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중독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창해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주말에 해치워야 할 급한 일이 있음에도 이 책 <연애중독>을 계속 읽고 싶어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서둘러 일을 끝내고 홀가분하게 책을 마저 읽게 되었을 때는 신이 날 지경이었다. 마침내 책을 다 읽고 나자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혹시 나도 미나즈키처럼 누군가를 옭아매고 있는 게 아닐까. 미나즈키처럼 내 주변이 발아하기에 제격으로 들어맞는 순간 방아쇠가 당겨질 수 있는 성향을 가진 게 아닐까. 두려웠다. 스산한 11월의 오후,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야마모토 후미오의 소설 <연애중독>은 이전에 읽었던 <플라나리아>보다 중독성이 강했다. 
남편과 이혼한 후 도시락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미나즈키 앞에 어느날 예전부터 동경하던 작가 이츠지 고지로가 나타나 다정한 손을 내민다. 세상에 대해 인생에 대해 정답이라도 알고 있는 듯 항상 거침없는 이츠지 고지로에게 미나즈키는 구원의 희망을 건다. 마치 뱁새의 알을 밀어내는 뻐꾸기 새끼 같다. 자신과 같은 처지로 이츠지 고지로의 '보살핌'을 받는 '어린 새끼양'들을 차례차례 둥지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미나즈키의 단호하고 치밀한 행동은 부화한 지 나흘 만에 눈도 안 뜬 안쓰런 모습으로 태연히 다른 생명을 죽이는 뻐꾸기 새끼 같다. 그러나 뻐꾸기 새끼에게도 항변할 말은 있다. 왜 나를 남의 둥지에 버려두고 품어주지 않나요.
그렇다. 나는 부모에게서도 타인에게서도 지독한 취급을 당해왔다고 생각해왔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수많은 타인에게도 막연한 적의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자기방어를 단단히 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미나즈키의 이런 원망에 이츠지 고지로는 괜한 원망이고 배은망덕이라고 일축한다.
과거에 '만약'이라는 말을 끼워 넣지 마.

항변의 말도 먹히지 않은 미나즈키는 저혼자 살아남아야 한다. 새끼 뻐꾸기가 붉디붉은 입을 가장 크게 벌려 어미가 물어온 먹이를 독차지하듯이. 모르는 사이 눈썹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한 여덟팔자를 그리고 있는 주름처럼 미나즈키는 어느새 연애라는 진한 독에 중독되었다. 남편에게도 연인에게도 최선을 다했으니 잘못한 게 없다고 믿는 그녀는 그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그들이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야?'라고 되묻는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붙잡고 있는 건 괴로운 일이야. 이츠지 고지로는 말한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미나즈키는 남편을, 이츠지 고지로를 붙잡고 괴로워한다. '그 미련 때문에 언젠가 자신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놓지 않는다. 
 부모는 그저 부모일 뿐이고 친구는 그저 친구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스스로도 나 자신을 좋아하지 못했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타인이 그였다. 내게도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있구나, 나는 나란히 깔아놓은 이불 이편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 내심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냥 남편이 옳은 것으로 쳐주었다. 검은 것을 희다고 해도 한편이 되어 주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상대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게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타인과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 후지타니는 단 한 사람, 타인이 아닌 인간이었다.
이토록 사랑했던 남편인데 미나즈키는 남편의 둥지에서 다른 뻐꾸기 새끼에게 떠밀려 떨어진 것이다. 누가 미나즈키에게 단죄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파렴치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뻐꾸기 새끼는 살기 위해 다른 새끼를 내던졌고, 살기 위해 붉은 입을 더 크게 벌렸을 뿐이다. 미나즈키는 그저 숨을 쉬며 살기 위해 연애의 대상을 찾았을 뿐이다. 타인이 아니라고 믿을 수 있는 인간을 찾았을 뿐이다.

나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게 서툰 나는 크게 당황했다. 자라온 과정이나 장래 희망 같은 것을 누구에게 자세하게 밝혀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거의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그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아직도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음을 터놓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마음을 터놓았다는 착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타인은 여전히 타인이다. 뒤늦게라도 미나즈키는 깨달았을까. 타인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나이를 먹어 강해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여전히 상대의 손을 꽉 부여잡고 아파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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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29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어요
어쩜 예전의 제 자신을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런 시절이 있었거든요
예전이라면
그럼 전 변했을까요?

superfrog 2005-11-29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史野 님, 이책 참 재밌게 읽었어요.
예전의 님이라면 중독 중인?^^
전 책 읽고 나서 좀 고민했어요. 타인을 사랑할 바에는 차라리 나자신을 사랑하자.라고 미나즈키는 말하는데.. 타인을 타인으로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로 나름 결론을 내렸답니다..;;

Volkswagen 2005-11-29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짜라구요? 요것도 사라구요? ㅠ.ㅠ 집에 한가득 쌓여 있는 거 보셨잖습니까?
우잉~

superfrog 2005-11-29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님, 아주 재밌어요!ㅋㅋㅋ 하루면 읽힙니다. 아마 손에서 못 놓으실 거에요. 화장실 가셔서 짬짬이 읽으세요, 아님 목욕하실 때(주로 제가 그럽니다..;)

Laika 2005-11-2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빨리 읽고싶어져요..^^

panda78 2005-11-29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도서 버스에서 한달쯤 전에 빌려 읽은 책인데. ^^
금붕어님의 결론이 마음에 쏙 듭니다. 타인을 "타인으로" 사랑하자.

superfrog 2005-11-29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단편집 <플라나리아>도 좋았지만 <연애중독> 두툼한데도 흡입력이 있어요. 게다가 가볍게 흐르지도 않고.
판다님, 님이 쓰신 페이퍼도 봤지요. 도대체 안 읽으신 책이 뭐에요? 아.. 시가테라 안 읽으신다고 했구나..;;
새벽별님, 님도 주문을 한 판으로 하시는군요, 저도 그래요..ㅎㅎ 저는 아주 재밌게 봤는데 어떨지. 이 작가의 주인공들은 매번 독특해요. 이번에도 그 독특한 캐릭터를 번역자가 잘 살렸더라구요. 역시나 번역이 중요해요.

깍두기 2005-11-29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좋아하는 금붕어님표 리뷰다!

여전히 상대의 손을 꽉 부여잡고 아파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이러지 않으려고 사람이 독해지는 건지도 몰라요. 아님 건조해지거나 무감각해지거나.




날개 2005-11-29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좋아하는 금붕어님표 리뷰다! ^^
너무 읽고 싶게 하시는군요...

어룸 2005-11-29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금붕어님표 리뷰다! ^^

superfrog 2005-11-29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날개님, toofool님 세 분이서 뭐하시는 거에요!
상표에 금붕어를 붙이니 무슨 젓갈이나 골뱅이, 그런 뉘앙스가 느껴져요..ㅋㅋㅋ
책 재밌어요, 기회 닿으심 꼭 보세요...!^^

히나 2005-11-2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리뷰 읽고나니까 나도 당장 읽고싶어 조바심이 생겼어요
(책임지셔요!!!) ㅋㅋ

superfrog 2005-11-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랍님, 저한테 시집오세요...=3=3=3

2005-11-30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owup 2005-11-30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야마모토 후미오 팬. 플라니리아, 연애중독, 블루 혹은 블루... 이 순서로 읽었어요. 실은 좋아하는 것도 이 순서. 플라나리아를 읽고 너무 좋아서 출판사에 이 사람 책 다른 것도 내주면 안 되냐고 전화하려 했을 정도.
이렇게 읽는 사람을 줌 렌즈처럼 확, 당기는 리뷰를 쓰시는군요. 와와와.

치니 2005-11-3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마음을 터놓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마음을 터놓았다는 착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 이거, 완존 동감! ^-^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거죠?

superfrog 2005-11-3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0:06에 숨어계신님, 님도 시집오세요..ㅋㅋ (아.. 그럼 저는 이츠지 고지로처럼 많은 어린양들을 돌보게 되는 일부다처제 아저씨??!) 많이 바쁘시군요.. 동경만경을 아직 못 읽으시고.. 에고, 님 조금만 바쁘시라 빌어드릴게요. 글고, 저 제목은 책 내용이랑 딱이에요. 무시무시한 중독이랍니다. 플라나리아도 재미나게 읽으실 거에요..
namu님, 제가 요즘 님 요리솜씨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는 거 모르시죠? 휴.. 한입만이라도 먹어보고 싶다니까요.. 님도 야마모토 후미오 팬이시군요! 이 아줌마, 글 흡입력이 대단하죠? 쓸데없는 내용이 없어요. <블루 혹은 블루>는 역자가 첨보는 사람이어서 조금 망설이고 있는 중. 양윤옥씨 번역은 <칼에지다>에서 보고 아주 만족스러웠거든요.^^ <블루 혹은 블루>도 재미있나요?
치니님, 속내를 다 털어놓고 나면 왠지 허탈해지는 때가 있지요..? 술김에 했던 말이면 더욱 그렇고, 터놓고 말해서 이해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또 한번 미련스러운 짓을 했구나.. 후회하게 되요.. 그래도 살만하겠지요, 살만하지 않아도 뭐 어떻게 살다보면 좀 살만해지기도 하겠지요..ㅎㅎ(아침부터 울증이런가..)

hanicare 2005-11-3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은 여전히 타인이다....알고 있으면서도 미련한 인간은 미련을 못 버리지요.
구절구절 가슴을 저미는군요. 어쩐지 두렵기도 한 책입니다.

superfrog 2005-11-3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련스럽다'와 '미련'이 한 가지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새삼 가슴에 와닿네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게 미련스러운 거. 매번 반복하고, 후회하고, 답답해하고 또 잊고 시도하고.. 참으로 미련스럽게 살다가 가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미나즈키처럼 파멸인지도 모르고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불씨를 다 꺼뜨리지 못하고 잠잠히 살기도 하고요..

비로그인 2005-11-3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플라나리아 읽고 야마모토 후미오의 팬이 되었어요.
빨리 구해서 읽어야 겠네요 너무 늦어진거 같아요 ^^

blowup 2005-11-30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게 미련스러운 거. 이거이거 제가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술 먹구 주정하던 소리 아닙니까. 하니케어 님. 금붕어 님.
살짝 소름이 돋을 뻔 했어요.

superfrog 2005-11-3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이님, 야마모토 후미오 팬이시군요!^^ 반갑습니다..ㅎㅎ 이 책, 아주 재밌어요. 스포일러가 될까 줄거리를 거의 피해갔는데요, 줄거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셔야 해요.^^재미나게 보세요..
namu님, 아.. 차마 헤어지지 마시고 님의 선처로 멋진 애인으로 거듭나게 하심 어떨까요..?^^;; 글고요, hanicare님이요, 다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딱 집어내시는 게 특기랍니다.. 저도 예전부터 많이 놀랐어요. 독심술을 하시는 게 아닌가 싶었지요.^^

플레져 2005-12-01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넘 좋은 리뷰... 슬프기도 함...(검지대신 중지로 쓰고있어요...ㅠㅠ)

2005-12-02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2-06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5-12-07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표 리뷰, 정말 숨막히거나 중독되거나...^^

superfrog 2005-12-07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옴마나, 마냐님이 제 서재에 글을 남겨주시다닛! 영광입니다..^^
미국에서 잘 지내고 계시죠? 미국이랑 님이랑 왠지 잘 어울려요.ㅎㅎ
다들 뭔가에 중독되고 싶으신가보다..ㅎㅎㅎ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마냐 2005-12-07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미국이랑 저랑 어울린다는 말씀. 무진장 궁금한 말씀이옴다. 어쨌든...뒤늦게 즐찾한건 사과드리고 넘어가겠슴다. 제가 원래 뒷북인생임다. ^^;;;

superfrog 2005-12-0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한 분 늘어난 숫자가 마냐님이셨군요! 음.. 미국이랑 잘 어울리신다는 말씀은, 대륙적인 시원시원한 모습이랑 합리적인 사고.. 이런 게 떠올라서요.^^
잘 지내고 계신거죠? 이곳은 한 일주일 몹시 춥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