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 병원에 갔다  시간이 남아서 이전에도 간 적이 있는 근처의 동네 서점에 갔다. 신혼 때 살던 아파트 입구의 대학가로 빠지는 모퉁이에 있는 아주 작은 서점이다.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는 것도 편리하지만 이때의 문제는 얻어 걸리는 책이 없이 온전히 자신의 취향,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것으로 읽기가 한정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여러 책을 주인장의 선별 하에 배열해 놓은 서점의 방문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그곳에서 만난 예쁜 책. 책을 사기 위해 무심코 산 책이었는데 젤다에게 한동안 푹 빠졌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 뮤즈. 가십걸.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를 있게 한 여자. 이런 선입견을 일거에 박살내는 책이다. 스콧의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 중 몇몇은 엄연히 아내 젤다의 것이었다. 심지어 젤다가 정신병원에서 쓴 자전적인 소설 <왈츠와 함께>는 스콧이 자신이 쓸 내용과 겹친다고 강제로 많은 부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녀의 정신병은 스콧이 젤다의 글쓰기를 방해하는 하나의 구실이 된다. 


<젤다>에는 젤다가 스콧의 이름으로 혹은 공저로 발표한 단편소설 다섯 편과 아홉 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정교한 플롯이나 대단한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공감각적 심상을 표현한 문장들의 절창은 경이로울 정도다. 또 언뜻언뜻 스콧 피츠제럴드의 문장들과 젤다의 그것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흡사한 대목들이 있다. 재즈시대의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던 그 낭비의 찰나적 아름다움의 묘사와 그것에서 정작 소외되는 내면의 심연의 대비들이 그러하다. 


스콧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시간들을 그린 것만 같은 <남부 아가씨>는 마치 그 둘과 함께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는 듯한 착각이 드는 읽기를 만드는 감각적인 작품이었다. 


모든 곳에는 그곳만의 시간이 있다. 겨울철 한낮 유리 같은 햇살 아래의 로마, 푸른 거즈 같은 봄날 석양에 덮인 파리, 그리고 뉴욕의 새벽 틈새로 흘러드는 붉은 태양, 따라서 당시의 제퍼슨빌에도, 내 생각에는 지금도, 다른 곳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름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은 길모퉁이 가로등들이 깜빡대고 칙칙대며 켜지는 초여름 밤 여섯 시 반쯤에 시작해서, 공 같은 백열전구들이 나방과 딱정벌레로 까매지고 먼지 자욱한 거리에서 놀던 아이들이 잠자리로 불려 들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젤라 피츠제럴드 <젤다> 남부 아가씨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에서는 스콧이 젤라의 일기나 편지글을 표절하여 자신의 책을 낸 것을 익살스럽게 지적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참으로 서글프게 느껴진다. 아내의 편지글, 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껴 써서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세상에 내어놓고 유명세를 누리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 발레,그림, 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그 어느 분야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정신 분열증으로 전기자극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서 대기하다 잠긴 문 안에서 화재로 죽어버려야 했던 젤다의 운명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게이도 여전히 살아 있다. 모든 정처 없는 영혼들 속에. 상류층의 풍속대로 계절을 따라 순례에 나서고, 퀴퀴한 대성당들에서 구릿빛 몸과 여름 해변의 사라진 마법을 찾고, 안정과 성공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리츠를 지금의 리츠답게 만들고, 대양 횡단 여행을 이브닝드레스와 다이아몬드 팔찌의 비공식적 업무로 만드는 모두의 마음속에.

-젤라 피츠제럴드 <젤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



<오리지널 폴리스 걸>의 어느 날 죽음으로 표표히 화려한 사교계에서 퇴장해 버린 게이라는 여자를 얘기하는 화자에는 엄연히 젤다가 있다. 젤다는 게이에 대한 사람들의 표면적 이해와 오해들, 게이의 마음 안에 숨어 있는 욕망과 결핍을 마치 스스로를 변호하듯 이야기한다. 게이가 "언제나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서 낭만이 달아날까 봐 걱정했다."는 이야기는 사실 젤다 자신의 것이다. 대중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소위 그 시대의 셀럽으로 온갖 억측과 가십의 대상이 되었던 젤다의 내면에는 남편의 유명세에 가려 스스로의 재능과 꿈을 실현할 수 없었던 좌절감과 함께 언젠가 반드시 스러지고 말 그 시대의 번영과 낭만의 최첨단을 향유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공존했다.


젤다는 우리에게 찰나처럼 지나가 버리는 그 모든 젊은 한 순간의 아름다움과 낭비와 순수와 열정의 가운데에 거기에 여전히 숨쉬고 있다. 그 모든 오해와 실패와 망각과 죽음도 함께 있는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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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1-06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젤다의 인생을 소설로 쓴 거 읽었어요. 드라마로도 나왔고요. (드라마는 못 봤어요)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고 피츠 제럴드 욕도 했습니다. 특히 ‘밤은 아름다워라‘를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blanca 2021-01-07 09:06   좋아요 1 | URL
아, 어떤 소설일까요? 피츠제럴드는 당시의 시대관을 반영한 나쁜 남자의 전형인 것 같아요. 아내의 재능을 가로채고 질투하고 글쎄, 이게 아직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어렵겠지만요. 저는 젤다가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와 거의 겹치는 존재라고 생각했었어요. 부잣집 딸에 철 없고 향락과 사치만 일삼는. 그런데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거더라고요. 문장력이 아주 탁월해요. 발레도 이십 대에 다시 시작해서 입단 제의까지 받을 정도였다니. 그래도 그녀의 사후 그녀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다행입니다.

유부만두 2021-01-07 09:20   좋아요 1 | URL
<Z: A Novel of Zelda Fitzgerald> by Therese Anne Fowler 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