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기형도의 시와 시작메모가 생각났다. 「밤눈」이라는 시였는데, 현재 나의 상황과 감정을 잘 표현해주는 듯했다. 그래서 생각이 났나 보다.

거리에서 시 쓰기

제50차 촛불문화제다.
이곳에 몇 번째 걸음인지 헤아리기 힘들어졌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고, 이것을 인터넷에 신속하게 올렸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들뜬 상태'였다는 뜻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분노했고, 갈망했고, 불안했고, 애가 바싹 탔지만 나의 글에는 그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이러한 열망을 번번히 묵살했던 것이다. 이명박이 국민들의 열망을 묵살했던 것처럼.

이 '묵살'은 오랫동안 풀지 못한 묵은때와 같은데, 앞선 2번의 선거 때도 나는 나에게 투표하지 않고, 나보다 강하고 독한 자들에게 권력을 허락했다.
김현진이라는 칼럼니스트는 내 마음 속에 이명박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시사IN 40호 "'우리 안의 이명박'부터 몰아내자") 사실 나는 좀더 좋은 장면을 담기 위해서 고성능 카메라를 원했고 이를 사람들에게 빨리 알려야 한다는 마음에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컴퓨터를 더럽혔다. 무엇보다 나는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펜과 종이 한 장, 시집 한 권만 들고 거리로 나갔다. 기형도의 시집이다. 요절한 젊은 시인 기형도는 '밤눈'이라는 시를 쓰면서 '시작메모'를 남겼는데, 메모에는 거리에서 시를 쓰는 것이 고통이라고 썼다. 이것은 정제된 시적 감수성과 난폭한 거리의 소음이 부조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고통만 안겨줄 뿐인 거리에서 계속 머물러 시를 썼을까? 그의 메모가 지금의 상황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전문을 인용한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으로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밤눈」은 그 즈음 씌어졌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삶과 존재에 지칠 때 그 지친 것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비유는 자연(自然)이라고.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앚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밤눈」을 쓰고 나서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 「밤눈」의 시작메모 전문, 기형도전집 333쪽



나의 옹졸한 수백 개의 문장은 한 시민이 길바닥에 흘린 한덩어리의 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경찰이 던진 벽돌은 선량한 가게의 간판을 찢고 무고한 시민에게 중상을 입혔다. 돌을 맞아 피를 흘린 시민은 급히 후송되었다.


부조화 선언

시인처럼 나도 부조화를 자청하려고 한다. 시민들이 목청껏 요구사항을 외칠 때 나는 그 외침들을 듣기 위해 침묵할 것이고, 촛불과 외침이 허공과 주위를 가득 매울 때 나는 모든 신경을 작은 종이 한면에 쏟아넣으려고 한다. 거리에서 나는 예외적인 인물이자 잉여인간이 되었다. 나의 급조된 글, 남에게 의지하려는 나약한 성정, 그리고 이를 통해 회피하려는 나의 유약함을 모두 털어내고 '부조화'라는 깃발을 든 이유는 거리에 서 있는 사람이 '나'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가 아닌 나'는 급조된 자기배반으로 치달을 수 있고, 맹자의 무서운 예견과 만날 수 있다. 맹자는 무서운 소리를 한다. 만약 이명박이 너를 소멸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먼저 스스로를 버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밤눈」이라는 짧은 시를 읽으며 나는 거리의 시민들이 밤눈과 닮았다는 생각을 헀다. 이 시는 도시에 내리는 위태로운 눈을 시인이 포착해서 쓴 글이다.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 「밤눈」 전문, 기형도전집 91쪽

몇 번이나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밤눈의 온도, 죽음도 다가가지 못하는 온도를 품은 생명은 먼지 크기의 극히 사소한 얼음알갱이일 뿐이며 금세 녹고 말겠지만, 쫓겨나면서도 자꾸 허공을 향해 춤을 추고 빛을 반사하는 격정을 시인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지 상상해 보았다. 그래서 나도 거리에서 시를 쓰기로 했다. 나는 거리의 촛불들과 부조화를 선언한다.


큰무덤

부덤보다 차가운 길바닥에 매달려 있던
촛불의 주인이 사라졌다.
그가 죽었다
새로운 촛불의 주인이 나타나 또다시
곤봉과 방패에 살해됐을 때도
사람들은 자꾸 나타나 기꺼이 죽었다
내가 기꺼이 죽을 테니
촛불을 더 달라고 성화다

무덤에는 사연이 많다.
더러는 너와 몸을 섞었던
치욕스러운 겨울밤을 잊고 싶어
죽음을 자청하기도 했고
물론 그보다 사소한 죽음도 있었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는
그를 기억하기 위한 무덤이 하나씩 세워졌는데
금세 사연 많은 큰 무덤이 만들어졌다

큰무덤 위에 누가 초를 꽂았다
촛불에도 사연이 많다
불나방처럼 촛불을 품에 안으려다 날개가 다 타버렸다
사람들이 촛불 앞에서 쓰러질 때마다
빛은 사연을 더해 갔다.
만 가지 사연을 가지고 애타게 타고 있는 촛불이
곧 꺼질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에서 촛불의 내력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민들이 인간의 띠를 이루어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날랐다. 내게는 그것이 큰무덤처럼 보였다. 모래 알갱이 하나마다 남다른 사연을 머금은 큰 무덤. 거기에 촛불 하나를 올려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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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27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무겁습니다~~~ ㅜㅜ
 

조중동 불매운동보다 신문광고관습 건드려야


신문업계에서 ‘원턴(one-turn)’ 방식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다. 조중동에서 광고를 시작해 다른 신문으로 흘러가는 구조인데, 현재와 같이 조중동에 대한 직접적인 광고주 압박운동은 분명히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신문광고구조 자체를 건드리기에는 미흡하다.
미디어 오늘은 조선 중앙 동아의 최근 광고매출은 예년의 50% 미만으로 떨어졌다는 광고업자들의 전언을 인용했다. 그리고 경향신문의 광고담당자와 직접 통화해 확인한 결과 조중동만큼은 아니지만, 40% 정도 광고매출이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신문광고에 대해서 점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광고주들이 촛불시류에 편승한 영향도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불매운동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촛불문화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신문광고가 예년에 비해 5∼10% 가량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촛불로 인한 광고타격 수치는 더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인터넷 카페 등이 주도하는 '조중동 광고주 압박운동'은 핵심을 잘 짚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캠페인이 지속가능한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광고주 압박운동 + 광고주 격려운동!


한국기자협회보는 6월 18일자 보도에서 한 가지 새로운 현상에 주목했다. 한겨레나 경향에 있어 광고주 압박 운동으로 제약회사나 외국계 기업들이 이례적으로 광고를 의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겨레 광고국 관계자는 “20년간 한번도 광고를 하지 않았던 기업이 요즘 광고를 의뢰하기도 한다”며 “이런 점들은 광고압박 운동으로 나타난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것은 현재 진행중인 신문광고 캠페인에 한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신문광고란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돼 그것이 실적으로 나타날 때 신뢰감이 생긴다.
이 시점에서 ‘원턴(one-turn)’이라는 신문업계의 관습이 왜 생겼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조중동이 예뻐서가 아니라

돈이 되기 때문이다. 즉 조중동 찍고 경향,한겨레 등으로 내려가는 모델이 나름대로 상품판매효과가 검증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향, 한겨레에 광고를 실었더니 많이 알려지고 판매에 도움이 된다면 광고주는 ‘원턴(one-turn)’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광고주 압박 운동으로 가장 이익을 본 것은 조중동도 아니고 경향, 한겨레도 아니고 광고주다.
“경제여건이 좋지 않아 기업들이 광고비를 줄이려던 상황이었는데 네티즌들이 명분을 만들어 준 셈”이라며 “기업 입장에서는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이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라고 한 조중동이 아닌 신문광고국의 책임자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광고주 좋은 일만 시킨 셈이다.
그렇다고 조중동 광고주 압박 운동을 그만두라는 주장은 아니다. 경향, 한겨레 광고주를 격려하고 상품을 알리는 캠페인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경향, 한겨레에 광고를 실은 기업을 널리 알리고 상품을 구매하는 흐름을 만들어간다면 경향, 한겨레는 진정한 '풍선 효과'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중동에 광고를 선호하는 경쟁업체의 광고가 경향, 한겨레에 실렸다면 이를 격려하는 방법으로 경쟁기업을 긴장시킬 수 있다. 만약 광고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매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증명된다면 신문광고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여론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정론매체가 더 이상 권력과 자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국민들이 듣고 싶은 목소리를 힘있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고착화된 언론사 위계질서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 언론사 지형 자체가 재편될 계기까지 마련할 수 있다.


네거티브 캠페인만으로는 언론소비자운동 완성할 수 없어

나는 시사저널 사태 당시 기자들을 지원하는 독자모임(옛 시사모)에 깊이 관여한 적이 있다. 시사모의 언론소비자운동은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를 적절히 조합시켰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다. 사태 초기에는 사장의 공식 사과나 편집국의 편집권 존중 등의 문제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기자들이 시사저널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진품시사저널 예약운동'을 펼쳐 기자들이 복귀하고 편집권을 인정받았을 때 시사저널을 구독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이는 물론 당시의 시사저널을 '짝퉁'으로, 새로운 시사저널을 '진품'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당시 시사저널 사측은 시사모를 영업방해 혐의로 고소하였고, 운영위원들은 검찰에 조사까지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시사모의 언론소비자운동 자체가 위축될 수 있는 위기를 맞은 것이다. 비록 무혐의로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네거티브 캠페인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소비자운동은 철저히 포지티브 중심으로 갔다. 당시는 시사IN이 창간을 선언한 시점이었다. 시사모는 창간호와 독자들이 직접 만든 호외판을 들고 광화문으로 제주도로 강원도로 돌아다니며 '자발적 구독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10,000부의 홍보책자와 기념품을 제작해 6~7,000부 정도를 전국에 배포하였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이를 높이 평가해 제9회 민주시민언론상 본상을 수여했다.  

시사IN은 독자들의 이러한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현재 든실한 언론사로 거듭났으며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을 최초로 싣는 등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진행할 수 있는 포지티브 캠페인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경향, 한겨레 등 정론매체에 광고를 싣는 기업들을 널리 알려주고 매출에 도움을 줌으로써 정론매체의 광고효과를 기업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둘째, 독자나 블로그, 카페 등 단체 명의로 의견광고를 지속적으로 싣는 것이다. 경향신문 광고담당자의 말과 같이 광고매출에 수치상으로 큰 도움은 될 수 없지만, 상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언론소비자주권운동이 곧 불매운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네거티브와 포지티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에야 비로소 언론소비자운동이 완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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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승주나무님, 경향신문 기사에 났어요.^^
    from 파피루스 2008-06-27 18:38 
    아침부터 알라딘에 출근(?)하느라, 학교갈 준비하며 신문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11면 대문짝만한 기사 말미에 '승주나무'님 이름이 올랐다. 이거 이거~~ 스캔받아 올려줄까? 생각하며 시간을 봤더니 12시 30분이라 다시 컴을 켜고 스캔받기엔 시간이 촉박했다......그래서 업무마치고 돌아와서 스캔받아 올린다. 승주나무님 서재에 올라온 글과 같은 내용이라 먼댓글로 연결했다. 승주나무님 이름을 경향신문에서 세번째
 
 
순오기 2008-06-27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면 되겠군요~
조중동엔 타격을 주고, 경향이나 한겨레 등에 직접 힘을 줄 수 있는 소비자 운동으로!!

멜기세덱 2008-06-2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추카.....신문에도 나셨넹....ㅋㅋㅋㅋ

승주나무 2008-06-27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 어디에..오마이인가 ㅋ

멜기세덱 2008-06-27 10:48   좋아요 0 | URL
2008년 6월 27일자 경향신문 11면 "광고주 압박서 '언론 자각' 운동으로"(강병한.임현주 기자) 중 마지막 문단,
=> 네티즌 '승주나무'는 "정론 매체에 광고를 싣는 기업들도 널리 알려주고 매출에 도움을 줘 (언론 소비자들이) 광고효과를 적극 증명해줘야 한다"며 "네거티브 캠페인만으로는 언론 소비자운동을 완성할 수 없고 광고주 압박과 격려가 적절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밝혔다.

승주나무 2008-06-27 11:09   좋아요 0 | URL
허허..이제야 봤네~
요즘 10면 이상은 퇴근 후에 봐서..
고마우이^^

순오기 2008-06-27 18:21   좋아요 0 | URL
제가 요거 스캔받아 올립니다. 제 서재에 올리고 먼댓글로 연결할게요.^^
저도 요 기사 보면서 빙그레~~~ 수고하셨어요.
사계절출판사 응원하느라 중학교독서회와 마을독서회 7,8월 토론도서로 사계절 책 선정했고요, 오늘 퇴근길엔 삼양라면도 사 왔어요.^^
 

벌써 이달만 의견광고에 4회째 참여했습니다.
명색이 선동하는 입장에서 뜻 있는 분들에게 선동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향신문 6월25일자 2면 경향게시판 의견광고

1. 정론매체의 위기

오늘자(6월25일) 경향신문에 다음 블로거기자들이 의견광고를 게재했습니다.
보신 분도 있을 듯합니다.
No Profit, No Independence는 안드레아스 휘텀 스미스(Andreas Whittam Smith·70)이라는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창립자가 시사IN 창간특집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경향, 한겨레 등은 정부광고 내려가고, 삼성광고 마르고, 대기업 광고는 줄어들고
요즘 고통이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싫지만,
이들 정론매체가 정부와 대기업의 압박에 굴복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경향신문의 광고부장과 통화했는데, 대기업의 광고가 끊겨서 의견광고 포함 광고매출이 40% 줄었다고 합니다. 조중동만 피해가는 게 아니라 경향, 한겨레 할 것 없이 언론사 전체가 된서리를 맞는 것이지요.

2. 촛불의 2막은 문화로 풀어야

이명박 대통령이 립서비스를 없던 일로 하고 국가정체성 운운하며 촛불을 무력으로 꺾으려 하고 있습니다.
맹자에 보면 마음으로 복종(심복)하지 않으면
힘이 떨어졌을 때 뒤집어진다고 했습니다.
고엽제전우회, 검경, 정부가 한마음으로 촛불을 끄기에 혈안이 돼 있어서
사태가 장기적으로 가리라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 가기 위해서는 동력이 있어야 하는데
직접 행동은 물리량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꺾이지 않을 수 없겠죠.
하지만 '문화'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잊어버리지 않고 문화적인 힘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봅니다.
'책'이라는 매체를 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예스24가 의견광고 제작이 끝나 경향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면
알라딘, 예스24를 축으로 독서 커뮤니티의 동참을 촉구하면 어떨까 합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의견을 보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각 분야별로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의견광고에 싣는 겁니다.
청소년이 읽을 책에서부터 광우병, 대운하,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등 핵심 키워드를 선별하고
거기에 들어갈 책과 책소개를 넣어서 '책 캠페인'를 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예) 초중등 추천도서 : <10대와 통하는 정치학>(철수와영희)
'민주주의는 피로 만들어진 나무다'라는 말처럼 촛불을 들고 힘들게 거리에 나가 싸워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책

제태크나 자기계발서, 외국어 등 현재 베스트셀러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친화적인 책을 소비하다 보니 비판적 사고를 잃고 대운하에 표를 준 것을 생각할 때, 이번에야말로 책읽기 캠페인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3. 3대 언론사 의견광고 비용조사와 기타등등

3대 언론사가 바뀐 거 아시죠.
조중동은 3대 찌라시로 강등됐고,
경향, 한겨레, 시사인이 3대 언론사로 불릴 만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알라딘에서 경향에 의견광고를 냈고, 예스24도 경향에 의견광고를 낼 예정이므로
광고게재의 순서는 한겨레-시사인-경향으로 했으면 어떨까 해서 조사를 해봤습니다.

한겨레는 5면 이하 하단 통으로 150만원 가량 비용이 들 것으로 예측됩니다.
인문사회과학 출판인들의 모임(이하 '인사회')에서 한겨레 하단통 광고를 진행했는데 실무자가 말해줬습니다. 참고로 출판광고는 단가를 다소 저렴하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시사IN은 판매팀장을 협박해서 100만원까지 할 수 있다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경향신문은 광고부장과 직접 통화했는데 5~10면 하단 통으로 150만원까지 할 수 있습니다. 담당자에게 취지를 설명했더니 괜찮은 기획이라며 돈이 모자라도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현재 알라딘이 50만원 좀 넘게 남았고 예스24와 다른 커뮤니티, 그리고 청소년출판협의회 관계자도 적극 참여하겠다고 했고, 인사회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번 캠페인이 독자와 출판사의 아름다운 연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의견 바랍니다.

찌리릿 님께 조르러 가기 => 클릭

덧 : 6월 19일자 경향신문은 찌리릿 님을 포함해 총 10분께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20부를 찌리릿 님께 보냈으니, 혹 원하시는 분은 그분 블로그에 가서 요청하시면 책과 함께 공짜로 배달해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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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 2008-06-2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생들 많으신데 죄송합니다만, 그냥 지나다니는 불청객이 소견 남깁니다.
촛불이 점점 사그라 들면서 오늘 급기야 미친소 '고시'를 한다는군요.
제가 알라딘 마을을 얼마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혹시나 '의견광고'라는 것이 알라디너들의 촛불집회 불참에 대한 자기위안 혹은 변명(심리적-무의식적-내면적) 수단으로 작용하지는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가끔 들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의 글을 보면 상당 수가 진보적 성향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듯 합니다만, 만약에 상기한 제 의구심이 조금이라도 맞다면, 이건 진보가 아니라 먹물의 본성이자 책의 사치가 아닌가 하는 좀 과도한 평도 곁들이고 싶군요. 무슨 악의가 있어서 뱉는 말이 아니라, 서로가 '촛불 살리기'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여기서도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남기는 주제 넘는 발언이었습니다. 심사에 불편을 드렸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참견이 거북스러우시면 바로 삭제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승주나무 2008-06-25 16:18   좋아요 0 | URL
먹물 님의 진지한 의견을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존중합니다.
'자기만족'이라는 말을 저도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63개의 자기만족 혹은 자기위안이라고 생각하며, 단연코 의견광고만으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제 개인적인 관점으로 볼 때 아프락사스 님과 여러 번 촛불집회에 참여하였고 마음을 항상 광화문에 두면서 다니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거리에서 비애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촛불집회 나오는 것만으로 뭔가를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오히려 나는 자기위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연행을 당하면 자기위안이 좀 더 될까요? 아닙니다. 저는 각자 자신의 상황에서 그것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딘은 저에게 소중한 커뮤니티이기 때문에 강요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 커뮤니티이므로 '책'이라는 것으로 할 수 있는 바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앞서의 페이퍼에도 글을 남겼듯 촛불은 수백만개로 분화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물 님이 보신 것은 촛불 살리기가 사라지는 세태가 아니라, 촛불을 오히려 살리려는 움직임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촛불을 여러 개의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는데, 알라딘 커뮤니티에서는 '책'으로 변환하려는 것뿐입니다. 거리에서의 물리적인 촛불은 계속 타오를 것이며, 우리들의 논의는 촛불의 크기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말씀드립니다.
먹물 님의 주장은 충분히 문제제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거북스럽지 않습니다. 삭제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님과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시기 때문이며, 의견을 공유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먹물 2008-06-25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각자 자신의 상황에서 그것을 해나가야 한다", 여기서의'각자'라는 말은 바로 도덕성의 문제로 직결되겠지요. 그 도덕성은 심리적-내적-개인적 문제이므로, 그것이 정치적-공적영역으로의 확장에는 무척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아시겠지만 이것은 揶愉임) 개연성의 관용이 있을테고요. 저는 지금이 그렇게 한가한 때는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적의 반격이 밀물처럼 닥쳐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 밀물에 대항할 힘은 사적 도덕성에서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 '함께'의 길목에서 찾아야 하리라 여겨지는군요. 한마디로, 의견광고에 입금만 하고는 어떤 알 수 없는 의무에서 해방되어 회식이나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 진정 진보라면, 그 회식 갈 동료를 데리고 광장으로 달려가려는 공적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얘기 입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분화된 촛불의 의미와 효능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신뢰는 안 가지만, 저도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08-06-25 23:11   좋아요 0 | URL
제가 한말씀 드려도 될지요.
일단 저는 먼저 의견광고가 일종의 자기위안이 될수도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실제로 그런면이 없지 않고요. 뭐 저부터도 전혀 아니라고 말씀은 못드리겠습니다. 저 역시 개인적인 상황으로 인해 촛불집회에 자주 나가지는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인터넷 공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이라도 찾게 됩니다. 그것이 양심의 가책을 얼마간은 덜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먹물님께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 의견광고나 하는 것이 자기 위안이 되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님께서는 혹시 이 공간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여기는 그저 책을 통한 놀이터입니다. 어떤 정치적 공동체도 아니며 어떠한 정치적 입장의 통일도 해본 적이 없는 공간입니다. 그럴수도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현재의 사태에 대한 알라디너들의 인식방법이나 대응방법은 천차만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매일 촛불집회에 나가시는 분부터 이 사태를 그저 조용히 관망하시는 분까지, 또 일부는 촛불집회에 대해 비판적인 분도 계시겠지요. 따라서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의견광고라든지 하는 것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견해들의 합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집회라고는 구경하기도 힘든 지방의 분들도 계시고, 어린 아이들에 매어있는 아줌마들도 있으며(유모차부대도 아무때나 나갈 수 있는건 아닐겁니다. 저만해도 지난주 내내 감기와 중이염을 달고 있는 애와 머리를 찍어 몇바늘을 꿰맨 아이를 데리고 촛불집회를 나갈 엄두는 낼 수 없었으니까요), 촛불집회라고 하는 공간 자체를 생소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 분들이 그런 상황에서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라도 찾아내고 참여하는 것이 왜 약간의 자기만족감을 주면 안되는 것일까요?

지금 촛불집회의 열기가 약간은 가라앉는 듯도 하고 거기다가 저 무식한 정부와 보수진영의 반격이 장난아니라는 위기상황이 님에게 이런 글을 남기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조금은 과도한 비판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많은 촛불들의 생각이 천차만별이듯 이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률적으로 통일적인 행동이나 지침을 강요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그 자유로움과 그에 대한 인정이 이곳의 사람들을 더 나아가게 하고 더 올바른 삶과 사회를 찾게 하는 출발점이라고도 저는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08-06-26 00:49   좋아요 0 | URL
먹물님, 이 페이퍼는 지.금. 작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내려는 행.동.의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님의 의견은 이해하고 부분적으로 깊이 공감하나, 왠지 순수함과 열망이 훼방받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 일에 참여하시는 분들 모두 마음에 뜨거운 촛불 밝히고 오시는 줄 압니다. 그것들이 모여 더 뜨겁게 타오르길 원할 뿐입니다. ... 님의 글을 읽고 저는 오히려 이 곳의 불길이 당황하고 주춤거리고 사그라질까 염려됩니다. 촛불집회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걱정과 초조함과 분노가 들끓고 있는 자들도 저는 촛불을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입금만하고는 의무에서 해방되어 회식이나 따라다닐거라뇨. 지나치십니다.무력감에 머리가 돌 것 같고 미치고 팔딱뛸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낮에 님의 글 읽고 왠지 속상하여 나갔다가 다시 왔습니다. 이 페이퍼가 더 이상 논쟁으로 소모되지 않길 바랍니다. 말이 거칠어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승주나무 2008-06-26 01:18   좋아요 0 | URL
누구나 '각자'로 들어가면 마땅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인자도 자기 스스로는 살인의 마땅한 이유가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각자는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각자'라기보다는 촛불이 타올랐으니 '각자' 응신을 보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물 님의 글을 보면서 현 정부와 단판에 끝을 보려는 성급함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 역시 언론과 책의 본질적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은 빠르고 책은 느리지만, 책은 오래 갑니다. 책의 가능성을 믿지만, 아직 우리들의 뜻이 책이라는 형식으로 제대로 표현됐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이명박이 갖은 살수차와 각목, 진압봉으로 촛불을 모조리 꺼버린다고 하더라도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바람돌이 님의 댓글에는 제가 더 보탤 말도 뺄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진지한 댓글 감사합니다.

FTA반대마음행로 님^^ 말로 하는 것, 말을 하지 않는 것,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것이 모두 행동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훼방받았다고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련이 없다면 허물을 벗기도 어렵겠죠~~
님의 열정에 존경심을 표합니다~

순오기 2008-06-2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잖아도 아침에 요걸 보고 빙그레 웃었지요~
여러모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승주나무 2008-06-26 01:18   좋아요 0 | URL
순오기 님~ 감사합니다. 웨닏양 님이 순오기 님 칭찬을 많이 하시더라구요^^
좋은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Koni 2008-06-25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저도 참여하고 싶어요.
저에게도 필요한 기획입니다... 요즘 책을 안 읽었더니, 어떤 책이 좋을까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승주나무 2008-06-26 01:19   좋아요 0 | URL
냐오 님~ 제 의견에 동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라딘이라고 해서 꼭 책으로 풀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저는 지금이야말로 '책'이라는 것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순오기 2008-06-26 08:40   좋아요 0 | URL
책으로 소통하는 것, 책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중요합니다.
제가 독서회나 학교 아이들에게 소리없이 다가가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독서회는 주부들이라 먹을거리와 운하 문제를 짚어주는 책을 선정해 토론했는데, 백마디의 말이 필요없습니다~ 읽으면 저절로 깨닫지요.
좋은 제안에 동의하고 미약하나마 지금처럼 주욱~~~` 계속할 것입니다.
힘내세요!

연두부 2008-06-2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됐던 우리 광고를 보고 사람들이 힘내지 않을까요....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좀 알려주세요...

승주나무 2008-06-26 01:20   좋아요 0 | URL
연두부 님~ 반갑습니다. 우리의 의견광고를 보고 뿌듯함을 느끼거나 아직 희망이 있구나 하고 느낀 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구체적인 의견은 논의가 좀더 구체화되고 참여가 이루어질 때 다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비로그인 2008-06-2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여합니다. 또 수고하시네요.

승주나무 2008-06-26 01: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작했는데, 끝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먹물 2008-06-26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람돌이님/ 저도 의견광고가 나쁘다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훌륭한 사회적 분위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건과 상황이 불충분해서 촛불집회에 직접 동참할 수 없는 분들도 당연히 많으리라는 것도 잘 압니다. 저 부터도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분들을 대상으로 제가 감히 '자기위안'이라는 부정적 어휘를 남발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저의 덜 분명한 글에 문제가 있었다고 자책합니다(다시 제 글을 읽어보니 그렇네요. 마음이 너무 급했었나 봅니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의견광고가 전혀 자기위안이 아니라 오히려 최선의 선택일 수도 당연히 있겠지요. 제가 발언의 대상으로 삼았던 분들은, 단지, 여건과 상황이 허락함에도 불구하고 '의견광고'가 집회 참여에 소홀하거나 방관해도 될 대체재 혹은 면죄부로 역할할 가능성이 은연 중에 있을 수 있는 분들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줄어든 촛불의 힘이 결국은 '고시' 강행을 몰고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어떤 시기적 절박함에서 괜히 끼어든 참견이었습니다. 심사에 불편을 끼쳐드려서 무척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비로그인 2008-06-27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다혈질이 들통났네요.^^ 개인적인 의견에 격한 반응을 보여 여러분들과 먹물님께 죄송스럽습니다.(꾸벅)

일이 잘 진행되길 바랍니다.



 

다음 블로거들도 지금 의견광고 행렬에 가세하고 있어요. 경향신문이 날마다 기다려지는 이유^^

블로거 의견광고 봇물


경향신문, 한겨레 등 정론매체에 대한 의견광고 경쟁이 시작됐다.
이제까지 개인이나 단체 등의 의견광고는 많았지만, 블로거들의 의견광고는 많지 않았다는 점이 의아했다. 그런데 책 커뮤니티인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블로거들이 먼저 일을 냈다. 6월 19일 경향신문 2면에 알라딘 누리꾼 63명의 명의로 된 의견광고가 올라갔다.



6월 16일 경향신문 2면에 게재된 63명의 알라딘 누리꾼 명의로 된 의견광고. 재정과 예산을 분담한 누리꾼을 중심으로 일 주일 간의 입금과 문안작업을 통해 광고를 싣게 되었다.

이에 경쟁 커뮤니티인 예스24 블로거들이 자극을 받아 의견광고 작업에 돌입했다. 예스24의 의견광고는 아예 입금에서 문안, 제작,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A~Z의 모든 작업을 도맡아서 하기로 했다. 즉 <광고제작팀><입금확인팀>, <광고완성팀>, <신청접수팀>으로 작업을 분류하고 진행상황을 페어퍼에 계속 올려놓으면 블로거들이 댓글을 통해 의견을 조율해가는 구조다. 현재 약 40명에 가까운 블로거가 입금을 완료했으며 시안 작업에 열중 중이다.

<광고제작팀>을 맡고 있는 아아디 'operion'에 의하면 의견광고는 (1) 카피와 이미지 중심으로 갈지, (2) 헤드카피와 텍스트 중심으로 갈지 논의중이라고 한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1)안은 시인성면에서는 뛰어나지만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고, (2)의 경우 시인성은 포기하는 대신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겠지요."라고 설명했다. <신청접수팀>을 맡고 있으며 이번 의견광고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아이디 'propharm'에 따르면 예스24 블로거들만의 결과물을 낸 후에 알라딘 등 다른 독서 커뮤니티와의 공동작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알라딘 누리꾼들은 72만6천원으로 1차 광고비를 집행하고도 60만원 가량이 남아 2차 광고를 원하고 있는 상황이다. 2차 광고는 한겨례나 시사IN이 될 확률이 많다.


▲ 한겨레 2008년 2월 11일 10면 / 신문 실제 촬영 (사진제공 : 커서님)

블로거들 중에는 이미 의견광고를 낸 팀이 있고, 지금 한창 의견광고 작업을 하고 있는 팀들도 있다. 그 중에서 먼저 의견광고를 냈던 아이디 '미디어한글로'는 "신문 1면 광고처럼 엄청난 금액의 광고는 개인이 내지 못하지만, 이런 운동이 일파만파로 번졌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다른 팀도 블로거 팀도 의견광고 작업이 한창이다. 블로거기자인 아이디 'peter153'는 충청신문 기자이며 14년째 언론사 생활을 하고 있다고 소개하며 의견광고를 독려했다. 하지만 유사 사기 사례가 적지 않아 몇몇 블로거들은 그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평소 블로거에 이따금씩 들려서 글을 올리다 보니까 촛불집회에 관한 글들은 아주 많이 등장하는데, 신문에 다음블로거님들 이름으로 나오는 의견광고는 없더군요"라고 아쉬워했다. 21일 현재 9명이 51만원의 성금을 보내주었다.


미디어 소비자 운동의 양대 축

회원수 2만5천여 명인 조중동폐간 국민캠페인은 매일같이 일명 '오늘의 숙제'라는 게시물을 올린다. 거기에는 조중동에 광고를 낸 기업들의 정보와 광고담당자 전화번호가 빠짐없이 올라가 있다. 그리고 '오늘의 숙제'가 올라갈 때마다 댓글이 수백 개 씩 달린다. 게시물이 올라가면 다음 아고라에 '펌글'이 올라가고 이것이 메인으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확산의 확산을 거듭한다. 때문에 조중동에서는 광고매출액이 현저히 줄었다.'미디어오늘'에 따르면 누리꾼들이 광고주 압박 운동을 본격화한 이후 지난 9일(월요일자)부터 17일(화요일자)까지 8일 동안 발행된 지면수를 살펴보면, 조선의 경우 하루 평균 49면을 발행하는 데 그쳐 16면이 줄었고, 중앙은 하루 평균 46면(10면 감소), 동아는 하루 평균 44면(10면 감소)을 발행하는 데 그쳐 10면 이상의 지면이 줄었다.
때문에 조중동은 광고주 압박 운동에 대해서 민형사상 대응을 계획하는 한편 검찰과 한나라당에서도 광고주 압박 운동을 엄격히 단속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조중동이 광고매출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불똥이 경향과 한겨레 등에게도 옮겨붙고 있다. 대기업의 광고주들이 조중동의 복수를 두려워해 경향과 한겨레에도 광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광고주 압박 운동에 대해서 찬반 논쟁이 매우 뜨겁다.
광고주 압박 운동이 네거티브 캠페인이라면 소액 광고주들의 의견광고 물결은 포지티브 캠페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경향신문의 경우 6월 보름 동안만(6/2~6/14일) 총 24면(전면광고 1건)의 하단광고에 독자들의 의견이 쇄도했으며 단독으로 하단광고를 게재한 단체는 14개에 달한다.

하지만 대체로 카페나 대학교 동문, 개인 등에 국한되며 누리꾼이 광고의 주체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누리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아가는 '온오프 일치'와는 다른 현상이라 아쉬움을 더해 왔다. 그러다가 '누리꾼은 자기 주장만 강하고 실제 지갑은 열려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블로거들의 의견광고와 알라딘 서재지기들의 의견광고 행렬에 이어 예스24와 타 블로거들의 의견광고 행렬이 이제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2008년은 미디어 소비자운동의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다. 안티 조선일보 운동이 시작된 지 매우 오래 됐지만, 조중동이 위기감을 느낄 만한 파괴력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뿐만 아니라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캠페인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고, 오프라인과 온라인 커뮤니티 할 것 없이 의견광고의 행렬이 계속되고 있다. 진실한 언론에 대한 독자들의 열망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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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6-2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견광고로 가장 하고픈 건, 조선일보에 "조선일보 폐간하라"라고 아무 배경없이 내보내는거에요. 큭큭.

승주나무 2008-06-24 00:27   좋아요 0 | URL
그건 아마 가장 비쌀 듯~~

몽당연필 2008-06-22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승주나무 2008-06-24 00:28   좋아요 0 | URL
^^

2008-06-22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06-24 00:28   좋아요 0 | URL
네~ 어쩐지 좀 허전하더라니깐요 ^^

순오기 2008-06-23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먼저 하는게 중요해요. 알라딘 아자아자!
'조선일보 폐간하라!'최고에요~~~ㅋㅋㅋ

승주나무 2008-06-24 00:28   좋아요 0 | URL
서재지기는 선빵을 중요시합니다. ㅋㅋ
 

기득권 보수세력의 예봉을 꺾은 촛불

답답하다. 촛불국면이 좀처럼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촛불 수십 개가 100만 개의 거대한 행렬을 만든 것은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과 세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경찰의 과잉 대응이 공헌한 바가 있었지만, 촛불은 구린내 나는 세태를 비틀며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색깔을 달리했다. 이 점이 주효했다. 이를 전쟁에 비유하자면 일단 예봉을 꺾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득권 세력이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를 거두어 보수의 전성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다들 예측하였고, 이에 맞서는 세력들은 연이은 패배로 좌절하고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겨룰 만한 상대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중고등학생들이 이명박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시민사회는 촛불문화제를 통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자체적으로 불상사를 예비하기 위한 준비까지 갖추어 대오를 유지했다. 비폭력이라는 명분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선봉에서 적의 예봉을 꺾었다고 해서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는 정부나 기득권 세력에 비해서 세(勢)가 약하기 때문에 그들이 진열을 갖추게 된다면 의외로 싱겁게 전쟁이 끝날 수도 있다. 이미 몇몇 부분에서 이러한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보수 단체들은 촛불시위를 막기 위해서 맞불 시위를 열거나 폭력행사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경찰은 거대한 컨테이너로 시민들의 '물리력'을 사전에 봉쇄했다.

이 시점에서 두 개의 전쟁 역사를 돌아보면서 촛불문화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촛불문화제는 상대가 명확한 투쟁이므로, 전쟁의 관점에서 쓴다.

실패한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군과 아테네 연합군은 모두 상대에 비해서 현저하게 세력이 적은 '약자'였다. 이에 맞서는 상대는 관군과 페르시아 대군이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실패했고, 아테네 연합군은 성공했다. 전쟁의 국면을 살펴보면 그 이유는 명확하다.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동학은 서학에 맞선다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의 수탈이었다.
고부는 전라도에서도 으뜸가는 곡창 지대였는데 그 때문에 수탈과 폭정이 잦았다. 군수 조병갑(1844-1911)의 폭정이 심해지자, 1894년 1월에 전봉준(1854년-1895년)과 수백 명의 농민들은 고부 관아로 진격하였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고,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을 처단하였다. 하지만 농민군이 사후 대책을 세워 놓지 않아 우물쭈물대는 사이에 관은 회유책을 쓰는 척하면서 관련자들을 혹독히 탄압하는 꼼수를 사용하였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관군에 맞섰다. 농민군은 관의 수탈에 고통을 겪고 있는 민심을 기반으로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데 이어 장성 황룡촌 승리, 전주성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내달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발전된 무기로 포격을 하는 한편, 봉기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을 징계하였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혀 봉기의 명분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해 청군이 이미 당도했고 일본의 군대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였다. 동학군은 이런 상황에 따라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끝난 전투였다.
동학 농민군은 탄압과 수탈에 대한 대항이라는 수세적인 탄생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엄청난 민심의 지지를 기반으로 일어난 이후에도 수세적 성격을 극복하지 못했다. 명분싸움에서 진 것이 첫 번째 패인이다. 동학 농민군이 수탈의 구조적인 모순을 포착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패인은 상대의 움직임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점이다. 오히려 관군이 농민군의 움직임을 모두 간파하고 복합적인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성공한 '페르시아 전쟁'


로마시대의 그리스 역사가이자, 신관인 플루타르코스가 비교영웅전의 형식으로 쓴 책이다. 1권의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략을 예측해 주도면밀하게 대응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BC 492경~449경)을 보면 그리스 반도의 도시국가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페르시아는 지금으로 따지면 미국이나 중국에 비할 만큼 제국의 면모를 갖춘 국가였다. 이들이 아테네 연합군을 농락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워 보였다. 하지만 2차례에 걸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모두 패하고 만다. 첫 번째 패배는 그 유명한 '마라톤 전쟁'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전쟁은 두 번째 전쟁(BC480)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테미스토클레스 편>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연합군의 해군 사령관이었고 그의 상대는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륵세스였다. 1차 페르시아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병력이 그리스로 당도하자 연합국가들은 모골이 송연해 항복할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리스 연합국가는 이권 다툼이 극도에 달아 내전 상황이었다. 이 때 테미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첫 번째 대책은 아테네의 시민들을 모두 피신시켜 본격적인 전시 체제를 갖춘 것이다. 한편 이를 명분으로 아테네 연합군을 설득할 수 있었다. '배 200척으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말은 아직도 유명하다.

"우리의 도시는 그리스에 있는 그 어느 도시보다 더 훌륭하오. 그것은 우리의 배 200척으로 이루어진 도시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 배는 당신 나라를 지켜줄 것이오. 그러나 만일 당신들이 전과 같이 우리를 배반하고 줄행랑을 놓는다면 그리스(그리스는 한 국가가 아니라 반도 내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 식대로 말하면 '동북아'와 비슷한 개념이다 - 글쓴이주) 사람들 중 오로지 아테네 사람들만이 소중한 영토와 자유가 넘치는 도시를 차지할 수 있을 뿐, 당신네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연합국가들은 연합군에서 이탈할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텔레스는 크세륵세스에게 역정보를 흘려 연합군의 이탈을 막고 '배수진'을 칠 수 있었다.

'그리스 군은 곧 후퇴하고자 한다. 충고하건대 그것을 막는 것이 좋으리라. 그들이 지상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해전을 통해 전멸시키도록 하라'

크세륵세스는 당연히 뛸듯이 기뻐하여 각 함대 사령관에게 연합군을 완전포위하라고 지시했고, 연합군은 목숨을 걸고 일전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테미스토텔레스는 협소한 지형을 이용하여 페르시아 대군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고 페르시아 해군은 폭풍우와 게릴라 공격에 시달려 수많은 병력을 잃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테미스토텔레스가 이 때 고안한 세 번째 대책이 전쟁의 성패를 갈랐다. 그는 전쟁이 장기화되면 당연히 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병력이나 모든 조건을 보았을 때 페르시아가 패배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텔레스는 크세륵세스에게 교묘한 심리전을 사용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패배와 좌절을 과도하게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크세륵세스에게 결정적인 밀서를 전달한다.

"그리스 군은 해전에서 이긴 기세를 타고 헬레스폰트로 배를 몰고 가서 거기 있는 부교를 끊어버릴 계획이오. 그러나 테미스토텔레스는 대왕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 사실을 알려드리는 바이니 대왕께서는 속히 그 다리를 건너 대와의 영토로 돌아가시라고 하오. 그 동안 이 사람은 그리스 군 연합함대가 지체하도록 시간을 벌어드리겠소."

이 말을 들은 크세륵세스는 매우 놀라 황급히 후퇴하고 말았다. 아울러 전쟁에서 테미스토텔레스에게 완전히 놀아난 황제가 되고 말았다.

테미스토텔레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강한 상대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낸 점이다. 아테네 국내는 물론 그리스의 연합군을 일치단결시킨 것은 테미스토텔레스의 기지와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전쟁의 국면을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카드와 상대방의 카드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상대방의 카드에 따라서 자신의 카드를 바꿀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약한 것을 강하게 보이기도 하고,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예측할 수 없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전쟁의 가장 중요한 작전이다. 크세륵세스는 테미스토텔레스에게 예측되었기 때문에 패배했고, 테미스토텔레스의 작전은 예측을 불허했기 때문에 승리했다.


물리적인 촛불은 당연히 꺼진다.

촛불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촛불문화제의 국면은 여러 모로 볼 때 동학농민전쟁과 유사하며 그 결말도 이와 같을지 우려된다.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 결과를 명분으로 내세워 '명분싸움'이 벌어진다면 촛불세력은 수세에 몰릴 수 있다. 청군과 일본군의 역할은 고엽제전우회와 뉴라이트연대가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국은 이들에게 집회허가를 내줌으로써 촛불문화제를 '불법시위'로 보이게 하고, 보수 단체가 폭력적으로 대응할수록 당국은 미소를 짓게 된다. 왜냐하면 촛불세력이 흥분해 폭력으로 대응하면 이전투구의 양상 속으로 이들을 가둬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촛불세력은 국민의 지지를 점점 잃어갈 것이다.
세 번째는 장비다. 살수차와 휴대용 소화기, 대형 컨테이너와 수많은 닭장차로 무장한 경찰을 상대하는 촛불세력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일 수밖에 없다. 촛불세력은 이런 불안 요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6월 20일 광화문. 한 보수단체의 회원이 우산에 촛불시위를 반대한다는 피켓을 붙여놓고 계단에 앉아 있다. 옆에는 각목이 놓여 있다. 이것은 '의도된 폭력'이다. 촛불을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빠뜨리려는 낚시질용 몽둥이인 셈이다. 정부는 이들에게 집회를 허락했다.


촛불의 성격을 엄밀히 따져보자. 촛불을 일어나게 한 원인을 따져보면 일단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발이 직접적인 동기였고, 국민들의 지지 역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촛불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수세적인 기반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야당과 학계, 시민단체 등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이유다. 만약 이명박 실정이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 모순을 깨뜨릴 대안이 제시돼야 하며, 이명박 실정에 대한 반발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명박 정부는 포장과 눈속임으로 실정을 감출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반발은 곧 수그러들 것이다. 촛불이 갇힌 프레임이다.
촛불은 비폭력을 무기로 삼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촛불은 물리력이다.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초를 들어야 하고 거리로 나가야 하고, 거리행진을 하면서 차량의 이동을 방해하는 모든 움직임이 물리량이다. 하지만 물리력은 한계가 있다. '물리적인 촛불'에 갇힌다면 촛불은 당연히 꺼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빛깔로 분출돼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해야 촛불이 계속 불붙을 수 있다.
비폭력과 물리력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관건이다. 촛불이 과연 비폭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도 불안하다. 만약 촛불이 고엽제 전우회 같은 단체와 맞서 폭력을 사용한다면 촛불국면은 매우 빠른 속도로 사그러들 것이다.


촛불이 승리해야 하는 이유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는 경향신문, 진보신당 주최로 17일 서울 여의도 진보신당 회의실에서 열린 긴급 시국 대토론회 제2차 ‘촛불집회와 진보정당의 과제’에서 촛불집회로 한국 사회 내의 구조와 제도로서 정치의 보수성이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1990년과 91년의 5월 정국, 97년 총파업, 2000년 촛불정국, 2004년 탄핵정국 등 대규모 운동의 개입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정치의 세계는 계속해서 보수적 독점체제의 지속으로 나타난 것을 주장의 근거다.  “광범한 대중적 참여와 운동의 시기에는 어떤 변화라도 가능할 것 같은 집합적 열망의 분출이 일순간 국면을 휩쓸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은 종결되고 탈동원화와 일상화의 주기로 돌아가 버린다”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싸늘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87년 민주화행쟁 이후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속물화되고 보수화됐는지, 그것도 민주화행쟁을 주도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자신이 386이면서 386을 정말 싫어한다는 우석훈 씨는 <88만원 세대>에서 386을 68세대와 비교해 비판했다.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중략)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68세대들이 공교육 체계를 대학까지 연장시키면서 다음 세대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20살에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반면 우리나라의 386은 학벌주의와 겨에엘리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지금 10대와 20대가 맞게 된 조금 황당한 상황들은 사실 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7~178쪽>

내가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촛불'이 '무덤의 추억'으로 남는 것이다. 우리는 87의 성과를 추억할 뿐, 실패의 폐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시민들이 꿈꾸는 세상과 변화에 대한 희망은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혔는데, 무덤 앞에서 울면서 그 날의 상황을 추억하지만,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2008년에도 신문지상에서 동일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론지들은 촛불을 찬양하며 엄청난 지면을 촛불에게 바치고 있다. 촛불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매우 귀하게 됐다. 100만인 행진이 어떻다는 말인가? 100만인 행진은 그 결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모든 상황이 끝나고 다시 속물화된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도 한때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누볐지' 하는 초라한 추억으로 자위를 하지 않으려면 이번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거리에서 타오른 물리적인 촛불은 반드시 다른 곳으로 옮겨붙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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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2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06-2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혁명의 추억'입니다.
그 자신이 깨져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추억으로 덧씌워졌으니 잘 안 맞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혁명의 추억'이라는 유령이 신문을 돌아다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람시에 대해서는 좀더 알아봐야겠습니다. 요즘 잘 걸리는 이름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