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 공부를 하고, 소설공부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지 않는다.
시 공부와 소설 공부와 같은 습작을 하지 않는 것이 내내 괴롭고, 책밭서점이라는 제주도의 허름한 헌책방 아저씨와 같이 신춘문예만 되면 가슴 한켠이 시리다.
연말 성석제씨 펜클럽에 성석제씨(우리는 '성아저씨'라고 부른다. 이하 '성아저씨, 또는 아저씨')가 와서 분위기를 한껏 돋궈주었다.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가 늦게 참여한 것이었다. 단연 이야기의 주제는 신춘문예였고, 성아저씨는 응모작들의 수가 적지 않음과 그에 따라 작품의 질적 수준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도로 전문적인 소재를 가지고 쓰는 글에 대해서도 '풍자'적으로 이야기한다. 그 안에서 작품들의 '기술성'이 읽힌다. 사실 신춘문예작의 기술성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신문문예용 작품이라는 오명도 굉장히 오래된 역사이다. 1920년대부터 해묵은 논쟁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이런 세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지극히 개인적인 물음을 던졌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경험'과 '습작'의 중요성입니다. 사실 저는 지금 습작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소설을 위해서는 '경험'이 중요한지 '습작'이 중요한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성아저씨로부터 선문답 또는 논어에 나올 듯한 대답이 돌아온다.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
순간 분위기가 '쌩뚱'해졌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본 결과 나의 답을 얻었다.
비단 '좋은'과 '작품'과 '써야' '한다'는 형태소의 의미를 세부적으로 분석하지 않더라도, 또는 성아저씨가 어떤 의도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그것은 나의 대답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도' 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고, 소설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나는 텍스트나 습작이라는 개념을 매우 한정적으로 본 것이 아닌가. 이것은 철학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이것은 매우 무책임한 생각일 수 있다. 후배의 비난처럼 그 '감수성(?)'을 '논술 따위'에 쏟아붓는다는 것이 자본에 굴복한 것일 수도 있다. 습작을 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생각'하거나 다른 '형식'으로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말장난'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말장난'인지 아닌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준 성아저씨의 선문답과 아래의 칼럼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101821371&code=99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