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박완서에 빠져 그의 글 전부를 읽겠다고 덤빈 적이 있다. 그는 이야기꾼이다. 별스럽지 않은 소재에서 끌어내는 이야기가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읽는 재미를 톡톡히 준다. 개성 근처의 박적골에서의 유년 시절의 자전적이 이야기, 6.25의 상흔이 개개인의 삶에 미친 여파, 중산층의 삶의 허위 의식, 위악, 속악함에 대한 형상화가 주종을 이룬다. 


소설뿐 아니라 하루키처럼 그의 소설적 재료의 원형들인 것 같은 그의 에세이 또한 참 좋다. 소설보다 오히려 더 절제되어 있고 때로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경우도 많다. 언어를 통과하는 삶의 깨달음과 비의들이 다시금 봐도 하나하나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어릴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도 이제 지금에 와서 읽어보니 세월과 더불어 더없이 공감된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이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글은 때로 인장 같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 아니다. 두고두고 남아 내 자신의 정체성의 조각처럼 여겨질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하나의 시선이자 입장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박완서 정도의 작가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엄정한 잣대의 울림이 큰 이유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제목은 여기에서 왔다. 그것은 언뜻 미소해 보여도 엄청난 것이다. 진실은 쉽지 않고 때로 눈앞의 이익해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 망설임 없이 밀고 나가는 힘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나온다. 세태에 휩쓸리고 사리사욕에 흔들리다 보면 진실은 저만치 물러가 버릴 때도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삶을 사는 일과 같다는 작가의 언질처럼 들린다.


그에게는 그만을 위한 서재가 없었던 시절이 길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생존해 있을 당시 그의 옆에서 피고한 몸으로 하루를 글쓰기로 마감하는 정경이 그려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번듯한 서재보다 그러한 글쓰기가 더 익숙하고 좋다는 그의 고백이 귀엽다. 


마지막에 대한 바람을 눌러 적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서 허락될까. 

-중략-

가을과 함께 곱게 쇠잔하고 싶다.

-박완서<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그의 소망을 닮고 싶다.  그는 이미 이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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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2-18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의 글. 저도 참 좋아하는데 blanca님 페이퍼 보니 이 책도 얼른 읽고 싶네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blanca 2021-02-18 16:36   좋아요 0 | URL
여전히 좋아요... 마음이 참 재독한 글도 있는데도 여전히 새롭고 울림이 있네요.
 

나는 코로나를 낙관하지 않는다. 단기간에 깔끔하게 끝나고 모두 한꺼번에 마스크를 벗어버릴 날이 조만간 올 거라고 개인적으로 믿지 않는다. 국경을 예전처럼 자유롭게 넘나들고 지구촌 일일 생활권이 회복될 거라 쉽게 낙관할 수도 없다. 특히 유럽의 상흔은 더 오래 남을 거라 생각한다. 이민자와 여행자에 대한 관용과 너그러움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방역을 위하여 개인을 통제하는 것이 당연시될 때 그것은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직시해야 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 않고는 인간적인 신뢰에 기대지 않고는 도저히 방역을 달성할 수 없다. 


이것은 지구의 인간에 대한 반격이다,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야생동물의 포획과 가금류의 집단 사육이 코로나의 단초를 제공했으리라 보는 시선은 그것의 일부일 것이다. 지구의 온난화가 바이러스의 활성화를 도왔다는 것 또한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의 존재 자체로 코로나에 기여했다. 그리고 그것을 막고자 쓰고 버리는 일회용 마스크들, 일회용 식품 용기들은 역설적으로 다시 지구 환경 파괴에 일조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지구의 온도를 올리고 바이러스가 증식하기 쉬운 환경을 만든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우리는 살기 위해 끊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암담한 역설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대지와 마시고 있는 공기와 물을 더럽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살기 위해 사랑과 접촉과 신뢰를 거부해야 하는 비대면의 관계의 풍토에도 적응해야 한다. 때로는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삶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친구를 만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일, 부모님과 식사를 하는 일, 연인과 입맞추는 일이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찔하다. 나의 모든 일상이 최악의 경우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간접적 가해가 될 수 있다. 




















저자 정혜윤은 피렌체의 보카치오가 흑사병으로 부모와 친구를 잃고 쓴 <데카메론>의 열 가지 주제를 가지고 21세기의 코로나 시대의 사랑의 이야기를 쓴다. 디스토피아를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의 감각을 중세에서 근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시대의 인문학자의 농염한 사랑의 테마로 재편한다. 그것은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재해를 조금 더 본질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다시금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욕망하고 생존하느라 짓밟고 간과했던 것들을 비로소 응시할 수 있는 관조의 시간을 선물받는다. 그것은 아프고 사무치는 일이다. 우리가 파괴하고 우리가 떠나보낸 지구의 근원적인 아름다움, 생명들을 다시금 찬찬히 돌아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카뮈의 <페스트>,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오릭스와 크레이크>, 어슐러 K. 르 귄의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등 수많은 텍스트들이 정혜윤의 언어를 통과하여 정리되고 팬데믹의 시대의 각주이자 미주가 된다. 우리가 막상 온몸을 담그고 있어 그 어떤 전체적인 조망도 불가능한 현실이 무언가 조금 더 투명하고 명징하게 떠오르는 느낌이 드는 읽기다. 


그녀는 잃어버린 사랑, 회복기의 사랑에 기댄 낙관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 때 우리가 꿈꾸는 내일은 디스토피아를 통과하고 유토피아로 상승한다. 믿고 싶다. 아이들이 마스크를 벗고 친구와 함께 떡볶기를 먹고 노래를 부르는 게 꿈이라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건 내가 누렸던 어제인데 그 어제를 마치 내일처럼 기약해야 하는 건 참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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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2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3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1-02-13 2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인류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쉽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이 전대미문의 팬데믹은 과연 얼마나 더 인류와 지구 곁에 머물지 궁금합니다.

blanca 2021-02-14 10:49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은 더 잘 체감하실 것 같아요. 인정하고 나면 순간순간 더 마음이 내려앉아요....그냥 인간의 존재 자체가 지구에 해가 되는 느낌...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단발머리 2021-02-15 1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작년 3월, 4월이 제일 힘들었구요. 차라리 지금은 반 정도 포기한 상황인데 조카 아이를 보면 이제 초등 2가 되는 조카를 생각하면 맘이 그렇게 우울해요. 학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옆에 친구랑 이야기 하지 마‘였구요. 짝궁이 뭔지 몰라요. 거리두기 때문에요 ㅠㅠㅠ
저도 이 책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나온 줄은 알고 있었는데 블랑카님이 읽으셨다니 저도 읽어야겠다는 그 어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염 도시>가 기억나네요. 저 그 책도 블랑카님 소개로 읽게 되었더랬죠^^

blanca 2021-02-19 15:40   좋아요 0 | URL
흑, 제 아이가 그 코로나 1학년입니다. 친구들 얼굴도 잘 몰라요. 요새는 아이들 몸을 서로 터치하는 놀이를 하면 애들이 운다면서요. 저도 어느새 마스큼 안 쓰고 걷던 때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감염 도시> 다시 읽어 보고 싶네요.^^
 

윌라 캐더의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19세기 중반 뉴멕시코 교구 사제로 온 장 마리 라투르 신부의 서사적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사제의 이야기지만 종교적 틀 안에서만 한정되지 않고 선교를 펼치는 지역의 멕시코 원주민과 인디언들의 토속 신앙과 관념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흩뿌려져 있다.  사제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태생과 문화, 심지어 신앙을 가지고도 교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 접목의 지대에서 돋보인다. 이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작가의 선구자적 통찰과 포용력이 없이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확장의 영역이다. 뿐만 아니라 윌라 캐더의 전매특허라 할 만한 장대한 풍경의 묘사가 일품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보여주듯 그녀의 묘사적 언어는 날카롭고 찬란하다. 언어가 상기하는 감각적 심상의 폭과 깊이가 경이롭다.


 


자연을 자신의 편의대로 가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각과 그것에 어떤 변형이나 훼손없이 공존을 도모하는 인디언들의 시각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 죽음을 어떤 불가피한 종말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관조하는 사제의 모습은 이 이야기의 백미다. 또한 사제에게서 세속적 욕망을 제거해버리지 않음으로 하나의 온전한 인간상을 창조해 낸 것 또한 미덕이다. 인간적인 욕망, 무언가를 건설하고 남기고 싶은 마음은 낯익은 것이다. 그 낯익음 속에서 지향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공감을 얻는다. 


주교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몇 주일 동안, 그는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것은 지나간 <과거>였다. 미래는 미래 스스로 저저로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어 가는 것에 대해 지적인 호기심이 있었다. 한 인간의 믿음과 가치의 척도에 있어 일어나는 그 변화에 대해...... 점점 더 생각할수록 그에게 인간의 삶은 자아의 경험, 말하자면 자아 그 자체가 아니라 자아가 겪는 경험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그의 종교적인 삶과는 별개라고 생각했다. 

-윌라 캐더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p.323


인간의 삶은 자아의 경험"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지나가는 모든 일들을 통과하며 견딜 수 있다. 그 일들에 잠식되거나 무릎이 꺾이거나 하는 대신 그 모든 일들을 경험하고 그것이 과거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그것들을 회고하게 될 것이다. 그때의 선택과 행위를 섣불리 심판하는 대신 그 불가피함 속에 오롯이 견뎌낸 자신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종국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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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2-07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일들에 잠식되거나 무릎이 꺾이거나 하는 대신 그 모든 일들을 경험하고 그것이 과거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이 책도 궁금하네요. 레삭매냐님께서 극찬하셨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블랑카님께서 읽으신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읽으니까 더 읽고 싶어지네요 ^^

blanca 2021-02-08 09:59   좋아요 1 | URL
윌라 캐더는 사랑입니다...

단발머리 2021-02-0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디언 마을의 사제 이야기라는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백미라고 하셨던 부분, ‘죽음을 하나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관조하는 사제의 모습‘에 대한 부분이 무척 궁금합니다.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2-07 18:33   좋아요 2 | URL
<나의 안토니아>,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통장 잔고가 남아 있는 한 그냥 구입, 소장하셔야 할 책입지요.
더 말을 보태는 건 구차한 일일 정도로요. ㅋㅋㅋㅋ 이러다가 후회하셔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

단발머리 2021-02-07 18:42   좋아요 0 | URL
저는 책 한 권에 혹했는데 이리 한권 더 던져주고 가시렵니끼?!? @@

다락방 2021-02-07 18:47   좋아요 2 | URL
저 < 나의 안토니아> 소장한지 십년 넘었어요. 네, 아직 안읽었고요.. 🙄

단발머리 2021-02-07 18:49   좋아요 1 | URL
일단 구입, 소장각이라 하시니 읽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가 봐요🙄

Falstaff 2021-02-07 19:10   좋아요 1 | URL
아이고, 뭔 말을 못해요. ㅋㅋㅋㅋ
이 책하고 안토니아는 쉬운 얘기로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란 말씀입죠.
후회하시면 제가 책값 물어드리겠습니다. 저, 절대로 열린책들하고 자매결연 맺지 않았습니다. ㅋㅋㅋㅋ

아냐, 아냐.... 안토니아만 걸기로 하겠습니다! 자고로 남아 일언은 풍선껌이니, 제 맘입니다. 하하하.....

단발머리 2021-02-07 19:28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나의 안토니아> 재미없으면 폴스태프님이 책값 물어주신대요. 저 살까요?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2-07 19:27   좋아요 0 | URL
일단 사시는 게 옳은 결정 같아요. 그 다음은.... 모르겠어요. 일단 사세요!! ㅋㅋ

blanca 2021-02-08 10:01   좋아요 1 | URL
ㅋㅋㅋ Falstaff님 당연히 여성분이라 생각했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 다 해주셨군요. 저는 <우리 중 하나> 너무 읽고 싶은데... 번역 얘기 때문에 망설여져요. 원서로 읽자니 너무 피곤하고요..

다락방 2021-02-08 10:34   좋아요 0 | URL
저는 우리 중 하나 도 사뒀어요. 저를 어쩌면 좋을지...😔

잠자냥 2021-02-08 16:25   좋아요 0 | URL
푸하하. 폴스타프 님 여성설! ㅎㅎㅎㅎㅎㅎ

Falstaff 2021-02-08 17:25   좋아요 2 | URL
ㅋㅋㅋ 저도 여성설이 재미있어서 답글을 달려고 했는데 <나는 고백한다>가 느므느므 재미있어서 도무지 짬을 못 내겠더라고요.
이제 3권까지 다 읽었습니다. 말 그대로 강추!!!!
오늘은 도미회에 쐬주, 낼은 조상님 성묘, 모레나 독후감 쓸 예정입니다. 크하, 개봉박두!
 

소용이 전부처럼 실질처럼 호도되는 사회에서 가장 소용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누군가는 책을 읽는 일을 그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우울과 생의 급박한 일들이 한꺼번에 닥칠 때 역설적으로 더 그런 일을 생각하게 된다. 걱정을 하고 거기에 침잠하고 모든 소용과 실질로 달려가는 일 대신 물러나고 읽고 쓰는 일, 고리타분한 것들,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에 푹 빠져버리고 싶다. 사는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믿어보고 싶어지니까 그렇다.





이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 제목만으로 저자와 번역자에게 큰 빚을 졌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 말이 너무 좋아 계속 곱씹으며 이미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좋아해 버렸다. 그리고 읽고나서는 더 좋아졌다. 사실  서문부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정경을 그리면 그냥 지게 된다. 이런 삶도 있다.


영하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감동에 젖어 프루스트를 생각하곤 했다. 코르크 벽 탓에 난방이 조금 과하게 된 방에서 죽은 그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종일 일하고 돌아온 폴란드 포로들이 게르망트 공작 부인 이야기나 베르고트의 죽음, 또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대로 전해주고자 했던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내면 묘사를 그토록 집중해 듣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놀라고 감격할까, 하고 말이다. 더욱이 그가 죽은 지 20년이나 됐을 때였는데 말이다.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그렇다. 저자 유제프 차프스키는 소비에트 연방 그랴조베츠 포로소용소에 함께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을 위해 그곳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참조할 그 어떤 책도 심지어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단 한 권도 그는 소지하고 있지 않아서 모든 것을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대목을 거의 정확하게 기억해서 인용했다. 죽음이 지척에 있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신뢰할 수 없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포로들은 절망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는 대신 가장 안 어울릴 것 같았던 지적 환희를 위해 그 빵 한 조각 나오지 않는 배움의 시간을 기꺼이 공유한다. 포로들이 각자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에 종사했던 직업에서 가져온 머리 속 지식으로 각 분야에서 스승이 되었고 열성적으로 제자가 되어 이 은밀하고 위험한 수용소 대학은 문을 열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유제프 차프스키의 프루스트에 대한 강의록이다. 


우리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러한 배경을 차치하고라도 이 프루스트 강의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프루스트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다 갖춘 경이로운 통찰을 준다. 프루스트의 그 처절할 정도의 정밀한 거리두기식 관찰기가 가지는 궁극의 의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빠지면 정작 잘 안 보이는 맹점이다. 이것을 한 발짝 떨어져서 거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종합하고 분석해 주는 강의가 더없이 필요한 이유다. 나는 마치 그 수용소에서 그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차프스키의 열성적인 강의를 듣는 착각이 들었다. 그에 따르면  프루스트는 무엇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 인간을 관류하는 시간, 그 흐름 자체를 구현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분권은 그에게 반하는 하나의 타협이었다. 시간이 파괴하는 모든 것, 변질시키는 모든 것, 그럼에도 궁극에 그를 사로잡은 그 단 하나의 의미를 그는 자신의 생과 뒤섞인 작품 그 자체로 구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단 한 권'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가 원했던 형태가 아닌 것이다. 행갈이도 여백도 장도 부도 없기를 그가 소망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어느 죽어 있는 하나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평행우주 같은 우리의 또 다른 삶 그 자체가 되기를, 그 흐름 자체를 형상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얘기였다. 기억과 회상,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섞여드는 그의 서술은 그러니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의 기법이 아니라 치밀한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들 그 자체, 느끼는 생각하는 그 행위 자체를 언어로 포획하는 일이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그것의 구현을 위해 자신의 삶 자체를 제물로 바쳤다.


프루스트 강의는 그들이 인간 이하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안전망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감상하고 때로 그것을 위해 삶도 바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을 경청하며 때로는 살아남고 때로는 견디고 때로는 그대로 죽어 버렸을 그들의 그 빛나던 시간을 잠시나마 엿본 것만으로 나는 많은 위안을 얻었다. 차프스키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프랑스 예술에 바치는, 내 소박한 감사의 공물"에 나도 나름의 소박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지향해야 하는 하나의 별을 그가 가리켜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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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4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4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타인에게 차마 드러내기 힘든 심연이 있다. 

모든 인간은 복합적이다. 대외적으로 인권을 존중하자며 정의를 부르짖으며 자기 부하 직원에게는 갑질을 일삼는 사람이 있고 세상 없는 독실한 종교인이 아이들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경우도 있다. 어릴 때는 사람을 단면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들였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이분법이었다. 내가 지지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무결한 사람이어야 했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미덕이 결여되어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인체의 신비 만큼 인간의 미스터리함을 느낀다. 어제 미덕을 행했던 사람이 그 날 밤에 약자를 폭행하는 스토리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누군가를 칭송하거나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나는 욕망 앞에 선 인간을 믿지 않는다.


나이가 많아지면 이렇게 믿지 않는 것이 많아진다. 두려운 것도 많아진다. 사회적 연계가 강화되며 자기가 아닌 주변인의 이권과 안전에 좋든 싫든 개입하게 되며 때로 비겁해진다. 그래서 N번방 사건이 나왔을 때, 그것을 수면으로 노출시긴 최초 제보자이자 취재 기자가 20대 중반의 대학생 둘이라는 데에 놀라운 한편 수긍이 갔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성별을 몰랐을 때 바로 남학생으로 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용감한, 이런 대단한 일을 한 주체로 자동반사적으로 나는 왜곡된 성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학습은 놀라운 것이다. 무언가를 용감하게 고발하는 주체로 자동적으로 우리는 남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여대생 두 명인 익명의 '추적단 불꽃'이었다. 2019년 7월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이었던 불과 단은 '탐사 심층 르포 취재물' 공모전을 준비하며 구글링을 하다 우연히 '와치맨'이 운영하는 구글 블로그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텔레그램 '번호방' 링크를 타고 아동, 청소년 성착취물 공유 단체 채팅방인 'N번방' 잠입취재로 이어지게 된다. 텔레그램은 독일에 서버가 있는 모바일 메신저이다. 자기 신원을 노출하지 않으며 각종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고 범죄를 공모하는 터전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한 곳이다. 


N번방은 언론으로 크게 보도되었지만 이것이 막연히 사이버 성범죄라고만 추측할 뿐 정작 여기에서 이루어진 범죄가 실생활과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 이 범죄의 핵심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도는 높지 않다. 이곳의 핵심은 성범죄 대상이 자기 결정권이나 자기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는 어린이, 청소년이라는 점이다. 그들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파괴한 각종 불법촬영물을 미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협박하고 조롱하였으며 심지어 주변의 지인들을 능욕하는 각종 불법촬영 영상물을 올리고 그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모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 촬영물을 각종 가상화폐로 거래하며 그 채팅방에 들어와 있는 유료회원들을 상대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이것을 제작하고 유통시킨 범죄자들 뿐 아니라 문제는 이 대화방에 들어와 있던 팔천 명이 넘던 회원들이다. 그들은 이 촬영물을 감상하고 지인을 능욕하고 각종 사회 일탈적인 발언을 주고받는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에 대한 색출과 처벌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불과 단의 평범하게 생각했던 선량해 보이는 지인도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이십 대 중반에 믿었던 주변인들의 괴물 같은 심연을 들여다본 불과 단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는 N번방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세상에 터뜨린 이 두 여학생이 겪었을 트라우마와 신변에 대한 걱정은 정작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는 그 둘이 그것을 취재하는 과정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맞닥뜨린 각종 성추행과 성편견에 따른 차별적 발언 등으로 갖게 된 상처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나보다도 훨씬 어린 여대생들의 성장 과정 및 대학교, 취업시장에서 겪게 된 일들이 어쩌면 그렇게 한 치의 진보도 없이 똑 닮았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세상에서 어린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부당한 일들을 끊임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그것에 반기를 들면 나는 예민하고 성마른 여자가 되고 넘어가면 무던하고 적응력 좋은 사회인이 되는 것이라는 구도가 염증스럽다. 


N번방을 발본색원한다고 해서 음지에서 자라나는 거대 욕망의 뒤틀린 재현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선악 구도를 뛰어넘어 한계를 모르고 타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행태가 사소한 것이라 여기는 순간 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누구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축소 환원되어 유린될 수 있고 그것은 자본주의 화폐로 거래되며 이권 사업으로 커갈 것이다. 자기 몸을 지키는 거부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운 취약 입지에 있는 아이들, 약자들이 가장 먼저 범죄의 타겟이 될 것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은폐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려 할 때 우리는 그 카르텔의 침묵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상시 감시체계가 작동하고 언론과 우리 모두가 주시해야 하는 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비단 성범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반응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의 어긋남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짓밟는 폭력의 지대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지 않는가? 인간이 인간을 욕망의 대상으로 물화할 때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은 마땅히 엄벌로 다스려야 하는 범죄다. 


불과 단은 아직 세상을 믿는다. 그들의 믿음에 배신하지 않는 응답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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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1-29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감사한 리뷰에요, 블랑카님.
언제나처럼 좋고, 감사한 리뷰입니다.

blanca 2021-01-30 08:5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기 전까지는 너무 막연하게 모호하게만 알고 있었더라고요. 놀라웠어요. 나의 20대를 돌이켜 보면 참으로 하기 힘든 행동이었을 텐데... 그리고 그때와 사회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 더 절망을 느낍니다.

수이 2021-01-29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리뷰를 읽어도 읽어야지 읽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기만 했는데 블랑카님 리뷰는 읽으면 정말 지금 당장 읽고 싶어지는 힘이 있어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blanca 2021-01-30 08:55   좋아요 0 | URL
수연님, 이 책을 많이 읽어주고 기억해 주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안 그래도 벌써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희석되고 이것은 성범죄자들의 형량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네요.

얄라알라 2021-02-04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아주 오래된 유죄] 초반부 읽고 있는데, 이 책과 같이 읽으면 더욱 좋겠군요!! 표지만 보고 책 소개 제대로 안 봤던 책인데, 리뷰 고맙습니다!

2021-02-04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