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고와 수류탄 - 생활사 이론
기시 마사히코 지음, 정세경 옮김 / 두번째테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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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오키나와 거주민들의 이야기를 청취하여 오키나와의 '역사와 구조'에 연결한 보고서다. 이렇게 요약하면 딱딱한 이론서처럼 들리지만, '약속으로서의 실재론'인 조사자와 구술자의 대화는 참혹한 역사적 관계에 우연히 엮여 들어간 평범한 인간 군상의 묘사로 감동적인 이야기들의 태피스트리다. 


표제작인 <망고와 수류탄>은 패전 후 일본군이 오키나와 민간인들에게 수류탄을 지급하고 자결을 명령한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는 할머니의 구술 이야기다. 당시 소녀는 엄마의 용기와 기지로 거기에서 탈출하지만, 미군이 쏜 박격포에 바로 옆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겪는다. 오십 년이 지나서야 소녀가 그날 뒤집어 쓴 게 아버지의 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손수 얼려서 이고 지고 온 망고를 이 연구에 참가한 젊은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끝난다. 훈훈한 결말을 품은 이야기 중에 이렇게 슬픈 사연을 지닌 것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사회학자에게 소녀 시절 겪은 역사적 참상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그 후에 깨달은 비극적인 진실까지 덧붙인 노인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삶의 잔인함, 비관을 한탄하는 대신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의 마침표를 찍는다. 


1945년 저 섬에서 그녀는 일본군에게 두 개의 수류탄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2015년 이 공민관에서 수류탄 대신 그녀가 우리에게 건네준 것은 몇 개의 다디단 망고였다.



저자는 본인이 택한 생활사 이론의 질적 연구에서 조사자의 경계짓기, 범주화를 통한 이해에 어떤 편견과 폭력이 게재되거나 연구 대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거짓과 모순이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 한계조차도 연구의 실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를 완성하는 하나의 조각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즉 그 불완전함, 그 한계가 인간이 인간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는 것의 실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애를 구술하면서 잘못된 기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진심 전체가 호도되고 그것을 들은 사람의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어떤 진실의 핵이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한다.


말하고 듣는다,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감정의 상호교환이 있고 이것은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기에 특유의 가치를 지닌다. 누군가의 아픈 생애를 그 우연적인 역사의 폭력에 다친 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자체로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의미란 없다. 우리가 어떤 전쟁에 휘말려들게 되는 것에도, 어떤 계층의 집에 태어나는 것에도, 혹은 '남자'나 '여자'인 것 그 어느 것에도 의미는 없다. 우리들은 절대적인 외부에 연쇄하고 있는 무한한 인과관계의 흐름 안에 갑자기 던져졌고, 거기서 살아가야 한다.



사회학자인 저자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책에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살아내는 인간 군상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여러 명의 주인공들의 순간을 담은 아름답고 슬픈 단편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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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0-25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사두었는데 블랑카 님의 리뷰를 읽으니 얼른 이 책을 읽고 싶어집니다. 망고와 수류탄 이라는 제목부터가 참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잖아요? 그것들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조화를 이뤄낼지, 이 리뷰를 통해 엿본 느낌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4-10-25 14:19   좋아요 1 | URL
저 이 책 망설이다 다락방님도 사셨다길래 산 거예요. 중간 방법론은 좀 지루한 대목들이 있긴 한데 전반적으로 정말 좋았어요. 땡스투를 사고 나서 해서 다락방님한테 제대로 갔을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