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 단 한 대의 피아노가 주인공이 되는 일대기. 어떤 극적인 드라마도 사건도 없이 그저 400명의 노동자가 조연이 되어 묵묵히 일 년 가까이 88개의 건반과 240개가 넘는 현이 만들어 낼 소리의 잠재태를 위하여 투신하는 이야기.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마음이 한없이 먹먹해지는 이야기. 
















저자인 [뉴욕 타임스] 기자인 제임스 배런은 K0862의 성격과 인격을 형성하는 스타인웨이 공장 노동자들 곁에서 피아노의 거대한 림을 만드는 출발점부터 조율을 거쳐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연주를 하는 '독립'의 피날레까지 전과정을 밀착 취재하여 기록했을 뿐 아니라 이민 노동자들 개개의 서사, 스타인웨이 가문의 전사까지 더불어 치밀한 태피스트리처럼 엮어낸다. 피아노를 만드는 과정은 기술의 혁신, 사람들의 관심사 변화와 더불어 많이 진화했지만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가 가지는 어떤 고전성을 수호하는 여전한 수작업과 오랜 시간 공력이 들어가는 지난한 시간의 경과를 화석처럼 품고 있고 이것은 다른 제조업 노동자들과는 다른 자부심을 각 공정의 노동자에게 불어 넣는다. 전임자는 후임자에게 정형화된 자동 매뉴얼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 형태를 보고 그것을 체현하는 형태의 도제 시스템을 통해 하나의 악기의 분업화된 업무를 전수한다. 스타인웨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서로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고 가족을 영입하기도 하며 하나의 단단한 결속력을 가진 부족처럼 끈끈해진다. 


효율과 능률과 IT 기술이 선봉에 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과는 거리가 먼 영역에서 여전히 느리고 진중하지만 과거의 가치를 믿고 수호하려 애쓰는 분투의 현장의 목격은 그 자체로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렇게 완성된 K0862의 연주자의 이름이 낯익다.
















피아니스트 조너선 비스의 언어는 마치 잘 다듬어진 선율처럼 독자를 설득한다. 그의 음악 이야기는 마치 하나의 근사한 연주회를 다녀온 듯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로 생생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언어와 음악이 가지는 한계를 서로 상쇄하며 이루어내는 절대 경지의 표현과 소통의 처절한 앙상블이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손으로 꼽는 값진 경험 중 하나가 어렸을 때 무리해서 배운 피아노다. 재능이 없는데 재능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던 엄마와 소곡집 연습만 해도 대단한 연주를 듣는 듯 감격했던 주변인들의 과장된 박수가 얼마 안 되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설명할 수 없는 증폭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향수, 실현하지 못한 꿈들, 그리고 결국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 그럼에도 여전히 그러한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손가락의 기억에 대한 신비로움이 한데 섞인 것이다. 울림 페달을 밟으면 나의 원래 실력보다 한 뼘쯤은 더 그럴듯하게 들렸던 그 기만의 연주에 취했던 그 어리석었던 과장의 시간들은  가감 없이 직시하는 현실의 황량함과 대비되어 언제나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악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공허해지기 쉽다. 그래서, 그 이후의 이야기를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악의 형상화에는 신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의 서사의 골격을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자칫 그 악행 자체를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우리의 현실에 악은 만연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악이 승리하거나 선의 무기력함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모든 악을 다루는 이야기의 도착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품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윌리엄 트레버는 그러한 점에서 대단히 명민한 작가다. 악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의 여정의 끝에는 선이 있다. 이것은 대단한 스포일러가 아닐 수 없다.

 

<펠리시아의 여정>의 펠리시아는 아일랜드의 십대 소녀다. 영국군에 맞선 전장에서 순직했던 선조들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스크랩한 아버지가 영국군에 입대한 청년의 아이를 가진 펠리시아에게 보일 반응은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녀의 여정은 언제나 그렇듯 이러한 집에서의 탈출로부터 시작된다. 펠리시아는 아이의 아버지 조니가 일한다고 했던 잔디깎이 공장 창고를 찾아 무작정 영국으로 떠난다. 이 여정에서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험들을 하게 된다. 전적으로 선하다고 그렇다고 오직 악하다고만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도움을 얻게 된다. 그 중에 공장 구내식당 매니저인 오십대의 독신남 힐디치가 있다. 그는 <펠리시아의 여정>에서의 중요한 기착지다.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시종일관 단서를 찾아 헤매어야 할 정도로 혼란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펠리시아에게 미칠 영향 그 자체에 대하여 유보된 판단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 무엇들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트레버는 분주하게 시점을 이동한다. 그의 시선이 힐디치에게 가닿았을 때 우리는 어떤 끈끈한 암시를 읽는다. 직장과 사는 고장에서 힐디치는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체구가 건장한 친절하고 따뜻한 중년의 이웃이다. 그러나 그러한 외피 밑에 감추어져 있는 은밀한 어두움은 조각조각 퍼즐처럼 군데군데 그의 고독하고 평범하지 않은 유년기의 회상들로 덮여 있다. 그는 싱글맘에게서 자라고 그녀가 끊임없이 초대했던 내연남들로부터 왜곡된 관계의 거친 원형들을 전수 받는다. 필요와 위장과 욕망에 의해 접근하는 사람들, 그러한 것들이 사라지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그들 뒤에 홀로 남은 어머니는 심지어 아들에게까지 성적 욕망을 발산한다. 힐디치의 끔찍한 어린 시절은 현재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그의 모습을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다. 그러한 과거를 품고 그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펠리시아에게 은근하게 접근한다.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끊임없이 그녀 주위를 맴돈다. 그에게는 그 전에 이미 여러 명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들은 그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라졌다. 트레버는 이러한 일들을 대단히 간접적이고 절제된 방식으로 암시할 뿐이다. 우리는 힐디치를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그의 번민과 고뇌, 유보된 욕망들은 그의 전체를 구성하지 못한다.

 

펠리시아가 끝내 그에게서 탈출한 곳은 의외의 곳이다. 그녀가 다시 그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오빠들에게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그녀의 여정이 가지는 의미를 시사한다. 어쩌면 따뜻하고 안전한 집으로 가지 않고 거리에 남는 일을 택함으로써 결국 펠리시아가 얻어낸 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각자가 해석해야 한다. 구질서에서 억압에서 제도권에서 가부장적 구조에서 떠나는 것 자체가 그 모든 것의 극복이자 탈출과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 행위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펠리시아는 놀랍게도 이 여정의 끝에 만족한다. 안전한 귀환만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놀라운 깨달음이다.

 

그녀는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목적 없는 여정에서도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는다. 시간과 사람이 뒤죽박죽 섞인 가운데서도 어떤 규칙을 찾지 않는다.

 -윌리엄 트레버 <펠리시아의 여정>


펠리시아의 여정을 규격화하거나 재단하는 대신 열린 것으로 해방시킴으로써 트레버는 그녀를 다른 방법으로 성장시킨다. 대부분의 영웅담이 결국 집으로의 귀환의 여정으로 그려진 것과는 달리 소녀의 여정은 거리로의 탈출로 확장된다. 힐디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녀가 도착한 곳은 드물긴 하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선의의 손길이다. 그것은 악보다 더한 선의 미스터리. 트레버가 악의 이야기를 통해 당도한 곳의 소박한 거리의 선은 악의 치밀함보다 더 관대하다. 위대해진 작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피하려 했던 가부장적 질서와 악의 만연의 해방구로서 그곳에 함께 당도하게 되는 독자들의 여정은 그러니 뭉클할 수밖에 없다. 시야는 확장되고 고정관념은 부서진다. 위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쓰는 이도 이야기 속 인물도 읽는 이들도 함께 성장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1-08-31 1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중지련, 멋있는 제목입니다.
축하드려요~^

blanca 2021-08-31 18:0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가뭄의 단비처럼 저도 모처럼 기분이 좋네요.

초란공 2021-08-31 1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또 읽어보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1-08-31 18:04   좋아요 2 | URL
초란공님, 부끄럽네요. 저는 한번 쓴 글은 부끄러워 못 읽겠더라고요 ㅋㅋ 감사합니다.
 

솔직히 SF에 푹 빠져들지는 못한다. 그 세계와 현실과의 갭 사이 어디쯤에서 항상 서성인다. 테드 창과 김초엽의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작품에 전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공명 지점도 결국 SF 세계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세계와 현실의 접점의 보편 정서가 얘기되는 곳이어서 가능했다. 


















아, 그런데 뒤늦게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 흠뻑 빠져 버렸다. "로켓의 여름이었다." 이런 문장 하나로도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작가라니. 존 스칼지가  열두 살에 실물을 영접한 마법사 같은 작가로 레이 브래드버리를 회고한 서문은 이 책을 다 읽고 마무리로 맞춤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를 읽는 일은 아쉽게도 열두 살은 아니지만(그 때 이 마법에 걸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황홀할까) 마법사가 만든 마법의 왕국에 로켓을 타고 탐사를 다녀온 느낌이다. 허무맹랑한데 그냥 무작정 설득된다. 잠들어 있던 그 무엇이 하나하나 깨어난다. 올더스 헉슬리가 브래드버리를 시인이라고 칭하자 "그런 망할 일이."이라고 응답한 에피소드를 고백한 것은 겸손이 아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이야기가 맞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어로 화성의 연대기를 만들 수 있는 작가가 이 지구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그가 설계한 화성은 지구와 동떨어진 곳이 아니다. 지구인들의 탐욕과 오만, 질서, 차별 의식을 벗어던지고 남은 실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지구인들은 연이어 원정대를 보내고 그곳을 또 오염시키려 한다. 그들만의 공고한 관념과 욕망은 다시 삶의 음험한 두려움과 불안, 유한한 생의 한계를 불러온다. 그의 비판 의식은 언뜻 화성과 지구를 대척점에서 대비시키는 것 같지만 화성은 결국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삶과 생의 핵심을 정면으로 직시해야 하는 전환기의 공간으로 위치한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허공에서 너무나 사소해져 버린 지상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삶을 조망하듯 이 작가의 렌즈로 비로소 우리와 우리가 채운 지구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화성 연대기>의 스물 여덟 편의 이야기는 연작처럼 묘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1999년 1월부터 2026년 10월로 상정되는 기간은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가진다. 그것은 화성에 정착한 지구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연인들이 정착한 화성으로 떠나기 전의 여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화성에서 이미 전멸해 버렸다고 생각한 화성인과 노인이 재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환영과의 재회, 과거, 현재, 미래가 교차하는 이야기, 돌이킬 수 없는 작별들을 송환하는 메아리이기도 하다. 한 편 한 편은 브래드버리의 서정적이고 다채로운 언어들로 직조되어 인류의 거대한 출항의 서사시처럼 들린다. 


브래드버리 자신의 이야기를 빌려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과거로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 이야기들이다. 미래의 이야기에서 그리운 빛바랜 과거의 향수를 다시 발견하는 즐거움은 특별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작은 초에 불을 붙이면 풍등은 천천히 빛을 품고 부풀어 올랐고,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친척들은 우울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떠나보내기 싫은 반짝이는 환영이었으니까. 풍등을 손에서 놓으면 인생의 한 해가, 또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셈이니까. 풍등은 빛을 품은 채로 따스한 여름밤의 별자리 사이로 흘러갔고, 빨갛고 하얗고 파랗게 물든 눈들은 함께 베란다에 앉아 아무말 없이 그 모습을 좇았다. 

-레이 브래드버리 <풍등>


이 책을 손에서 놓으면 인생의 한 해가, 또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 별빛 사이로 떠가는 풍등처럼 사라져 버린다. 다행히도 풍등을 떠나 보내는 마음은 사라져 버리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가치와 무게로 바로 차오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은 역주행이다. 사십 대에 갑자기 김연수의 <스무 살>을 ,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는 일. 이십 년도 넘게 지난 스무 살의 정서는 이제는 과거완료형이다. 그럼에도 나는 더 깊이 더 풍부하게 주인공들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비로소 완결되고 나서야 뒤돌아보고 나서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되는 인생의 많은 일들과 스무 살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은 그렇다. 하나의 사건 같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넘어지고 구르는 일, 모두가 빛난다고 최고라고 하는 시기를 통과하며 전혀 그렇다고 느낄 수 없는 그 거리감에 한없이 추워하면서도 내가 과연 서른 살과 마흔 살을 기다리는지 확신할 수 없었더 시간들.

















정말 놀라운 것은 하루키가 스물아홉 살에 갑자기 "아무 생각 없이 쓴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결국 오늘날의 하루키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인간의 심연, 삶의 비의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ㄱ 심플한 문장들이 하루키스러운 그 무엇의 강렬한 울림을 더 원색적으로 제공한다. 스물한 살의 남자애가 또래 여자애와 나누는 그 살아 있는 대화들, 갑자기 튀어 나오는 너무 무겁고 진지한 삶의 이야기들은 불협화음처럼 들려야 하는데 또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우리도 그랬다. 뜬금없이 스무 살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식. 삶의 모든 철학적 진의를 이미 다 알아버린 듯한 허세. 스무 살은 그런 부조화와 모순과 불협화음의 결정체여야 스무 살 답다. 논리적이고 담담하고 겸손하다면 그건 스무 살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다. 마땅히 지워버리고 싶은 많은 부분을 품고 있어야 제법 스무 살 답다. 내 생각은 그렇다.


김연수의 <스무살>의 친구 재진과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친구 쥐는 크게 닮은 점이 없다. 아니, 오히려 반대다. 재진은 온순하고 사회의 정형화된 틀에 맞는 성공의 코스를 성실히 답습한다. 쥐는 그렇지 않다. 반항하고 도망친다. 둘은 각각 주인공의 청춘에 강렬하게 각인되는 주변인으로 그려지지만 어쩌면 자신의 내부에 있던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결국 김연수도 하루키도 화자가 아니라 재진과 쥐를 그려내기 위해 단지 나의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을 빌려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결국 이러한 것을 이미 우리는 다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스무 살에 직관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구. 조건은 모두 같아. 고장난 비행기에 함께 탄 것처럼 말이야. 물론 운이 좋은 녀석도 있고 나쁜 녀석도 있겠지. 터프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나약한 녀석도 있을 테고,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남들보다 월등히 강한 녀석은 아무 데도 없다구. 모두 같은 거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젠가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겁을 집어 먹고 있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는 영원히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지. 모두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빨리 그걸 깨달은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해. 시늉만이라도 좋아. 안 그래? 강한 인간 따윈 어디에도 없다구. 강한 척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야.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종내는 고장나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죽음으로 향한 비행기에 함께 타고 있다. 다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숨기기도 하고 잊기도 한다. 이미 그걸 우리는 아주 어려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잊어 버리고 욕망하고 시샘하고 절망한다. 청춘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죽음과 상실과 직시함으로써 제대로 복기할 수 있다.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그 찰나를 복원하는 것은 그래서 어렵고 여전히 유효하다. 노인이 되어서 다시 스무 살의 이야기를 읽는다 해도 여전히 나는 또 가슴 뭉클할 것이다. 너무 멀어져 버려서, 너무 가까워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7-13 16: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아무 생각 없이 써야지 좋은 작품이 나오나 봐요. 전 하루키 작품 중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참 좋아했거든요. ㅎㅎ

blanca 2021-07-14 08:01   좋아요 1 | URL
저 이거 얼마전에 읽었어요. 정말 좋더라고요. 진짜 힘이 쫙 빠진 담백한 서정성.
 
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에서 선한 주인공을 매력적으로 그리는 서사는 쉽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이기적인 본성을 감지하지만 쉽게 감정이입하는 인물은 악인이 아니라 선인이다.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탐욕, 위선, 이기심, 질투, 증오는 공감이 아니라 투사에 의한 적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를테면 우리가 누군가를 강하게 비판하게 된다면 그는 나의 약점, 내가 싫어하는 나의 어떤 취약점을 공유할 가능성이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야기의 캐릭터 구현은 종종 선악의 대결구도로 그려질 때 무게중심을 슬며시 미덕을 가진 인물에게 옮겨간다. 그만큼 악을 형상화해서 독자의 호응을 얻는 것은 어렵다. 그레이엄 그린은 그런 어려운 일을 해냈다.


<브라이턴 록>의 주인공은 열일곱 살 소년 핑키다. 그는 범죄자다. 살인을 저질렀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사건의 중요한 증언을 할지 모를 열여섯 살의 소녀 로즈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자신이 떠나온 빈민가에 강렬한 증오를 느끼고 그것을 공유하는 로즈를 사랑할 수 없음에도 결혼을 강행한다. 작가 그레이엄 그린은 이 소년의 눈으로 바닷가 휴양지의 브라이턴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영화촬영의 카메라 뒤에 있는 듯 이야기의 정조, 흐름을 따라 이동한다. 그린의 배경묘사는 그래서 부차적인 게 아니라 때로 핵심이다. 세상을 온통 무정한 악으로 가득찬 곳으로 바라보는 소년의 눈높이에서 호화로운 호텔은 현재는 가지지 못하지만 마침내 정복하고 가지고 싶은 전리품으로, 도망쳐 왔지만 끊임없이 돌아오는 고향은 풀어낼 수 없는 족쇄처럼, 바다의 잔교는 빛과 어둠의 통로이자 경계로 자리한다. 


소녀 로즈는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핑키를 사랑한다. 가난하고 무정한 부모와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스노 식당과 악과 참회와 죽음 속에 부유하는 소년 핑키는 어쩌면 연장선상 같음에도 로즈는 핑키를 만나서 한 경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떤 부정적인 경험도 그것을 통과하면 사람은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원상복귀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 인생을 이전과 이후로 양분한다. 그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을 거부하는 로즈의 모습은 삶에 대한 그린의 가차없는 직시가 투영된 것이다. 그린은 우리의 삶과 인간의 본성을 이상적인 하나의 절대선과 긍정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지옥 같은 절망의 무도다.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브라이턴 록' 막대사탕의 은유처럼 그것은 "끝까지 깨물어 먹어도 여전히 브라이턴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도 삶의 본질도 그렇다. 부정적인 것이 나올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경험하는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반면 탐정의 역할을 하게 되는 아이다라는 여자는 다소 아쉬운 캐릭터다. 초반부에 죽게 되는 헤일과 잠시 스친 인연으로 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과감하게 파헤치게 되는 역할은 다소 작위적이다. 하지만 그녀가 소녀 로즈를 핑키에게서 빼내오기 위하여 기울이는 노력은 나이 어린 소녀가 나쁜 남자에 빠져 자신의 삶 자체를 방기하는 것을 선배로서 두고보지 않겠다는 연대감에서 비롯된 것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거부하는 로즈가 결국 돌아가게 되는 곳이 어쩌면 더한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도 그러하다. 그린은 그 지점을 예리하게 묘파한다.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행위가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인가? 이 반문은 적시에 필요한 의심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외형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끝내 구원을 얻지 못하는 핑키와 핑키를 사랑했던 시간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로즈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고 생각하는 아이다의 이야기는 서로 어긋나는 듯하며 만난다. 사는 일은 동화가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숱한 악과 선이 혼재되어 있다. 그 누구도 단편적으로 일관되게 딱 떨어지게 모든 것들을 심판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과 그 환경에 철저하게 매몰되는 인간이 있다. 그 어딘가쯤에 우리 모두는 자리할지도 모른다. 그 깨달음은 무겁고 씁쓸하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6-26 20: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반갑네요!이 작품 유튭에서 흑백으로도(1947), 2010년작도 토막으로 볼 수 있는데 매력있어요! 상황탓에 좋아하는 척하면서 구토참는게 기억에 남아요. 꼬집는거랑ㅋㅋㅋㅋ잊지못할 캐릭터 핑키!

blanca 2021-06-27 13:03   좋아요 3 | URL
이게 참 딱 영화로 제작하기 좋겠다 싶은 스토리와 배경이더라고요. 카포티의 <차가운 벽>도 생각났어요.

새파랑 2021-07-07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에 이책 읽었는데 반갑네요. Blanca님 당선 축하 드려요 ~!!👍

blanca 2021-07-08 08:29   좋아요 1 | URL
덕분에 알았네요.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7-07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

blanca 2021-07-08 08:29   좋아요 1 | URL
아우, 이 이쁜 팡파레~감사해요^^

서니데이 2021-07-07 1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1-07-08 08:2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해요. ^^

초딩 2021-07-07 2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앙 2관왕 축하드려요~

blanca 2021-07-08 08:30   좋아요 2 | URL
ㅋㅋㅋ 초딩님, 2관왕이라 하니 뭐라도 된 착각 나쁘지 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