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매너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점이 협소한 것 같아, 올립니다.
매너님의 중복 게재 4가지 모델에 대한 의견
클릭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39757
매너님과 X님, 그리고 어린이 위서가 님이 제기하시는 문제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출처는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39730 참고할 것. 광고라고 해도 좋음)
1. 독자 개인의 중복 리뷰 수용 과정과 그 피해 사례를 가설에만 의존한다는 점.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적 문제 등의 문제보다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중복 리뷰를 읽어서 피해를 보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합다.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중복 리뷰가 폐해를 주는 과정을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장한다든지, 실제 피해 사례를 구체적으로 지목한다든지, 실제 중복 리뷰 때문에 피해가 많은 사람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사례 조사가 없는데 기인합니다. 좀더 솔직해지기를 바랍니다. 중복 리뷰가 여러분들이 보기에 밸이 꼬여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질이 저해되는 현상을 모델을 통해서 보여줄 뿐, 그것이 어떻게 피해를 주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반적으로 부족해서 결론은 '개인적 불만' 차원으로 협소해집니다.
거기서 아무리 확장시키려 해도 '알라딘과 예스24'를 함께 이용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중복 리뷰에 대해 기분나빠하는 분들의 관점보다 더 이상 확장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어느 한 곳에만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을 감안하지 않은 점이 큰 문제입니다. 바쁜 시대에 교보, 예스24, 알라딘 등의 커뮤니티에 공력을 쏟아부을 만큼 여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이것도 추측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중복 리뷰에 불만을 느끼거나 중복 리뷰를 발견하는 사람보다 중복 리뷰로 인해 리뷰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자신들보다 더 많은 표본을 논의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은 자신들의 불만을 마치 전체적 문제인냥 확대해석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아니면 제가 제시한 모델을 더해서 그림을 다시 그려 보실 것을 제안합니다.
2. 무엇보다도 독자 개인을 바보라고 생각한 것이나 독자의 피해 등을 짐짓 자의적으로 파악한 점
독자로서 매우 불쾌감을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독자 개인으로서 저의 '불쾌'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중복 리뷰로 인해 불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불쾌해야 할 아무 이유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글을 보고 있으면, 마치 파쇼 정권에서 '민중' '민중' 하고 강조하는 허무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는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정치인의 모습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불쾌함만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왜 불쾌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려지는 '나'와 실제의 '나'는 한참 떨어져 있음을 알아야 하며, 여러분의 입으로 생각하는 '독자' 중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 독자 안에 내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독자인 나의 권리를 남용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량한(?) 독자가 아니라 중복리뷰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중복리뷰어도 역시 '독자'라는 사실을 왜 망각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의 지적처럼 중복리뷰어가 하는 행위가 문제가 된다면, 그들 사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거나 그런 캠패인이 벌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여러분들의 논리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중단했던 예스24와 교보 등에 리뷰를 등록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노무현의 연정발언'을 떠올립니다. '무지한 대중에게 내가 깨우쳐주는 것이다'라는 논리가 전제된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알라디너들을 '무지렁뱅이'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지점에서 저는 매우 화가 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희 무지를 깨우쳐주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방식은 오히려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악의'를 읽습니다. 여러분들은 저희에게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변화시키고 싶은 의지도 없습니다. 다만 '푸념'을 할 뿐입니다. 만약 그것이 진짜 문제이고 변화시켜야 하는 일이라면 좀더 진지하게 물어와야 합니다. '터뜨린다'는 표현 안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읽었습니다. 어린이 위서가 님의 조롱형 댓글 따위는 오히려 사소합니다. 조롱도 얼마든지 논리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위서가 님의 댓글들을 읽은 바로는 이 점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점은 나머지 두 분에만 해당합니다. 어린애한테 박쥐가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독자는 리뷰를 평가할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리뷰의 질적인 내용입니다. '중복 리뷰'에서는 그것을 검증할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중복 리뷰를 만약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금세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skip입니다. 아니면 옛 기억을 더듬어 다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복 리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리뷰의 질만 좋다면 100번을 읽어도 저는 행복합니다. 사실 정성들여 쓴 리뷰는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는 거 아시죠. 제가 논어를 100번도 넘게 읽은 이유입니다. 결국 중복 리뷰는 그것에 대해 애써 문제를 지적하는 경우와,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는 '총량'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총량보다 내가 대면하는 리뷰에 관심이 많은 저는 그 문제에 대해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겠습니다.
3. 중복 게재 모델에서 덧붙여야 할 모델군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중복 모델을 나쁘게만 보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저의 경우입니다. A,B,C 서점을 두루두루 방문할 기회가 되지 못하는 저는 A 서점만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B,C 서점의 이뷰에 대한 수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B,C에 올렸던 것을 A에 올리기 전까지는 저는 '리뷰'가 없는 줄로 압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얼른 예스24나 교보문고를 생각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인간이 손가락을 클릭해서 다른 서점으로 가서 해당 리뷰를 확인하기까지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를 여러분들은 알지 못합니다. 만약 그 간극이 없다면 '진공청소기'나 '식기세척기' 등은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겠죠. 여기서 저는 여러분들의 마케팅 능력을 확인합니다.
4. 자본주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땡스투를 하는 경우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할 것을 기대했는데 너무 신사적입니다.
저는 책을 살 때 쿠폰을 사용하고, 적립금을 사용하고, 마지막으로 땡스투추천을 사용합니다. 땡스투를 추천하면 일정 비율의 적립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의도한 것이 알라딘이기도 합니다. 저는 도덕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습니다. 만약 관련 리뷰나 페이퍼가 올라와 있다면 땡스투를 눌러서 적립금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 불량리뷰에 대해서는 땡스투를 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땡스투가 몇 십원이나 몇 백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제게는 책을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비용을 줄이는 것은 제게 생존과 직결돼 있습니다. 알라딘은 땡스투를 추천한 사람과 땡스투를 받은 사람에게 모두 적립금이 돌아갑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드립니다. 그리고 그 취지까지 생각하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요번에 정민 선생의 책을 읽고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신문에서 봐서 사려고도 했지만, 무엇보다 리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읽고 나서 생각이 든 것은 기존의 '리뷰'가 너무 책에 대해 성의 없게 다가가서 혹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읽고 판단할 수 있도록 정성들여 리뷰를 썼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가던 땡스투가 저에게 왔습니다. 저는 그 일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좀더 속물적으로 쓰자면 저 사람이 노동 없이 불로소득을 얻어가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정당히 노동해서 소득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알라딘이 그 책을 밀 때였으니까 땡스투에 대한 욕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쓴 것이죠. 그리고 저에게 땡스투를 해준 분들께 이 자리에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며, 그 분들도 저와 같은 감정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땡스투가 한동안 저에게 집중된 이유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만약 중복 리뷰였다고 하더라도 '독자의 선택'은 엄정합니다. 제가 땡스투를 많이 받아챙길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리뷰를 정성들여서 썼고, 그것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없습니다. 제 도덕성을 비난하시겠습니까. 저는 자본주의에 사는 인간에 불과하고, 알라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도서구매 비용을 줄입니다. 만약 괜찮은 리뷰가 있다면 저는 중복 리뷰인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땡스 추천을 할 것입니다. 사실 리뷰도 읽기 어려운 데 어떻게 일일히 중복리뷰를 찾아다니면서 읽겠습니까. 저의 게으름을 지적하시렵니까. 저는 스스로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복리뷰가 사회문제가 된다는 점까지는 매우 비약적인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보려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볼 것도 없이 FTA 찬성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미시경제학보다 거시경제학을 더 존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전체적으로 중복 리뷰가 한국 도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개인이 리뷰를 통해 도움을 받는 실상에 대한 상상력이 극도로 부족합니다. 여러분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렇게 일부러 생각해야 생각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안 그래도 실물경제가 어두운데, 성장만을 너무 강요하다보면 서평 문화 자체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문제 제기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서평 쓸 시간이 낭비되어 서평 총량으로는 오히려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제가 아는 여럿도 개점휴업에 들어갔습니다. '서평계의 스뤠기~ !'라고 말하신다면 논의를 닫아야겠지만요.
5. 리뷰가 없어지는 상황과 중복 리뷰 상황 간의 관계 등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4의 말미의 내용의 연장입니다. 두 가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평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딘은 알라딘의 문화가 있고, 예스는 예스의 문화가 있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은 각각 그 토양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서평을 받아들이더라도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재생산됩니다. 그것을 모르지는 않으시겠죠. 여러분들의 논의가 타당하기 위해서는 서평가들이 중복리뷰에 의해 중독되어 매일같이 천편일률의 서평을 쏟아내어야 가능합니다. 아니면 예스24와 알라딘의 유저들이 완전히 같아져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전혀 없습니다. 알라딘과 예스24의 마케팅 능력을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여러분들의 마케팅 능력은 위에서도 이미 검증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독자 무시'의 문제가 생깁니다. 텍스트를 독자들에게 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6. 여러분은 리뷰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략하고 있습니다.
중복 리뷰는 '리뷰' 이후에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중복 리뷰를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리뷰'의 문제는 빼먹지 않으셨나요. 알라디너를 포함해서 제가 본 리뷰 중에 감동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중복 리뷰인 사실은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리뷰를 제가 예스에서 보건 교보에서 보건, 카페에서 보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made in 그사람'의 리뷰입니다. 이 원천기술 이야기를 싹 빼버리고 중복 리뷰를 문제삼는 것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알라디너는 정성들여 리뷰를 쓰고 많은 사람들이 그 정성을 보아 줄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리뷰를 잘 쓰지, 또는 이 사람의 리뷰 중 어떤 것을 벤치마킹할까 등등의 점입니다.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자기 리뷰를 여기저기 잘 퍼나를까 하는 문제도 배우고 싶습니다. 정군 님, 저도 리뷰 열심히 쓸테니까 노출 경로 좀 살짝 알켜주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매너 님의 '불공평한' 모델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해보세요. 정말 그 모델밖에 없습니까? 개인의 입장에서 출발해보세요. 왜 구름 위에 떠 있는 '사회주의'를 운운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