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신뢰를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를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이다. 로마의 파비우스 가문처럼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모두 목숨을 바치는 가문을 어찌 백성이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자기희생은 커녕 군역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았다. 지배층이 군대에 가지 않는 나라의 피지배층이 전쟁 때 종군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중

 

 

역사라는 큰 강에 개개의 삶은 낱낱이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결국 하나의 흐름이 되어 과거로 수렴된다. 흐르는 물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를 무색하게 한다. 역사학이 과거학이자 현재학, 미래학인 이유다.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뱉는 공기, 무심코 던지는 말들, 마주치는 시선들은 우리가 과거라고 호명하는 것들의 복기일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래라고 꿈꾸는 것들의 예시일런지도 모른다. 

<조선왕을 말하다>의 저자 이덕일은 보기드문 필력을 지닌 역사학자다. 그는 잠자고 있는 텍스트들을 일으켜 깨워 독자들에게 그 시대, 그 현장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환각을 선물한다. 개별적으로 그 시대의 아이콘격인 인물들을 탐구한 책들은 문학적 서사와 인물에 대한 심오한 탐구, 애정이 버무려져 가슴께를 둔중하게 두드린다. 이 책은 조선시대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선조, 인조, 성종, 영조를 당파적 시선과 성리학적 관점을 걷어내고 섬세하고 예리하게 들여다보고 그들의 행적을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일종의 평설이다. 그의 책들을 이미 많이 접했다면 중복되는 면면이 있어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그와 대면하는 초입으로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악역을 자처한  태종과 세조가 쿠데타의 공신 제거의 딜레마에서 어떻게 양극단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를 조명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태종은 편법의 수단을 천명의 실현 도구로 녹여 내고 왕권 강화를 꾀함으로써 세종을 낳았고, 세조는 기본 헌정 질서를 깡그리 파괴하고 공신들을 법 위에 잠자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후계자인 예종의 의문사를 초래하고 말았다.

쫓겨난 군주들인 광해군과 연산군에 대한 왜곡된 평가에 대해서도 그 자료의 편파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그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광해군이 실리주의 외교정책을 펼친 부분과 연산군의 황음무도한 난행들에 대한 과장 왜곡된 기록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전란을 겪은 선조와 인조는 역사가 외부적 변수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정치적 리더가 편협한 가치관에 빠져 그 난국을 타개하지 못하고 어떻게 진보의 흐름을 역류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반면교사 같다. 명분 때문에 현실을 외면한 정권이 끝내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아야 했던 그 비극적 대목은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건조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두 졸렬한 군주의 공통점은 열등감과 시기심으로 사람을 잃었다는 데에 있다. 전란을 극복하는 데에 일등공신이었던 이순신과 유성룡을 내친 선조와 근대화의 물결을 수혈받고 실리외교론까지 체화하고 온 준비된 후계자인 소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조. 결국 외세에 의하여 강제로 서양문물을 향해 개방해야 했던 미래는 이 시점에서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격렬한 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하면 반대 당파의 재기를 막기 위한 정치 보복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치 보복은 권력 강화가 아니라 권력 약화의 길이었다. 진정한 권력 강화는 반대 당파의 탄압이 아니라 반대 당파의 인정을 통해 이룩되기 때문이다. -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중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전언이다. 조선 후기 당파싸움의 길목의 가장 큰 희생자는 아마도 뒤주에 갇혀 죽고 만 사도세자일 것이다. 영정조 시대를 흔히 조선 문예 부흥기로 꼽지만 정작 한중록에 의하여 패악무도한 정신병자로 묘사된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엄밀한 조망은 결여되어 있다. 영조가 평생 시달렸던 경종 독살설의 배후로서의 지목과 비천한 신분의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는 태생적으로 그의 정권을 떠받치고 있었던 노론과 독자적 노선을 걷는 것을 방해했다. 사도세자가 이런 당파싸움에서 주도적 노선을 걷기 시작하며 미움을 받았다는 대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전히 이 대목은 논란이 되고 있고 왕위를 계승한 정조와도 연결된 지점이라 최근 <정조어찰첩>이 공개되었을 때 또 한바탕 학계와 언론계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까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는 인간. 그러나 이 시도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자 역사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이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하고자 하는 저 후안무치한 시도들이 결국은 진실의 장에서 무용한 것으로 판가름 나기를 바라 본다.역사 읽기는 그래서 언제나 현재에서 여전히 진실을 채굴해 내는 하나의 은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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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06-17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갑자기 역사라는 게 가진자의 권력 다툼의 기록이구나 싶네요.^^

blanca 2010-06-18 10:36   좋아요 0 | URL
예. 기억의 집님. 사람들이 다 시간 앞에서 무력하지만 힘없는 자들은 문자로도 남을 수 없다는 게 참 씁쓸하네요.

2010-06-17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8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17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나는

잘못된 것, 잘한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뭔가 배울만한 것을 제대로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근대를 지나야 했다는 것이 서글퍼집니다. 해야 할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의 경계도 명확치 못한 아픔도요.

blanca 2010-06-18 10:3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현재에서 과거까지 마구 수정하고 재단하고 왜곡되게 해석해서 이용하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들도 미래에 결국 그렇게 쓰일까 두렵습니다.

마녀고양이 2010-06-1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역사 이야기 참 잼나지요? 이덕일 씨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못 읽었다눈.. ㅡㅡ;;

얼마 전에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을 읽었는데, 맘이 참 징하더군요. 우리 역사의 정치 싸움을 읽다보면 가슴 아플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우리 후세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렇겠죠? 노무현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blanca 2010-06-18 10:4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사도세자의 고백> 진짜 강추예요. 이덕일씨의 시각도 중립적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진짜 마지막 장면은 소설보다 더 슬프답니다.-..- <조선을 뒤흔든~> 재미있을 것 같아요. 역사가 제대로 평가해 주기를 바라 봅니다.

순오기 2010-06-1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지 몰라도, 작가는 패자와 백성의 역사를 기록하지요.
사도세자의 고백, 저도 강추합니다.
어제까지 '최숙빈' 읽었어요~ 동이를 한번도 안 봐서, 리뷰를 쓰려면 한번은 보고 싶은데 언제 하는지...
남한산성, 소현, 최숙빈~~~~시리즈 도서 같아요.

blanca 2010-06-19 13:4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맞아요. 조정래샘 책 읽고 소설가가 역사 속에서 패자들의 역사를 다시 쓰는구나 싶어 감동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거의 소설 만큼 감동적이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영조가 정조한테 왕위 승계 하는 장면은 정말 눈물 나더라구요. 소현세자는 오늘 서점가서 봤는데 생각보다 얇아서 놀랐어요. 요새는 왜이리 얇은 책이 좋은지요 ㅋㅋㅋ 동이는 저도 생각보다 드라마를 안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