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천문대를 꿈꾸던 열일곱 살의 나를 만난다면 귀뺨 한 대 정도 맞을 용의가 있다. 겨우 그 정도에서 포기하다니. 아마도 그 어린 녀석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김연수 <스무 살> 중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놓고 저희끼리만 등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스무 살> p.9

 

시인으로 등단했던 김연수가 단편의 초입마다 인용해 놓은 시들은 그가 만든 이야기다보다 어쩌면 더 적확하게 그 이야기의 심중을 반영한다. <스무 살>에는 최하림의 <어두운 골짜기 중에서> 이러한 대목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옛날엔

훌륭한 삶을 원했지...

 

젊음 안에 내장된 순진함이 품는 이상은 크고 훌륭한 삶의 주어에 자신을 대입시키는 것이다. 이윽고 살면서 나이 먹어가며 모든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혹은 더 나아가고 싶은 지점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꾸역꾸역 견뎌 나가게 된다. 그러면 스무 살에 혹은 그 이전에 꿈꾸었던 많은 것들이 가뭇없이 사라지거나 심연에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타락했다거나 비겁하다고 폄하만 할 것도 아니다. 사는 일에는 차마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에 연루되어 분명 하루 하루를 전진시키는 신비한 생명력이 있다. 그러니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고 표현했던 김연수의 이야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낭만과 처연함을 한데 모아 스무 살의 나날들을 치장한다고 해도 그 이후가 있음으로 해서 스무 살이 더욱 빛남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이후가 반드시 초라한 것도 무력한 것도 타락한 것도 아니다.

 

 

 

 

 

 

 

 

 

 

 

 

 

 

 

부천 원미동 23통 거리에는 스무 살 이후의 삶들이 있다. 지물포 주씨, 행복사진관 엄씨, 형제슈퍼 김반장의 살아나가는 나날들은 어떤 거대한 이상이나 가치보다는 그날 그날의 생계에 기대어 있다. 그 사이 사이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야기, 몇 년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지금 다시 그것을 되짚는 사이의 간극은 이제 정말 나의 스무 살들은 저 멀리 등뒤에 쌓이고 그 이후의 더 길고 더 많은 지루한 삶들이 분분하며 쌓였기 때문에 생긴 것일 게다.

 

부딪치고, 아등바등 연명하며 기어나가는 삶의 주인들에게는 다른 이름의 진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탐구하고 사색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몸으로 밀어가며 안간힘으로 두들겨야 하는 굳건한 쇠문이었다.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중

 

부천 원미동의 거주민들의 이야기의 대미는 작가의 자전적 사연이 녹아 있는(그렇게 보여지는) <한계령>이다. 어린 시절 친구가 변두리 클럽의 밤무대 가수가 되어 작가가 된 '나'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연락해 오며 시작된 이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올망졸망한 동생들과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었다 어느 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큰오빠에 대한 뼈아픈 회고로 이어진다. "수십 년간 가슴에 품어온 고향의 얼굴을 현실 속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다,라고 나는 생각했다."의 '나'의 고백은 그렇게나 친구 은자가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술집에 가서 친구인지 확신할 수 없는 여가수의 '한계령' 노래를 먼 발치에서 듣고 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세월이 쌓인 자리를 이따금씩 뒤지며 그것은 그대로 두는 것이 다시 불러오는 것보다 더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될 때가 있다. 어느 시점에서 만난 그 숱한 사람들, 그리고 그 거리에서 벌어진 일들, 나눈 이야기, 꿈, 소망, 회한은 결론이야 어떻게 됐든 바로 그 지점에 오롯이 놓여 있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모여 삶의 이야기를 이룬다. '내'가 유년을 공유했던 '은자'를 꼭 지금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의 일부였을 것이다.

 

김연수의 <스무 살>'죽지 않는 인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에게 해 주었던 '기억의 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어린이 대공원에 갔던 찬란한 날들을 잊지 않기 위해 되뇌는 '나'에게 아버지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그 방의 이야기로 안심시킨다. 그러한 나날들에서 하루를 불러온다. 열다섯 살. 단짝친구들과 나는 버스를 타는 대신 걷기로 한다. 그 날은 시험이 끝났고 그래서 우리는 시장통에서 떡볶이 파티도 하기로 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서너 군데나 가야 하는 그 거리가 우리가 다 아는 친구, 선생님, 연예인 이야기로 비좁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제 어쨌든 아무것도 걱정할 건 없다. 중간 고사가 끝나면 난 다 된 거다. 달콤한 떡볶이를 먹고 책도 좀 사고 낮잠을 자고 가요톱텐을 보면 저녁이 올 테고. 이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 꼭 다시 한번 살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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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1-01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때는 고등학생 시절이 하나도 그립지 않았는데, 대학교 졸업하고나서 이년 지나니까 고등학생 시절이 가끔 그리워져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십년 전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최근에 버즈의 노래를 듣게 되면서 그 시절이 더 그립습니다.

blanca 2015-11-02 15:39   좋아요 0 | URL
그리워지는 시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쩌면 지금의 시간들도 먼 훗날에 그리움으로 기억하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hnine 2015-11-02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연수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런 사람을 알고 지내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 얘기를 시작하든지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 것 같다는 추측을 해보곤 해요.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은 제가 대학생때 읽은 것 같은데 실제 출판년도를 보니 1997년으로 나오네요. 그렇다면 제가 졸업하고 훨씬 뒤인데, 아무튼 정말 오래전 기억을 되부르는 책이어요.
그보다 더 이전 열다섯살때, 시험 일정이 스케쥴의 전부이던 그때, 시험 끝나도 친구들과 떡볶이 먹고 책도 사러 가고 가요톱텐도 보고, 그런 기억이 제게 없는게 아쉬워요.
(blanca님 서재에서 보고 구입한 Peter Bieri의 <자기결정>을 지난 주말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서니데이 2015-11-02 07:08   좋아요 0 | URL
hnine 님, 원미동 사람들의 조기 출판연도는 기억하시는 것처럼 그보다 더 전일거예요, 아마 그 다음에 다시 출간한 것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blanca 2015-11-02 15:42   좋아요 1 | URL
아, 서니데이님 말씀처럼 재출간이네요.^^ 김연수 작가는 사실 제 입장에서는 작품의 편차가 좀 있는 편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무언가 자꾸 심금을 울리는 지점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청춘 시절이요. 특히 에세이집은 정말이지 어디 하나 물릴 것이 없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지만요^^;;) 저는 지금도 떡볶이 중독이랍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떡볶이 탐험을 떠났던 이력은 사라지지를 않네요...

희선 2015-11-19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간 시간이기에 더 좋게 기억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말을 조금 전에 어디선가 봤네요 지나치듯 봤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가 좋았지, 하는 말을 하기도 하잖아요 지금이 힘들면 더 지난날을 떠올리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스무 살은 누구나 지나고, 저는 별거 없었네요 다시 생각하니 지금까지 지나오면서 더 안 좋아졌네요 시간이 지나서 별거 없는 지금을 그리워할지도... 예전에도 이런 생각했군요


희선

blanca 2015-11-20 00:0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정말. 지금도 결국 과거가 될 테니 나중에는 또 지금을 그리워할 듯 싶어요. 현재, 순간에 집중하며 시선은 정면을 향해야 겠어요. 요새는 기억 자체에도 좀 회의가 들기도 해요. 시간이 지나며 자꾸 변질되는 것 같아요.
 

노량진에서 재수하던 시절 종종 자그마한 문구점에 가서 펜을 고르곤 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즐거운 반전도 없는 생활에서 조금 더 또박또박 환기되는 내용들을 더 눈에 잘 띄게 적어놓는 일은 어쩌면 나의 생활의 본질적인 측면이었다. 당연히 여기에서 사용되는 도구들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문구류 이상이었다. 수험생활이 지나가고 이제는 시험 성적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도전에서 해방된 지금이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문구덕후다. 수많은 색깔,다양한 굵기의 각양각생의 필기류, 노트 들은 언제나 나를 매혹하고 조금 더 산다는 일을 단순하고 균질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윤색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준다. 사각사각 펜과 조응하는 사철식의 노트, 번지지도 않고 뭉개지지도 않으며 좀 허접하더라도 흘러가는 나의 언어들을 어느 순간 잡아서 보여주는 담담한 만년필 혹은 볼펜, 궁극의 그것들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같다. 그러한 욕구들,소망들이 멈추면 이윽고 펼쳐질 황량함이 나는 때로 두렵다.

 

 

 

 

 

 

 

 

 

 

 

 

 

 

 

저자 소개는 좀 생뚱맞다. 런던 문구 클럽의 공동 창설자이자 '나는 지루한 것들을 좋아해'블로그 운영자란다. 소개 위에 좀 멍한 표정으로 측면이 찍힌 젊은 남자의 모습에서 과연 진지하고 깊이 있는 문구의 역사들이 연상되기란 쉽지 않지만 그러한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 책은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읽는 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적절한 무게추를 잘 잡고 있다. 물론 당연히 저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문구에 탐닉해 있었다. 영국의 소도시 서리주 우스터파크에서 자란 저자가 종종 방문하던  파울러스 문구점에서 먼지 덮인 회전식 문구류 정리함을 사서 그것을 채우는 것으로 우리는 클립의 발명, 만년필과 볼펜의 시대, '진정한 몰스킨은 이제 더는 없어요'라는 문구점 주인의 애도의 목소리, 스타인벡이 선호했던 블랙윙 연필, 오타에 시달리던 여비사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리퀴드 페이퍼(우리가 종종 화이트라고 부르는 그것)의 서사의 현장에 들어가게 된다. 학교에 입학한 후로부터 그렇게나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던 그 물질적인 것들이 그 이상이 되는 지점에는 분명 이러한 그것들의 탄생과 발전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의 부활이 있다. 대단히 정신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만 하며 삶의 본질적인 측면에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환각 뒤편에는 분명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의 실재가 내재되어 있다. 어느 날 꾹꾹 몽당연필을 눌러쓰며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분명 이해해 보려 했던 시도 속에 갑자기 부러져 엄지 손가락 뿌리 왼편에 박혀 버린 연필심에는 16세기 초반 어느 폭풍우 치던 밤 영국의 컴벌랜드에서 갑자기 노출된 흑연의 광맥의 화석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었다. 지금도 그 연필심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아 언제나 나는 나의 손바닥을 펼치고 그 연필심을 볼 수 있다. 아마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따금 그러할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시간의 층은 무심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듯 나를 노려본다. 저자가 노란색 스타빌로 형광펜으로 그것을 만들어 낸 슈반호이저 공장의 이야기를 그어가며 느꼈던 희열과 닮아 있다.

 

"물리적인 것은 뭔가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한다."p.349

 

정말 진심으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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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10-25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날이 지난 뒤 연필을 오래도록 안 쥐다가
아이들하고 살며 새삼스레 연필을 다시 쥐다 보니
연필을 하나하나 모아서 책상맡에 잔뜩 올려놓고
이것저것 골라서 쓰는 재미가 쏠쏠해요.
연필을 다시 쓰니 볼펜을 다시 쓰기 어렵더군요 ..

blanca 2015-10-25 22:04   좋아요 1 | URL
저는 언젠가부터 연필을 안 쓰게 되었어요. 다시 연필로 사각사각 글을 쓰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어요.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지다보니 글씨가 영 미워졌더라고요. 연습해서 또박또박 잘 써보고 싶어집니다.^^

희선 2015-10-3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펜은 쓰기 편하면 한가지만 써요(볼펜은 볼펜심만 바꾸는 걸로 쓰고... 내 친구) 공책은 예전에는 두꺼웠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얇아졌는지... 전에 보이면 사두기도 했는데 요새는 잘 안 가는군요 펜은 종이에 따라 쓰기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해요 어떤 종이에든 잘 써지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 볼펜은 괜찮군요


희선

blanca 2015-11-01 12:50   좋아요 0 | URL
희선님처럼 저도 한 가지 펜에 정착해야 하는데...자꾸 이것저것 들쑤시게 됩니다. 결국 궁극의 펜과 노트를 만나야 해결될 일이 아닐런지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이제 만으로 몇 년의 유예기간이 있긴 하지만(그 동안은 조금 그 안에서 머물고 싶지만), 엄연히 마흔이라는 숫자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으니까 도리어 돋을새김처럼 보인다. 한 해 한 해 나는 조금씩 달라진다. 뒤로 가기도 하고 "절대!"라고 외쳤던 성역 따위는 오만이었다는 것도 배워간다. 어떤 이념이나 이상을 자신감 있게 외치고 그 안의 모든 항목들을 한 치도 틀리지 않게 사수할 수 없음에 때로 좌절한다. 말하여지는 것보다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려 하지만 그 막간에 때로 시선이 간다. 그리고 솔직히 나 자신한테는 더 많이 실망한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만 하는 일들,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한 층 한 층 더 쌓이며 견고해짊을 때로 느낀다. 이러한 점에서 조로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없다. 듣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브람스의 무엇을, 바흐의 어떤 음악을, 누가 연주할 때 가장 뭉클한 지 자신감 있게 얘기하지 못할 정도로 돌아서면 그 세세한 사항들을 다 잊어버린다. 오자와 세이지도 하루키가 이야기했기에 그렇구나, 했던 정도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빈국립오페라하우스 음악감독을 역임한 그는 영어가 서툰 일본인이었다는 한계를 성실성과 재능으로 극복한 노장 지휘자다. 노년에 이르러 암투병의 좌초에 걸리기는 했지만 쉬엄쉬엄 그 난관을 잘 이겨나가며 후계자 양성에도 힘을 쏟고 나날이 조금씩 더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키는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지하고 겸허한 인터뷰어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진지함과 예리함의 폭이 넓고 깊어 오자와 세이지와의 이야기가 더없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스스로를 지칭한 '문외한'이라는 말은 이러한 지점에서 쓰일 단어는 아닌 듯하다. 주로 하루키의 집에서 실제 화제에 오른 음악을 틀어 놓고 들으며 음악가와 작가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는 사실 대단한 것들이 아닌데도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을 흠칫하게 하는 절실함이, 반짝이는 빛처럼 아무렇지 않게 흩뿌려져 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오자와 세이지의 부지휘자 시절의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일화들, 구스타프 말러 등 시간대, 음악, 사람이 구심점이 되어 이야기가 오고가지만 한결 같은 오자와 세이지의 담담하고 차분한 이야기와  하루키의 상대적으로 더 젊고 호기심이 많아 예리하게 과거의 추억을 환기하는 역할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특히나  롤이라는 스위스의 소도시에서 오자와 세이지가 신진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주관한 세미나의 풍경을 그린 대목은 하루키의 짦은 이야기처럼 그의 언어와 관찰력이 조응하며 간결하고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는다. 젊고 다듬어지지 않은 현악기 연주자들의 오케스트라 연습 참관 대목은 기회만 된다면 나도 그러한 기회를 얻고 싶을 만큼 찬란하다. '좋은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동행한 작가는 아직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그 과정을 이끌고 가는 노장은 나날이 그 되어가는 과정에 동행하며 '거친 어제'들이 쌓여 빛나는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음을 체현한다.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늙어가는 모습과그것을 언어화할 수 있는 자리에 동행하게 되는 작가의 시간들도 참으로 부러웠다. 그 둘에게는 '나이듦'이 쇠락이 아니라 어떤 되어가는 과정의 시간의 누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때 무책임하게 징징대며 그만 둔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었다.(지금은 아쉽게도 잠시 그만둔 상태) 그만둔 지점에서 한참이라 다시 뒤로 물러나 시작했지만 다시 그 지점 근처나마 비교적 짧은 시간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나 치기 싫었던 피아노가 이제는 길어진 손가락과 공명하여 나오는 음들을 하나 하나 들을 때마다 왠지 뭉클했다. 작은 몸짓, 페달에 닿지도 않았던 발들, 암보라는 게 대체 뭔지도 모르는 채 그냥 기계적으로 눌러댔던 음계들이 레가토로 들려주는 음악은 시간의 낙차를 가로질러 과거의 어린 마음을 생생하게 불러왔다. 왠지 눈물이 자꾸 났다. 그때 다 완성시키지 못한 음악들을 이제 다시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 한정없이 내 앞에 그득 쌓였을 것만 같은 시간들이 한정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흩어져 사라져 가는 그 선율들을 더욱 농밀하게 한다. 어떤 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이러한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때로 아직도 시작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

 

 

 

 

 

 

 

 

 

 

 

 

 

 

노인이 될 준비를 하는 사람은 솔직히 낯설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잘 늙어가는 이들은 그러했다. 60대가 되어 가까스로 첼로다운 음을 내게 된 그녀는 50대에 제대로 그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흔세 살에 발레를 시작한 사람은 쉰 살이 넘어서 복근을 가지게 됐다. 다들 느지막하게 시작한 것들도 꾸준히 계속하니 취미와 관심사를 넘어서는 지점을 통과하고 삶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스스럼없이 나이듦을, 노화를 이야기하고 심지어 더 나이들었을 때의 삶을 준비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노화, 노인, 죽음이라는 화제 앞에서 머뭇대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지금 여기에서의 풍조를 돌아보게 했다. 힘이 빠져 더이상 지금 여기 같은 삶을 누릴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가감없이 한다. 젊음과 보여지는 아름다움과 에너지만을 찬양하는 풍조에서 사실 필멸의 존재의 실재는 설 곳이 없다. 외면하고 구태여 주목하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들에 사실은 '진짜'가 있을 수도 있는데... 분명 쉽지 않겠지만 또 확실히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다. 피할 수가 없다. 아직은 많은 의무와 책임감이 난무하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나로서는 시간의 흐름이 홀가분함을 통과할 때 어떤 느낌일 지가 궁금하고 기대된다. 조금 정갈해 질런지, 정돈된 모습일지 등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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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16 16: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는 시점부터 피아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졌어요. 피아노를 다시 한 번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든 적이 있는데, 나이가 들수록 예전의 여유를 가질 형편이 되지 않네요. 그래도 피아노 연주의 꿈은 잊지 않았어요. 초등학생 시절에 썼던 피아노 교본을 버리지 않고 집에 보관하고 있는데, 피아노에 다시 흥미를 가질 날이 찾아 올 거라고 믿습니다. ^^

blanca 2015-10-17 10:03   좋아요 0 | URL
오, 사이러스님 비교적 오래 배우신 편이네요. 게다가 교본까지 보관하고 있다니 언제든 다시 시작하시면 두 달 정도면 손가락이 풀리면서 그만 둔 지점 근처로 접근하더라고요. 그럼요, 꼭 그러한 시간, 기회가 다시금 오더라고요.

기억의집 2015-10-16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아들도 초등 5학년까지 치다가 갑자기 작년 (중3)에 피아노 치기 시작했어요. 피아노 학원도 다시 다니고... 아들애가 이루마의 인디고나 라스트 카니발 칠 때 멋있더라구요. 전 피아노가 여자 악기라고 생각했는데 울 아들이 치는 거 보니 피아노를 남자가 치면 힘이 들어가 멋지더라구요.... 저의 아들은 일주일에 한번 가는데, 블랑카님도 일주일에 한번 어떠세요. 그러면 중단 되진 않더라구요.

나이 드니 저는 손으로 뭔가 하고 싶어 목공 배워요!!!! 목공 작업실 갖고 싶기는 한데, 소음이 만만치 않아 집에선 하기 힘드네요~

blanca 2015-10-17 10:05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근래들어 유튜브에서 피아노 동영상 찾아보면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에 남자 비율이 높던걸요. 참, 근사해요. 아무래도 타건에 힘이 요구되는 대목에 좀 유리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우아, 벌써 고등학생이군요! 이렇게 취미로 다시 피아노를 칠 정도면 사춘기도 잘 이겨나갔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흑, 저희 기저귀 찬 아들은 언제쯤 그런 날이 올까요?^^

숲노래 2015-10-17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저녁으로
하루 십 분이나 이십 분쯤
피아노를 쳐 보시면...
살아가는 기쁨을 새롭게 누리시리라 생각해요 ^^

저는 우리 집 아이들이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들으며
온몸이 새롭게 깨어나는 느낌이 들어 늘 즐겁습니다

blanca 2015-10-17 10:06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숲노래님 아이들이 피아노 치는 소리, 상상만으로도 참 흐뭇해지네요. 저는 아직 피아노를 칠 여유는 안 나는데 내년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중이랍니다.^^

희선 2015-10-20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책은 어제 잠깐 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한 책이군요 홀가분하게 살기, 말은 쉬워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키는 재즈뿐 아니라 클래식도 잘 아는군요 음악을 다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좋아하는 것만 듣는 사람이 더 많기도 한데... 하루키는 여러가지에 관심을 갖고 들은 거군요 그래서 많이 알게 되었겠네요 나이를 먹고도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게 더 좋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희선

blanca 2015-10-20 17:12   좋아요 0 | URL
아, 라디오에서 들으셨군요. 맞아요,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기보나는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는 게 더 삶의 의욕과 관련된 것일 테니까요...
 

김훈처럼 대파의 흰 속대 부분을 세로로 길게 갈라 하여튼 무진장 넣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계란을 잘 풀어서 넣고 불을 내리고 뚜껑을 덮어버렸다. 이윽고 탱글탱글한 면발을 들이키며 그가 이야기한 라면 레시피 대목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아아, 이건 너무 맛있잖아. 역시 그 어떤 분야보다 나날이 먹을 것을 만드는 일에는 다양한 의견 참조가 필요하다. 여기가 다일 것 같아도 막상 또 나아갈 곳이 있다는 발견은 참 즐거운 일이다. 단순하고 또 단순한 나를 먹이는 일 앞에서 모든 사는 일은 하나로 만져지는 것도 같고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김훈이 되뇌었던 삶의 구체성은 바로 이러한 대목에 집중되는 것같다.

 

 

 

 

 

 

 

 

 

 

 

 

 

 

 

삼십 대 후반 언저리의 엄마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작은 이모가 나란히 찍은 사진 속에는 삶의 신산함이 서려 있다. 한때는 고왔을 두 여인은 너무 조로했다. 통통하던 볼살은 내렸고 기미는 흩어져 있다. 그래도 둘은 나란히 무언가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제 영원히 엄마와 이모가 사수해야 할 것 같은 나이의 지대를 넘어가고 있다. 그 만큼 크지도 늙지도 않았을 것 같은 느낌, 미성숙함과도 닿아 있다. 나날이 쌓여 나는 정말 아줌마가 되어 가고 영원히 울어댈 것 같았던 아기에게는 어엿한 소녀티가 나기 시작했고 없었던 존재가 우뚝 내 옆에서 걸어다니고 있다. 시간이란 도저히 말로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그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몰고 나타나기도 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것들을 모조리 쓸어담아 독불장군처럼 저만치 달아나기도 한다. 참, 냉정하고 기대 이상이고 기대 이하이다.

 

이 무사한 하루하루가 흘러 결국은 저 차가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 속에서 핏덩이는 자라서 여자로 변한다. 그 아이는 내가 기른 아이가 아니라, 저절로 자란 아이였다. 무사한 날들의 이 한없는 시간들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아이를 여자로 길러줄 것인가.-p.140 

 

시월이 가면 항상 나는 늙는다. 김훈이 언어화했던 이 이야기는 차마 내가 집약해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바로 이러한 사소해 보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그 시간의 일상적인 흐름이 이루어 놓는 것들에 때로 화들짝 놀라고 때로 감동하고 때로 서글퍼진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흘러 당도하는 곳에는 편안함과 안도가 있었는데 이제는 결국 그것이 죽음으로 간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마음이 무겁다. 이 모든 일상의 사소한 일들도 결국은 언감생심이 된다는 것,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결국은 그러한 수순을 밟고 세상과 작별한다는 것을 의식하다 보면 모든 게 너무나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단단하게 버티는 사물들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그 앞에 선 살아 있는 것들이 애잔하기도 하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중

 

정말 그럴까. 아직 마음으로 수긍하기엔 조금 이르다. 조금 더 살아보면 그래, 사라짊은 숙명이고 그것은 아름다운 섭리라고 고개 끄덕일 날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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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10-1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을 채비를 하고 있어요.
흰 속대 부분을 잔뜩 넣은 대파 칼칼하겠죠?
김훈은 참 예리하고 혀를 찌르는, 그럼에도 따뜻한 사람일듯 해요. 글처럼요^^

blanca 2015-10-10 20:17   좋아요 0 | URL
글에서 의외로 참 솔직하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정리된, 정제된 어휘가 참 정갈하니 좋아요. 이제 시작하셨는 지 궁금합니다. ^^

yureka01 2015-10-11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습니다. 뭐랄까요..참 담담하구나 싶었어요.
김훈의 산문이 특별히 시처럼 세련된 것이 아닌 거 같음에도
뭔가 상당한 끌림의 진솔감이랄까요. 역시 대가는 왜 대가 인가 싶더군요.....


blanca 2015-10-12 15:3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yureka01님. 김훈 문장은 정말 색깔이 뚜렷해서 되뇌어 읽게 되곤 합니다. 아무래도 기자 시절 단련된 사실에 입각한 간결함이 쉬이 물러나지 않는 것 같아요.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잘 포착하는 작가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프레이야 2015-11-22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페이퍼 당선, 축하 드려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늘 좋은 글이지만요.^^
김훈의 라면과 대파 이야기는 그의 소설 `공무도하`에도 잘 묘사되어 있어요.
여자와 남자가 주고 받는 대사 속에서요. 읽어보셨을 것 같네요.
그 남자도 기자에요. 대파의 푸른색 부부은 넣지 말라고 해요, 여자가.
흰 부분에 대해.. 갑자기 생각이 나요.
그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슬퍼할 것도 없는 날이 올 거라 믿어요.
그저 소멸이 존재증명이고 아름다움일 날이... 그렇게 느껴질 날이.
좋은 뜻으로요^^

blanca 2015-11-22 15:22   좋아요 0 | URL
아, 공무도하에 그런 구절이 있었어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저도 유달리 대파의 흰대가 참 좋더라고요. 달고 써는 질감도 좋고... 방금도 숭덩숭덩 썰어 국에 한껏 넣었어요^^ 늙고 죽는 과정은...음, 저는 아직도 많이 두렵지만 때로 그냥저냥 앞선 사람들처럼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럽고 너무 어려운 삶의 마지막 과제인 듯해요. 사실 어렵고 두렵다 해도 피할 수 없으니까요...
 

우연히 팟캐스트에서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영화음악을 듣게 되었다. 단순히 영화음악 라디오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배우 얘기가 나오면 목소리가 떨리며 흥분하기도 하고 게스트로 나온 영화 관련 일에 종사하는 사람 앞에서 팬심을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왜 아직도 그렇게 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추억하며 그리워하지는지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무엇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안들에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그 용기와 비겁하지 않은 모습. 2004년에 정지된 그녀의 시간으로부터 벌써 11년이 지나도 방송인들이 쉽게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돌연 나는 왜 내가 며칠 계속 불쾌했는지 그 진원지를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시끌시끌하게 하는 문제로 격앙된 주민들이 동조를 바라는 문제 앞에서 나는 그들에게 공감했지만 돌아서면 영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주민들이 분노하는 행정 절차상의 많은 하자를 감안하더라도 그들이 반대를 위해 들춰낸 논리에 나는 동조하지 않음을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해하고 심정적 분노에도 일정 부분에는 공감하지만 그래도 내가 내 자신에게 떳떳하려면 나는 '이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고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 앞에서 부끄러웠던 것이다. 타인의 지지와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무엇보다 솔직했어야 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다수 앞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했다. 침묵했으면 편했을 것이지만 그게 그녀의 방식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흔도 채 되지 못한 채 그녀는 내가 살던 동네 근처에서 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꾸었던 수많은 꿈들, 아직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 미처 표현하지 못한 사랑들의 더께는 홀연 바람에 의해 걷히고 말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렬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바쳤고 또한 그것을 표현했고 때로 미움받고 비난받을 여지가 있음에도 용기 있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던 그녀의 삶의 농밀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때로 산다는 것은 멈추어 서서 생각하지 않으면 비겁해지기 쉽다. 다수를 따라가는 게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함, 성실함과 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연히 토바이어스 울프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다만 레이먼드 카버가 그와 우정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젊은 시절 리처드 포드를 포함한 낭독회에서 낭독을 마치고 미소를 띤 모습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기억할 따름이다. 그 사진을 찍을 때 레이먼드 카버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예견했는데 정작 그만 제외하고 나머지 둘만 살아남아 그 중 한명인 토바이어스 울프가 작가로서의 삶을 반추하는 노년의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힘없고 쇠락한 할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어딘가 차곡차곡 경험과 이야기와 깨달음을 쌓아 익힌 듯한 성숙함과 관록을 가지고 여유 있게 카메라 앞에서 조곤조곤 자신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다행히 아버지가 죽기 전에 화해한 대목에 이르러서 그의 파란 눈은 젖는다. 나의 영어는 그의 이야기 전부를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시선과 어조는 그 이상을 가능하게 한다. 매일 영어를 공부하지만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거나 듣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영어를 듣고 읽고 이따금 쓴다. 그냥 그저 그러는 게 습관처럼 좋아서다. 학창시절, 취업을 앞두고 필요에 의해 시작했던 영어 공부는 이제 그냥 생활이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과 인터뷰를 영화를 어느 정도 영어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걸로 족하다. 더 바라기도 하지만 그 지점은 내가 잡으려고 하면 또 저만치 물러간다.

 

 

 

 

 

 

 

 

 

 

 

 

 

 

감히 줌파 라히리 같은 작가가 이탈리아어 앞에서 느낀 애정, 좌절, 경의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지만 그래도 그녀의 이탈리아어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에 공감이 갔다. 벵골어를 쓰는 가정환경에서 영어를 쓰는 학교에 등교해야 했던 그녀가 느낀 그 혼란은 쉽게 스러질 것이 아니었다는 것, 이제 영어로 글을 쓰고 그 글이 수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는 위치에 선 그녀가 단지 이탈리아어에 이끌려 로마로 이주해 이탈리아어로 에세이를 내고 소통하는 과정에 대한 짧은 글은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사려깊고 섬세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집념과 성실성, 언어를 조탁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능력은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그녀의 경험과 느낌을 그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킨다.

 

한계가 있음에도 지평선은 끝없이 펼쳐진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른 언어로 읽는다는 건 성장과 가능성의 끝없는 상태를 내포한다.-p.42

 

이제 늙는 일만 남았다,고 체념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성장하려면 또 넘어지고 다시 배워야겠지. 얼마간 부끄러웠고 미웠던 나의 모습들을 다시 돌아다 본다. 잘 늙고 싶다. 계속 성장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정은임은 토바이어스 울프는 줌파 라히리는 각기 다른 의미에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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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10-07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늙고 싶다. 계속 성장하고 싶다..격하게 동감합니다^^
정은임 참 안타깝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죠.
오늘 얼마전에 읽었던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 생각했는데...

blanca 2015-10-10 10:43   좋아요 0 | URL
세실님, 그런데 이게 참 쉽지가 않네요. 상황이라는 게 항상 머물러 있으면 퇴보하기 쉽게 흘러가서... 공부와 내공이 더 필요할 듯해요. 줌파 라히리는 굉장히 모범적인 이미지더라고요. 단정하고 공부 열심히 하며 자랐을 것 같은 느낌이요^^;;

희선 2015-10-14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가가 자신은 늘 자란다고 했는데, 누가 그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젊다고... 나이를 먹고 몸은 다 자라도 마음은 다 자라지 않았죠 아직도 자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좋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또 그러기 위해 애써야겠네요 예전에 정은임 아나운서가 하는 라디오 방송 들었습니다 그만뒀을 때 언젠가 또 다른 방송으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어딘가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군요


희선

blanca 2015-10-14 14:04   좋아요 0 | URL
아, 정은임 아나운서 방송을 실제 들으셨군요. 저는 그러진 못했고 이름과 요절에 대한 소식만 알고 있어서 팟캐스트로 이따금 과거 방송을 들으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요. 목소리가 가지는 생생함은 도저히 그 사람의 부재를 써올리지 못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