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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옆 작업실 - 홍대 앞 예술벼룩시장의 즐거운 작가들
조윤석.김중혁 지음, 박우진 사진 / 월간미술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홍대앞에서 4년이 좀 넘는 시간을 보냈다. 계단집에서 점심을 해결했고 몇몇 클럽을 한두 번 기웃거렸고 산울림소극장에서 연극을 봤다. 극동방송국 앞을 헤매고 다녔으며 지금은 그럴듯하게 정비되어 희망시장과 프리마켓의 터가 된 놀이터 벤치에 앉아 어질거리는 술기운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한밤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4년의 시간 동안 마주쳤던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미대생들, 그들을 가끔 조금은 부러운, 혹은 질투의 시선을 보냈던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살리에르의 비애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들은 제몸을 움직여, 머릿속의 생각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창조해 내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선택해서 가고 있는 길에 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 책 <놀이터 옆 작업실>에는 희망시장이라는 곳에 뿌리를 두고 사방으로 그들만의 소우주를 향해 뻗어가며 때론 주저하고 고민하고 행복해하는 그들을 소개하고 있다. '행동하는 디자이너' 파펑크는 반쪽짜리 무지개가 아닌 완전한 무지개를 보여주기 위해 꿈을 꾸고 그 꿈을 영상으로 만들어 낸다. '돌을 믹싱하는 원석 dj' 미미루는 세상 이곳저곳 자신만의 돌을 찾아다닌다. '유쾌상쾌통쾌한 공장장' 라라는 '작자'가 되어 누군가에게 달아줄 날개를 만들고 있다. '빨강고양이'는 고양이모자로 세상사람들이 키득 웃게 만들고, 우유각소녀는 글과 그림이 뒤섞인, 말과 닭과 개를 그리며 아이들과 말싸움을 하고 아이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재활용예술가' 환생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것들을 모아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막연하고 치기어린 거침없음이 아닌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고 얻어낸 뼈아픈 성장의 내딛음이라 더욱 빛이 난다.
희망시장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곳에서 이러한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희망시장에서 장사를 하기 위한 단 하나의 조건은 바로 '손으로 만든 작품이나 상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으로 만든다는 것은 마음을 담는 일이다. 그러므로 방점이 찍혀야 할 곳은 '시장'이 아니라 '희망'이다.
그저 단순하게 '학교앞'이었던 곳에서 그들은 희망을 재단하고 꿈과 소망을 담고 있다. 무언가 내손으로 만들어 내는 창조의 기쁨을 맛보는 그들이 처음에는 부러웠다. 그러다 슬쩍 스스로에게 위안의 말을 던졌다. 지금의 나는 갑갑하지만, 갑갑하고 조바심나지만 '박소하다'가 만드는 부채꼴 모양의 책처럼 저 혼란스럽게 보여지는 길들 중에 내 길이 언젠가는 활짝 펼쳐지리라. 겹쳐 있어 알 수 없어도 그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품을 수 있을테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머리로 생각하고 몸과 손을 움직여 눈앞에 만들어 내는 기쁨, 그 기쁨을 느끼고 싶은 바람은 단순하게 재능의 유무로 꺾일 만큼 연약한 게 아니다.
몇 년 전 지하철 역에서 '수줍은 전략가' 강영민이 참여한 <서브웨이 코믹 스트립>의 작품을 대했을 때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지하철을 갈아타러 가는 긴 통로의 벽을 가득 메운 그 유쾌한 그림들은 이제껏 봐 왔던 날아다니는 어설픈 학이나 무궁화, 전통문양 등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유니크한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인 두 사람이 볼일을 보는 모습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의 아톰과 미키마우스가 결합된 캐릭터는 아, 한국도 이런 분위기가 받아들여지는구나,하는 감격까지 자아냈었다. 그 작은 변화가 그토록 감탄스러웠던 것은 그만큼 이 나라의 소통의 통로가 좁았다는 증거이다. 스스로 검열하고 스스로 움추려들기 급급했던 증거이다. 하여 그들, 작은 반란자들의 존재가 반갑고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그들은 희망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시장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 고민의 답이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싶은 욕망, 그것은 단순하지만 도달하기 힘든 궁극의 직업관이 아닐까 싶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라는 건 루쉰의 말이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희망이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고.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고. 지금의 희망시장에 이보다 더 어울릴 만한 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희망시장 작가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그 끝이 낭떠러지인지 오아시스인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그들은 길을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