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이 전부처럼 실질처럼 호도되는 사회에서 가장 소용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누군가는 책을 읽는 일을 그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우울과 생의 급박한 일들이 한꺼번에 닥칠 때 역설적으로 더 그런 일을 생각하게 된다. 걱정을 하고 거기에 침잠하고 모든 소용과 실질로 달려가는 일 대신 물러나고 읽고 쓰는 일, 고리타분한 것들,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에 푹 빠져버리고 싶다. 사는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믿어보고 싶어지니까 그렇다.
이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 제목만으로 저자와 번역자에게 큰 빚을 졌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 말이 너무 좋아 계속 곱씹으며 이미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좋아해 버렸다. 그리고 읽고나서는 더 좋아졌다. 사실 서문부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정경을 그리면 그냥 지게 된다. 이런 삶도 있다.
영하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감동에 젖어 프루스트를 생각하곤 했다. 코르크 벽 탓에 난방이 조금 과하게 된 방에서 죽은 그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종일 일하고 돌아온 폴란드 포로들이 게르망트 공작 부인 이야기나 베르고트의 죽음, 또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대로 전해주고자 했던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내면 묘사를 그토록 집중해 듣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놀라고 감격할까, 하고 말이다. 더욱이 그가 죽은 지 20년이나 됐을 때였는데 말이다.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그렇다. 저자 유제프 차프스키는 소비에트 연방 그랴조베츠 포로소용소에 함께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을 위해 그곳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참조할 그 어떤 책도 심지어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단 한 권도 그는 소지하고 있지 않아서 모든 것을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대목을 거의 정확하게 기억해서 인용했다. 죽음이 지척에 있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신뢰할 수 없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포로들은 절망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는 대신 가장 안 어울릴 것 같았던 지적 환희를 위해 그 빵 한 조각 나오지 않는 배움의 시간을 기꺼이 공유한다. 포로들이 각자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에 종사했던 직업에서 가져온 머리 속 지식으로 각 분야에서 스승이 되었고 열성적으로 제자가 되어 이 은밀하고 위험한 수용소 대학은 문을 열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유제프 차프스키의 프루스트에 대한 강의록이다.
우리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러한 배경을 차치하고라도 이 프루스트 강의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프루스트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다 갖춘 경이로운 통찰을 준다. 프루스트의 그 처절할 정도의 정밀한 거리두기식 관찰기가 가지는 궁극의 의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빠지면 정작 잘 안 보이는 맹점이다. 이것을 한 발짝 떨어져서 거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종합하고 분석해 주는 강의가 더없이 필요한 이유다. 나는 마치 그 수용소에서 그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차프스키의 열성적인 강의를 듣는 착각이 들었다. 그에 따르면 프루스트는 무엇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 인간을 관류하는 시간, 그 흐름 자체를 구현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분권은 그에게 반하는 하나의 타협이었다. 시간이 파괴하는 모든 것, 변질시키는 모든 것, 그럼에도 궁극에 그를 사로잡은 그 단 하나의 의미를 그는 자신의 생과 뒤섞인 작품 그 자체로 구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단 한 권'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가 원했던 형태가 아닌 것이다. 행갈이도 여백도 장도 부도 없기를 그가 소망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어느 죽어 있는 하나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평행우주 같은 우리의 또 다른 삶 그 자체가 되기를, 그 흐름 자체를 형상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얘기였다. 기억과 회상,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섞여드는 그의 서술은 그러니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의 기법이 아니라 치밀한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들 그 자체, 느끼는 생각하는 그 행위 자체를 언어로 포획하는 일이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그것의 구현을 위해 자신의 삶 자체를 제물로 바쳤다.
프루스트 강의는 그들이 인간 이하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안전망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감상하고 때로 그것을 위해 삶도 바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을 경청하며 때로는 살아남고 때로는 견디고 때로는 그대로 죽어 버렸을 그들의 그 빛나던 시간을 잠시나마 엿본 것만으로 나는 많은 위안을 얻었다. 차프스키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프랑스 예술에 바치는, 내 소박한 감사의 공물"에 나도 나름의 소박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지향해야 하는 하나의 별을 그가 가리켜 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