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me de la cre'eme(크렘 드 라 크렘)은 최고 중의 최고로 이 용어의 개념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구현한 이야기로는 뮤리얼 스파크의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가 있다. 여학교에서 진 브로디 선생이 자신이 직접 선별한 학생들을 최고 중의 최고로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는 결점 많은 인간이 자신의 주관으로 얼마나 왜곡된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맹목에 빠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에 수록된 <크림>에서의 '크렘 드 라 크렘'은 조금 다른 용도로 쓰였다. 최고의 것이라는 정의 그 자체를 변용한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아이러니 없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를 의미한다. 진 브로디 선생의 실패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것이다.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서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아집에 사로잡혀 구현한 세속적인 최고의 인간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은 무용한 것으로 결론나지만 하루키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정수를 얻어내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독려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확장된다. <크림>에서 '내'가 바람 맞은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돌아오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신비스러운 노인은 "비슬비슬 늘어져 있으면 못써. 지금이 중요한 시기거든. 머리와 마음이 다져지고 빚어져가는 시기니까."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재수 중인 열여덟 살의 청년이다. 그리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어떻게 보면 그 노인의 말처럼 비슬비슬 늘어져 있는.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소녀의 실없는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정도로 나는 유유자적한다. 그 초대는 신비로운 각성의 초입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하루키의 이야기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의 관문에 독자를 데려간다. 이것은 작위와 비작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곳에 당도하는 과정에 언제나 설득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얻는 깨달음들은 항상 울림이 크다. 재즈 매니아답게 <찰리 파커플레이즈 보사노바>에는 죽은 찰리 파커가 보사노바를 녹음한 가상의 음반조차 이 안의 세계에서는 왠지 타당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게 하루키다. 실재가 아닌 가상의 것들도 모두 마치 현실에 있는 것처럼 그럴 듯하다. 화자는 대학 시절 자신이 하나의 가상의 공간을 창조했고 그 공간을 뉴욕에서 실제로 자신이 통과했음을 알아차린다. 그것이 하나의 환각이라고 했을지라도 그가 통과한 세계가 변화시킨 자신의 성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서른네 살에 죽은 찰리 파커의 고백은 죽음의 과정을 음악의 프레이즈로 변환시킨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의 나이는 여전히 스물 언저리, 삼십대 중반을 맴돌지만 그들의 죽음과 삶, 기억에 대한 인식은 하루키가 지금 살아내고 있는 칠십대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여전히 죽음은 그를 덮치진 않았지만 이젠 손에 닿을 거리로 다가왔다. 그것이 더 많은 앎을 예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한 모호함은 그것에 대한 알수없음의 무게를 한층 더 올리며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그의 주인공들의 기억의 소환은 이렇게 삶을 거쳐 죽음에 가닿는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반면 상당히 경쾌한 하루키 자신의 작은 전기 같은 이야기다. 집 근처 진구 구장에 만년 패자 야쿠르트 스왈로스 팀을 응원하며 수시로 써낸 시들을 자비 출판한 이야기는 언뜻 소설인지 진짜 자신의 얘기인지 아니면 트릭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설 정도로 생생하다. 정작 아무도 출판해 주지 않아 자비로 손수 펴낸 시집을 많이 남기지 않아 부자가 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대목은 과연 하루키답다는 생각이 드는 위트다. 하루키가 마침내 세상에 소설가로 등장한 시점과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드디어 이십구 년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한 때가 겹치며 한데 어우러진다. 이것은 야구에 대한 이야기에 빗대어 하루키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역사를 축약한 것 같다.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중
무언가 찡 하고 울리는 대목. 밑줄을 긋는다. 정말 살아보니 그렇다. 승리했다고 졌다고 그 시간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결국 모든 것들은 기억으로 수렴한다. 이기고 지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키도 지금의 거장이 된 모습보다 무명이었던 시절 진구 구장에서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야구에 관련한 시를 끄적이던 시절들을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위드 더 비틀스>는 사실 비틀스와 직접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다. 사방에서 '벽지처럼' 비틀즈가 흘러나왔던 시대에 일인칭 화자는 여자친구도 아니고 여자친구의 오빠와 어느날 우연히 만나 그에게 자살한 아쿠타가와의 <톱니바퀴>를 읽어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둘은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닌데 하나의 문학 작품을 통해 깊은 소통의 시간을 가지게 되고 이것은 결국 둘이 헤어져 각자의 삶으로 흘러들어갔을 때에도 영구적인 잔향을 남긴다. 어쩌면 공허와 여백이 통과하는 이 엉뚱한 이야기는 그 시대의 어떤 분위기와 그 우연적인 만남들이 빚어낸 기억들을 소환하는 분위기로 전부를 말하는 소설 같기도 해서 여운이 짙다. 대단한 얘기를 한 소설도 아닌데 더없이 강렬한 그것은 하루키 특유의 강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표제작의 제목처럼 모조리 일인칭 단수의 남성들 화자의 이야기. 그것은 더 이상 청년이 아닌 하루키를 통과하고 화자들의 기억을 통과해서 독자들에게 와닿는다. 모든 우연적 조응, 모순, 공백, 상실들은 결국 어떤 허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긍정하며 나아가게 한다. 그게 바로 하루키의 크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