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댓글]'사실'과 '의견' (김훈 : 승주나무)
저는 기본적으로 김훈이 '사실과 의견'을 논했을 때 그것이 이분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훈이 말하는 '사실'이 이분법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견'과 무관한 영역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훈이 말하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적 의견'을 말하기 때문에 '사실'이라는 본질과도 다릅니다. 김훈의 이분법은 선악의 이분법과 달리, 의견이라는 개념을 사실과 의견으로 억지로 구분하려 했기 때문에 작위적 이분법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김훈은 '사실'에 대한 일종의 맹목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김훈의 '사실론'은 예컨대 '똥 싸지 않는 인간'을 상정하는 것처럼 허무맹랑해 보입니다.
김훈에 대한 인간적인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자를 하다가 소설가가 되고 나서 기자와 소설가의 양다리를 걸치면서 정체성을 선택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시사저널 사태 때 와서 "나는 언어의 관리자다"라고 말하는 오만함도 그렇습니다. 김훈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이 있어서 안티가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김훈의 '사실과 의견'론은 토론을 할 만한 수준에 도달한 담론은 아니고, 기껏해야 김훈의 개인적 관심사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개인적 호오와 취향은 있는 것이므로 개입할 필요는 없으나, 기왕에 문제제기를 받은 입장에서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세상에 아주 순수한 의미의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속에는 항상 의견이 개입돼 있으며, 사실의 결론 역시 조작되거나 특정한 관점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봐도 역시 편견과 당파성이 개입된 서술방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가에게 월급을 주거나 역사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서술이라는 것이, 특히 사실적 역사서술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실의 배열방식도 의견에 포함되며, 사실의 순결한 속살을 추종하는 것도 하나의 의견이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솔직히 "이것은 의견이다"라고 깔고 들어가면 좋겠지만, 자신의 의견임을 감추기 위해 여러 가지 근거를 갖다 붙이고 사실을 동원하는 방식의 글쓰기는 더 밉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당파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계급존재이기에 일정 부분 당파성의 한계를 인식해야 하며, 이것을 부정하는 순간부터 순수성은 깨진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정치적이라는 것, 이것이 '순수성'의 본체가 아닐까요. 정치에 관심을 갖는 인간이 '순수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의견은 사실을 토대로 끊임없이 검증되어야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실은 의견이라는 가설을 토대로 수집방향을 잡아야 하며, 만약 사실 확인 과정 속에서 의견(가설)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행로를 수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할 때라야만 온전한 의미의 언론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위의 주장은 '과학의 연구방법론'에서 가져온 것이기에 언론 방식과 사소한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기사를 쓰기 위해서 갖가지 사실과 인터뷰, 양쪽의 주장, 근거, 배경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심층기자와 과학자의 연구방법이 근본적으로는 같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에 연결을 시키고 생각해 봤습니다.
안티조중동 문제가 나와서 말씀을 드리자면, 안티조중동 운동 자체를 패러다임 전쟁이라고 선언한 적은 없습니다. 안티조중동 운동은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대에 나타나는 한 가지 징후일 뿐이며, 안티조중동이 패러다임 전쟁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패러다임 전쟁>과 관련해서는 졸고를 써볼까 하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취재를 하고 있는데, 만약 출판사를 만나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서재나 블로그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을 듯합니다.
당연히 조중동과 조중동의 잔재에 영향을 받는 이른바 '정론매체'에 대한 전쟁도 포함됩니다. 패러다임 전쟁은 대한민국의 언론환경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언론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교육, 경제, 문화 등 모든 범위에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만 패러다임 스펙트럼의 본체가 드러나지 않을까 합니다. 조중동을 죽이고 정론매체를 살리는 것만으로 현재의 패러다임 구조가 개선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근의 나의 행동이 정론매체 살리기로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정론매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프로젝트의 1단계일 뿐입니다. 우리 나라에 '정론'이라는 간판을 달고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워낙 어렵기 때문에 일단 본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챙겨 주자는 생각에서 1단계를 이렇게 설정했는데 1단계에서 꽤 오래 지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2단계에 대한 구상은 1단계 구상 때부터 하고 있었는데, 좀처럼 현실화할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2단계가 곧 드러날 것입니다. '언론에 대한 독자 피드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 등등에 관한 이야기도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저는 순수한 의미의 사실은 부정하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라는 것도 부정합니다. 공자와 석가, 예수는 지독한 욕망에 사로잡힌 현세인일 뿐입니다.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욕망, 사랑하겠다는 욕망, 아픔을 함께 하고 싶은 욕망 등 초인적인 욕망 덩어리입니다.
<굳나잇 앤 굳럭>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CBS의 뉴스맨과 신경민 앵커가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에 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시간이 나지 않아서 못썼네요. 어떤 사안에 대해서 내가 옳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뉴스를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해당 사안이나 뉴스에 대한 입장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뉴스진행방식과 입장을 지지합니다. 나의 주장 역시 어느 쪽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경민의 뉴스진행을 지지하는 것은 그의 결론을 지지한다기보다는 "할 말은 하는", "아닌 건 아닌"을 지지합니다. 언론은 아군이나 적군에게 동시에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입니다. 결국 비판 그 자체가 언론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동영에 대한 사례는 그 사람을 평가하기에 좋은 예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과 무관하지만 의미 있는 것에 대한 입장을 봐야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가에서는 이것을 '봉시불행(逢時不幸 : 공교롭게 아주 좋지 못한 때를 만남)'이라고 하는데, 봉시불행의 사례를 통해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여기에 영향을 좀 받는 것 같습니다. 아래 이와 관련된 논어의 문구를 하나 인용합니다.
섭공이 공자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우리 고을에 말입니다,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정직한 인물이 있습니다. 전번에 자신의 아버지가 이웃집의 양을 훔치자 그 아들이 관청에다 고발을 했지 뭡니까!"
공자가 [이맛살을 약간 찌푸렸다가 펴며] 반박했다. "[참으로 드문 일이군요. 그러나] 우리 고을에서 말하는 '정직'은 당신의 마을과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 비위 사실을 감추고, 마찬가지로 자식도 아버지를 위해서 비위 사실을 감추어줍니다. 정직은 서로 감추어주는 곳에 들어 있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 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 <논어> 자로편(13) 18절
※ 위 예시는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사계절)의 해석본을 따랐습니다.
저는 순수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신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