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 위험 가득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남기, 최신 개정증보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김현구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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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상품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직원의 권유로 가입한 상품은 공격형 투자에 적합한 파생투자상품 위탁 판매를 통한 것이었다. 소액이라면 소액이라지만 최근 독일 국채 관련 파생 상품이 급격한 원금 손실을 보면서 은퇴자금 전부를 그 관련 상품에 넣은 노년층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들으면서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 손실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찬찬히 상품 설명서를 들여다 보면 원금 손실이 나기 쉬운 설계였다. 다섯 장도 넘는 상품 설명서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전문가의 설명에 건성으로 응수하며 힘들게 번 돈을 공격적인 투자 상품에 넣은 것이다. 헛똑똑이는 '블랙 스완'에 먹혔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나는 결단코 그 상품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월가의 파생상품 투자 전문가로 일한 경력이 있다. 1987년 '블랙 먼데이'는 그가 '블랙 스완'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 세계의 불확실성과 비예측성을 얘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백조라면 응당 흰색일 거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까만 백조는 이 세계에 대한 이론의 틀, 플라톤적 관념 체계 자체를 전복시키는 혁명이었다. 나심은 이 '예측 불가능성'과 '우리가 모르는 것'에 집중한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


나심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럴듯한 스토리에 쉽게 현혹된다. 낱개의 사실들은 연결 고리로 뭉클한 이야기로 거듭난다. 그 행간에는 거짓과 과장, 온갖 곡해가 개입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오류다. 그럼에도 환원주의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우리는 모두 두서없는 날것의 진실보다 매끈한 거짓 이야기를 더 믿으려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적 세계에서 소수의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된다. 


이야기 짓기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 읽는 시간을 줄이고, 인터넷을 무시하라. 결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p,233

상당히 도발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선정적인 뒷이야기, 감동적인 스토리로 왜곡된 진실이 뒤늦게 드러나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충분히 봐 온 점을 감안한다면 나심의 도발은 타당하다. 건조한 진실의 입에 기꺼이 손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세계화, 지구화에 대한 우려


세계화가 취약성이 서로 얽혀 오히려 파괴적인 검은 백조를 양산한다는 나심의 의견은 예리하다. 금융 전문가 및 경제학자 등을 대놓고 저격하고 그들의 통계 수치를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킨 이 책은  수많은 논쟁에 불을 지피고 적을 양산했다. 하지만 그의 책은 뒤이어 일어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하나의 예언서로 격상되는 이변을 맞는다. 그는 이미 금융기관들이 합병되어 비대화되고 현실과 맞지 않는 확률에 기댄 예측치로 복합 상품을 설계하여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일이 엄청난 파국을 맞을 것이라 예고한 바 있다. 작금의 현실을 예감한 듯 나라 간 이동이 용이해지며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확산될 위험이 크다는 우려도 있다. 이 세계의 복잡성은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의존적으로 얽혀 예측 자체가 무의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레바논인인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처음 전쟁이 발발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낙관적 희망을 가졌던 것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목도하게 되며 회의주의적 경험론자로 거듭난다.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는 낙관에서도 비관에서도 여지없이 노출된다.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과 비정형성, 비선형성을 이제는 감내해야 할 시간이 왔다.



그래서 그렇다면 어떻게


나심은 자신의 책이 경제서가 아니라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실제 확률에 관련된 장은 일반 독자들은 건너 뛰어도 좋다고 덧붙인다. 몽테뉴와 세네카에 대한 경의는 시종일관 그의 아름다운 문장과 만난다. 이 책은 그의 주장처럼 경제서가 아닌 것도 아아니고 그가 어쩌면 기대했을 철학서라고 보기에도 그 모든 요소를 건너지르고 아우르는 방대함이 있다. 세계에 대한 사람들이 흔히 주목했던 전문가 집단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뒤에 그는 쉽게 허무주의로 전락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은 세네카에 대한 얘기다. 철학자 세네카의 서한집에 나오는 아이들과 부인을 잃은 스틸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고전의 마지막 장을 장식해도 좋을 정도로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스틸보의 대답은 '니힐 페르디티, 옴니아 메아 메쿰 숨트' 였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나의 재산은 모두 내 안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회의주의는 삶 자체를 방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진지한 비판 의식을 가져야 하고 누군가 지나치게 그럴 듯한 논리를 펼 때 의심의 촉수를 뻗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졌다고 자만할 때 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그럼에도 나는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 인사는 세네카의 'vale'라는 인사로 갈음했다. '강인하기를'  우리 모두가 극한 확률을 뚫고 태어난 거대한 검은 백조라는 그의 시어 같은 이야기에 맞춤한 작별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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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맥퀸 - 광기와 매혹 현대 예술의 거장
앤드루 윌슨 지음, 성소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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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가 된다는 건 거물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심지어 자기 분야에서 전위적인 선구자의 역할을 맡는다는 건 대체 어떤 부담감과 압박감을 가져오는지 그 당사자의 마음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명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 두 세계의 균형점을 찾아 그 지점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사적 개인과 공적 개인의 두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그 분열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통합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누리는 명성, 권력, 재력에만 주목하고 그 뒤안길에서 흘릴 눈물은 흔히 무시해버린다. 이제 그러한 이름을 가지고 자신에게 어떤 목적이 있어 다가오는 이들, 상업적 이윤을 끊임없이 창출해야 하는 부담감, 혁명적인 새로움을 항상 창출해야 하는 부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어린 시절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한 천재를 좀먹어 가는 과정에 동행하는 일은 참으로 힘겨웠다. 마치 그의 주변인, 심지어 그 자신에게 들어가 그러한 고강도의 삶을 체험하는 느낌, 그리고 그 비극적인 결말. 과연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알렉산더 맥퀸. 그의 이름은 거의 하나의 고유 명사가 되었다.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자라나 성적 학대와 빈곤에 시달리던 그가 최상류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다. 열두 살이 되자 그는 패션계의 거물이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고 능청스럽게 이야기한다. 패션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디자이너들의 경력을 찾아봤다고 한다. 소년의 꿈은 실현되었다. 고모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진학하게 된 패션 스쿨 패션쇼에서 그는 '보그'의 이사벨라 블로의 눈에 들게 된다. 이후로 둘의 기이한 공생 관계는 난임이었던 블로가 맥퀸을 자신의 아들이자 또다른 자아로까지 생각하는 관계로 진전하게 된다.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에 빠진 블로는 맥퀸을 자신의 상류층 세계에 끌어들이고 지원하여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브랜드를 완성하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맥퀸은 전위적이고 반역적이었고 혁명적이었다. 패션쇼 자체를 보수적인 세계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그 자신의 위인전으로 격상시킨다. 언론의 혹평과 호평은 항상 동시에 쏟아져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인간 본능의 어둡고 심오한 악마적 분위기에 그는 침잠한다. 그의 노골적이고 기이한 옷들과 쇼는 그 자신을 유명하게도 만들었지만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했다.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되었을 때 그에게 가해진 어마어마한 압력과 부담은 상상 이상이었다. 패션계는 냉엄하고 잔혹한 자본주의의 집약체였다. 그는 소진되었고 구속되었다. 약물과 방탕한 생활과 천재적 성취는 혼재되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배신하고 배신 당하고 이용하고 이용 당하고 실험하고 선도하고 창조하고 절망하고 넘어지고 무너졌다 다시 일어섰지만 영혼의 쌍둥이 같았던 블로의 자살과 어머니의 죽음은 결국 그를 허물어뜨렸다.


"죽음은 슬픈 일이죠. 우울하지만 동시에 낭만적이에요. 죽음은 인생이라는 한 주기의 끝이에요. 무엇이든 끝을 맺어야 해요. 죽음은 새로운 것이 태어날 공간을 마련해 주니 긍정적이죠."


악동 훌리건이라는 호칭을 얻었던 맥퀸은 6형제 중 막내였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엄청난 부를 거머쥔 후에도 노모 앞에서는 목이 메는 아들이었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어린 시절의 상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은 슬프다. 대답은 "엄마보다 먼저 죽는 거요."였다. 맥퀸은 그러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썼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는 약속과 자신이 세상을 향해 남긴 작품들이 남길 의미들을 기약하며 그는 새로운 것이 태어날 공간을 예비하고 떠나 버렸다. 


맥퀸의 친구는 그가 아무리 대가들에게 극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도 자존감이 낮았다고 얘기한다. 돈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 순간의 새로움에 탐닉해서 끊임없이 그것을 강박적으로 쥐어짜야 하는 패션계, 본질적 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교환되는 세계에서 그는 불행했다. 그의 모습에서 읽는 자들은 스스로의 단편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긴 채 사라져버린 그의 비극적인 결단이 남기는 여운이 가지는 두려움에서 우리의 삶,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자본주의의 무모한 룰렛 돌리기에 잠식 당하지 않기 위해 과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더 난해하고 심오한 질문에 둘러싸일지도 모른다. 맥퀸은 죽어서도 이렇듯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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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내려서 신난 멍뭉이처럼 연휴 왔다고 여기저기 인사댓글 달고 다니는 syo입니다.
blanca님, 복된 연휴 되세요^-^

blanca 2020-01-24 13:21   좋아요 0 | URL
멍뭉이 ㅋㅋ syo님도 즐거운 신나는 연휴 되기를 바랍니다. 날씨도 따뜻해서 한층 더 좋네요.
 
나의 문구 여행기 -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용기에 대하여
문경연 지음 / 뜨인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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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이 되면 교보문고 문구 코너 다이어리 판매대는 여전히 붐빈다. 내지를 그득 채우지 않더라도 새해에는 무언가 좀더 계획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일종의 의식처럼 종이 플래너를 사는 습관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무리 스마트폰을 껴안고 살아도 내가 새해에 가지는 비장한 결심에는 종이와 연필이 필요한 법이다. 그 틈에 중후한 노신사가 서서 다양한 다이어리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당신에게 새해는 당신을 둘러싼 젊은이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겠지만 여전히 새로운 결심과 의지와 파이팅을 품고 있을 것이다.


나날이 죽어간다고 이곳저곳에서 애도하는 활자의 시대에 여전히 아날로그적 문구 시장은 건재하다. 쓰지 않는 연필이라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연필들을 수집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종이 노트, 다이어리 꾸미기(일명 다꾸), 스티커, 스탬프, 엽서, 파일 등에 다양한 브랜드가 생겨나고 확장된다. 사람들은 꼭 그것들을 백프로 소비하지 않아도 소유하고자 수집하고자 하는 열망에 기꺼이 굴복한다.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고 대단한 공간을 요구하지 않는 이 시장이 죽지 않는 것에 안도한다. 동네 문방구가 하나둘씩 문을 닫아도 그 안에서 고작 연필 한 자루, 노트 한 권, 지우개 한 개를 한 시간이 넘게 고르며 주인 아주머니와 근황을 주고 받던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사랑은 비단 책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문구에게까지 확장된다. 이 사랑은 그런데 왠지 떳떳하지가 않다. 그게 문제였다. 문구 사랑은 왠지 내밀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불러온다. 


'아날로그 키퍼'라는 범상치 않은 문구 브랜드를 운영하는 저자도 그러한 저어함을 고백한다. 이 책의 표지에는 심지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용기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 전쟁에 뛰어드는 대신 문구덕후는 63일간의 문구 여행을 감행한다. 파리에서 베를린에서 바르셀로나에서 런던에서 상하이에서 그녀가 찾아간 곳은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문구점이었다. 문을 열기 전 대기했다 주인이 장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설레어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구 여행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다. 문방구에 찾아가고, 사진 찍는 게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이 멋진 문방구를 눈으로만 담으면 되지, 왜 사진을 찍고 글을 써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배배 꼬인 마음을 이겨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잔뜩 흡수했다. 마음껏 호들갑을 떨었다. 

-p.180


그녀의 호들갑이 때로 생략했던 기록들이 쑥스러워했던 사랑이 열정이 이 책의 골조다. 그 여정에서 사회에서 주입한 것들이 아닌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세상을 향해 표현하는 일은 통속적이지 않다. '아날로그 키퍼'에서 구입한 소위 떡메모지의 그 평범하지 않은 격자무늬도 주인장의 마음을 알고 나니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를 목도하는 느낌이다. 그 사랑은 언뜻 가벼워보이지만 제대로 느끼면 묵직하다. 사랑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의 시연에 전염된다. 내가 제대로 미처 표현 못했던 사랑들에 무언가를 제대로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은 이 아름다운 음각의 각인들이 남아 있는 하얀 책에 대한 되돌려 보내지 못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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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다층적이고 가변적이고 복합적이다. 한 마디로 단정짓기도 일반화하기도 어렵다. 분명한 것은 어떤 역학 관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구태여 갑과 을이라는 구도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렇다. 힘의 균형이 어느 한 쪽으로 많이 가 있을수록 그 관계가 건강한 지속성을 가지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쉽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지만 그것 또한 관계와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져 주는 사람이다. 이것은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관계로 상대를 포용하기로 설정한 불균형에 다름 아니다. 끊임없이 배신하는 연인을 언제나 받아주며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라 자위하는 것은 그런 드라마에 중독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한 역할에 대한 심리학적 용어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인에이블러(Enabler)'다. 
















표면적으로는 '조력자'인데 이러한 의존 관계가 결국 도움을 받는 사람의 성장과 삶까지 망친다는 통찰은 놀랍다. 저자 스스로를 '인에이블러'로 칭한다. 네 아이의 엄마이자 우울증을 가진 배우자의 아내로 그녀가 해왔던 역할은 그들의 우울감, 분노를 받아주고 흔들리는 상황에서 의사 결정을 대신해 주고 여러 부정적인 상황의 방패막이 역할까지 떠안는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역할이 사회적으로 결혼한 여자에게 기대하는 이상주의적 기대와 겹친다,는 지적은 기억할 만하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자질구레한 일상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아이들을 학교, 학원으로 실어나르고 교사에게 아이의 지각 이유까지 대신 변명하며 뒤치다꺼리를 하는 아내, 엄마의 모습은 여기에서 얘기하는 '인에이블러'의 초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력자의 역할이 결국 그 의존 관계에서의 상대가 실제 삶의 여러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하며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과 성장의 저해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대목이다. 상대를 위해서 한 행동이 결국 상대에게 방해가 됐다는 자각은 저절로 오기 어렵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했는데 너는 더한 것을 요구하고 그간 내가 주었던 것들까지 부정한다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부부 관계, 부모자식 관계에서 이러한 비극적 역학이 발생한다. 그것은 삶 그자체가 문제가 없이 완벽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고 한다. 그러한 완벽한 삶을 선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고 그 지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팔을 걷어 부치고 해야 한다,는 믿음은 결국 나도 상대도 그리고 그 둘의 관계도 파괴하게 되는 맹신이다. 


자신의 생애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소재로 독자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저자의 설득력은 기대 이상이다. 나도 나와 가족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저도 모르게 인에이블러가 되었던 적도 그 상대가 되었던 적도 있다는 깨달음은 명치를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내가 속해 있는 원가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과 아직 단단하지 않은 내 자존감의 허약한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앎 또한 그랬다. 결국 내가 내 자신에게 가진 사랑의 양 만큼 상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낮은 자존감으로 연결된 관계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삶이 그 어떤 고난, 상실, 고통 없이 완벽할 수 있다는 유아적 믿음에 매달리는 한 인간의 성장은 불가능하다. 잘 사는 삶은 삶 자체의 모순과 그 불완전함과 변화를 포용하려는 그 기꺼움에 기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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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1-09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blanca 2020-01-10 08: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카스피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2020년 되기를 바랍니다.
 
휘파람 부는 사람 - 모든 존재를 향한 높고 우아한 너그러움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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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올리버는 사적인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했던 것같다. 여러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녀의 시가 낭송되고 각종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은둔에 가까운 삶을 그녀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그녀는 자신의 시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느낌으로 응답한다. 그리고 그녀의 동반자를 묘사한 시 <휘파람 부는 사람>을 그래도 딴 이 책이 바로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 되었다.


<휘파람 부는 사람>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고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솔직하게 표현한다. 우리는 그녀를 대면하지 않아도 그녀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평온한 삶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다. "지난주에는 황금빛 작은 태양 같은 거북이알을 먹었고, 오늘은 주엽나무 꽃을 먹을 것이다."는 엉뚱한 고백. 관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손수 요리해 먹으며 살찌우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진다. 가식도 과장도 생략도 없다.


그녀 자신의 얘기뿐만 아니라 프로스트, 휘트먼, 포에 대한 이야기는 짧은 지면 안에 시인들의 전생애를 심도 있게 관찰하고 그들의 시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분석도 인상적이다. 막연하게 그들의 삶의 단편들을 접하고 그들의 시를 토막토막 끊어 읽는 우리들에게 진짜 시인이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위대한 선구자들에 대한 분석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구나 싶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일례로 우리는 이 대목을 읽고 나서야 포가 왜 그렇게 음울하지만 아름다운 시들을 토해냈는지 그의 성장과정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게 된다. 시인들의 개인적 삶을 그들의 시와 분리해서 이해한다는 건 그들의 작품을 진정한 의미에서 해독하는 데에 한계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다가 가느다란 은빛 줄무늬가 들어간 검정 레이스를 흔들어 과시한다. 이따금 개들이 행복한 발로 모래밭을 질주하다 올아온다. 우리가 다시 방파제에 이르러 마당을 건너기 전에 밤은 지나가버린다. 우리는 집 문 옆에 서 있다. 우리는 날카롭고 흰 낮으로 이어지는 연푸른 반도에 서 있다. 작고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장미 덤불 아래서 뛰어간다. 개들이 기분 좋게 짖어댄다. 

날마다 하루가 이렇게 시작된다.

-p.138


그의 전령인 말로 그려지는 그림 같은 풍경에 사람과 문명은 없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휘파람 부는 사람'이 든든하게 서 있다. "아름다운 걸 보고 가슴이 환호할 때마다 달려가 말해 주고 싶은" 사람이다. "사춘기가 다시 돌아온 기분"을 느꼈던 사람과 30여 년을 함께 살아왔다는 그녀의 고백은 감동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고 삶의 의미를 확신하는 시인의 희망어린 마무리에 2020년이 따스해져 온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운명이다." 이 짧은 문장 안에 그녀와 우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듯하다. 사족이 필요없는 얘기다. 간직하고 싶은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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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1-03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을 읽으며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카야와 테이트를 떠올립니다. 아침부터 뭉클합니다 감동 감사드려요ㅜㅜ

blanca 2020-01-03 16:4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달밤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그렇게 좋다면서요! 몇 번이나 읽을까 하나 지나갔는데 결국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하긴요, 시간 내서 글 읽어주시는 님이 고맙죠.

프레이야 2020-01-03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굿모닝 블랑카님
우리 모두는 서로 운명이다. ^^

blanca 2020-01-03 16:46   좋아요 1 | URL
벌써 오후가 되어버렸네요. 새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프레이야님. 많은 성취가 있었던 나날들 더 복된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라로 2020-01-03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름 알라딘에서 메리 올리버를 일찍 발견했다고 혼자 우쭈쭈하는 저는
이제 메리 올리버와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네요.
너무 책을 안 읽고 있는 저는 블랑카 님을 보며 반성은 안 하고 그냥 부러워 하는 걸로 만족.^^;;;

blanca 2020-01-03 16:48   좋아요 0 | URL
라로님은 지금 정말 바쁘고 보람된 나날들을 보내고 계시잖아요. 저는 라로님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