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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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에서 최악의 고비, 첫사랑의 단계를 지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존재의 가장자리가
칼날 같아서 당신의 여린 생살을 베히고 마는, 그래서 결국 피를 내고야 마는 그런 상처의 시대에도 마침표는 있다고
얘기해 주기를 바라나요? 그 황홀한 고통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버석거리는 끝은
결국 오고야 만다고 얘기해 버리고 맙니다. 

당신은 이미 결혼이라는 사회적 의례를 통과하고 희미한 열정의 끝을 가만가만 더듬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정의 거스러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나요? 

이도 아니면 당신은 이 모든 애조띤 열정을 담담하게 쓰다듬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늙어버렸을 수도 있겠군요.
근사하게 행복한가요?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한 삶의 느낌, 그 어떤 애욕과 열정의 가능성의 심지마저 이지러져 버린
그 시점에 서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이 책은 자신이 사랑의 '경박함'을 체화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쉰 가까이 된 여자가 자신의 과거의 무모한 열정의
체현인 것 같은 젊은 남자 앞에서 뒷걸음질치고 그에게 맞춤한 또래의 젊은 여자에게 돌려 보내는 얘기입니다.
언뜻 들으면 통속적인 연애 소설 같나요? 하지만 이 책 속에는 삶과 어머니와 사랑에 대한 면밀하고 아름다운 통찰이
바람처럼 불어와 독자의 가슴 속에 스미게 만드는 마력이 있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신경숙 작가 덕택입니다. 그녀가 쓰고 싶었는데 왜 하필 콜레트라는 작가가 이 책을
썼을까, 했다지요. 이 책은 이백 페이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얇습니다. 저는 솔직히 소설에 흠뻑 빠지는 타입이
아닙니다만 이 책을 읽으며 태어나 난생 처음으로 소설 앞에서 설레었답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 책은 콜레트라는, 프랑스에서 국민들에게 '나의 콜레트'라고 불려질 만큼,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질 만큼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여류 작가의 자전적 작품이랍니다. 어떻게 시작하는 지 아세요? 바로 주인공이자
작가의 일흔다섯 살의 어머니가 딸의 두번째 남편의 초대를, 선인장 꽃의 개화 구실로 정중하고 귀염성 있게 거절하는
편지로 시작한답니다. 이 편지는 실제로 작가의 어머니가 사위에게 보낸 편지를 조금 개작한 것이랍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시작의 시작을 붙잡기 위해 늙어갈수록 더 일찍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는 이 작품 전체에서
그녀에게 나이들어가는 것은 스스로 부유해지지 않고는, 즉 재난도 상처도 다 그러모아 차곡차곡 쌓아가지 않고는
그리고 가끔씩 뒷걸음질쳐 그것을 완상하지 않고는 불가능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녀가 젊은 남자에게서 뒷걸음질치고
만 것도 결국은 죽은 어머니가 사랑이 지나가며 그린 그 언제나 꼭 같지 않은 아라베스크 문양이 주는 애조띤 아름다움의
허무함을 상징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사랑을 아는 자만이 사랑을 밀어낼 수도 있답니다. 거짓된 몸짓일지라도 우리는 그 사랑의 결 속에 일상이 스미면
그 황홀함이 어떻게 경박스러움과 무미건조함으로 변질되는 지 화석처럼 굳어버린 추억의 상흔만으로 유추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외쳐대는 그녀가 사랑을 거부만 한 것일까요?

여자들은 행복한 사랑을 해본 횟수만큼 많은 고향을 가지며,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는 하늘 아래서 매번 새로 태어난다.
-p.19 

행복한 사랑에서 우리는 명징한 존재의 순간을 체험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그렇게나 절절하고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또 있을까요? 

행복한 사랑이 참혹한 결말로 종지부를 찍고 가슴 속 저 밑에서부터 수많은 유리조각들이 차 올라 나의 온 몸 속에 생채기를
그어대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살아 있음을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지나가고 난 자리, 꾸덕꾸덕하게 상처가 말라갈 무렵, 우리는 또 돌연 행복해집니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수많은 생명을 낳는 경계선일런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산고로 사랑의 완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미완의 사랑이 남기는 가르침을 낳습니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만이 더 깊이 많이 존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아닐까요? 

당신에게 이 책을 강권합니다. 꼭 새벽에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진부하다고 외쳤던 사랑과 모성애가
가장 덜 진부한 생의 현현임을 절절히 느낄 수 있도록. 

창백한 푸른빛이 방에 들어오는 그 순간, 이 책을 읽으며 마음껏 슬프고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잃고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번역한 역자의 노고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 지도
아울러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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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20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문학동네에서 왜 그리 탐나는 책이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이 책 읽으면 이런 멋진 리뷰가 줄줄 나오려나요? ㅎㅎ
안 그래도 터져나가는 장바구니지만 한권 더 쏘옥 넣었습니다~

blanca 2010-06-20 22:05   좋아요 0 | URL
Manci님 안그래도 일본기행 잘 보고 있습니다. 저도 다담주 쯤 아마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탐나는 책이 너무 많아요. 장바구니는 터지라고 있는 거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06-20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콜레트가 알려진 것은 영화 '지지'덕이지요.80년대에 그녀 작품 몇개가 한권으로 묶인 번역본이 주우출판사에서 나온 적이 있습니다.신경숙 씨도...오...그렇군요.

blanca 2010-06-20 22:06   좋아요 0 | URL
노자님은 모르시는 게 없군요. 진짜. 안그래도 다른 책 읽어 보려 했는데 절판이랍니다.-..- 영어라면 우짜든동 시도라도 해보겠는데 불어 원서는 흑흑.... 영화 지지라구요? 한 번 찾아봐야겠군요.

프레이야 2010-06-20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매력적인 리뷰에 저도 장바구니행입니다.
보관함이 미어터지는데..ㅎㅎ
권유대로 새벽 창백한 푸른빛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순간에 꼭 읽어야겠네요.

blanca 2010-06-20 22:0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정말 번역도 너무 공들여 한 티가 나고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자기고백서처럼 읽히더라구요. 삶은 전연 다르지만 거의 문체는 최명희 수준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근래들어 이렇게 놀라며 읽은 외국 소설은 정말 처음인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10-06-2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
입을 다물 수가 없어!
아~~~~

blanca 2010-06-20 22:08   좋아요 0 | URL
마기님! ㅋㅋㅋ 그저 감탄사로도 커뮤니케이션이 되네요.^^;;

마녀고양이 2010-06-2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장바구니에 넣어야게따.
그런데 어찌하면 블랑카님처럼 아름다운 리뷰를 쓸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합니다~ ^^

얼마 전 결혼한 사람들끼라 한 이야기,, 이제 남자 사냥 안 해도 되니 넘 편해.. ㅋㄷ

blanca 2010-06-21 12:30   좋아요 0 | URL
남자 사냥ㅋㅋㅋ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소개팅 해달라고 조르지 않아도 되고 감정싸움 안해도 되고...벌써 주변에도 미스가 없어지네요...대신 화제가 너무 한정되서 아쉬워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 듣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데...다 가족 얘기만 하게 되요. 여기서 마녀고양이님랑 노는 게 참 좋아요.

穀雨(곡우) 2010-06-21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잠이 많는 저에게는 무리군요...^^
블랑카님의 글은 금요일 밤마다 늦은 시각 방영하는 오늘의 영화같은 느낌입니다. 읽고 있다보면
"음...시간이 없더라도 이 책은 꼭 쟁여서 봐야겠군...근데 이 사람의 언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글에 무슨 유혹의 덫이라도 있는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아무래도 이건 음모야 음모...^^)"
추천과 아울러 살포시 장바구니로...ㅋㅋ

blanca 2010-06-21 12:30   좋아요 0 | URL
곡우님, 댓글을 자꾸 다시 읽게 되네요....그저 고맙고 황송한 찬사입니다.^^;;

강래희 2010-06-2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ㅎㅎ 감탄~~^^
저 책 지난주에 12권 들였는데요,, ㅡㅡ
지금 적잔데 ..ㅡㅡ
그래도 저도 장바구니에 살짝 넣어볼까요?? 오오오

blanca 2010-06-21 21:44   좋아요 0 | URL
arcia님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신경숙 작가의 감성과 통하는 지점에 있는 책입니다. 대문사진 보니 미인이시네요^^

후애(厚愛) 2010-06-22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 보고싶지만 다음에 기회가 오면 꼭 봐야겠어요.^^

blanca 2010-06-22 21:05   좋아요 0 | URL
후애님, 한국에 오시면 제가 선물로 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2010-06-23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3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6-23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게 두 번 읽었어요.
블랑카님은 글은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에요.^^

blanca 2010-06-23 22:32   좋아요 0 | URL
두 번 읽으셨다니 긴장됩니다.^^;;

꿈꾸는섬 2010-06-2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네요. 저도 담아가요.^^

blanca 2010-06-25 20:34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이 댓글을 지금 봤네요. 책 분량도 얇아서 부담도 없답니다.^^ 전체가 시 같은 소설 이에요. 읽기에도 좋고...추천합니다.

자하(紫霞) 2010-06-25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들은 행복한 사랑을 해본 횟수만큼 많은 고향을 가지며,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는 하늘 아래서 매번 새로 태어난다.
사랑은 철학만큼 어려운 것 같아요~
멋진 리뷰이십니다!!^^

blanca 2010-06-25 20:35   좋아요 0 | URL
베리베리님, 퍼스나콘이 너무 사랑스럽네요. 세상에서 젤 어려운 게 사랑인 것 같아요. 가장 아름다운 것도요. 늙어도 죽음을 앞두고도 결국은 사랑한다,는 말이 남는 것 같아요.

2010-08-15 0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5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illyours 2011-03-0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아이엠러브>를 보고는 이 책이 생각나 바로 집어들었어요. 아, 이 근사한 책- 역자의 정성에도 감탄했답니다. 검색해보니 발자크 책도 번역하셨길래, 이제 그 책을 읽으려고요. 오래오래, 깊은 여운으로 남을 것 같아요. 급히 페이퍼를 쓰고 블랑카님 리뷰를 읽으니 두근대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참 좋습니다. 언제나 좋은 리뷰, 감사히 읽고 있어요 :)

blanca 2011-03-03 21:02   좋아요 0 | URL
moon님! 이 책 읽으셨군요. 정말 역자후기가 참 감동적이더라구요. 진정성 있는 자기 고백은 언제나 공감을 얻는 것 같아요. 발자크 책 어느 출판사 것을 번역하셨을까요? 민음사 것 저도 읽었는데 번역자가 누구인지 확인도 못했네요. 읽어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stillyours 2011-03-04 08:14   좋아요 0 | URL
문학동네 책이었어요 :) <루이 랑베르>
역자를 따라 다른 책을 읽게 되는 것도 참 신나는 일입니다!

blanca 2011-03-04 23:31   좋아요 0 | URL
아, 찾아 봐야겠군요! 발자크를 좋아하는데 게다가 번역자까지! 감사합니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신뢰를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를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이다. 로마의 파비우스 가문처럼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모두 목숨을 바치는 가문을 어찌 백성이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자기희생은 커녕 군역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았다. 지배층이 군대에 가지 않는 나라의 피지배층이 전쟁 때 종군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중

 

 

역사라는 큰 강에 개개의 삶은 낱낱이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결국 하나의 흐름이 되어 과거로 수렴된다. 흐르는 물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를 무색하게 한다. 역사학이 과거학이자 현재학, 미래학인 이유다.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뱉는 공기, 무심코 던지는 말들, 마주치는 시선들은 우리가 과거라고 호명하는 것들의 복기일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래라고 꿈꾸는 것들의 예시일런지도 모른다. 

<조선왕을 말하다>의 저자 이덕일은 보기드문 필력을 지닌 역사학자다. 그는 잠자고 있는 텍스트들을 일으켜 깨워 독자들에게 그 시대, 그 현장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환각을 선물한다. 개별적으로 그 시대의 아이콘격인 인물들을 탐구한 책들은 문학적 서사와 인물에 대한 심오한 탐구, 애정이 버무려져 가슴께를 둔중하게 두드린다. 이 책은 조선시대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선조, 인조, 성종, 영조를 당파적 시선과 성리학적 관점을 걷어내고 섬세하고 예리하게 들여다보고 그들의 행적을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일종의 평설이다. 그의 책들을 이미 많이 접했다면 중복되는 면면이 있어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그와 대면하는 초입으로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악역을 자처한  태종과 세조가 쿠데타의 공신 제거의 딜레마에서 어떻게 양극단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를 조명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태종은 편법의 수단을 천명의 실현 도구로 녹여 내고 왕권 강화를 꾀함으로써 세종을 낳았고, 세조는 기본 헌정 질서를 깡그리 파괴하고 공신들을 법 위에 잠자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후계자인 예종의 의문사를 초래하고 말았다.

쫓겨난 군주들인 광해군과 연산군에 대한 왜곡된 평가에 대해서도 그 자료의 편파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그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광해군이 실리주의 외교정책을 펼친 부분과 연산군의 황음무도한 난행들에 대한 과장 왜곡된 기록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전란을 겪은 선조와 인조는 역사가 외부적 변수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정치적 리더가 편협한 가치관에 빠져 그 난국을 타개하지 못하고 어떻게 진보의 흐름을 역류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반면교사 같다. 명분 때문에 현실을 외면한 정권이 끝내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아야 했던 그 비극적 대목은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건조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두 졸렬한 군주의 공통점은 열등감과 시기심으로 사람을 잃었다는 데에 있다. 전란을 극복하는 데에 일등공신이었던 이순신과 유성룡을 내친 선조와 근대화의 물결을 수혈받고 실리외교론까지 체화하고 온 준비된 후계자인 소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조. 결국 외세에 의하여 강제로 서양문물을 향해 개방해야 했던 미래는 이 시점에서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격렬한 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하면 반대 당파의 재기를 막기 위한 정치 보복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치 보복은 권력 강화가 아니라 권력 약화의 길이었다. 진정한 권력 강화는 반대 당파의 탄압이 아니라 반대 당파의 인정을 통해 이룩되기 때문이다. -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중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전언이다. 조선 후기 당파싸움의 길목의 가장 큰 희생자는 아마도 뒤주에 갇혀 죽고 만 사도세자일 것이다. 영정조 시대를 흔히 조선 문예 부흥기로 꼽지만 정작 한중록에 의하여 패악무도한 정신병자로 묘사된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엄밀한 조망은 결여되어 있다. 영조가 평생 시달렸던 경종 독살설의 배후로서의 지목과 비천한 신분의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는 태생적으로 그의 정권을 떠받치고 있었던 노론과 독자적 노선을 걷는 것을 방해했다. 사도세자가 이런 당파싸움에서 주도적 노선을 걷기 시작하며 미움을 받았다는 대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전히 이 대목은 논란이 되고 있고 왕위를 계승한 정조와도 연결된 지점이라 최근 <정조어찰첩>이 공개되었을 때 또 한바탕 학계와 언론계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까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는 인간. 그러나 이 시도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자 역사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이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하고자 하는 저 후안무치한 시도들이 결국은 진실의 장에서 무용한 것으로 판가름 나기를 바라 본다.역사 읽기는 그래서 언제나 현재에서 여전히 진실을 채굴해 내는 하나의 은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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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06-17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갑자기 역사라는 게 가진자의 권력 다툼의 기록이구나 싶네요.^^

blanca 2010-06-18 10:36   좋아요 0 | URL
예. 기억의 집님. 사람들이 다 시간 앞에서 무력하지만 힘없는 자들은 문자로도 남을 수 없다는 게 참 씁쓸하네요.

2010-06-17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8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17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나는

잘못된 것, 잘한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뭔가 배울만한 것을 제대로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근대를 지나야 했다는 것이 서글퍼집니다. 해야 할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의 경계도 명확치 못한 아픔도요.

blanca 2010-06-18 10:3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현재에서 과거까지 마구 수정하고 재단하고 왜곡되게 해석해서 이용하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들도 미래에 결국 그렇게 쓰일까 두렵습니다.

마녀고양이 2010-06-1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역사 이야기 참 잼나지요? 이덕일 씨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못 읽었다눈.. ㅡㅡ;;

얼마 전에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을 읽었는데, 맘이 참 징하더군요. 우리 역사의 정치 싸움을 읽다보면 가슴 아플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우리 후세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렇겠죠? 노무현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blanca 2010-06-18 10:4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사도세자의 고백> 진짜 강추예요. 이덕일씨의 시각도 중립적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진짜 마지막 장면은 소설보다 더 슬프답니다.-..- <조선을 뒤흔든~> 재미있을 것 같아요. 역사가 제대로 평가해 주기를 바라 봅니다.

순오기 2010-06-1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지 몰라도, 작가는 패자와 백성의 역사를 기록하지요.
사도세자의 고백, 저도 강추합니다.
어제까지 '최숙빈' 읽었어요~ 동이를 한번도 안 봐서, 리뷰를 쓰려면 한번은 보고 싶은데 언제 하는지...
남한산성, 소현, 최숙빈~~~~시리즈 도서 같아요.

blanca 2010-06-19 13:4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맞아요. 조정래샘 책 읽고 소설가가 역사 속에서 패자들의 역사를 다시 쓰는구나 싶어 감동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거의 소설 만큼 감동적이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영조가 정조한테 왕위 승계 하는 장면은 정말 눈물 나더라구요. 소현세자는 오늘 서점가서 봤는데 생각보다 얇아서 놀랐어요. 요새는 왜이리 얇은 책이 좋은지요 ㅋㅋㅋ 동이는 저도 생각보다 드라마를 안보게 되네요.
 

정말 대단히 심한 위염입니다. 이것 보세요. 

의사는 화면의 생채기가 가득해 군데군데 피를 흘리고 있는 위를 가리켰다. 그건 신입직원의 위였다.
속에서 받지 않는 술을 잔돌리기라는 직장의 의례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억지로 들이붓고,  
줄 서 있는 손님들 하나 하나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처럼 느껴져
그 위압감과 스트레스로 발을 동동 구르다 안그래도 어리버리한 비전공자로 눈엣가시로 여기는
팀장의 잔소리까지 상처없이 여과해 내려고 했던 신입사원의 처절한 발버둥의 현현이었다.  

아버지는 그 사진을 들고 가슴아파했다. 동기는 인터넷에서 위염 관련 정보를 출력해
형광펜까지 쳐가며 무너져 가는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써 주었다. 

그래, 직장만 그만 두면 나의 위는 깨끗해질거야. 직장 생활의 궤적은 나의 위를 흘러가며 흔적을 그렸다.
속이 쓰릴 때마다 나는 머슴의 비애를 곱씹었다.
이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고 단순한 머슴은 눈물을 삭히며 대신 위로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직장 생활과 멀어진 지금도 나의 위는 잠잠해지지 않았다.
<한겨레21>을 읽으며 손등에 라인을 잡고 내시경을 기다리는 시간,
그 공간을 채우고 나와 같이 위에 그려진 자신들의 삶의 비애의 지도를 확인하고 보듬어 주기 위하여 수십 명이 지루한 기다림을 죽이고 있었다. 

저는 스트레스성 자살입니다. 

노예로서의 충성심도 사라진 지금 정체성이 남아 있지 않다며 자살을 택한 시간 강사의 얘기.
98년도 이후 여덟 명의 시간강사가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영등포 구치소에 복역하고 있는 연인을 기다리며 참여연대 노래패에서 <다시 떠나는 날>을 소망하는 그녀.
아이폰4를 시연하며 개발자 하나 하나를 호명하며 일어나게 해서 박수를 받게 했던 스티브 잡스의 얘기. 

삶이 뭉클뭉클 일어나 서로 교차하며 뻗어 나가는 환영 속에 나는 수면 마취가 안되 계속 눈을 말똥말똥 뜨며
다량의 마취제를 추가로 투여 받아야 했다.  

무언가에 온전하게 취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삶의 신산한 편린들 속에서 취하지 않고
명징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더듬고 싶은 것은 하나의 갈망으로 그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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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6-17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위염 많이 나아졌다고 하죠?
나두 얼마 전까지 밤마다 위가 아파서 잠을 못 잤는데, 요즘은 괜찮아졌어요.
내시경을 찍어봐야 하는데, 매일 차일 피일 미루고 있으니... ㅠㅠ

비틀려있는 사회, 퍽퍽한 사람들만 생각하면 힘들어지고, 위염도 낫지 않아여.
서늘한 아침이예요. 그리고..... 내 주식만 주가가 빠져여. 에효.

blanca 2010-06-17 11:33   좋아요 0 | URL
위축성 위염이래요--;; 헬리코박터파이로리균 검사들어갔어요. 마녀고양이님도 다시 위가 아프면 꼭 한 번 해보세요. 사람들 엄청 많더라구요. 무슨 번호표 받아서 차례로 위내시경 검사 받는 분위기였다니까요 ㅋㅋㅋ 장내시경 받는 사람도 많고요.

주식은...저는 적립식 했는데 불입중지하고 쳐다 보지도 않아요.--;;

순오기 2010-06-17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염이 심하면 많이 괴롭겠어요.ㅜㅜ
30년 전에 심하게 고생을 해서 그 후 철저하게 관리했어요.
빈속에 콜라나 커피도 안 마실 정도로...
요즘은 제대로 안 챙겼더니 5월말 건강검진에서 위염이 보인다며 요주의로 나왔어요.ㅜㅜ

blanca 2010-06-17 16:4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희 친정쪽이 다 만성위염이라 조금만 음식 조절을 안해도 그러네요. 아무래도 커피를 끊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쉽지가 않아요. 순오기님도 음식 조심하세요.

기억의집 2010-06-17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저도 약 먹어요. 속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위염이라고 하더라구요.
오늘도 약 오일치 타왔어요. 한 한달 정도 먹어야한다고 하는데..것도 고역이네요.
커피를 마시지 말아야하는데 그래도 하루에 한잔은 꼭 마신다는.커피를 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블랑카님, 우리 이겨냅시다. 애엄마끼리.

blanca 2010-06-18 10:42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저는 커피를 아예 치웠어요. 핸드드립기가 있는데 여과지도 떨어지자 안사구요. 없으니까 별 수 없더라구요. 신기한게 완전 커피킬러인데 생각이 없어지더라구요. 한 잔 정도는 속을 채우고 먹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위염...흑흑 기억의집님과 함께 완전 건강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2010-06-17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8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시마 2010-06-2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성 위축성 위염... 저의 병명이기도 한데 말이죠... ^^ 사가지고 온 약이 다 떨어져서 병원에 전화하고 공수해 줄 사람을 수소문하고... 한 2주치 약 타다가 이 나라로 공수해다 먹으려구요. 저는 3개월에 한번 정도 위 병이 나요. 그럼 또 한 일주일 죽과 간장만으로 연명하다 좀 나았다 싶으면 미련하게 또 커피를 들입다 들이 붓는... ㅎㅎ 남편은 종종 금붕어 아이큐라고 놀리지만, 위가 아픈 것도 아픈 거고, 커피가 땡기는 건 또 땡기는 거니까 음. 짧은 인생 먹고 싶은 것 좀 먹고 살자고, 위하고 타협하려 노력중인데, 게다가 저는, 먹고 싶은게 별로 없는 희한한 인종이라서 이 타협이 쉬울 것 같았는데... 흠... ^^ 먹고 싶은 걸 먹지 말고 아무 생각 없는 걸 먹으라더군요.
아, 장기 만성 위염을 앓은 끝에 얻은 소득은,

죽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끓인다는 거. 특히 흰 죽. 이거 쉬운듯 은근 까다롭거든요. ^^
(최명희 혼불에서 청암부인에게 죽 끓여다 주는 효원이 이야기가 나오죠.)

나중에 늙으면 죽집이라도 낼까봐요.

blanca 2010-06-21 21:47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저랑 넘 같아요. 다스려 놓고 들입다 커피 붓고 그리고 또 재발. 그래서 저 최근들어 집에 커피 관련된 걸 다 치워 버렸어요. 커피 마시려면 밖에 나가야 한답니다.--;; 견뎌지기는 하는데 낙이 없네요.

아시마님, 이국에서 속까지 아프시면 어떡해요. 빨랑 나으세요. 죽은 저는 이유식용만 끓일 줄 알아요 ㅋㅋ 혼불 기억나네요. 그 다음 내용을 몰라 속터져요. 참, 저는 아메바랍니다.^^;;
 

깐소 새우를 매워하는 아기를 위해 물컵에 새우를 씻어 주는데
멀찍히 서서 우리를 감시라도 했던지 득달같이 달려와 컵을 나꿔채며
물컵을 이렇게 쓰면 안된다,고 호통치는 중국집주인. 

너는 요즘 뭐햐냐,고 물었을 때 딱히 할 말이 없어 글...써. 라고 얘기하면
그럴 줄 알았다,
나한테 보여주라고 하는 친구들.   

오랜만에 통화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위와 삶의 신산함으로 마구
구겨져 버석거릴 때, 

고작 세상에 나온 지 2년 좀 넘은 아이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기껏 했던 선택들이
교묘하게 비틀어져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시국을 볼 때,

나는 슬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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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2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3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1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슬프다~~

blanca 2010-06-12 23:50   좋아요 0 | URL
앗! 지금 마기님 서재로 고고! 글구 마기님 슬프면 안되요^^;;

마녀고양이 2010-06-13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헙, 왜 새우 씻어주는데 주인이 난리래여?
나두 예전에 항상 그리 했는데,,, 그 주인 이상하네?
블랑카님,, 그럴 때는 참지말고 항의하세요, 큰 소리로. 너무 참으면 병 되염,, 아셨죠?

보고 싶었어요.... 쪼옥~

blanca 2010-06-13 19:13   좋아요 0 | URL
아기 아빠도 있었는데 저희 부부 성격이 그렇답니다.-..- 저는 화내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마녀 고양이님 기다리느라 병 나는 줄 알았습니다.^^;;

후애(厚愛) 2010-06-14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에 담아두시면 병 납니다. 저처럼..
힘 내세요. 화이팅~!!! 행복한 한주 되세요^^

blanca 2010-06-14 22:39   좋아요 0 | URL
후애님, 덕분에 행복한 한주 출발이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에 언제쯤 오시나요?

후애(厚愛) 2010-06-15 06:16   좋아요 0 | URL
8월1일부터 한국에 있을겁니다.^^

기억의집 2010-06-1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운 것 물병에다 많이 헹궈서 주었는데..그 짜장면집 주인이 더위 먹었나봐요. 대체로 손님한테 안 그런데...

저는 애들한테는 성질 잘 안내는데 이젠 그려러니하고 살아요. 하지만 요즘 공처럼 뒹구는 아이가 미운 것은 사실이에요. 공부 진짜 안해요. 어휴~~~~

블랑카님, 홧팅입니다. 오늘부터 장마래요. 아까 길상사 글 봤는데 언제 길상사 가시는 길에 불러주세요.^^

blanca 2010-06-14 20:20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단골이라는 게 더 서운합니다. 저는 고작 세 살한테 이러고 있으니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집니다. 제 책상 위에 <화내는 부모가 아이를 망친다>는 책도 있는데 말이에요 ㅋㅋㅋ

길상사! 안그래도 후애님 귀국하시면 다 같이 함 뭉쳐서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공양시간 맞추어서요^^;;

비로그인 2010-06-2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톤 슈낙의 책을 잠시 펴 보았습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글을 계속 읽다보니, 드러낼 수 없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들 속에서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것이 쌓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내가 주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분노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blanca님 안녕하세요 :D

blanca 2010-06-30 10:4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과거 글에 이렇게 댓글 달아주시니 참 기분이 좋네요. 괜히 대우받는 느낌이랄까요?^^;; 안톤 슈낙의 글 전문을 읽어 본다는 게 이렇게 항상 미루게 되네요. 슬픔이 쌓이면 분노가 된다, 맞는 얘기인 것 같아요. 기쁨이 쌓여 행복이 되기를 바라 봅니다.
 

어린이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땀을 흘리며 시인의 맑고 빛나고 하찮고 스러지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읽었다. 너무 좋아서 빌려 읽은게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줄을 그을 수도 간직할 수도 없고 흔쾌히 다시 살 수도 없는 이 딜레마라니.  

 

 

 

 

 

 

 

당신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의 선택은 마을의 불빛들이다. 불빛들은 갓 핀 다알리아 꽃송이처럼 싱싱하다. 세 칸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의, 꿈과 노동과 상처와 고통의 시간들의 은유이기도 하다. 아름다움보다는 쓸쓸함이, 기쁨보다는 아쉬움의 시간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도 그들은 말없이 불을 켜고 지상의 시간들을 지킨다.-p.120

바다, 고기떼, 어부, 방조제, 해녀들, 아이들, 그리고 등대. 나는 이런 것들을 마음으로 떠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그것들에 대한 얘기는 나를 매혹한다. 특히 그 틈새에 스며 있는 삶의 곤곤한 맛을 짭조롬하게 버무려 소랑고둥 곁에서 시를 쓰는 시인과 동행하는 여로는 고향을 더듬어 마침내 어머니의 자궁으로 가닿는 듯한 안온함을 선물받는 일이기도 했다. 

멸치잡이배들에서 멸치를 털어내다 길밖으로 나오는 멸치에 환호하며 주워담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 소리하는 아내의 윗입술을 돌멩이로 짓찧어 놓은 남편, 그 상처가 살점으로 도드라져 아물어 가며 육자배기 가락까지 절절한 삶의 비애로 축인 할머니의 얘기, 온몸이 흠뻑 빠질 만한 진흙뻘에 널을 밀며 조개를 캐서 자식들을 공부시킨 어머니들의 사연. 

그저 풍경을 멀거니 관조하는 여행기가 아니라 그 속에 함뿍 빠져 하늘 한켠 버려진 낮달을 쓰다듬는 것 같은 얘기들. 

이 얘기들의 잔상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한 채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연상시키는 이 책을 펴들었다. 

 

유대인 저자 에릭 캔델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다달팽이를 이용한 세포내 기억과정을 발견한 공로 등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자서전과 이 기억의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 과정 및 성과가 혼재되어 있는 책이다.  

이탈리아의 유대인 화학자 프리모 레비와 비슷한 전철을 밟은 대목이 있지만 에릭 캔델의 삶은 그의 것과는 판연히 다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끌려가 이것이 인간인가! 라고 절규해야 했던 레비에 비하자면 비교적 쉽게 미국으로 망명하여 학문적 지원과 후원의 세례를 받고 마침내 노벨상까지 수상한 캔델의 삶은 부르주아적으로까지 다가온다. 

그러니 저자의 드라마틱한 삶을 기대했던 나는 그 대목에서부터 조금씩 김이 빠졌고 인간의 정신영역을 생물학적으로 해부하고 신경회로로 해체하는 과정이 생경스럽게 느껴졌다. 인간의 정신기능을 사변적 형이상학의 전유물이 아니라 생산적인 실험의 영역이라 천명하는 그의 목소리가 적이 건조하게 느껴졌다. 

기억을 찾아 가는 여정은 중간까지 왔는데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기엔 너무 덥다고 중얼거려 본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며 읽을 능력도 없고 계속 오독하는 것같아 멈추고 만다. 저자와 번역자의 노고가 우매한 독자 앞에서 스러질 것만 같다. 

시인과 과학자가 나란히 걸어가다 소실점 부근에서는 만날 수 있을까? 멀미가 난다.  

아,오늘에서야 북해도가 훗카이도와 같은 곳임을 알았다. 북해도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 살 딸내미의 비키니를 주문했다. 가고 싶다,가 아니라 갔다 왔다, 고 말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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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것만 읽으셨구나!
블랑카님은 어케 이리도 알흠다운 글만 쓰셔요?

blanca 2010-06-11 20:46   좋아요 0 | URL
마기님!알흠답다,는 말 너무 이쁘네요^^ 대문사진이 마치 모델 같습니다. 3535됐는지 지금 빨랑 가보려구요.

비로그인 2010-06-1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구.

마르셀 푸르스트..

기억. 그리고 몇 가지 생각을 머금고 다녀 갑니다.

blanca 2010-06-11 20:4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저도 곽재구처럼 포구기행을 직접 떠나고 싶어요. 어리버리해서 미아가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리고 아낙네들이랑 어부 아저씨들이 목소리 걸걸하게 사진 왜 찍냐고 막 화내면 울고 ㅋㅋㅋ 역시 사람의 인생은 사람의 성격을 뛰어넘을 수 없나 봐요.

기억의집 2010-06-14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일본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요맘때 피는 수국이 보고 싶기도 하고. 적금 깨서 남은 돈이 있는데 그걸로 갔다올까..그런 생각을 했어요.
북해도는 겨울에 가고 싶어요.^^
에릭 캔델 처음 들어보는데..흥미롭네요.

blanca 2010-06-14 20:21   좋아요 0 | URL
저는 잘하면 칠월 초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잘될지는 모르겟지만요. 이 책은 기억의 집님이 좋아하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생물 시간에 졸아서 그런지 기억이 너무 안나서요. 과학 관련 쪽은 기억의 집님 전문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