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에서 재수하던 시절 종종 자그마한 문구점에 가서 펜을 고르곤 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즐거운 반전도 없는 생활에서 조금 더 또박또박 환기되는 내용들을 더 눈에 잘 띄게 적어놓는 일은 어쩌면 나의 생활의 본질적인 측면이었다. 당연히 여기에서 사용되는 도구들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문구류 이상이었다. 수험생활이 지나가고 이제는 시험 성적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도전에서 해방된 지금이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문구덕후다. 수많은 색깔,다양한 굵기의 각양각생의 필기류, 노트 들은 언제나 나를 매혹하고 조금 더 산다는 일을 단순하고 균질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윤색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준다. 사각사각 펜과 조응하는 사철식의 노트, 번지지도 않고 뭉개지지도 않으며 좀 허접하더라도 흘러가는 나의 언어들을 어느 순간 잡아서 보여주는 담담한 만년필 혹은 볼펜, 궁극의 그것들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같다. 그러한 욕구들,소망들이 멈추면 이윽고 펼쳐질 황량함이 나는 때로 두렵다.

 

 

 

 

 

 

 

 

 

 

 

 

 

 

 

저자 소개는 좀 생뚱맞다. 런던 문구 클럽의 공동 창설자이자 '나는 지루한 것들을 좋아해'블로그 운영자란다. 소개 위에 좀 멍한 표정으로 측면이 찍힌 젊은 남자의 모습에서 과연 진지하고 깊이 있는 문구의 역사들이 연상되기란 쉽지 않지만 그러한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 책은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읽는 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적절한 무게추를 잘 잡고 있다. 물론 당연히 저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문구에 탐닉해 있었다. 영국의 소도시 서리주 우스터파크에서 자란 저자가 종종 방문하던  파울러스 문구점에서 먼지 덮인 회전식 문구류 정리함을 사서 그것을 채우는 것으로 우리는 클립의 발명, 만년필과 볼펜의 시대, '진정한 몰스킨은 이제 더는 없어요'라는 문구점 주인의 애도의 목소리, 스타인벡이 선호했던 블랙윙 연필, 오타에 시달리던 여비사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리퀴드 페이퍼(우리가 종종 화이트라고 부르는 그것)의 서사의 현장에 들어가게 된다. 학교에 입학한 후로부터 그렇게나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던 그 물질적인 것들이 그 이상이 되는 지점에는 분명 이러한 그것들의 탄생과 발전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의 부활이 있다. 대단히 정신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만 하며 삶의 본질적인 측면에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환각 뒤편에는 분명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의 실재가 내재되어 있다. 어느 날 꾹꾹 몽당연필을 눌러쓰며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분명 이해해 보려 했던 시도 속에 갑자기 부러져 엄지 손가락 뿌리 왼편에 박혀 버린 연필심에는 16세기 초반 어느 폭풍우 치던 밤 영국의 컴벌랜드에서 갑자기 노출된 흑연의 광맥의 화석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었다. 지금도 그 연필심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아 언제나 나는 나의 손바닥을 펼치고 그 연필심을 볼 수 있다. 아마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따금 그러할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시간의 층은 무심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듯 나를 노려본다. 저자가 노란색 스타빌로 형광펜으로 그것을 만들어 낸 슈반호이저 공장의 이야기를 그어가며 느꼈던 희열과 닮아 있다.

 

"물리적인 것은 뭔가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한다."p.349

 

정말 진심으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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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10-25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날이 지난 뒤 연필을 오래도록 안 쥐다가
아이들하고 살며 새삼스레 연필을 다시 쥐다 보니
연필을 하나하나 모아서 책상맡에 잔뜩 올려놓고
이것저것 골라서 쓰는 재미가 쏠쏠해요.
연필을 다시 쓰니 볼펜을 다시 쓰기 어렵더군요 ..

blanca 2015-10-25 22:04   좋아요 1 | URL
저는 언젠가부터 연필을 안 쓰게 되었어요. 다시 연필로 사각사각 글을 쓰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어요.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지다보니 글씨가 영 미워졌더라고요. 연습해서 또박또박 잘 써보고 싶어집니다.^^

희선 2015-10-3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펜은 쓰기 편하면 한가지만 써요(볼펜은 볼펜심만 바꾸는 걸로 쓰고... 내 친구) 공책은 예전에는 두꺼웠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얇아졌는지... 전에 보이면 사두기도 했는데 요새는 잘 안 가는군요 펜은 종이에 따라 쓰기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해요 어떤 종이에든 잘 써지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 볼펜은 괜찮군요


희선

blanca 2015-11-01 12:50   좋아요 0 | URL
희선님처럼 저도 한 가지 펜에 정착해야 하는데...자꾸 이것저것 들쑤시게 됩니다. 결국 궁극의 펜과 노트를 만나야 해결될 일이 아닐런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