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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전2권 세트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한동안 소설을 멀리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뭔가 문제가 있는 탓인지, 난 너무 쉽게 몰입한다. 너무 쉽게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몰입이 되어 소설책이 끝나도 좀체 그곳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아마 탤런트나 연극을 했으면 이런 나의 몰입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슬프게도 나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거기에 가끔은 딸노릇 며느리노릇 학부형노릇까지 해야 하는 멀티플레이어인지라 책을 읽고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주책일 뿐이다.
그런데 어쩌다 내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집어들었는지 모르겠다. 계속 내치기만 하기에는 남녀 작가가 번갈아 썼다는 기획(누구는 소설이 무슨 이벤트냐고 비난하지만), 그리고 매력적인 제목의 유혹이 너무 컸다.
나는 늘 글을 읽을 때, 독자가 작가의 의도대로 끌려가야 하는 게 참 싫었다. 그러나 독자로서는 방법이 없다. 상대방의 심리를 묘사해줄 만큼 친절한 작가는 참 드물기 때문이다.
혹시 상대방의 심리를 묘사하더라도 결국 작가 생각의 주인공 입장에 충실할 뿐이다. 상대방의 입장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 아예 남녀 작가가 따로 썼단다. 하나의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두 사람이 각각 썼단다. 참 매력적이었다.
처음 잡은 책은 로소. 제목이 <냉정과 열정 사이>이니 하나는 냉정이고 하나는 열정일 터, 이왕이면 열정 쪽부터 읽고 싶었는데, 천만에. 오렌지빛깔의 책이 냉정이었고, 푸른 빛깔의 책은 열정이었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여류 작가에게, 아니 아오이라는 여인에게 폭 빠져버렸다. 부족할 것 없는 마빈이라는 남자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늘 외로운 여자. 마치 내가 아오이인 듯, 마치 남편이 마빈인 듯,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남편에게 미안했다.
(나중에 혹시 남편이 이 책과 나의 리뷰를 읽었을 때, 쥰세이가 아닌 마빈임을 남편은 좋아할까 싫어할까, 기뻐할까 슬퍼할까.)
오른손에 느껴지는 책의 두께가 점점 얇아지는 것이 너무나 아깝고 아쉬운 느낌에 일부러 책을 천천히 읽게 되었고, 이 책을 놓자마자 나는 정신없이 블루를 찾아들었다. 쥰세이라는 놈을 만나러.
작가의 문체 탓인지 나의 성향 탓인지 쥰세이에게로의 몰입은 좀 덜했다. 아니 오히려 쥰세이를 보면서도 자꾸 아오이가 생각나고, 아오이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결말. 진부했지만 고마웠다.
책을 덮자 내 마음 한쪽에 도사리고 있다가 가끔 고개를 드는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가끔, 몸서리치게 외로운 나를 꿈꾼다.
내가 떠올리는 나의 모습은 ‘사방이 책으로 빽빽한 오피스텔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가끔은 혼자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찾는 나’이다.
내가 꿈꾸는 나의 죽음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다락방의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흔들의자에 앉아 돋보기를 손에 든 채 잠자듯 죽는 것’이다. 무릎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나의 꿈 속에서 내 곁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으면서, 애써 누르는 나의 외로움이 자꾸 일어난다. 집에는 하루종일 쫓아다니면서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할 가족들이 있고, 학교에는 반짝반짝 눈이 빛나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래도 눈물나게 외롭다.
이 책...
가을에 읽지 않아서 다행이다.
봄에 읽지 않아서 다행이다.
뜨거운 여름에 읽어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