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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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에서 최악의 고비, 첫사랑의 단계를 지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존재의 가장자리가
칼날 같아서 당신의 여린 생살을 베히고 마는, 그래서 결국 피를 내고야 마는 그런 상처의 시대에도 마침표는 있다고
얘기해 주기를 바라나요? 그 황홀한 고통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버석거리는 끝은
결국 오고야 만다고 얘기해 버리고 맙니다. 

당신은 이미 결혼이라는 사회적 의례를 통과하고 희미한 열정의 끝을 가만가만 더듬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정의 거스러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나요? 

이도 아니면 당신은 이 모든 애조띤 열정을 담담하게 쓰다듬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늙어버렸을 수도 있겠군요.
근사하게 행복한가요?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한 삶의 느낌, 그 어떤 애욕과 열정의 가능성의 심지마저 이지러져 버린
그 시점에 서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이 책은 자신이 사랑의 '경박함'을 체화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쉰 가까이 된 여자가 자신의 과거의 무모한 열정의
체현인 것 같은 젊은 남자 앞에서 뒷걸음질치고 그에게 맞춤한 또래의 젊은 여자에게 돌려 보내는 얘기입니다.
언뜻 들으면 통속적인 연애 소설 같나요? 하지만 이 책 속에는 삶과 어머니와 사랑에 대한 면밀하고 아름다운 통찰이
바람처럼 불어와 독자의 가슴 속에 스미게 만드는 마력이 있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신경숙 작가 덕택입니다. 그녀가 쓰고 싶었는데 왜 하필 콜레트라는 작가가 이 책을
썼을까, 했다지요. 이 책은 이백 페이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얇습니다. 저는 솔직히 소설에 흠뻑 빠지는 타입이
아닙니다만 이 책을 읽으며 태어나 난생 처음으로 소설 앞에서 설레었답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 책은 콜레트라는, 프랑스에서 국민들에게 '나의 콜레트'라고 불려질 만큼,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질 만큼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여류 작가의 자전적 작품이랍니다. 어떻게 시작하는 지 아세요? 바로 주인공이자
작가의 일흔다섯 살의 어머니가 딸의 두번째 남편의 초대를, 선인장 꽃의 개화 구실로 정중하고 귀염성 있게 거절하는
편지로 시작한답니다. 이 편지는 실제로 작가의 어머니가 사위에게 보낸 편지를 조금 개작한 것이랍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시작의 시작을 붙잡기 위해 늙어갈수록 더 일찍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는 이 작품 전체에서
그녀에게 나이들어가는 것은 스스로 부유해지지 않고는, 즉 재난도 상처도 다 그러모아 차곡차곡 쌓아가지 않고는
그리고 가끔씩 뒷걸음질쳐 그것을 완상하지 않고는 불가능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녀가 젊은 남자에게서 뒷걸음질치고
만 것도 결국은 죽은 어머니가 사랑이 지나가며 그린 그 언제나 꼭 같지 않은 아라베스크 문양이 주는 애조띤 아름다움의
허무함을 상징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사랑을 아는 자만이 사랑을 밀어낼 수도 있답니다. 거짓된 몸짓일지라도 우리는 그 사랑의 결 속에 일상이 스미면
그 황홀함이 어떻게 경박스러움과 무미건조함으로 변질되는 지 화석처럼 굳어버린 추억의 상흔만으로 유추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외쳐대는 그녀가 사랑을 거부만 한 것일까요?

여자들은 행복한 사랑을 해본 횟수만큼 많은 고향을 가지며,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는 하늘 아래서 매번 새로 태어난다.
-p.19 

행복한 사랑에서 우리는 명징한 존재의 순간을 체험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그렇게나 절절하고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또 있을까요? 

행복한 사랑이 참혹한 결말로 종지부를 찍고 가슴 속 저 밑에서부터 수많은 유리조각들이 차 올라 나의 온 몸 속에 생채기를
그어대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살아 있음을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지나가고 난 자리, 꾸덕꾸덕하게 상처가 말라갈 무렵, 우리는 또 돌연 행복해집니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수많은 생명을 낳는 경계선일런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산고로 사랑의 완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미완의 사랑이 남기는 가르침을 낳습니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만이 더 깊이 많이 존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아닐까요? 

당신에게 이 책을 강권합니다. 꼭 새벽에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진부하다고 외쳤던 사랑과 모성애가
가장 덜 진부한 생의 현현임을 절절히 느낄 수 있도록. 

창백한 푸른빛이 방에 들어오는 그 순간, 이 책을 읽으며 마음껏 슬프고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잃고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번역한 역자의 노고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 지도
아울러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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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20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문학동네에서 왜 그리 탐나는 책이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이 책 읽으면 이런 멋진 리뷰가 줄줄 나오려나요? ㅎㅎ
안 그래도 터져나가는 장바구니지만 한권 더 쏘옥 넣었습니다~

blanca 2010-06-20 22:05   좋아요 0 | URL
Manci님 안그래도 일본기행 잘 보고 있습니다. 저도 다담주 쯤 아마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탐나는 책이 너무 많아요. 장바구니는 터지라고 있는 거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06-20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콜레트가 알려진 것은 영화 '지지'덕이지요.80년대에 그녀 작품 몇개가 한권으로 묶인 번역본이 주우출판사에서 나온 적이 있습니다.신경숙 씨도...오...그렇군요.

blanca 2010-06-20 22:06   좋아요 0 | URL
노자님은 모르시는 게 없군요. 진짜. 안그래도 다른 책 읽어 보려 했는데 절판이랍니다.-..- 영어라면 우짜든동 시도라도 해보겠는데 불어 원서는 흑흑.... 영화 지지라구요? 한 번 찾아봐야겠군요.

프레이야 2010-06-20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매력적인 리뷰에 저도 장바구니행입니다.
보관함이 미어터지는데..ㅎㅎ
권유대로 새벽 창백한 푸른빛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순간에 꼭 읽어야겠네요.

blanca 2010-06-20 22:0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정말 번역도 너무 공들여 한 티가 나고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자기고백서처럼 읽히더라구요. 삶은 전연 다르지만 거의 문체는 최명희 수준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근래들어 이렇게 놀라며 읽은 외국 소설은 정말 처음인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10-06-2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
입을 다물 수가 없어!
아~~~~

blanca 2010-06-20 22:08   좋아요 0 | URL
마기님! ㅋㅋㅋ 그저 감탄사로도 커뮤니케이션이 되네요.^^;;

마녀고양이 2010-06-2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장바구니에 넣어야게따.
그런데 어찌하면 블랑카님처럼 아름다운 리뷰를 쓸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합니다~ ^^

얼마 전 결혼한 사람들끼라 한 이야기,, 이제 남자 사냥 안 해도 되니 넘 편해.. ㅋㄷ

blanca 2010-06-21 12:30   좋아요 0 | URL
남자 사냥ㅋㅋㅋ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소개팅 해달라고 조르지 않아도 되고 감정싸움 안해도 되고...벌써 주변에도 미스가 없어지네요...대신 화제가 너무 한정되서 아쉬워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 듣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데...다 가족 얘기만 하게 되요. 여기서 마녀고양이님랑 노는 게 참 좋아요.

穀雨(곡우) 2010-06-21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잠이 많는 저에게는 무리군요...^^
블랑카님의 글은 금요일 밤마다 늦은 시각 방영하는 오늘의 영화같은 느낌입니다. 읽고 있다보면
"음...시간이 없더라도 이 책은 꼭 쟁여서 봐야겠군...근데 이 사람의 언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글에 무슨 유혹의 덫이라도 있는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아무래도 이건 음모야 음모...^^)"
추천과 아울러 살포시 장바구니로...ㅋㅋ

blanca 2010-06-21 12:30   좋아요 0 | URL
곡우님, 댓글을 자꾸 다시 읽게 되네요....그저 고맙고 황송한 찬사입니다.^^;;

강래희 2010-06-2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ㅎㅎ 감탄~~^^
저 책 지난주에 12권 들였는데요,, ㅡㅡ
지금 적잔데 ..ㅡㅡ
그래도 저도 장바구니에 살짝 넣어볼까요?? 오오오

blanca 2010-06-21 21:44   좋아요 0 | URL
arcia님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신경숙 작가의 감성과 통하는 지점에 있는 책입니다. 대문사진 보니 미인이시네요^^

후애(厚愛) 2010-06-22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 보고싶지만 다음에 기회가 오면 꼭 봐야겠어요.^^

blanca 2010-06-22 21:05   좋아요 0 | URL
후애님, 한국에 오시면 제가 선물로 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2010-06-23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3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6-23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게 두 번 읽었어요.
블랑카님은 글은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에요.^^

blanca 2010-06-23 22:32   좋아요 0 | URL
두 번 읽으셨다니 긴장됩니다.^^;;

꿈꾸는섬 2010-06-2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네요. 저도 담아가요.^^

blanca 2010-06-25 20:34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이 댓글을 지금 봤네요. 책 분량도 얇아서 부담도 없답니다.^^ 전체가 시 같은 소설 이에요. 읽기에도 좋고...추천합니다.

자하(紫霞) 2010-06-25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들은 행복한 사랑을 해본 횟수만큼 많은 고향을 가지며,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는 하늘 아래서 매번 새로 태어난다.
사랑은 철학만큼 어려운 것 같아요~
멋진 리뷰이십니다!!^^

blanca 2010-06-25 20:35   좋아요 0 | URL
베리베리님, 퍼스나콘이 너무 사랑스럽네요. 세상에서 젤 어려운 게 사랑인 것 같아요. 가장 아름다운 것도요. 늙어도 죽음을 앞두고도 결국은 사랑한다,는 말이 남는 것 같아요.

2010-08-15 0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5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illyours 2011-03-0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아이엠러브>를 보고는 이 책이 생각나 바로 집어들었어요. 아, 이 근사한 책- 역자의 정성에도 감탄했답니다. 검색해보니 발자크 책도 번역하셨길래, 이제 그 책을 읽으려고요. 오래오래, 깊은 여운으로 남을 것 같아요. 급히 페이퍼를 쓰고 블랑카님 리뷰를 읽으니 두근대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참 좋습니다. 언제나 좋은 리뷰, 감사히 읽고 있어요 :)

blanca 2011-03-03 21:02   좋아요 0 | URL
moon님! 이 책 읽으셨군요. 정말 역자후기가 참 감동적이더라구요. 진정성 있는 자기 고백은 언제나 공감을 얻는 것 같아요. 발자크 책 어느 출판사 것을 번역하셨을까요? 민음사 것 저도 읽었는데 번역자가 누구인지 확인도 못했네요. 읽어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stillyours 2011-03-04 08:14   좋아요 0 | URL
문학동네 책이었어요 :) <루이 랑베르>
역자를 따라 다른 책을 읽게 되는 것도 참 신나는 일입니다!

blanca 2011-03-04 23:31   좋아요 0 | URL
아, 찾아 봐야겠군요! 발자크를 좋아하는데 게다가 번역자까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