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계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다층적이고 가변적이고 복합적이다. 한 마디로 단정짓기도 일반화하기도 어렵다. 분명한 것은 어떤 역학 관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구태여 갑과 을이라는 구도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렇다. 힘의 균형이 어느 한 쪽으로 많이 가 있을수록 그 관계가 건강한 지속성을 가지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쉽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지만 그것 또한 관계와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져 주는 사람이다. 이것은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관계로 상대를 포용하기로 설정한 불균형에 다름 아니다. 끊임없이 배신하는 연인을 언제나 받아주며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라 자위하는 것은 그런 드라마에 중독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한 역할에 대한 심리학적 용어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인에이블러(Enabler)'다. 
















표면적으로는 '조력자'인데 이러한 의존 관계가 결국 도움을 받는 사람의 성장과 삶까지 망친다는 통찰은 놀랍다. 저자 스스로를 '인에이블러'로 칭한다. 네 아이의 엄마이자 우울증을 가진 배우자의 아내로 그녀가 해왔던 역할은 그들의 우울감, 분노를 받아주고 흔들리는 상황에서 의사 결정을 대신해 주고 여러 부정적인 상황의 방패막이 역할까지 떠안는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역할이 사회적으로 결혼한 여자에게 기대하는 이상주의적 기대와 겹친다,는 지적은 기억할 만하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자질구레한 일상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아이들을 학교, 학원으로 실어나르고 교사에게 아이의 지각 이유까지 대신 변명하며 뒤치다꺼리를 하는 아내, 엄마의 모습은 여기에서 얘기하는 '인에이블러'의 초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력자의 역할이 결국 그 의존 관계에서의 상대가 실제 삶의 여러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하며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과 성장의 저해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대목이다. 상대를 위해서 한 행동이 결국 상대에게 방해가 됐다는 자각은 저절로 오기 어렵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했는데 너는 더한 것을 요구하고 그간 내가 주었던 것들까지 부정한다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부부 관계, 부모자식 관계에서 이러한 비극적 역학이 발생한다. 그것은 삶 그자체가 문제가 없이 완벽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고 한다. 그러한 완벽한 삶을 선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고 그 지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팔을 걷어 부치고 해야 한다,는 믿음은 결국 나도 상대도 그리고 그 둘의 관계도 파괴하게 되는 맹신이다. 


자신의 생애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소재로 독자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저자의 설득력은 기대 이상이다. 나도 나와 가족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저도 모르게 인에이블러가 되었던 적도 그 상대가 되었던 적도 있다는 깨달음은 명치를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내가 속해 있는 원가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과 아직 단단하지 않은 내 자존감의 허약한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앎 또한 그랬다. 결국 내가 내 자신에게 가진 사랑의 양 만큼 상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낮은 자존감으로 연결된 관계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삶이 그 어떤 고난, 상실, 고통 없이 완벽할 수 있다는 유아적 믿음에 매달리는 한 인간의 성장은 불가능하다. 잘 사는 삶은 삶 자체의 모순과 그 불완전함과 변화를 포용하려는 그 기꺼움에 기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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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1-09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blanca 2020-01-10 08: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카스피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2020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