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집에서 한 번도 이사를 하지 않은 채 살던 난, 이사를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다.

서울에서 전학왔다고 서울말을 쓰던 얼굴 하얀 지영이는 전학 온 첫날부터 우리 반 남녀 모든 학생들에게 공주 대접을 받았다.

완도 어디서 전학왔다던 인숙이는 전학오자마자 중간고사에서 전교2등을 해서 학교에 소문이 쫙 퍼졌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공주대접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집은... 아직도 거기다.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이사. 원을 풀었다. 결혼하고 10년. 지금부터 이사내력을 풀어볼까 한다. 

1994년 가을, 결혼하자마자 시댁에서 보름쯤 살았고, 그 다음엔 친정에서 일주일, 그리고 서울 반포의 신혼집에 입성했다. 집 뒤로 고속도로가 난, 무지무지 시끄러운 집이었다. 낡아서 방음도 엉망이었다. 몰라서 얻은 거였다. 거기서 6개월.

1995년 봄, 역시 서울이지만 정 반대쪽인 북쪽의 태릉선수촌 부근으로 이사했다.  남편 직장이 그쪽으로 옮긴 탓이었지만, 어떻게든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난 정말 좋았다. 전세값을 조금 보태 평수를 두배로 늘렸다. 신혼때, 전세값 천오백 올리느라 허리가 휘었다.

1년 살고 났더니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랜다. 그래서 1996년 여름, 그 옆동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1년 반.

1998년 봄, 남편이 난데없이 부산으로 발령이 났다. 그래서 부산으로 이사해 1년 반. 부산엔 사고무친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황금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부엌에서 바다가 내다보였다. 아침에 밥을 하고 있으면 바다에서 해가 떴다. 아이들 데리고 하루종일 해운대에서 살았다.

1999년 여름, 이번엔 남편이 전라도 정읍으로 발령이 났다. 그래서? 또 이사했다. 친정 가까워 좋았다. 서울-부산-정읍이니 강원도 한번 갔다가 제주도 한번 갔다가 서울 가면 기막히게 별을 그리는 거라고 웃었다.

2001년 봄, 강원도와 제주도를 건너뛰고, 곧바로 서울로 발령이 났다. 물론 이사했다. 전세 2년 계약이었는데, 계약할 때 2년 반쯤 살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흥, 그런데 집주인은 늘 자기 맘이다. 2003년이 시작되자마자... 집주인의 며느리에게 전화왔다. 2년 되었다고 나가라고. 자기 어머니는 차마 말 못하니 자기가 전화했단다. 법대로 하잔다. 헉...

그래서 2003년 봄, 일산으로 이사했다. 부랴부랴 골라 이사한 집은... 좋았지만 좁았다. 전세값을 2천만원이나 올려서 왔는데, 평수는 6평이나 줄었다. 그리고 이제 이사가 지겨워졌다. 내 집에서 살고 싶었다.

2003년 가을, 조금 무리해서 내집을 마련했다. 그래서 이사했다. 꽤 비쌀 때 사면서, 더 오르기 전에 지금이라도 사자고, 빚내가면서 샀는데, 계약하자마자 무슨무슨 부동산대책을 대통령님이 몸소! 발표하시면서 집값은 떨어졌을 것이다. 어차피 내집이니 신경 안 쓰기로 했다.

결혼하고 9년만에 8번째 집으로 이사하면서(물론 시댁 친정에서 산 것 빼고), 이제 이사 그만 하자고 생각했다. 내년에 남편이 또 지방발령이 난다는데, 적어도 올해, 2004년은 이사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런...데...

도서실이 이사한다. 4층의 도서실을 2층으로 옮긴다. 이번주일 내내 짐을 쌌다. 책만 몇백 박스다. 집의 이사는 포장이사 맡기면 되는데, 학교 이사는... 사람도 안 불러줘서, 기사아저씨 두분과 공익요원 1명,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다 했다. 어제까지 짐 싸고, 오늘은 내내 서가를 닦았다. 사서교사가 고상해보인다고? 실상은 노가다이다.

다음주엔 옮기고 짐 푸느라 또 다 가겠지...

팔자다. 내 팔자에 역마살이 없댔는데, 그래두 팔자인 모양이다. 누구를 탓하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가다에 어울리는 몸매를 가졌다는 점이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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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8-2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으---- 도서관 이사라니... 정말 노가다도 그런 노가다가....;;;
고생많으셨습니다. 다음주도 무사히 잘 넘기시기를.... 병 안 나시게 쉬엄쉬엄 하셔요. 막바지 더위도 한창인데 걱정입니다.

starrysky 2004-08-26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 너무 고생하시네요.. 결혼하신 후의 잦은 이사도 그렇지만 혼자(+소수의 인력) 그 무거운 책들을 옮기고 정리하셔야 하다니요.. 책은 1박스만 해도 무게가 엄청난 건데 몇백 박스라뇨.. @_@ 아아, 정말 너무한다. 지나치게 튼튼한 저라도 가서 도와드리고 싶네요..
혹시 이사하시느라 몸살이라도 나지 않으실까 걱정이예요.. 건강관리 잘 하시면서 쉬엄쉬엄 하시길 당부드려 봅니다..만 호랑녀님 성격이시라면 아이들 하루 빨리 제대로 된 공간에서 책 보여주고 싶어서 후딱 해치우실 것 같네요. 무사히 마치시길 빕니다!! ^^

sooninara 2004-08-2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이사에 도가 트이셨겟네요..^^전 산본신혼집에서 안산으로 갔다가 현재집으로 골인해서..이사 경험은 적지만..그래서 그런지 이집에서 4년째 들어갈려니 이사 가고 싶기도 합니다..현재 사는곳이 좋긴 한데...기분 전환이랄까...웬지 맘이 둥둥 뜨는것이..가을 바람인가봐요..
책이 이삿짐중에 가장 무거운건데..그걸 다 싸서 옮기시려면...손목,팔목 조심하세요..건강하다고 무리하다 큰일납니다..도서관 이사하시면 새기분이 들고 좋으실겁니다(염장성 멘트죠?)

하얀마녀 2004-08-2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고생하시겠네요. 몸 조심하시길.

비로그인 2004-08-26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행적(!)입니다. 읽는것만으로도 헥헥....
전 서울 토박이인데다가 환경이 바뀌는 것에 쉽사리 적응을 못하는 스타일인지라, 부평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온 이후 이 동네에서 계속 버팅기고 있다지요. 초등학교 6학년때 부천으로 잠시 이사 갔었으나 온갖 생떼를 쓰면서 전학 안 가고 부천에서 지금 동네로 학교를 다니는 미친짓을 감행했었던...;;; 하늘이 감탄했었던건지 결국 6개월만에 다시 재이사를--;;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이 동네에서 살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실은 그러고 싶다는..;;)

숨은아이 2004-08-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짐 싸는 것도 문제지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에구, 공익요원 5명쯤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T_T

진주 2004-08-26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ㅠㅠ
저는 이사란 말만 나오면 눈물부터 나려구 해요....
저도 한 8번 했거든요. 적응하는데 1년 정도 걸리는데 겨우 정 붙일만하면 이사를 해 대는 통에, 심각한 정서장애를 앓을 뻔 했다는......(콘도에서 방 옮길 때 그런 넉두리한 거 기억나세요?)
책박스 무거운 데 몸 조심하세요

부리 2004-08-2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같이 연약하신 분이 왜 그런 걸 한답니까. 무리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젊을 때 고생은 커서의 지병입니다.

반딧불,, 2004-08-26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얼마나 힘드셨어요??
넘 무리하셨네요..어떻게..견디셨는지...


장난 아닌데요..
어떻게 이사비용은 아니라도, 꼭 수당 챙기세요.아셨죠??

호랑녀 2004-08-26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수당이요? 계약직 노동자에게 수당이 다 뭐랍니까? 아직 안 끝났어요. 게다가 맘고생은 또... 스토리가 깁니다요 ㅠㅠ
부리님... 호호... 마태님께 물어보세요. 제 얼굴이 17인치라고 알려주실 거에요. 17인치 두상에 연약한 몸이면 제가 어찌 사람입니까, 괴물이지?
박찬미님...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군요. 전 별로 스트레스 안 받아요. 그냥 닥치면 해요.
숨은아이님... 갈대님과 소굼님께 SOS요청할까요? 싫어하실 것 같은데요?
평범한여대생님... 새로 적응하면 또 나름대로 괜찮기도 해요. 하긴 성격 나름인데, 인간관계가 깊어질 틈이 없어서 좀 아쉽긴 해요. 엄마가 도와야 할 부분이죠.
하얀마녀님... 고맙습니다. ^^
수니나라님... 저도 기대하고 있는데, 가서 하나하나 사인물이며 장식 다시 할 일이 걱정입니다. 제가 워낙 미적 감각이 없어서... 이럴 때 수니나라님같은 분이 필요한데...ㅠㅠ
하하, 스타리님, 어떻게 아셨어요? 이번 일요일에 몰래 나가 일하려고 맘먹고 있는데...
판다님... 1등으로 오셨네요 ^^ 네, 쉬엄쉬엄 조심조심 하려구 해요. 이래서 제가 팔뚝살이 빠질 틈이 없답니다. 이건 근육이라구요...ㅠㅠ

마냐 2004-08-26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결혼하구..거의 연례행사로 이사했는데.. 님 앞에서는 고개를 수그립니다..흐흐.
그나저나...노가다에 어울리는 몸매라니, 저와 비슷한 거 같아..왠지 더 반갑군요..으하핫.

호랑녀 2004-08-26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마냐님... 저는 마냐님을 떠올리면 하이칼라 신여성이 떠오른다니깐요?
신여성이 저같은 몸매라면... 안 어울리는데요? 신여성을 수행한 유모라면 모를까...ㅎㅎ

mira95 2004-08-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화려한 이사 이력이네요^^ 전 자취하느라 뭐 계속 이사를 다니는데요, 경상북도에서 교사를 하고 있으니 발령에 따라 계속 이사를 다니겠죠.. 하지만 문제는 전 짐싸는 걸 정말 싫어한다는 거에요... 내년에도 사택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사를 해야 할 텐데 벌써부터 한숨만 쉬고 있답니다..(포장이사할까...)

호랑녀 2004-08-27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라님... 돈으로 떼울 수 있으면 돈으로 떼우세요.(제가 이러니 부자가 못됩니다 ㅠㅠ) 아, 경북지역이시구나. 포천 어딘 줄 알았어요.
따우님, 집 이사는 제가 맘대로 하는 거지만, 도서관 이사는... 층층시하 시집살이라서 이사한 후가 더 걱정이랍니다. 가서 사인물 하나 하나 붙이는 것까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실 터이니...

가을산 2004-08-2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허리 괜찮으신가요?
2층이면 학생들이 찾아오기 더 좋기는 하겠네요. 층층 시하라는 것이 걸리기는 하지만....

무탄트 2004-08-2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 들어와서 집 이사만 두번, 회사 이사 두 번에, 내부 이사 두 번 하면서 힘들었는데, 호랑녀님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었군요. ^^ 그리고 얼마되지 않는 분량의 제 책들 가지고 이사하면서도 헉헉거렸는데, 도서관 이사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게다가 층층시하 시집살이라니... 몸살 나실까봐 걱정되는군요. 쉬엄쉬엄하세요. ^^

부리 2004-08-27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얼굴이 17인치라니 놀랍습니다. 지금 17인치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대단할 것 같네요^^ 호랑녀님 화이팅.

호랑녀 2004-08-2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막노동이 좋습니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받는 것두 만만치않네요.
가을산님... 허리는 아직 괜찮은데, 손목이... 아무래도 정형외과 가봐얄 것 같아요 ㅠㅠ
무탄트님... 이사 일정잡는 것 하나도 내 맘대로 안 된답니다. 흥, 이제 저도 안 서두를랍니다. 되거나 말거나... 증말 윗사람 되어서 변한건지, 원래 저런 성질머리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부리님... 앞으로 절대로! 부리님 뵙지 않을 거예요. 흥.

마태우스 2004-08-28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부리는 원래 저렇습니다. 그러니 저랑 놀아요!

호랑녀 2004-08-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고맙습니다, 따우님.
개학이라 더 정신이 없군요.
마태님, 놀아주겠다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노무 이사... 언제나 끝나려나...

책읽는나무 2004-08-3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서야 코멘트를 남기네요..
지난번에 이글 읽고 글남기려는데 민이가 하도 방해를 하는통에 말입니다..ㅡ.ㅡ;;

저는 이사를 결혼하고 두번 다녔는데요..
이사도 지역을 좀 많이 벗어나서 다니다보니.....
이번엔 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싶네요..ㅡ.ㅡ;;
헌데 이사비용도 그렇거니와 짐정리하는게 넘 힘이 들어서 이사엄두를 못내고 있지만요..
이사다니는것도 습관성이 붙나봐요!!ㅎㅎ

전 저기 전라도 지역도 한번 살아보고 싶고...강원도쪽도 살아보고 싶고...
얼마전에 다녀온 거제도도 살아보고 싶어요...
이쪽으로 너무 급하게 이사를 온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많이 드네요...ㅠ.ㅠ
왜냐하면 신랑이 얼마전에 새로 직장을 구할꺼라고 알아보니..경기도쪽에 현장이 하나 났다고 하던데...여기 이사온지가 일년만 지났어도 바로 짐들고 올라가는건데 말입니다..ㅠ.ㅠ
경기도쪽도 살아보고 싶거든요....
지금 이곳도 공기가 좋아서 마음에 들지만....벌써 지겨워지네요..ㅎㅎ

호랑녀님도 새로운곳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으세요??..^^
전 아마도 역마살이 끼었나봅니다...ㅎㅎ

로드무비 2004-09-0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봤어요.
고백하자면 즐겨찾기 조금 전 했습니다.
당연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안한 곳이 한 이틀새 일곱 곳이 발견됐습니다.
그래놓고 코멘트가 어쩌고 저쩌고 쓰고 앉았으니...
부산에서 1년 반 사셨다니 반갑네요.
제 친정이 해운대 부근이라...
저는 지금 다용도실이 엉망인데 그것 치울 엄두가 안 납니다.
그런데 이사라면...
님의 이사 얘기 읽으니 숨이 가빠지는군요.
그러게, 왜 자주 전근 다니는 남자를 고르셨어요?^^;;;

호랑녀 2004-09-0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나무님... 경기도도 괜찮아요. 사람 사는 곳이거든요 ^^
전 내년에 딱 한 번만 따라가기로 했어요. 그 2년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구요. 흠, 어떻게 산 집인데요...ㅠㅠ
로드무비님, 해운대 부근이 친정이셨어요? 와~ 잠깐 살긴 참 좋더라구요. 바닷가라... 그런데 제가 바닷가에 안 살아봐서 습기가 차니까 집에 곰팡이가 피더라구요. 그런 관리는 한 번도 안해봐서. 굉장히 난감해했죠. 제가 이 남자를 고를 때만 해도 이렇게 이사다닐 줄은 몰랐답니다.
그런데 그 즐겨찾기요. 님이 한 사이에 딴 사람이 빠졌나 봐요. 숫자가 똑같아요 ㅠㅠ
너무 즐겨찾기가 많아지니, 페이퍼고 리뷰고 다 읽을 수가 없어서 좀 힘들더군요. 그래서 저도 가끔 초심을 유지하기 위해 정리합니다.

아영엄마 2004-09-05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이 글 읽다가 책읽는 나무님 이벤트 놓칠 뻔했습니다..^^;; 이사를 자주 다니셨군요. 이젠 짐 싸는데 이력이 나셨을 것 같네요.

아영엄마 2004-09-05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간이 올리시니 글이 저의 길다란 페이퍼 브리핑에 묻혔나 봅니다. 이제서야 읽었네요. 죄송.(__)

호랑녀 2004-09-06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아영엄마님, 즐찾 수가 많다보니, 페이퍼브리핑 장난이 아니더군요.
예전엔 그거 다 찾아다녔는데, 저도 요즘은 거의 제목만 봅니다요...ㅠㅠ
 

우연히 한 논문에서 아래의 글을 발견했다. 한 초등학교의 사서교사를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논문의 주제는 사서교사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학교 내 여러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그것이 학교도서관을 살리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얘기였다.

그런데 아래의 구절을 발견하고는 논문의 주제와 상관없이 이 교장선생님이 도대체 누군지, 이 학교가 도대체 어딘지 몹시 궁금해졌다. 수원의 기독교 계통 사립학교라는데...유니텔 운운하는 것으로 봐서 꽤 오래 된 논문인 것 같은데, 그 시대에 이런 학교도서관이 있단다... 꼭 한 번 찾아가봐야지.

교장선생님이 도서관을 굉장히 중요한 곳으로 생각하세요. 교장선생님은 미국에서 공부한 목사이신데 도서관에 대해 바라는게 많아요. 우리학교는 도서관이 그야말로 중앙에 있지요. 교장선생님이 바라는 도서관은 교육의 중심센터이고 정보센터이고 아이들 자료탐구학습을 위한 장소가 되어야 된다고 해서 굉장히 지원을 많이 해주세요.

우린 정말 돈이 없어서 자료를 못사는 일은 없어요. 그런데 CD-ROM 도 사려고 해도 그렇게 적당한게 없더라구요. 소프트웨어가 굉장히 부족한거 같아요. 시청각미디어도 모두 도서관에 있고 컴퓨터도 물론 도서관에 있지요. 유니텔을 이용하는데 시간은 많이 걸리는거에 비해서 인터넷에서 얻어지는 정보는 적은거 같고… 하여튼 교장선생님은 나를 발령내기 전에 미국연수까지 보내주셨어요. 가서 보고 오라고 해서 3주일동안 로스앤젤리스, 시카고, 샌디애고 그런데의 학교들을 보고 왔지요.

우리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도 도서관을 이용해요. 고학년들은 자료조사를 해서 레포트를 써내는게 많거든요. 요즈음은  특히 사회시간, 세계 여러나라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서 많은 학생들이 도서관에 오고 또 도서관 옆의 소극장을 예약을 받아 수업시간에 연극공연 같은 것도 하고  비디오도 보고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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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4-08-24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든 도서관은 많아야 해요.. 물론 양서를 갖춘 도서관으로!

숨은아이 2004-08-2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원에 있는 기독교 계통 사립학교라면 삼일, 매향과 유신 창현이 있는데(요즘 새로 생긴 학교가 많아 다는 모르지만), 삼일중-삼일실고와 매향여중-매향여상(요즘엔 정보통신고로 바뀌었으려나?)은 고교가 실업계이니 도서관에 그렇게 투자하지 않을 것 같아요.(이런 편견이 사실이니... T_T) 유신고와 창현고는 한 재단입니다. 아주대학교도 같은 재단인데, 아무래도 대학과 고교가 한데 모여 있으니 교육 여건이 나을 수도... 그런데 대학 때 유신고 나온 아이들한테 듣기론, 거기 역시 세례 받기와 교회 출석을 강요하는 학교라지요.

starrysky 2004-08-2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멋진 학교, 멋진 교장선생님이시네요. 저도 어느 학교인지 궁금해요. ^^ 유니텔이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추억속의 그 무엇이니까 아마 2000년도 전후해서 나온 논문인가 봐요.
우리 호랑녀님 학교의 교장선생님도 저런 분이시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요..
아차차, 그러고 보니 저 오늘 도서관 가야 되는데.. 글쎄, 이틀이나 연체해 버린 거 있죠. ㅠㅠ

비로그인 2004-08-24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부럽네요. 저 학교 다닐 땐 학교에 도서관 따윈 없었는데...ㅠ.ㅜ

마태우스 2004-08-24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도서관이 많아야 해요. 5천개만 있다면 양서를 내도 5천권은 기본으로 팔리는 거구....

진/우맘 2004-08-25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때 아닌 딴지, <사서교사의 인간관계>라....치, <특수교사의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않도록 듣고 사는 저로서는, 갑자기 투덜대고 싶어집니다.
충분한 예산도, 전문가의 식견에 대한 존중도, 이해와 협조도 내 주지 않으면서, 오로지 <인간관계> 하나로 도서관을 개척하라니, 너무하잖아요!!! 그쵸!!!!

호랑녀 2004-08-2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진짜 개척교회 하는 목사님처럼 개척해야 해요...ㅠㅠ 특수교사도 그렇구나.
(제 친구 특수교육과 나온 애는 언어치료클리닉을 개업했어요. 나름대로 보람도 있고, 일단 돈을 무지무지 잘 벌더군요. 진/우맘님도 고려해보심이...)
마태우스님, 5천개만 있음 책은 최소한 X3으로 팔립니다. 1만5천권이요. 대부분 최소한 3권씩은 사거든요. 만오천부만 팔림 손해는 안 보니까, 진짜 좋은 책들 맘놓고 만들텐데...
평범한여대생님, 저두 학교에 도서관 따윈! 없었어요. 초등학교 땐 교실이 부족해서 2부제수업했었구요, 중고등학교 땐, 훌륭한 도서관 건물도 있었는데,그 안에서 늘 야간자율학습만 했죠. 떠들다 단체기합도 받구... 도서관에 대한 슬픈 기억들...
스타리님... 난 내 아이들 저 학교에 보내고 싶더만요. 내가 가서 일하는 건 둘째구.
숨은아이님, 아마 초등학교일 것으로 보여요. 사립초등이니 종교교육이야 무지무지 시키겠죠, 뭐. 그런데 수원 사시던가요?
아영엄마님, 마져요...ㅠㅠ 동네 어디나 산책로 옆에 도서관이 있어서 그냥 산책하다 불쑥 들어갈 수 있었음 좋겠어요. 나의 소원이여요.

숨은아이 2004-08-25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까지 수원 살았습니다. 근디 수원에 있는 사립 초등학교라? 소화학교인가? 가톨릭계 학교지요.
 
냉정과 열정사이 - 전2권 세트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한동안 소설을 멀리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뭔가 문제가 있는 탓인지, 난 너무 쉽게 몰입한다. 너무 쉽게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몰입이 되어 소설책이 끝나도 좀체 그곳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아마 탤런트나 연극을 했으면 이런 나의 몰입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슬프게도 나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거기에 가끔은 딸노릇 며느리노릇 학부형노릇까지 해야 하는 멀티플레이어인지라 책을 읽고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주책일 뿐이다.


그런데 어쩌다 내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집어들었는지 모르겠다. 계속 내치기만 하기에는 남녀 작가가 번갈아 썼다는 기획(누구는 소설이 무슨 이벤트냐고 비난하지만), 그리고 매력적인 제목의 유혹이 너무 컸다.


나는 늘 글을 읽을 때, 독자가 작가의 의도대로 끌려가야 하는 게 참 싫었다. 그러나 독자로서는 방법이 없다. 상대방의 심리를 묘사해줄 만큼 친절한 작가는 참 드물기 때문이다.

혹시 상대방의 심리를 묘사하더라도 결국 작가 생각의 주인공 입장에 충실할 뿐이다. 상대방의 입장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 아예 남녀 작가가 따로 썼단다. 하나의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두 사람이 각각 썼단다. 참 매력적이었다.


처음 잡은 책은 로소. 제목이 <냉정과 열정 사이>이니 하나는 냉정이고 하나는 열정일 터, 이왕이면 열정 쪽부터 읽고 싶었는데, 천만에. 오렌지빛깔의 책이 냉정이었고, 푸른 빛깔의 책은 열정이었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여류 작가에게, 아니 아오이라는 여인에게 폭 빠져버렸다. 부족할 것 없는 마빈이라는 남자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늘 외로운 여자. 마치 내가 아오이인 듯, 마치 남편이 마빈인 듯,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남편에게 미안했다.

(나중에 혹시 남편이 이 책과 나의 리뷰를 읽었을 때, 쥰세이가 아닌 마빈임을 남편은 좋아할까 싫어할까, 기뻐할까 슬퍼할까.)

 

오른손에 느껴지는 책의 두께가 점점 얇아지는 것이 너무나 아깝고 아쉬운 느낌에 일부러 책을 천천히 읽게 되었고, 이 책을 놓자마자 나는 정신없이 블루를 찾아들었다. 쥰세이라는 놈을 만나러.

작가의 문체 탓인지 나의 성향 탓인지 쥰세이에게로의 몰입은 좀 덜했다. 아니 오히려 쥰세이를 보면서도 자꾸 아오이가 생각나고, 아오이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결말. 진부했지만 고마웠다.


책을 덮자 내 마음 한쪽에 도사리고 있다가 가끔 고개를 드는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가끔, 몸서리치게 외로운 나를 꿈꾼다.

내가 떠올리는 나의 모습은 ‘사방이 책으로 빽빽한 오피스텔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가끔은 혼자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찾는 나’이다.

내가 꿈꾸는 나의 죽음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다락방의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흔들의자에 앉아 돋보기를 손에 든 채 잠자듯 죽는 것’이다. 무릎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나의 꿈 속에서 내 곁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으면서, 애써 누르는 나의 외로움이 자꾸 일어난다. 집에는 하루종일 쫓아다니면서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할 가족들이 있고, 학교에는 반짝반짝 눈이 빛나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래도 눈물나게 외롭다.


이 책...

 

가을에 읽지 않아서 다행이다.

봄에 읽지 않아서 다행이다.

 

뜨거운 여름에 읽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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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2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4-08-24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가슴이 너무 서늘해져서...못견디겠더군요. 꽤 오래 여운이 남았던 책으로 기억됩니다. 그 고통과 설레임, 떨림을, 다시 만나지 못할거 같다는 공포...
외로움을 다독이시구..천천히 서둘지 않고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급하게 벗어나려 해도 오히려 부작용이 우려되더군요..

호랑녀 2004-08-26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서늘해진다...
책으로 서늘해진 가슴, 책으로 다스렸습니다. 너무 몰입하지 않도록 좀 가벼운 책으로 읽었더니 훠얼~씬 좋아졌습니다. 우리학교 아가씨 선생님께 빌려드렸는데, 이 선생님은 괜찮으신지 여쭤봐야겠습니다. ^^

외로운 발바닥 2004-08-2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지 색 책이 냉정이고 푸른 색 책이 열정이란 것을 지금 알았네요. 그리고 책을 읽고 난 지금은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고 또 작가들의 섬세함에 놀라고 있습니다. 마음과 인생이 한 곳에 있는,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이 준세이와 아오이가 되길 기원합니다.

호랑녀 2004-09-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 옆에 있는 사람이 준세이와 아오이가 되어야지요.
우리학교 선생님, 이 책 읽으시더니, 앞으론 선생님이 권해주시는 책만 읽을 거에요...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재미있으셨대요.
 
피난 열차
헤미 발거시 지음, 크리스 K. 순피트 그림, 신상호 옮김 / 동산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아이를 똑같이 키운다고 해도 모두 제각각이다. 같은 부모, 같은 환경인데도 제각각이니 키울 맛이 난다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책만 잡고 있어서 게을러 걱정인 큰놈에 비해, 둘째는 엄마가 일하는 도서실에 오면 책들이 자기에게 무너져내릴 것 같아 머리가 아프단다. 어릴 때 그림책을 내딴엔 열심히 읽어줬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러는 걸 보면 아마 부모에겐 없지만 조상 누군가에게 있었을 유전자가 그쪽으로 갔나보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책을 좋아하게 하는 방법엔 왕도가 없다. 재미있는 책을 골라 읽어줄밖에. 피난열차도 이 아이에게 읽어주기 위해 나도 일게 되었다.

조금 덜 다듬어진 듯, 다소 아마추어 냄새가 나는데 작가 탓인지 번역가 탓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번쯤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한국전쟁이야기였고, 역시 아이들은(이미 읽은 3학년짜리 큰애나 아무것도 모를 다섯살짜리 막내까지도) 빨려든다.

중간쯤 읽었을까, 작전을 개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부엌으로 내달렸다. 아이들은 원성이 자자해졌는데, 큰애는 이미 읽었다고 가버리고, 막내는 뭐 한글을 모르니 어쩔 수 없고... 내가 몰래 주목하고 있는 오늘의 목표 둘째는 뒷얘기가 궁금해서 할 수 없이 책을 들고 읽어나간다.

아이가 다 읽었을 때쯤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려웠던 한국전쟁 시절의 이야기, 그리고 이 책의 작가는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미국에 가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는 미국으로 입양되어갔다는 이야기...

자연스럽게 그림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림의 잘못된 부분 찾기를 했는데, 아이는 옷고름이 나비리본처럼 양쪽으로 묶였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전쟁 때 그렇게 호화스러운 밥상(상 가운데 신선로가 있는)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것, 기와집이 그렇게 가득한 마을은 아마 서울 북촌 즈음의 양반마을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림이 참 평화롭고 표정이 밝다는 것... 그런 얘기를 했다.

이야기는 해외 입양 문제까지 발전했고, 일러스트레이터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림을 그릴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도 얘기했다.

정말 오랜만에 딸과 엄마는 긴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그 동안은 일에 쫓겨, 형제자매에 쫓겨 엄마를 그렇게 오래 차지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이 책의 일러스트가 정확하지 못함에 다소 짜증이 났던 참이었는데, 아이는 이해했다. 직접 살아보지 않았으니 어떻게 알겠느냐고, 그래도 진짜 열심히 그린 티가 나지 않느냐고 나를 어른스럽게 달랬다.

전쟁중 주민들의 표정이 밝아보였던 것은, 어쩌면 일러스트레이터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선조들이 그렇게 밝고 건강했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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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8-1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했을 둘째에게 ....바치는 연시군요.

좋은 방법 배웁니다..

제가 형제가 많은 속에서 자랐거든요.
그런데도 다 제각각이랍니다..참 이상하죠??

호랑녀 2004-08-12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상해요. 첫째와 둘째를 연년생으로 두었는데, 성격이 진짜 극과 극이랍니다. 그래서 셋째를 낳을 땐 도대체 어떤 놈을 닮을까 생각했더니...
그놈은 또 다르더군요. 3인3색입니다. ^^

반딧불,, 2004-08-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다 제각각...
그런데...살면서 그래도 많이 닮아가는 듯 하답니다..그렇지요??
 

내 고향은 전라도 광주. 그리고 시댁은 전라도 영암.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부터 추석(설날은 어차피 방학중이니까)날 고향에 가는 건 늘 하나의 프로젝트였다.

대학 1학년 때! 말로만 듣던 추석귀향열차표 예매를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까 고민했다. 난 기숙사에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제법 엄해서 열차표를 끊기 위해 서울역 앞에서 노숙한다고 하면 절대로! 외박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미팅. 미팅한 남자애(내가 미팅한 건 아니고, 나랑 한 방 쓰던 부산 출신 처자가 물어온)와 그 친구들에게 부탁했고, 스무살 남자아이들은 순수해서 흔쾌히 오케이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전날 오후부터 줄을 서서 제법 앞자리에 있던 걸 확인하고 돌아왔는데, 담날 새벽에 가 보니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뒤에서 밀어대면서 줄에서 튕겨나왔고, 튕겨나온 사이에 경찰이 와서 줄을 에워쌌다는... 황당한 얘기였다.

반면 경부선 쪽의 줄은 얌전했고(왜? 그쪽은 기차가 훠얼~씬 많아서 그렇게 밤샘까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난 눈물을 머금고 자체휴강하면서 버스로 왕복했다.

대학 2학년 때. 그 친구들은 한번 더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난 별로 믿지 않았고, 그 친구들은 또 밤샘을 하고서도 표를 구하지 못했다. 그때는 우리보다 학생복지를 훨씬 더 신경쓰던 S대 동기들의 도움으로 그 학교의 차를 타고 고향에 갔다.

우리학교도 3학년때부턴 귀성버스를 마련해주었고, 버스 안에서 총학에서 신경써 준 빵과 음료를 먹고 마시면서 비교적 편하게 고향을 향했다.

혼자 움직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대식구다. 게다가 귀향한 후 성묘가고 시장을 갈 차편도 필요하여 우린 드디어 길고 긴 차량행렬의 꼬리에 끼어들었다.

벌써 10년 전인데도 늘 기본이 12시간이었다. 언론에서 8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우린 10시간 이상이 걸렸고, 12시간 걸린다고 했던 1997년 추석엔... 가다가 대전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출발했다. 거의 피난가는 수준이었다. 물론 돌아올 때도 대전의 한 모텔에서 잤다. 젖먹이를 데리고 그렇게 다녔다. ㅠㅠ 주부들은 명절에 가서 일하는 게 스트레스라는데, 난 일하는 게 아니라 당장 오가는 게 큰 프로젝트였다.

최고의 프로젝트수행은 1997년 설이었는데, 그땐 남편이 작은 사무실의 대장노릇을 하던 때라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휴가는 본부의 허락을 받는 사항이라 못냈다. )

따라서! 조금쯤은 지각을 해도 좋다는 말. 연휴 후 출근 첫날 새벽 2시에 출발했는데, 와우, 그땐 평일 고속도로만큼도 막히지 않아서 정확히 4시간만에 집에 당도했다. 세상에 눈도 두어 시간 붙인 후 출근하고도 지각하지 않았다!

이번 추석. 어김없이 기차표에 도전했다. 인터넷으로 예약할 수 있다는 시간의 10분 전에 일어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아침6시 정각에 '예약하기'를 클릭했다. 처음엔 아직 아니라는 소리만 하더니, 나중엔 접속자가 너무 많단다. 때로는 페이지가 안 뜬다는 메시지도 나왔다. 한 시간을 열심히 클릭하다 입장도 못하고 우연히 잔여석을 봤더니 내가 가려고 했던 날 주변과 오려고 했던 날 주변은 이미 표가 없다. 매진이란다. 도대체 누가 들어가서 예약을 했을까. 그 사람 손가락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래 그럼 그렇지. 내가 그렇게 애용을 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철도청은 나와 친하지 않다.

흥, 그래도 난 이미 비행기 예약을 해두었다. 언제? 지난 설도 되기 전에. 사람들은 설날 티켓팅을 하는 줄 알지만 그때 벌써 추석 비행기 예약이다. 그리고 5월에는 결제도 했다. 물론 그것도 인터넷으로 시간 되어서 들어간 것이었지만,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는 최소한 철도청보다는 사정이 좀 낫다. 다만 문제는 우리 가족 왕복 비행기표가 50만원이 훨씬 넘는다는 것이지.

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이렇게 간다. 그렇게 고생해서 가는데, 며느리라고 도착하자마자 좀더 일찍 도착하지 못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며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부엌으로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 티켓 값이 그렇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시장도 좀 봐가야 하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려야 한다. 100만원은 우습게 든다.

결혼하고 10년쯤 되고 보니, 요즘은 그 돈으로 차라리 여행을 가서 좀 쉬고 싶은 생각이 물씬물씬 풍긴다. 그런 황금 연휴가 쉬운가 말이다. 그 돈이 빠듯한 가계부에서 쉬운가 말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열심히 철도청을 드나들다 결국 실패한 후의 짜증이 담긴 페이퍼이니 크게 마음에 담아둘 건 없다. 난 명절은커녕 여름휴가조차도 우리끼리 놀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6남매 맏며느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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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8-11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 경비로 정말 여행이나 한 번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을가요. 전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내니 신경은 안쓰지만 예전에 너무 힘들땐 정말 명절이 싫었습니다. (이제는 만성이 되어시리)
그런데 친정을 갈려고 하니 걱정입니다. 차로 달려 1시간에 도착하는 친정은 그날은 6시간 걸립니다. 이번엔 기차로 갈 생각입니다. 미리 예약하러 역으로 가야겠습니다. 혹시 늦었으면-..-

2004-08-11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녀 2004-08-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속삭여주신 님, 말씀만도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는 식구가 많습니다. 아시죠?
비행기 표 있으니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수께끼 2004-08-1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호랑녀님 말씀처럼 많은 알라디너분들을 위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잠시 알라딘을 잠시 더나있었는데...제 서재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네요...훌훌 털어내고 새롭게 정좌토록 해야겠습니다. 호랑녀님의 격려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숨은아이 2004-08-1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결혼하고 젤 싫었던 게 명절 교통체증이었어요~ (제 친정은 수원, 시댁은 전라도 광주.) 그래도 요새는 고속도로가 많이 뚫려(서해안고속도로도 있고 논산에서 공주 지나는 도로도...) 훨 나아졌어요.

호랑녀 2004-08-1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수께끼님 환영합니다. 서재청소해드릴께요 ^^

숨은아이님... 으... 교통체증... 진짜 젊었을 땐 어떻게 다녔는지 모르겠다니깐요 ^^

음 시댁이 광주시라구요? 무슨 동이실까... 호적조사 들어가야겠습니다. 호호
어제 우리학교 한 선생님과 수다를 떨다 보니, 글쎄 시숙님이 제 직장 선배님 아니겠습니까? 광주는 좁거든요.

조선인 2004-08-1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남매의 맏며느리!!! 나, 언니를 더욱 존경할래요.
아, 그리고 수수께끼님, 반가와요.

2004-08-11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녀 2004-08-1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따우님... 그 표가 어떤 푠데... 세상에...
조선인님... 그게 ... 맏며느리... 제가 골라서 된 것두 아니고, 그냥 이 남자가 큰아들이라고 결혼을 안 하는 것두 좀 우습고... 그래서 이리 되었답니다. 제가 존경받을 일은 아니구...^^;;
수수께끼님 반갑죠? 하하...

마냐 2004-08-1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6남매의 맏며느리! 시댁에 비행기 타고 가야하시는게...다행인지도...^^;;;

호랑녀 2004-08-11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따우님. 혹시 추석 때 날씨 안 좋으면 따우님 말 안 들어준 하느님을 원망해야겠습니다 ^^

마냐님, ㅠㅠ 6남매 맏이이지만, 우리집 재경부장관으로서... 가계부 상황도 점검해야 한다는...

숨은아이 2004-08-1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는 광주인데 시내가 아니라 농촌이랍니다. 예전에는 광산군 서창면이라는 동네였다지요. 명절에 고속버스 안에 갇혀 있을 때는 내가 결혼을 왜 해서 이 고생을 하나 하고 생각했다는... ^^

mira95 2004-08-12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서 전라도까지 가시려면 정말 힘드시겠네요.. 제친구는 지혼자 딸랑 서울에 있고, 집은 대군데, 그것도 힘들다고 잘 안 내려옵니다.. 그에 비하면 호랑녀님은 대단하세요^^

호랑녀 2004-08-12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서창... 제 외가는 평동이었지요.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시지만, 지금도 그곳을 지나가면 어릴 때 명절 때나 겨우 찾아가던 기억에 괜히 가슴이 설렙니다. 아마 그 기억 때문에 이렇게 기를 쓰고 고향을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애들에게도 그런 추억을 남겨주려고...^^
가끔은... 왜 광산김씨 조상님들의 제사를 광산김씨가 아닌 사람들의 준비로 모셔야 하나... 생각도 하지만, 큰일은 시어머님이 다 하시니 그냥 군소리 없이 합니다.

미라님... 나두 처녀적엔 뭘 굳이 저렇게 다니다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결혼하니 왜 그리 기를 쓰고 가는지. 그런데 고향에서 쓸쓸하게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조금 고달프더라도 가는 게 낫다 싶더군요.

숨은아이 2004-08-1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젠 1년에 몇 번이나 뵌다구... 하는 생각에, 이때라도 얼굴 봬드려야지... 하는 생각에, 군말 없이 갑니다. ^^

호랑녀 2004-08-1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숨은아이님...^^
애가 크면, 애가 중학교 다니고 고등학교다니면 점점 더 어려워진다더군요.

비로그인 2004-08-1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에서는 교통 대란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친척이라곤 하나도 없는대다가 고향마저 서울인 저는 명절 때마다 만날 사람 있고 찾을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ㅠ.ㅜ 실은, 아버지 어머니 모두 삼남매이시지만, 부모님 윗대 분들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지라 친척들이 전혀 안 모인다지요.;;; 뭐가 그리 급하셔서 그리도 일찍 돌아가셨는지... 돌아가신 나이가 지금 제 부모님 나이인지라, 가끔씩은 부모님께서 머지 않아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지요.(워낙에 단명하는 집안인지라 65세를 넘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_-)

호랑녀 2004-08-1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명절이... 외로우실 수도 있겠네요.
부모님 세대 일찍 돌아가신 거야, 요즘은 의약이 많이 발달해서 문제될 건 없을 것 같아요. 저희 조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지만, 저희 친정아버지는 75세이신데도 정정하시거든요.
명절 외로운 거야, 나중에 결혼하시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요. ^^
다만 명절마다 부모님 외롭지 않으시게 늘 신경쓰셔야겠네요.

로드무비 2004-08-2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이 싫어요. 미혼이던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
동그랑땡은 맛있지만...
호랑녀님, 맏며느리 자리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2004-08-20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녀 2004-08-20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드무비님... 애들은 좋아하잖아요. 맏며느리자리..첨엔 혹했답니다. 집에선 막내였는데, 결혼하니 시커먼 장정들이 형수님 형수님 하면서 떠받들어주잖아요 ^^ 그런데 갈수록 짐이네요. 아무도 귀찮게 않는데, 그냥 나 혼자 짐스러워요 ㅠㅠ
속삭여주신님... 술 사면 봐드리죠. ^^(근데 봐드려야 할 게 없는데... 에구에구...)

2004-08-21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oninara 2004-08-25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6남매 맏며느리인데...무늬만요^^
친정아빠가 8남매의 장남이라서 저도 귀향,귀성전쟁이 남의 일이었다가 전북 정읍으로 시집가서 명절마다 내려가려면..눈물이 앞을 가려요..쉬면서 내려가면 10시간은 기본이니깐요..
올해도 추석연휴가 앞으로 길던데..그럼 일찍 내려가야되서 더 싫은데...^^ 난 나쁜 며느리..

호랑녀 2004-08-2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 추석연휴가 길면... 싫구나. 나두 그래요.
그래서 전 비행기 끊을 때 가능한 한 시골에 있을 시간을 줄였어요(그래도 3박4일이네요 ^^) . 물론 친정에 있을 시간에 확 줄어들지만, 요즘 친정엔 고3 조카가 있어서 친정도 별로 편하지 않거든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두 와서 쉬어야 하니까...
아, 나두 나쁜 며느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