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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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소설의 흡인력은  이미 비교적 쉽게 획득한 핍진성보다는 사실들의 행간의 맥락, 인물의 내면의 심리의 묘사력에 기대는 바가 크다. 이미 벌어진 일들은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독자가 그러한 사태와 상황 속의 인물에 몰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전제일 것이다. 시공간의 낙차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러한 내면의 묘사가 가지는 공감의 힘이다. 


그러한 면에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배교자들은 비겁해 보이지 않는다. 17세기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포르투칼 로드리고 신부의 수난의 과정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그의 스승이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에 굴복해 배교한 과정은 결국 제자인 '나'의 여정에서 비로소 다른 측면에서 이해되고 재조명될 것이다. 기적도 극적인 해피엔딩도 없이 건조하고 어쩌면 외형적으로는 패배의 여정이라 할 만한 그 처절하고 사실적인 선교 과정의 묘사는 실제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와 종교를 공유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하고 감동 받을 만한 것이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우리가 삶에서 청춘일 때 인생에 기대하는 어떤 열정, 이상과 합치하지 않는 생의 간극에서 가지게 되는 회의의 정경에서 흔들리는 대목을 그래도 체현하고 있다. 비겁자 스승의 발자취를 좇으며 그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들은 비단 종교적인 것들만이 아니다.


드라마틱한 기적도 신의 응답도 실종된 침묵의 현장에서 고통받으며 순교하는 무고한 신도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성화를 밟고 배교하기를 강요 당하는 고문의 현장에 선 로드리고 신부의 고통의 묘사가 절절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대체 이 머나먼 이국으로 와 응답이 없는 신을 위해 이 생에서도 굶주리고 위정자들에게 핍박받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고문에 몸부림치며 죽어가야 하나, 라는 회의론적 의문은 치열하게 그를 압박한다. 모든 흔들리는 희미한 질문들을 엔도 슈사쿠는 피하지 않는다. 선교라는 미명하에 변형되어 아예 실체조차 불확실한 종교의 변용에 대한 회의도 비록 일본인의 입을 빌렸지만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수없이 바다를 횡단하여 이 작은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그건 정녕 희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매미가 울고 있는 한낮, 목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은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며 신도들의 작은 배를 쫓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 신부는 벽을 향하고 앉아 소리를 내어 웃었다.

-p.215


유다처럼 로드리고를 밀고하고 팔아 넘기고 부인하고 도망치지만 끝내 그의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기치지로라는 인물도 어쩐지 눈물겹다. 약한 본성과 엄혹한 상황에 몰려 계속 자신의 신앙을 부정해야 했던 그지만 그럼에도 반복해서 돌아오고 신부 곁을 맴도는 그의 현실은 신앙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는 용감한 신도들의 모습보다 더 현실적이다. 엔도 슈사쿠의 인물들은 고정적이고 용감하고 이상주의적인 대신 현실적이고 유동적이고 회의하고 모순적이라 우리의 삶과 더 가깝다. 그 모두의 변심과 배교는 그래서 미약한 마침표가 아니다. 수많은 질문들과 실종된 답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취다. 그는 감히 답하거나 설명하지 않은 채 마친다. 그것은 한계이기도 하고 최대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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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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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진창에 빠졌을 때, 고단한 버티기에 지쳤을 때, 인간과의 소통이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마들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지키고 있었을 온갖 야생화와 동물과 곤충에게서 받을 위안을 상기시키는 아름다운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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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일기
올레 토르스텐센 지음, 손화수 옮김 / 살림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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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목수가 의뢰받은 한 가족의 130년 된 다락을 개축하는 과정에 대한 투박하고 가감없는 이야기가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왜 이리 뭉클한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이 시대에 사라져가는 육체를 동원한 고전적인 일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자아내는 향수가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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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0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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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미리 정해진 일이었다. 나는 우리 인생이 트럼프 카드와 같다고, 누굴 만나고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지는 카드가 어떻게 섞이는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운명의 손에 들려 게임 판으로 나간 카드는 버려지기도 하고 다른 손에 넘어가기도 한다.

- 대프니 듀 모리에 <몬테베리타> 중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들은 농밀하다. 압축적이다. 일상의 균열로 그 사람의 삶 전체에 건 헛된 기대와 믿음을 배반하는 이야기들이다. 상대를 의심했는데 결국 문제는 나였다. 나만 소외되어 세상은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 결국 우리가 기대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룩한지 허약한지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남기고 가는 나머지는 결코 '내'가 아니다. 이 모든 무자비한 우연성, 비논리성, 불합리가 나마저 해체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미스테리적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삶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유지하는 미덕은 흔한 것이 아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지금 쳐다보지 마>에서 '나'는 아이를 잃고 이탈리아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쌍둥이 노자매의 허무맹랑한 신비한 예지 능력에 기대는 아내를 비판한다. 아내는 나약하고 나는 강인하다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전은 그것마저 하나의 허상임을 일깨운다. 나는 결국 나의 미래를 본 것이라는 각성은 뼈아프다. 


히치콕 감독의 <새>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의 단편을 영화화한 것이다. 대자연의 재앙은 인간의 대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일상의 견고함 또한 그렇다.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들, 내가 믿는 사람들, 내가 나라고 여기는 것들의 지반 자체가 흔들릴 때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서 나를 덮친다. 심지어 내가 살고 있다고 여기는 시간, 공간적 공간 또한 미심쩍다. 과거를 회고할 때 흔히 우리는 그 시간, 그 공간에 나로 있었던 나날들조차 실재했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푸른 렌즈>에서 여주인공 마다가 시력 복원 수술을 하는 동한 임시로 꼈던 푸른 렌즈는 주변 사람 모두를 끔찍한 동물들 형상들로 변모시킨다. 마다는 모두를 의심하게 된다. 그들의 선의, 배려 등도 그 렌즈를 통과하면 미심쩍고 사악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거대한 은유다. 우리가 모두 사회적 페르소나를 입고 사회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 아래 맨얼굴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놀랍다. 


마지막 <몬테베리타>는 감동이 있는 진지한 모색이다. 동양적 이상향인 무릉도원이 연상되는 '몬테베리타'로 떠나버린 여인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두 남자의 삶. 한 사람은 여전히 세속에 발을 담그고 나머지 한 사람은 결국 세속과 몬테베리타의 경계에서 헤매다 죽음을 맞는다. 우리가 있는 여기를 '홍진'에 비유한 것, 거기에서 바라보는 이상향인 몬테베리타 또한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거기에 도달해서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들에 대한 냉정한 직시, 직관이 빛나는 작품. 산다는 것과 꿈꾸는 것의 경계에 선 작가의 성찰이 뭉클하다. 결국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거나 누릴 수 없다는 한계의 자각에서 우리는 다시 출발한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여전히 놀랍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며 진지한 고민을 하는 방법을 아는 영리한 작가다. 그녀를 읽는 일은 결국 우리 삶의 독법과 만난다. 허무하고 시간 낭비가 아닌 일. 읽기의 무게를 여전히 실감하게 하는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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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06-26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www.cinecube.co.kr/news/notice_view.jsp?b_idx=2&uid=10092&rnum=1
씨네큐브에서 히치콕 특별전을 하고 있습니다.^^ 레베카는 7월 1일 저녁에 하네요.우리 벙개할까요? ㅋㅋㅋ

blanca 2020-06-27 09:03   좋아요 0 | URL
흑, 아쉽게도 번개는 못하지만 테레사님 보시고 오시면 꼭 후기 부탁드립니다.!!!

유부만두 2020-06-30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아침에 다 읽었어요. 매우 옛 이야기 같은데도 긴장감이 대단하네요.
은근 무서워서 한 호흡에 다 못 읽고 재미를 아껴가며 읽었어요.
읽고 나서도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고요. 듀 모리에의 다른 소설을 더 읽어야 겠어요.

blanca 2020-06-30 19:06   좋아요 1 | URL
그죠, 유부만두님. 저 다 읽고 나니까 아까울만치 좋았어요. 안 그래도 저 지금 또 다른 책 대기중이랍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가 비교적 작품이 많아 다행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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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험은 그 이전으로 건너갈 수 없다. 잠시 입원했던 병동에서 한 경험,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 앞에서 내는 소리, 무너지는 존엄을 목격한 이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나와 다른 종족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다 알면서 견디어낸 걸까. 나는 너무 순진했었다.


그것이 명분도 대의도 부족한 그래서 내가 기꺼이 머리로 정제된 말로 반대했던 전쟁이었다면. 그리고 그 전쟁에서 내 옆의 동료가 죽어나가고 때로 무고한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고 그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일이었다면. 그리고 그 전쟁이 끝난 후에 그건 잘못된 것이었다고 우리가 구태여 참가해서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던 거라고 확인사살까지 시켜준다면. 게다가 하필 나는 글을 쓰는, 그래서 나의 그 무참한 기억들을 목격자로서 다시 복기해 내며 경험해야 한다면. 죄책감과 패배감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한데 그러모아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인 적도 있었다고 딸에게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작가라면. 그 무게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팀 오브라이언은 실제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이 소설은 그 전쟁에 참전한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것이다. 함께 한 전우들, 전장에서 사라져간 그들, 돌아온 그들, 그곳에 오기 전의 팀 오브라이언, 그리고 지금 그렇게 다시 글을 쓰며 그들을 소환해 내는 작가의 시점, 시차가 스물두 편의 이야기에 혼재되어 있다. 너무 사실 같아서 이것은 흡사 소설이 아니라 그냥 팀 오브라이언의 자전적 경험의 치열한 기록물 같기도 하고 때로 너무 거짓 같아서 다 꾸며낸 팀 오브라이언의 전쟁 연작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 혼란과 애매모호함에 독자를 던져놓고 그는 자신이 처했던 괴로운 딜레마들과 갈등들을 우리도 함께 경험하고 성찰하고 고찰하고 마침내 우리의 삶에 통합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전쟁은 순전히 자세와 운반의 문제였고, 그 혹 같은 등짐이, 일종의 타성이, 일종의 공허함이, 욕구와 지성과 양심과 희망과 인간미의 그 무디어짐이 전부를 차지했다. 그들의 원칙은 발에 있었다. 그들의 계산은 생물학적이었다. 그들은 전략이나 작전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p.31

이것은 전쟁에 대한 대단히 직관적인 이해다. "그들은 전략이나 작전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문장의 진동이 전해져 온다. 전쟁은 우리가 머리로 그럴듯한 언어로 정당화하는 명분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육과 폭력과 무모함과 비이성과 광기와 하루 하루의 생존에 더 가닿아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늙은 가진 자들의 탁상공론하에 전장에 내몰린 어린 청년들의 발이 있다. 모든 더럽고 직시하기 힘든 것들을 우리는 그들에게 밀어버린다. 팀 오브라이언 자신도 있었던 곳이다. "용감함은 목적이 아니었다. 그보다, 그들은 너무 겁나서 겁쟁이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사실적이고 진실을 품고 있다. 용감한 군인, 승전 퍼레이드, 정의 수호, 약자 보호와 전쟁은 멀다. 


<레이니강에서>는 징집을 피해 캐나다로 달아날까? 를 고민했던 스물한 살의 팀의 모습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도망자를 묵묵히 지켜보고 다시 현실로 돌려보낸 놀라운 목격자이자 진짜 어른인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이 소년티를 채 벗지 못한 어린 청년의 마음을 짐작했지만 그것에 대해 일언반구 그 어떤 조언도 경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곁에서 침묵하고 그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지지해줌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를 전장에 돌려보낸다. "그 남자는 알았던 것이다."는 이십 년 뒤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그 작가로서의 자아의 초자아다. 그것은 가상의 노인이었을 수도 있고 그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는 전장에 들어가서 마침내 이 글의 소재를, 주제를 몸소 살아낸다.


진실한 전쟁 이야기는 결코 교훈적이지 않다. 그것은 가르침을 주지도, 선을 고양하지도, 인간 행동의 모범을 제시하지도, 인간이 지금껏 해오던 일들을 하지 않도록 말리지도 못한다. -p.89


이 이야기들의 가치는 이 이야기들이 순진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데에 있다. 명분도 합리성도 이성도 논리도 실종된 곳에서 이십 대의 청춘들은 하루하루 견뎌 나간다. 때로는 자신의 내부에서 악을 발견하고 처절한 잔인함을 목도하고 소스라치며 하나의 거대한 서사의 축이 되어나간다. 청춘은 너무 이르게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의 죽음을 가정하고 예상하고 옆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며 때로 아직 남아 있는 생에 전율하고 그것에 경도되기도 하고 삼자오 압도당하여 스스로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게 내가 전우의 죽음을 야기하기도 하고 그것은 평생에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으로 남는다. 팀 오브라이언은 그러한 죽어간 전우들을 이야기로써 다시 부활시키며 죽음에 맞선다. 그는 사라졌는가 싶으면 다시 돌아와 자신이 하는 얘기의 진실성의 근간을 흔들고 독자를 깨우고 때로는 그 행위 자체로 이 이야기 모두가 소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임을 방증하는 교묘하고 모호한 모습을 보여준다. 진실한 전쟁의 이야기는 삶 그 자체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며 그렇다면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전쟁을 경험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그 이야기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지점에서 그는 유유히 빠져나간다. 


나는 내가 느꼈던 걸 당신이 느꼈으면 좋겠다. 이야기의 진실이 왜 때로 실제의 진실보다 더 진실한지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다.

-p.210


팀 오브라이언이 바란 바다. <죽은 이들의 삶>이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기민한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다. 그럼에도 그렇지만 그러나 "이 또한 진실이다. 이야기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그가 서두에 밝힌 것은 지당하다. 그의 잃어버린 그 아름답고 슬픈 첫사랑의 이야기의 평행우주적 결론은 이야기의 힘을 설파한다. 모든 사라져간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그 사랑을 다시 그러모을 수 있도록 자신만의 이야기로 재편한 그의 마침표는 너무 울림이 커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 모두에게는 상실이 있고 그것을 팀 오브라이언의 방식처럼 다시 그러모아 부활시키고픈 소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그의 결론은 언제나 옳다. 그가 작가로서 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구원했듯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 모두의 슬픔과 상실과 고통을 구원하는 상상을 해본다. 경이로운 이야기다. 


나는 어리고 행복하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p.282


죽음 앞에서 죽음을 부정하고 생 앞에서 생을 부정하고 지금 여기에서 생을 긍정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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