 사람이라는 편견은... ㅋㅋ

폭력운전 나빠요. 근데 스스로들은 그게 운전을 잘 하는 거라고 믿는 걸까요? 저 정말 너무 쫄았지 뭐예요. 흙.

mong 2008-10-09 13:51   좋아요 0 | URL
잘못했어요 ㅠ.ㅜ
(편견쟁이 몽 ioi)

네꼬 2008-10-09 18:18   좋아요 0 | URL
용서해드릴게요.

(하하하. 농담농담)

전호인 2008-10-08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안전운전을 하셨군요.
사고는 순간인 것 같아요,
사고 난 후 생각해보면 방심하는 찰나인 것이 많으니까요.
항상 안전운전하세염

네꼬 2008-10-08 20:16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 오래간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맞아요 항상 잠깐 방심한 사이에 일이 나죠. 조심 또 조심해야 돼요. 근데 그걸 다른 사람들도 좀 알아줘야 할 텐데. ㅜㅜ 우리모두 안전운전, 안전승차, 안전보행, 안전안전.

2008-10-08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8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8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9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9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10-0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면 세상에 불평 불만이 없겠죠~~~이쁜 네꼬님!
인사동은 한번도 가본 기억이 없으니 못 가본게 확실해요~ ㅜㅜ

네꼬 2008-10-21 00:55   좋아요 0 | URL
저랑 같이 가보세요, 순오기님.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드릴게요! (전 남자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