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처럼 대파의 흰 속대 부분을 세로로 길게 갈라 하여튼 무진장 넣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계란을 잘 풀어서 넣고 불을 내리고 뚜껑을 덮어버렸다. 이윽고 탱글탱글한 면발을 들이키며 그가 이야기한 라면 레시피 대목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아아, 이건 너무 맛있잖아. 역시 그 어떤 분야보다 나날이 먹을 것을 만드는 일에는 다양한 의견 참조가 필요하다. 여기가 다일 것 같아도 막상 또 나아갈 곳이 있다는 발견은 참 즐거운 일이다. 단순하고 또 단순한 나를 먹이는 일 앞에서 모든 사는 일은 하나로 만져지는 것도 같고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김훈이 되뇌었던 삶의 구체성은 바로 이러한 대목에 집중되는 것같다.

 

 

 

 

 

 

 

 

 

 

 

 

 

 

 

삼십 대 후반 언저리의 엄마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작은 이모가 나란히 찍은 사진 속에는 삶의 신산함이 서려 있다. 한때는 고왔을 두 여인은 너무 조로했다. 통통하던 볼살은 내렸고 기미는 흩어져 있다. 그래도 둘은 나란히 무언가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제 영원히 엄마와 이모가 사수해야 할 것 같은 나이의 지대를 넘어가고 있다. 그 만큼 크지도 늙지도 않았을 것 같은 느낌, 미성숙함과도 닿아 있다. 나날이 쌓여 나는 정말 아줌마가 되어 가고 영원히 울어댈 것 같았던 아기에게는 어엿한 소녀티가 나기 시작했고 없었던 존재가 우뚝 내 옆에서 걸어다니고 있다. 시간이란 도저히 말로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그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몰고 나타나기도 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것들을 모조리 쓸어담아 독불장군처럼 저만치 달아나기도 한다. 참, 냉정하고 기대 이상이고 기대 이하이다.

 

이 무사한 하루하루가 흘러 결국은 저 차가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 속에서 핏덩이는 자라서 여자로 변한다. 그 아이는 내가 기른 아이가 아니라, 저절로 자란 아이였다. 무사한 날들의 이 한없는 시간들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아이를 여자로 길러줄 것인가.-p.140 

 

시월이 가면 항상 나는 늙는다. 김훈이 언어화했던 이 이야기는 차마 내가 집약해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바로 이러한 사소해 보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그 시간의 일상적인 흐름이 이루어 놓는 것들에 때로 화들짝 놀라고 때로 감동하고 때로 서글퍼진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흘러 당도하는 곳에는 편안함과 안도가 있었는데 이제는 결국 그것이 죽음으로 간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마음이 무겁다. 이 모든 일상의 사소한 일들도 결국은 언감생심이 된다는 것,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결국은 그러한 수순을 밟고 세상과 작별한다는 것을 의식하다 보면 모든 게 너무나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단단하게 버티는 사물들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그 앞에 선 살아 있는 것들이 애잔하기도 하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중

 

정말 그럴까. 아직 마음으로 수긍하기엔 조금 이르다. 조금 더 살아보면 그래, 사라짊은 숙명이고 그것은 아름다운 섭리라고 고개 끄덕일 날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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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10-1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을 채비를 하고 있어요.
흰 속대 부분을 잔뜩 넣은 대파 칼칼하겠죠?
김훈은 참 예리하고 혀를 찌르는, 그럼에도 따뜻한 사람일듯 해요. 글처럼요^^

blanca 2015-10-10 20:17   좋아요 0 | URL
글에서 의외로 참 솔직하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정리된, 정제된 어휘가 참 정갈하니 좋아요. 이제 시작하셨는 지 궁금합니다. ^^

yureka01 2015-10-11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습니다. 뭐랄까요..참 담담하구나 싶었어요.
김훈의 산문이 특별히 시처럼 세련된 것이 아닌 거 같음에도
뭔가 상당한 끌림의 진솔감이랄까요. 역시 대가는 왜 대가 인가 싶더군요.....


blanca 2015-10-12 15:3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yureka01님. 김훈 문장은 정말 색깔이 뚜렷해서 되뇌어 읽게 되곤 합니다. 아무래도 기자 시절 단련된 사실에 입각한 간결함이 쉬이 물러나지 않는 것 같아요.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잘 포착하는 작가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프레이야 2015-11-22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페이퍼 당선, 축하 드려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늘 좋은 글이지만요.^^
김훈의 라면과 대파 이야기는 그의 소설 `공무도하`에도 잘 묘사되어 있어요.
여자와 남자가 주고 받는 대사 속에서요. 읽어보셨을 것 같네요.
그 남자도 기자에요. 대파의 푸른색 부부은 넣지 말라고 해요, 여자가.
흰 부분에 대해.. 갑자기 생각이 나요.
그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슬퍼할 것도 없는 날이 올 거라 믿어요.
그저 소멸이 존재증명이고 아름다움일 날이... 그렇게 느껴질 날이.
좋은 뜻으로요^^

blanca 2015-11-22 15:22   좋아요 0 | URL
아, 공무도하에 그런 구절이 있었어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저도 유달리 대파의 흰대가 참 좋더라고요. 달고 써는 질감도 좋고... 방금도 숭덩숭덩 썰어 국에 한껏 넣었어요^^ 늙고 죽는 과정은...음, 저는 아직도 많이 두렵지만 때로 그냥저냥 앞선 사람들처럼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럽고 너무 어려운 삶의 마지막 과제인 듯해요. 사실 어렵고 두렵다 해도 피할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