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팟캐스트에서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영화음악을 듣게 되었다. 단순히 영화음악 라디오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배우 얘기가 나오면 목소리가 떨리며 흥분하기도 하고 게스트로 나온 영화 관련 일에 종사하는 사람 앞에서 팬심을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왜 아직도 그렇게 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추억하며 그리워하지는지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무엇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안들에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그 용기와 비겁하지 않은 모습. 2004년에 정지된 그녀의 시간으로부터 벌써 11년이 지나도 방송인들이 쉽게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돌연 나는 왜 내가 며칠 계속 불쾌했는지 그 진원지를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시끌시끌하게 하는 문제로 격앙된 주민들이 동조를 바라는 문제 앞에서 나는 그들에게 공감했지만 돌아서면 영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주민들이 분노하는 행정 절차상의 많은 하자를 감안하더라도 그들이 반대를 위해 들춰낸 논리에 나는 동조하지 않음을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해하고 심정적 분노에도 일정 부분에는 공감하지만 그래도 내가 내 자신에게 떳떳하려면 나는 '이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고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 앞에서 부끄러웠던 것이다. 타인의 지지와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무엇보다 솔직했어야 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다수 앞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했다. 침묵했으면 편했을 것이지만 그게 그녀의 방식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흔도 채 되지 못한 채 그녀는 내가 살던 동네 근처에서 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꾸었던 수많은 꿈들, 아직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 미처 표현하지 못한 사랑들의 더께는 홀연 바람에 의해 걷히고 말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렬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바쳤고 또한 그것을 표현했고 때로 미움받고 비난받을 여지가 있음에도 용기 있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던 그녀의 삶의 농밀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때로 산다는 것은 멈추어 서서 생각하지 않으면 비겁해지기 쉽다. 다수를 따라가는 게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함, 성실함과 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연히 토바이어스 울프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다만 레이먼드 카버가 그와 우정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젊은 시절 리처드 포드를 포함한 낭독회에서 낭독을 마치고 미소를 띤 모습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기억할 따름이다. 그 사진을 찍을 때 레이먼드 카버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예견했는데 정작 그만 제외하고 나머지 둘만 살아남아 그 중 한명인 토바이어스 울프가 작가로서의 삶을 반추하는 노년의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힘없고 쇠락한 할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어딘가 차곡차곡 경험과 이야기와 깨달음을 쌓아 익힌 듯한 성숙함과 관록을 가지고 여유 있게 카메라 앞에서 조곤조곤 자신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다행히 아버지가 죽기 전에 화해한 대목에 이르러서 그의 파란 눈은 젖는다. 나의 영어는 그의 이야기 전부를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시선과 어조는 그 이상을 가능하게 한다. 매일 영어를 공부하지만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거나 듣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영어를 듣고 읽고 이따금 쓴다. 그냥 그저 그러는 게 습관처럼 좋아서다. 학창시절, 취업을 앞두고 필요에 의해 시작했던 영어 공부는 이제 그냥 생활이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과 인터뷰를 영화를 어느 정도 영어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걸로 족하다. 더 바라기도 하지만 그 지점은 내가 잡으려고 하면 또 저만치 물러간다.
감히 줌파 라히리 같은 작가가 이탈리아어 앞에서 느낀 애정, 좌절, 경의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지만 그래도 그녀의 이탈리아어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에 공감이 갔다. 벵골어를 쓰는 가정환경에서 영어를 쓰는 학교에 등교해야 했던 그녀가 느낀 그 혼란은 쉽게 스러질 것이 아니었다는 것, 이제 영어로 글을 쓰고 그 글이 수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는 위치에 선 그녀가 단지 이탈리아어에 이끌려 로마로 이주해 이탈리아어로 에세이를 내고 소통하는 과정에 대한 짧은 글은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사려깊고 섬세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집념과 성실성, 언어를 조탁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능력은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그녀의 경험과 느낌을 그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킨다.
한계가 있음에도 지평선은 끝없이 펼쳐진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른 언어로 읽는다는 건 성장과 가능성의 끝없는 상태를 내포한다.-p.42
이제 늙는 일만 남았다,고 체념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성장하려면 또 넘어지고 다시 배워야겠지. 얼마간 부끄러웠고 미웠던 나의 모습들을 다시 돌아다 본다. 잘 늙고 싶다. 계속 성장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정은임은 토바이어스 울프는 줌파 라히리는 각기 다른 의미에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