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늘빵 >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밑줄긋기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6년 6월
구판절판


부자란 정말 어떤 사람들일까? 부자란 바로 부를 늘리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더 이상의 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부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부를 지키고 이전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 더 이상 부를 늘려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20쪽

재테크란 애써 벌어들인 자산이 시간이 흐르면서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막으려 애쓰는 행위이고, 때로는 자산을 늘리기는커녕 보험처럼 예기치 못한 위험을 방어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며, 그 중에서 일부는 자산을 지키는 것 이상의 수익을 내기도 한다. 재테크란 노동의 가치와 달라서 중간에서 새어나가는 비용들이 자산가치 증가분을 잠식하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금리 이상의 수익을 내기가 어렵다. 몇 년 째 수입 퍼센트의 수익을 내더라도 이후 서너 번만 마이너스 수익률이 되면 다시 본전이 되는 것이 투자다. 재테크에 성공하려면 연체동물처럼 유연하게 수익을 낼 때는 투자하고 상황이 나쁘면 빠질 줄 알아야 한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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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5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8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래의 매너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점이 협소한 것 같아, 올립니다.


매너님의 중복 게재 4가지 모델에 대한 의견
클릭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39757


매너님과 X님, 그리고 어린이 위서가 님이 제기하시는 문제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출처는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39730 참고할 것. 광고라고 해도 좋음)

1. 독자 개인의 중복 리뷰 수용 과정과 그 피해 사례를 가설에만 의존한다는 점.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적 문제 등의 문제보다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중복 리뷰를 읽어서 피해를 보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합다.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중복 리뷰가 폐해를 주는 과정을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장한다든지, 실제 피해 사례를 구체적으로 지목한다든지, 실제 중복 리뷰 때문에 피해가 많은 사람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사례 조사가 없는데 기인합니다. 좀더 솔직해지기를 바랍니다. 중복 리뷰가 여러분들이 보기에 밸이 꼬여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질이 저해되는 현상을 모델을 통해서 보여줄 뿐, 그것이 어떻게 피해를 주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반적으로 부족해서 결론은 '개인적 불만' 차원으로 협소해집니다.

거기서 아무리 확장시키려 해도 '알라딘과 예스24'를 함께 이용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중복 리뷰에 대해 기분나빠하는 분들의 관점보다 더 이상 확장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어느 한 곳에만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을 감안하지 않은 점이 큰 문제입니다. 바쁜 시대에 교보, 예스24, 알라딘 등의 커뮤니티에 공력을 쏟아부을 만큼 여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이것도 추측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중복 리뷰에 불만을 느끼거나 중복 리뷰를 발견하는 사람보다 중복 리뷰로 인해 리뷰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자신들보다 더 많은 표본을 논의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은 자신들의 불만을 마치 전체적 문제인냥 확대해석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아니면 제가 제시한 모델을 더해서 그림을 다시 그려 보실 것을 제안합니다.

2. 무엇보다도 독자 개인을 바보라고 생각한 것이나 독자의 피해 등을 짐짓 자의적으로 파악한 점
독자로서 매우 불쾌감을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독자 개인으로서 저의 '불쾌'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중복 리뷰로 인해 불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불쾌해야 할 아무 이유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글을 보고 있으면, 마치 파쇼 정권에서 '민중' '민중' 하고 강조하는 허무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는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정치인의 모습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불쾌함만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왜 불쾌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려지는 '나'와 실제의 '나'는 한참 떨어져 있음을 알아야 하며, 여러분의 입으로 생각하는 '독자' 중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 독자 안에 내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독자인 나의 권리를 남용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량한(?) 독자가 아니라 중복리뷰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중복리뷰어도 역시 '독자'라는 사실을 왜 망각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의 지적처럼 중복리뷰어가 하는 행위가 문제가 된다면, 그들 사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거나 그런 캠패인이 벌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여러분들의 논리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중단했던 예스24와 교보 등에 리뷰를 등록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노무현의 연정발언'을 떠올립니다. '무지한 대중에게 내가 깨우쳐주는 것이다'라는 논리가 전제된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알라디너들을 '무지렁뱅이'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지점에서 저는 매우 화가 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희 무지를 깨우쳐주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방식은 오히려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악의'를 읽습니다. 여러분들은 저희에게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변화시키고 싶은 의지도 없습니다. 다만 '푸념'을 할 뿐입니다. 만약 그것이 진짜 문제이고 변화시켜야 하는 일이라면 좀더 진지하게 물어와야 합니다. '터뜨린다'는 표현 안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읽었습니다. 어린이 위서가 님의 조롱형 댓글 따위는 오히려 사소합니다. 조롱도 얼마든지 논리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위서가 님의 댓글들을 읽은 바로는 이 점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점은 나머지 두 분에만 해당합니다. 어린애한테 박쥐가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독자는 리뷰를 평가할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리뷰의 질적인 내용입니다. '중복 리뷰'에서는 그것을 검증할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중복 리뷰를 만약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금세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skip입니다. 아니면 옛 기억을 더듬어 다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복 리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리뷰의 질만 좋다면 100번을 읽어도 저는 행복합니다. 사실 정성들여 쓴 리뷰는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는 거 아시죠. 제가 논어를 100번도 넘게 읽은 이유입니다. 결국 중복 리뷰는 그것에 대해 애써 문제를 지적하는 경우와,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는 '총량'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총량보다 내가 대면하는 리뷰에 관심이 많은 저는 그 문제에 대해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겠습니다.


3. 중복 게재 모델에서 덧붙여야 할 모델군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중복 모델을 나쁘게만 보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저의 경우입니다. A,B,C 서점을 두루두루 방문할 기회가 되지 못하는 저는 A 서점만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B,C 서점의 이뷰에 대한 수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B,C에 올렸던 것을 A에 올리기 전까지는 저는 '리뷰'가 없는 줄로 압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얼른 예스24나 교보문고를 생각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인간이 손가락을 클릭해서 다른 서점으로 가서 해당 리뷰를 확인하기까지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를 여러분들은 알지 못합니다. 만약 그 간극이 없다면 '진공청소기'나 '식기세척기' 등은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겠죠. 여기서 저는 여러분들의 마케팅 능력을 확인합니다.

4. 자본주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땡스투를 하는 경우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할 것을 기대했는데 너무 신사적입니다.
저는 책을 살 때 쿠폰을 사용하고, 적립금을 사용하고, 마지막으로 땡스투추천을 사용합니다. 땡스투를 추천하면 일정 비율의 적립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의도한 것이 알라딘이기도 합니다. 저는 도덕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습니다. 만약 관련 리뷰나 페이퍼가 올라와 있다면 땡스투를 눌러서 적립금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 불량리뷰에 대해서는 땡스투를 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땡스투가 몇 십원이나 몇 백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제게는 책을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비용을 줄이는 것은 제게 생존과 직결돼 있습니다. 알라딘은 땡스투를 추천한 사람과 땡스투를 받은 사람에게 모두 적립금이 돌아갑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드립니다. 그리고 그 취지까지 생각하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요번에 정민 선생의 책을 읽고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신문에서 봐서 사려고도 했지만, 무엇보다 리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읽고 나서 생각이 든 것은 기존의 '리뷰'가 너무 책에 대해 성의 없게 다가가서 혹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읽고 판단할 수 있도록 정성들여 리뷰를 썼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가던 땡스투가 저에게 왔습니다. 저는 그 일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좀더 속물적으로 쓰자면 저 사람이 노동 없이 불로소득을 얻어가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정당히 노동해서 소득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알라딘이 그 책을 밀 때였으니까 땡스투에 대한 욕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쓴 것이죠. 그리고 저에게 땡스투를 해준 분들께 이 자리에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며, 그 분들도 저와 같은 감정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땡스투가 한동안 저에게 집중된 이유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만약 중복 리뷰였다고 하더라도 '독자의 선택'은 엄정합니다. 제가 땡스투를 많이 받아챙길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리뷰를 정성들여서 썼고, 그것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없습니다. 제 도덕성을 비난하시겠습니까. 저는 자본주의에 사는 인간에 불과하고, 알라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도서구매 비용을 줄입니다. 만약 괜찮은 리뷰가 있다면 저는 중복 리뷰인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땡스 추천을 할 것입니다. 사실 리뷰도 읽기 어려운 데 어떻게 일일히 중복리뷰를 찾아다니면서 읽겠습니까. 저의 게으름을 지적하시렵니까. 저는 스스로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복리뷰가 사회문제가 된다는 점까지는 매우 비약적인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보려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볼 것도 없이 FTA 찬성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미시경제학보다 거시경제학을 더 존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전체적으로 중복 리뷰가 한국 도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개인이 리뷰를 통해 도움을 받는 실상에 대한 상상력이 극도로 부족합니다. 여러분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렇게 일부러 생각해야 생각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안 그래도 실물경제가 어두운데, 성장만을 너무 강요하다보면 서평 문화 자체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문제 제기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서평 쓸 시간이 낭비되어 서평 총량으로는 오히려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제가 아는 여럿도 개점휴업에 들어갔습니다. '서평계의 스뤠기~ !'라고 말하신다면 논의를 닫아야겠지만요.


5. 리뷰가 없어지는 상황과 중복 리뷰 상황 간의 관계 등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4의 말미의 내용의 연장입니다. 두 가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평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딘은 알라딘의 문화가 있고, 예스는 예스의 문화가 있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은 각각 그 토양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서평을 받아들이더라도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재생산됩니다. 그것을 모르지는 않으시겠죠. 여러분들의 논의가 타당하기 위해서는 서평가들이 중복리뷰에 의해 중독되어 매일같이 천편일률의 서평을 쏟아내어야 가능합니다. 아니면 예스24와 알라딘의 유저들이 완전히 같아져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전혀 없습니다. 알라딘과 예스24의 마케팅 능력을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여러분들의 마케팅 능력은 위에서도 이미 검증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독자 무시'의 문제가 생깁니다. 텍스트를 독자들에게 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6. 여러분은 리뷰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략하고 있습니다.
중복 리뷰는 '리뷰' 이후에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중복 리뷰를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리뷰'의 문제는 빼먹지 않으셨나요. 알라디너를 포함해서 제가 본 리뷰 중에 감동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중복 리뷰인 사실은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리뷰를 제가 예스에서 보건 교보에서 보건, 카페에서 보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made in 그사람'의 리뷰입니다. 이 원천기술 이야기를 싹 빼버리고 중복 리뷰를 문제삼는 것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알라디너는 정성들여 리뷰를 쓰고 많은 사람들이 그 정성을 보아 줄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리뷰를 잘 쓰지, 또는 이 사람의 리뷰 중 어떤 것을 벤치마킹할까 등등의 점입니다.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자기 리뷰를 여기저기 잘 퍼나를까 하는 문제도 배우고 싶습니다. 정군 님, 저도 리뷰 열심히 쓸테니까 노출 경로 좀 살짝 알켜주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매너 님의 '불공평한' 모델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해보세요. 정말 그 모델밖에 없습니까? 개인의 입장에서 출발해보세요. 왜 구름 위에 떠 있는 '사회주의'를 운운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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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7-01-1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 2 "중복리뷰를 읽어서 발생하는 피해"가 아니라, "중복리뷰로 인해, 해당 사이트에서만 서평을 올리는 사람이 입어야 하는 피해" 입니다. 매너님이나 위서가님은 모르겠으나, 저는 독자분들더러 "불쾌감"을 가지라고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유감입니다. 그리고 제 글의 경우, 인터넷 서점 각각에 고유의 서평그룹이 생겨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 글이므로,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이런 식으로 길게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 전제가 바람직하다고 동의하십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논의를 더 이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출판 시장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썼습니다. 그것을 '불쾌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중소규모 출판사 입장에서는 '억울함'일 것이고, 다른 입장의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감정이 생겨나겠죠.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승주나무 2007-01-14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X님의 견해는 제가 경청해서 의견이 있으면 남기겠습니다. '여러분'이라고 한 말씀을 두고 하시는군요. 일단 매너 님이 의견을 주신 데 대한 저의 의견이었으니, X 님의 글의 문맥에 정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되도록이면 X님과 매너 님, 어린이 위서가 님과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제겐 전혀 다른 캐릭터거든요. 그리고 님의 의견은 제가 존중하겠습니다.

마늘빵 2007-01-14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제 글에 주소붙여넣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2007-01-14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7-01-1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서점 각각에 고유의 서평그룹이 생겨야 한다는 전제'라는 이상적인 바람을 고집피운다고 되는건 아니잖아요. '무고한 시민'들한테 왜 해코지를 하고 그래요?
:-) 출판산업의 위기를 열혈독자에게서 찾으려고 합니까? 왜.
 

언어 이전과 언어 이후의 우주

- 부제 : 상처받은 알라디너에게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알라딘에서 벌어지는 리뷰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고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에 괴로워하며 새벽부터 잠을 설쳤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논쟁의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싸울까도 생각했지만, 먼저 페이퍼의 글을 다 읽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글을 다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글을 남기려고 했지만 마음이 무거워지고 제대로 글을 남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최근에 둥지를 튼 커뮤니티의 글을 읽고 필이 꽂혀 댓글을 쏟아붓다가, 아예 답글로 전환해서 남긴 글의 전모를 여기에 '중복'으로 퍼다 나르겠습니다. '펌글'이라고 무시한다면 기분나쁩니다. 알라디너 생각하면서 쓴 글이니까요. 알라디너 여러분. 이제까지 '차가운 이야기'를 접하셨다면, 저는 그와 반대로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문체가 댓글체, 답글체이기 때문에 문맥이 다소 헷갈리시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최대한 문맥을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원문 글의 주인에게 부탁을 드려 놓았으니, 허락해주시면 원문을 볼 수 있게 링크해 드릴게요.

(허락을 얻어 원본 글을 링크합니다. 원본은 포스트 주소가 없어서 제 블로그에 담았는데, 블로그에는 원본 글 연결이 있으니 연결해서 들어가면 됩니다. )
=====>>> http://blog.daum.net/lycurgus/10712593


그 분이 남긴 글의 제목은 '언어는 존재의 집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1.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동시에 언어는 '존재의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화용론은 언어보다 언어 이면의 모습들을 더 잘 보여줍니다. '자알~한다'라는 말에는 '잘 하는' 것에 대한 의미보다는 '볼수록 가관이다'와 같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언어 이전에 사람은 교감을 합니다. 그리고 자세를 잡고 그것에 대한 확인으로서 마지막에 '언어'를 남깁니다. 언어 이전도 하나의 우주이며, 언어 이후도 또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두 우주는 서로를 껴안고 있는 형세입니다. 그래서 언어 이전이 황량한 경우, 언어 이후는 더 볼 것도 없습니다.


2. 저는 제 아내를 관찰합니다. 아내는 제 언어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오랫동안 휴대폰을 붙들면서 가족들과 나누는 잡담이나 블로그를 뒤적거리며 남기는 댓글들, 티비를 보면서 울고 웃고 일상적으로 떠드는 모습들은 저에게는 '행복'입니다. 저는 아내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영혼의 주인은 아내입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제 아내의 영혼'을 행복하게 해줄 책임을 말합니다. 어제 한 가장이 생활고를 비관해 자식 셋을 죽이고 두 팔을 긋는 일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하는 것' 혹은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피아노 소리 좋습니다. 중독성이군요. 멈출 때까지 계속 쓰게 돼요. 설마 반복 설정을 해놓으신 것은 아니겠죠. 그럼 저는 멈추지 못할 것 같은데요. '언어'를 이야기하면서 '아내'와 '책임' 그리고 '사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언어의 집에 들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성정이 다소 격해서 제 영혼이 상처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너 자꾸 그렇게 말하면 내 영혼이 아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는 제 영혼이 직접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그 후로 말을 조심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영혼'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니까 재미있어하였지만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4.
저는 아내의 '영혼'을 잘 알기에 따뜻한 언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진짜 따뜻해집니다. 난로가에 불을 쬐는 고양이(동물에 비유해서 뭣하지만)나 따뜻한 가을 햇볕에 몸을 쬐며 낮잠을 자고 있는 강아지 또는 '대지'에 나오는 왕륭의 늙은 아버지처럼 말이죠. 이때마다 사람의 영혼은 얼마나 연약한가, 언어는 얼마나 이 영혼을 간단히 베어버릴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우주'에 대한 성찰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장문의 댓글을 부담스럽게 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한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가냘프지만 사랑스런 영혼들이 사는 집입니다.


5.
하지만 누군가 '황량한 우주의 그림자'인 '언어'를 사용하여 몇몇 지기를 베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베어버린 것'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면서 말이죠. 물론 '언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스토리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앙금이 가라앉으면 애처롭게도 남는 것은 '언어'와 '상처'뿐입니다. 이것을 펼쳐보였던 '주제'는 대개는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공자와 예수가 아무리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랑의 우주적 언어'를 설파했지만 남은 것은 '사랑'과 '언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혼란과 그 원인에 대한 문제는 끊임없는 관심과 성찰이 전승되면서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6.
언어를 늘어놓았다고 해서 존재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는 제자들의 말이 제자들의 행동을 항상 앞지르는 것을 가장 가슴아파했습니다. 언어는 '촛불'입니다. 그것이 전승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자신의 '초'에다 옮겨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촛불의 중요성을 알리면서 옮겨갈 곳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자의 언어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2~3000년 동안 촛불을 부지런히 옮겨다 나른 사람들의 노고는 쉬이 잊어 버립니다. 만약 자신의 언어와 생각이 옳다고 여긴다면 자신의 편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행동'할 것을 권해야 합니다.


7.
이것이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언어의 우주는 물론 언어의 빈 그릇에 들어가는 '행동'이 정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 언어에는 '따뜻한 것'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을 지적하더라도 '냉엄한 질책'보다는 따뜻한 격려가 더욱 필요합니다. '냉엄한 질책'은 힘이 있는 사람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예컨대 광주항쟁 때문에 운동권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원희룡 국회의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 앞에서 세배를 올린 것에 대해서는 '냉엄한 질책'을 해야 합니다. 원희룡 의원은 권력자이고, 저를 비롯한 젊은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제도권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들에게 '질책'은 가혹합니다


그리고 답글


부담스런 댓글을 단 것에 대해서 혹시라도 언짢으셨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이렇게 댓글에 이어 저의 의견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우선 글머리가 꽂혔기 때문이고, 음악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이야기하다보니 제가 사랑하는 커뮤니티가 생각나서입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이어서 하고 싶습니다. '책임'이라는 부분은 매우 중요한 데도 현실에서 많이 어긋나고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저의 책임'과 '자식들을 죽인 가장의 책임'을 보세요. 이것이 똑같은 책임인가요?

 

언어는 이렇습니다. 똑같은 '책임'이지만 그 안에 전혀 다른 우주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전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저의 책임은 '반쪽짜리 책임'입니다. 저는 제 인생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반쪽의 책임'을 집니다. 저는 제 아내를 행복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 할' 책임 따위는 애초에 없는 거겠죠. 그리고 아내와 타인의 차이점이 될 텐데, 아내의 잘못된 점을 '지적'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내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도록 단속할 책임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따끔하게 입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내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 만약 아내가 그 '슬픔'을 딛고 내가 바라는 '수정'을 한다면 저는 행복할 것입니다. 만약 아내에게 '슬픔'이 남아 있다면 저는 아주 나쁜놈입니다. 만약 아내가 '슬픔'을 느끼지 않고 '수정'을 한다면 저는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언어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사람마다 '뜻'을 전하는 성정의 차이가 있으나, 그 뜻과는 별개로 상처받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뜻'에 대해서 제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처받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경우는 사람들에게 '뜻'이 반드시 필요하거나, 사람들이 아직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성찰이 있을 때에만 '뜻'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고통스럽고 철저한 자기검증'이 전제됩니다.

 

사람의 인생은 대체로 불행합니다. 거기에 불행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덧붙이는 것은 '범죄행위'입니다. 때문에 사람은 자신과 관계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책임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은 가능합니다. 만약 그 사람에게 '고통스런 처방'을 내려서, 그 사람의 고질적인 불행의 요소가 제거될 때에 한해 '요법'은 허락됩니다.

 

나에게 누군가를 불행하게 할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뜻'만을 내세워 그 반응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 사람을 '어린이' 또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할 줄 아는 어린이족'이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사회비용이나 '궁극의 엔트로피' 따위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맹자는 '하나를 구부려 열을 곧게 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열을 구부려 하나를 펴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에 왜 사이 간(間)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언어보다 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펼쳐진 '우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언어'를 사용할 자격이 없습니다. '행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책'을 읽어도 감흥이 없습니다.

 

나는 요즘 고민입니다. 저도 성정이 다소 과격하거든요. 어떻게 하면 따뜻한 언어를 많이 만들어서 제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위대한 실험'이 성공한다면 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가 사는 '내 언어의 집'을 어떻게 하면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저의 큰 행복입니다. 제 아내의 일상과 표정, 언어는 제 노력의 '차가운 평가자'입니다. 아내가 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든지 얼굴을 붉힌다든지 내 '뜻'에는 상관없이 내 '언어'에 문제를 지적한다든지, 한숨을 짓는다든지, 표정에 미세한 '실망'이 지나간다든지 하는 것을 저는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제 '언어의 공장'에다가 적용을 시킵니다.

 

저는 지금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황량한 언어의 우주'로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 슬픔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별로 느끼고 싶지 않지만, 사람들의 고통에 즐거워하는 '또 다른 사람'의 냉소도 느껴집니다. '사람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사람의 뒤에 수많은 언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봅니다. 그보다 더 광대하고 넓은 언어의 우주가 펼쳐져 있는 것도 보입니다.

 

거기다 저는 한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상처를 주고 사랑을 주고 다양한 것들을 줍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인생의 길은 저마다 고달픈 것 일색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의 영역이므로 말미에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 맹자의 구절을 남깁니다.

'사람 때문에 견딘다'는 이야기를 저는 믿습니다. 사람 때문에 견뎌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니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구체화시키면 '사람 때문에 사람을 견딘다'이고, 이를 좀더 구체화시키면 '따뜻한 사람들 때문에 상처주고 아프게 한 사람들의 기억을 견딜 수 있다'입니다. 이 두 사람은 언어로 표현하면 매우 차가워집니다.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사람'이라고 말한 이전에 '언어의 우주'로 보면 말하고 느낄 것이 매우 많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매우 괴롭고 슬프고 화도 납니다. 하지만 우연히 바라본 님의 페이퍼에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제게 힘을 주신 것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제가 쓴 글을 그 커뮤니티에 올릴 생각인데, 약산 님의 글 원본을 올려도 되는지 정중하게 묻고 싶습니다. 올리고 싶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것이 많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일단은 제 글만 먼저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허락해주시면 링크를 걸어서 그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링크로 인해 이 카페가 범람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 커뮤니티도 상당한 자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아이디도 공개가 되겠지만요.

님의 일상적인 글에 부담스런 댓글과 답글을 단 것까지 모자라 글을 링크해가도 되느냐느 무례한 부탁을 드린 다작 이만 물러갑니다용~

 

 

덧 : 마지막으로 이 스토리와 관계된 두 개의 사례를 남깁니다. '언어'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싶다는 저의 간절한 소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1. 순식간에 이루어진 아내와 저의 대화 한 꼭지를 전합니다.

아내 : 너 어제 설겆이했구나!

나 : 설겆이한 게 뭐 대수냐? 네가 요리를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내: 어, 야아~

 

2. 따뜻한 사람들이 왜 더 많이 아파야 하는지에 대한 신의 뜻에 대해 언어표현을 시도한 맹자의 문구

하늘이 이 사람에게 장차 큰 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수고로이 하고, 그 신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어 보고, 나아가 그가 하는 일마다 어그러뜨리고 어지럽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고, 그가 할 수 없는 바(능력)을 북돋운다. 사람은 항상 잘못이 있은 뒤에 고칠 수 있고, 마음에 곤란을 받고, 생각이 막힌 뒤에 분발하여 일을 하고, 얼굴색에 나타나고, 말소리로 나타난 뒤에 이해를 한다.

안으로는 법도와 전통이 있는 세습 신하나 진중한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이나 우환이 없는 임금의 나라가 항상 멸망한다. 그런 뒤에야, 우환 속에서는 생존하고, 안락 속에서 비로소 사멸한다는 것을 안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근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人恒過然後 能改 困於心 衡於慮然後 作徵於色 發於聲而後 喩,
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
然後 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
<맹자 고자-하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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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1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닭살(관련없는 댓글)

비로그인 2007-01-1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반했어요^^

승주나무 2007-01-1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 님//어~ 야아~ 따뜻한 글이라고 해주세요. 알라딘의 차가운 온도는 높이고, 과열된 온도는 좀 냉각시키는 인공지능 온난풍기가 되려구 해요^^
라라 님//정말이요. 아이 즐거워라~ 장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푸하 2007-01-14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글이에요. 이 문장에 제 시선이 머물어요. '사람과 사람에 왜 사이 간(間)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언어보다 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펼쳐진 '우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언어'를 사용할 자격이 없습니다. '행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책'을 읽어도 감흥이 없습니다.' 말하여지지 않은 수많은 침묵을 차분히 응시해야 할 것 같아요.

승주나무 2007-01-1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님//처음 뵙겠습니다. 멋지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잘하지만, 말을 잘하는 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14-5>

이 구절에 대한 물만두님의 댓글에 대한 보답으로 페이퍼를 만들었지요. 물만두 님//구석에서 울고 있는 거시죠... 뚝~ 그치세요(토닥토닥)


로쟈 2007-01-1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커뮤니티가 제가 아는 곳이더군요.^^ '그 분이 남긴 글'에 대해 저대로 보충하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할 때, 그 언어는 다른 무엇보다도 '시어'입니다. 후기 하이데거가 존재사유를 릴케와 횔덜린의 시 주석으로 대체한 이유이기도 하고요(물론 이때 '존재'는 '존재자', '있는 것'들과는 구별되는 '있음' 혹은 있다는 것'입니다. 명사가 아닌 일종의 동명사). 그래서 '휴머니즘'과는 무관한 것이기도 하고요...

마늘빵 2007-01-14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이 첨언하시니 어려워지는군요. -_-a 그냥 닭살멘트로 볼래요 전. ㅎㅎ

승주나무 2007-01-1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 안녕하세요. 하이데거는 서점에서 얼굴만 쳐다봤지, 뭐 들여다본 것은 없습니다. 부끄럽죠~ 그 페이퍼에서는 뭐랄까 그때의 심정도 있었고, 그래서 '휴머니즘' 같은 것을 떠올렸나 봐요. 닭살멘트도 좋구요.
아프 님//잘 배워두세요. 결혼하면 이렇게 하는 거에요. 알겠죠?^^

마늘빵 2007-01-1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네
 

논어 리뷰의 제목임..

그냥 써봤음..

이제부터 동양의 고전철학을 정리해보기로 했음..

얼른 정시가 끝났으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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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 공부를 하고, 소설공부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지 않는다.

시 공부와 소설 공부와 같은 습작을 하지 않는 것이 내내 괴롭고, 책밭서점이라는 제주도의 허름한 헌책방 아저씨와 같이 신춘문예만 되면 가슴 한켠이 시리다.

연말 성석제씨 펜클럽에 성석제씨(우리는 '성아저씨'라고 부른다. 이하 '성아저씨, 또는 아저씨')가 와서 분위기를 한껏 돋궈주었다.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가 늦게 참여한 것이었다. 단연 이야기의 주제는 신춘문예였고, 성아저씨는 응모작들의 수가 적지 않음과 그에 따라 작품의 질적 수준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도로 전문적인 소재를 가지고 쓰는 글에 대해서도 '풍자'적으로 이야기한다. 그 안에서 작품들의 '기술성'이 읽힌다. 사실 신춘문예작의 기술성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신문문예용 작품이라는 오명도 굉장히 오래된 역사이다. 1920년대부터 해묵은 논쟁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이런 세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지극히 개인적인 물음을 던졌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경험'과 '습작'의 중요성입니다. 사실 저는 지금 습작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소설을 위해서는 '경험'이 중요한지 '습작'이 중요한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성아저씨로부터 선문답 또는 논어에 나올 듯한 대답이 돌아온다.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

순간 분위기가 '쌩뚱'해졌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본 결과 나의 답을 얻었다.

비단 '좋은'과 '작품'과 '써야' '한다'는 형태소의 의미를 세부적으로 분석하지 않더라도, 또는 성아저씨가 어떤 의도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그것은 나의 대답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도' 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고, 소설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나는 텍스트나 습작이라는 개념을 매우 한정적으로 본 것이 아닌가. 이것은 철학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이것은 매우 무책임한 생각일 수 있다. 후배의 비난처럼 그 '감수성(?)'을 '논술 따위'에 쏟아붓는다는 것이 자본에 굴복한 것일 수도 있다. 습작을 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생각'하거나 다른 '형식'으로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말장난'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말장난'인지 아닌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준 성아저씨의 선문답과 아래의 칼럼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101821371&code=9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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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1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혼생활은 어떠세요? ^^ (쌩뚱)

승주나무 2007-01-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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