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이전과 언어 이후의 우주

- 부제 : 상처받은 알라디너에게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알라딘에서 벌어지는 리뷰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고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에 괴로워하며 새벽부터 잠을 설쳤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논쟁의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싸울까도 생각했지만, 먼저 페이퍼의 글을 다 읽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글을 다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글을 남기려고 했지만 마음이 무거워지고 제대로 글을 남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최근에 둥지를 튼 커뮤니티의 글을 읽고 필이 꽂혀 댓글을 쏟아붓다가, 아예 답글로 전환해서 남긴 글의 전모를 여기에 '중복'으로 퍼다 나르겠습니다. '펌글'이라고 무시한다면 기분나쁩니다. 알라디너 생각하면서 쓴 글이니까요. 알라디너 여러분. 이제까지 '차가운 이야기'를 접하셨다면, 저는 그와 반대로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문체가 댓글체, 답글체이기 때문에 문맥이 다소 헷갈리시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최대한 문맥을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원문 글의 주인에게 부탁을 드려 놓았으니, 허락해주시면 원문을 볼 수 있게 링크해 드릴게요.

(허락을 얻어 원본 글을 링크합니다. 원본은 포스트 주소가 없어서 제 블로그에 담았는데, 블로그에는 원본 글 연결이 있으니 연결해서 들어가면 됩니다. )
=====>>> http://blog.daum.net/lycurgus/10712593


그 분이 남긴 글의 제목은 '언어는 존재의 집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1.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동시에 언어는 '존재의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화용론은 언어보다 언어 이면의 모습들을 더 잘 보여줍니다. '자알~한다'라는 말에는 '잘 하는' 것에 대한 의미보다는 '볼수록 가관이다'와 같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언어 이전에 사람은 교감을 합니다. 그리고 자세를 잡고 그것에 대한 확인으로서 마지막에 '언어'를 남깁니다. 언어 이전도 하나의 우주이며, 언어 이후도 또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두 우주는 서로를 껴안고 있는 형세입니다. 그래서 언어 이전이 황량한 경우, 언어 이후는 더 볼 것도 없습니다.


2. 저는 제 아내를 관찰합니다. 아내는 제 언어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오랫동안 휴대폰을 붙들면서 가족들과 나누는 잡담이나 블로그를 뒤적거리며 남기는 댓글들, 티비를 보면서 울고 웃고 일상적으로 떠드는 모습들은 저에게는 '행복'입니다. 저는 아내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영혼의 주인은 아내입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제 아내의 영혼'을 행복하게 해줄 책임을 말합니다. 어제 한 가장이 생활고를 비관해 자식 셋을 죽이고 두 팔을 긋는 일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하는 것' 혹은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피아노 소리 좋습니다. 중독성이군요. 멈출 때까지 계속 쓰게 돼요. 설마 반복 설정을 해놓으신 것은 아니겠죠. 그럼 저는 멈추지 못할 것 같은데요. '언어'를 이야기하면서 '아내'와 '책임' 그리고 '사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언어의 집에 들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성정이 다소 격해서 제 영혼이 상처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너 자꾸 그렇게 말하면 내 영혼이 아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는 제 영혼이 직접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그 후로 말을 조심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영혼'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니까 재미있어하였지만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4.
저는 아내의 '영혼'을 잘 알기에 따뜻한 언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진짜 따뜻해집니다. 난로가에 불을 쬐는 고양이(동물에 비유해서 뭣하지만)나 따뜻한 가을 햇볕에 몸을 쬐며 낮잠을 자고 있는 강아지 또는 '대지'에 나오는 왕륭의 늙은 아버지처럼 말이죠. 이때마다 사람의 영혼은 얼마나 연약한가, 언어는 얼마나 이 영혼을 간단히 베어버릴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우주'에 대한 성찰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장문의 댓글을 부담스럽게 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한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가냘프지만 사랑스런 영혼들이 사는 집입니다.


5.
하지만 누군가 '황량한 우주의 그림자'인 '언어'를 사용하여 몇몇 지기를 베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베어버린 것'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면서 말이죠. 물론 '언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스토리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앙금이 가라앉으면 애처롭게도 남는 것은 '언어'와 '상처'뿐입니다. 이것을 펼쳐보였던 '주제'는 대개는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공자와 예수가 아무리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랑의 우주적 언어'를 설파했지만 남은 것은 '사랑'과 '언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혼란과 그 원인에 대한 문제는 끊임없는 관심과 성찰이 전승되면서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6.
언어를 늘어놓았다고 해서 존재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는 제자들의 말이 제자들의 행동을 항상 앞지르는 것을 가장 가슴아파했습니다. 언어는 '촛불'입니다. 그것이 전승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자신의 '초'에다 옮겨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촛불의 중요성을 알리면서 옮겨갈 곳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자의 언어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2~3000년 동안 촛불을 부지런히 옮겨다 나른 사람들의 노고는 쉬이 잊어 버립니다. 만약 자신의 언어와 생각이 옳다고 여긴다면 자신의 편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행동'할 것을 권해야 합니다.


7.
이것이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언어의 우주는 물론 언어의 빈 그릇에 들어가는 '행동'이 정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 언어에는 '따뜻한 것'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을 지적하더라도 '냉엄한 질책'보다는 따뜻한 격려가 더욱 필요합니다. '냉엄한 질책'은 힘이 있는 사람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예컨대 광주항쟁 때문에 운동권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원희룡 국회의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 앞에서 세배를 올린 것에 대해서는 '냉엄한 질책'을 해야 합니다. 원희룡 의원은 권력자이고, 저를 비롯한 젊은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제도권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들에게 '질책'은 가혹합니다


그리고 답글


부담스런 댓글을 단 것에 대해서 혹시라도 언짢으셨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이렇게 댓글에 이어 저의 의견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우선 글머리가 꽂혔기 때문이고, 음악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이야기하다보니 제가 사랑하는 커뮤니티가 생각나서입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이어서 하고 싶습니다. '책임'이라는 부분은 매우 중요한 데도 현실에서 많이 어긋나고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저의 책임'과 '자식들을 죽인 가장의 책임'을 보세요. 이것이 똑같은 책임인가요?

 

언어는 이렇습니다. 똑같은 '책임'이지만 그 안에 전혀 다른 우주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전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저의 책임은 '반쪽짜리 책임'입니다. 저는 제 인생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반쪽의 책임'을 집니다. 저는 제 아내를 행복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 할' 책임 따위는 애초에 없는 거겠죠. 그리고 아내와 타인의 차이점이 될 텐데, 아내의 잘못된 점을 '지적'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내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도록 단속할 책임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따끔하게 입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내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 만약 아내가 그 '슬픔'을 딛고 내가 바라는 '수정'을 한다면 저는 행복할 것입니다. 만약 아내에게 '슬픔'이 남아 있다면 저는 아주 나쁜놈입니다. 만약 아내가 '슬픔'을 느끼지 않고 '수정'을 한다면 저는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언어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사람마다 '뜻'을 전하는 성정의 차이가 있으나, 그 뜻과는 별개로 상처받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뜻'에 대해서 제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처받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경우는 사람들에게 '뜻'이 반드시 필요하거나, 사람들이 아직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성찰이 있을 때에만 '뜻'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고통스럽고 철저한 자기검증'이 전제됩니다.

 

사람의 인생은 대체로 불행합니다. 거기에 불행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덧붙이는 것은 '범죄행위'입니다. 때문에 사람은 자신과 관계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책임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은 가능합니다. 만약 그 사람에게 '고통스런 처방'을 내려서, 그 사람의 고질적인 불행의 요소가 제거될 때에 한해 '요법'은 허락됩니다.

 

나에게 누군가를 불행하게 할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뜻'만을 내세워 그 반응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 사람을 '어린이' 또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할 줄 아는 어린이족'이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사회비용이나 '궁극의 엔트로피' 따위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맹자는 '하나를 구부려 열을 곧게 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열을 구부려 하나를 펴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에 왜 사이 간(間)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언어보다 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펼쳐진 '우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언어'를 사용할 자격이 없습니다. '행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책'을 읽어도 감흥이 없습니다.

 

나는 요즘 고민입니다. 저도 성정이 다소 과격하거든요. 어떻게 하면 따뜻한 언어를 많이 만들어서 제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위대한 실험'이 성공한다면 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가 사는 '내 언어의 집'을 어떻게 하면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저의 큰 행복입니다. 제 아내의 일상과 표정, 언어는 제 노력의 '차가운 평가자'입니다. 아내가 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든지 얼굴을 붉힌다든지 내 '뜻'에는 상관없이 내 '언어'에 문제를 지적한다든지, 한숨을 짓는다든지, 표정에 미세한 '실망'이 지나간다든지 하는 것을 저는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제 '언어의 공장'에다가 적용을 시킵니다.

 

저는 지금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황량한 언어의 우주'로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 슬픔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별로 느끼고 싶지 않지만, 사람들의 고통에 즐거워하는 '또 다른 사람'의 냉소도 느껴집니다. '사람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사람의 뒤에 수많은 언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봅니다. 그보다 더 광대하고 넓은 언어의 우주가 펼쳐져 있는 것도 보입니다.

 

거기다 저는 한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상처를 주고 사랑을 주고 다양한 것들을 줍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인생의 길은 저마다 고달픈 것 일색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의 영역이므로 말미에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 맹자의 구절을 남깁니다.

'사람 때문에 견딘다'는 이야기를 저는 믿습니다. 사람 때문에 견뎌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니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구체화시키면 '사람 때문에 사람을 견딘다'이고, 이를 좀더 구체화시키면 '따뜻한 사람들 때문에 상처주고 아프게 한 사람들의 기억을 견딜 수 있다'입니다. 이 두 사람은 언어로 표현하면 매우 차가워집니다.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사람'이라고 말한 이전에 '언어의 우주'로 보면 말하고 느낄 것이 매우 많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매우 괴롭고 슬프고 화도 납니다. 하지만 우연히 바라본 님의 페이퍼에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제게 힘을 주신 것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제가 쓴 글을 그 커뮤니티에 올릴 생각인데, 약산 님의 글 원본을 올려도 되는지 정중하게 묻고 싶습니다. 올리고 싶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것이 많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일단은 제 글만 먼저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허락해주시면 링크를 걸어서 그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링크로 인해 이 카페가 범람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 커뮤니티도 상당한 자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아이디도 공개가 되겠지만요.

님의 일상적인 글에 부담스런 댓글과 답글을 단 것까지 모자라 글을 링크해가도 되느냐느 무례한 부탁을 드린 다작 이만 물러갑니다용~

 

 

덧 : 마지막으로 이 스토리와 관계된 두 개의 사례를 남깁니다. '언어'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싶다는 저의 간절한 소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1. 순식간에 이루어진 아내와 저의 대화 한 꼭지를 전합니다.

아내 : 너 어제 설겆이했구나!

나 : 설겆이한 게 뭐 대수냐? 네가 요리를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내: 어, 야아~

 

2. 따뜻한 사람들이 왜 더 많이 아파야 하는지에 대한 신의 뜻에 대해 언어표현을 시도한 맹자의 문구

하늘이 이 사람에게 장차 큰 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수고로이 하고, 그 신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어 보고, 나아가 그가 하는 일마다 어그러뜨리고 어지럽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고, 그가 할 수 없는 바(능력)을 북돋운다. 사람은 항상 잘못이 있은 뒤에 고칠 수 있고, 마음에 곤란을 받고, 생각이 막힌 뒤에 분발하여 일을 하고, 얼굴색에 나타나고, 말소리로 나타난 뒤에 이해를 한다.

안으로는 법도와 전통이 있는 세습 신하나 진중한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이나 우환이 없는 임금의 나라가 항상 멸망한다. 그런 뒤에야, 우환 속에서는 생존하고, 안락 속에서 비로소 사멸한다는 것을 안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근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人恒過然後 能改 困於心 衡於慮然後 作徵於色 發於聲而後 喩,
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
然後 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
<맹자 고자-하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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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1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닭살(관련없는 댓글)

비로그인 2007-01-1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반했어요^^

승주나무 2007-01-1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 님//어~ 야아~ 따뜻한 글이라고 해주세요. 알라딘의 차가운 온도는 높이고, 과열된 온도는 좀 냉각시키는 인공지능 온난풍기가 되려구 해요^^
라라 님//정말이요. 아이 즐거워라~ 장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푸하 2007-01-14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글이에요. 이 문장에 제 시선이 머물어요. '사람과 사람에 왜 사이 간(間)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언어보다 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펼쳐진 '우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언어'를 사용할 자격이 없습니다. '행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책'을 읽어도 감흥이 없습니다.' 말하여지지 않은 수많은 침묵을 차분히 응시해야 할 것 같아요.

승주나무 2007-01-1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님//처음 뵙겠습니다. 멋지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잘하지만, 말을 잘하는 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14-5>

이 구절에 대한 물만두님의 댓글에 대한 보답으로 페이퍼를 만들었지요. 물만두 님//구석에서 울고 있는 거시죠... 뚝~ 그치세요(토닥토닥)


로쟈 2007-01-1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커뮤니티가 제가 아는 곳이더군요.^^ '그 분이 남긴 글'에 대해 저대로 보충하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할 때, 그 언어는 다른 무엇보다도 '시어'입니다. 후기 하이데거가 존재사유를 릴케와 횔덜린의 시 주석으로 대체한 이유이기도 하고요(물론 이때 '존재'는 '존재자', '있는 것'들과는 구별되는 '있음' 혹은 있다는 것'입니다. 명사가 아닌 일종의 동명사). 그래서 '휴머니즘'과는 무관한 것이기도 하고요...

마늘빵 2007-01-14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이 첨언하시니 어려워지는군요. -_-a 그냥 닭살멘트로 볼래요 전. ㅎㅎ

승주나무 2007-01-1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 안녕하세요. 하이데거는 서점에서 얼굴만 쳐다봤지, 뭐 들여다본 것은 없습니다. 부끄럽죠~ 그 페이퍼에서는 뭐랄까 그때의 심정도 있었고, 그래서 '휴머니즘' 같은 것을 떠올렸나 봐요. 닭살멘트도 좋구요.
아프 님//잘 배워두세요. 결혼하면 이렇게 하는 거에요. 알겠죠?^^

마늘빵 2007-01-1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