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천문대를 꿈꾸던 열일곱 살의 나를 만난다면 귀뺨 한 대 정도 맞을 용의가 있다. 겨우 그 정도에서 포기하다니. 아마도 그 어린 녀석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김연수 <스무 살> 중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놓고 저희끼리만 등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스무 살> p.9
시인으로 등단했던 김연수가 단편의 초입마다 인용해 놓은 시들은 그가 만든 이야기다보다 어쩌면 더 적확하게 그 이야기의 심중을 반영한다. <스무 살>에는 최하림의 <어두운 골짜기 중에서> 이러한 대목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옛날엔
훌륭한 삶을 원했지...
젊음 안에 내장된 순진함이 품는 이상은 크고 훌륭한 삶의 주어에 자신을 대입시키는 것이다. 이윽고 살면서 나이 먹어가며 모든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혹은 더 나아가고 싶은 지점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꾸역꾸역 견뎌 나가게 된다. 그러면 스무 살에 혹은 그 이전에 꿈꾸었던 많은 것들이 가뭇없이 사라지거나 심연에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타락했다거나 비겁하다고 폄하만 할 것도 아니다. 사는 일에는 차마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에 연루되어 분명 하루 하루를 전진시키는 신비한 생명력이 있다. 그러니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고 표현했던 김연수의 이야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낭만과 처연함을 한데 모아 스무 살의 나날들을 치장한다고 해도 그 이후가 있음으로 해서 스무 살이 더욱 빛남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이후가 반드시 초라한 것도 무력한 것도 타락한 것도 아니다.
부천 원미동 23통 거리에는 스무 살 이후의 삶들이 있다. 지물포 주씨, 행복사진관 엄씨, 형제슈퍼 김반장의 살아나가는 나날들은 어떤 거대한 이상이나 가치보다는 그날 그날의 생계에 기대어 있다. 그 사이 사이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야기, 몇 년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지금 다시 그것을 되짚는 사이의 간극은 이제 정말 나의 스무 살들은 저 멀리 등뒤에 쌓이고 그 이후의 더 길고 더 많은 지루한 삶들이 분분하며 쌓였기 때문에 생긴 것일 게다.
부딪치고, 아등바등 연명하며 기어나가는 삶의 주인들에게는 다른 이름의 진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탐구하고 사색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몸으로 밀어가며 안간힘으로 두들겨야 하는 굳건한 쇠문이었다.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중
부천 원미동의 거주민들의 이야기의 대미는 작가의 자전적 사연이 녹아 있는(그렇게 보여지는) <한계령>이다. 어린 시절 친구가 변두리 클럽의 밤무대 가수가 되어 작가가 된 '나'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연락해 오며 시작된 이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올망졸망한 동생들과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었다 어느 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큰오빠에 대한 뼈아픈 회고로 이어진다. "수십 년간 가슴에 품어온 고향의 얼굴을 현실 속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다,라고 나는 생각했다."의 '나'의 고백은 그렇게나 친구 은자가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술집에 가서 친구인지 확신할 수 없는 여가수의 '한계령' 노래를 먼 발치에서 듣고 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세월이 쌓인 자리를 이따금씩 뒤지며 그것은 그대로 두는 것이 다시 불러오는 것보다 더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될 때가 있다. 어느 시점에서 만난 그 숱한 사람들, 그리고 그 거리에서 벌어진 일들, 나눈 이야기, 꿈, 소망, 회한은 결론이야 어떻게 됐든 바로 그 지점에 오롯이 놓여 있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모여 삶의 이야기를 이룬다. '내'가 유년을 공유했던 '은자'를 꼭 지금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의 일부였을 것이다.
김연수의 <스무 살>'죽지 않는 인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에게 해 주었던 '기억의 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어린이 대공원에 갔던 찬란한 날들을 잊지 않기 위해 되뇌는 '나'에게 아버지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그 방의 이야기로 안심시킨다. 그러한 나날들에서 하루를 불러온다. 열다섯 살. 단짝친구들과 나는 버스를 타는 대신 걷기로 한다. 그 날은 시험이 끝났고 그래서 우리는 시장통에서 떡볶이 파티도 하기로 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서너 군데나 가야 하는 그 거리가 우리가 다 아는 친구, 선생님, 연예인 이야기로 비좁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제 어쨌든 아무것도 걱정할 건 없다. 중간 고사가 끝나면 난 다 된 거다. 달콤한 떡볶이를 먹고 책도 좀 사고 낮잠을 자고 가요톱텐을 보면 저녁이 올 테고. 이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 꼭 다시 한번 살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