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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열차
헤미 발거시 지음, 크리스 K. 순피트 그림, 신상호 옮김 / 동산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아이를 똑같이 키운다고 해도 모두 제각각이다. 같은 부모, 같은 환경인데도 제각각이니 키울 맛이 난다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책만 잡고 있어서 게을러 걱정인 큰놈에 비해, 둘째는 엄마가 일하는 도서실에 오면 책들이 자기에게 무너져내릴 것 같아 머리가 아프단다. 어릴 때 그림책을 내딴엔 열심히 읽어줬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러는 걸 보면 아마 부모에겐 없지만 조상 누군가에게 있었을 유전자가 그쪽으로 갔나보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책을 좋아하게 하는 방법엔 왕도가 없다. 재미있는 책을 골라 읽어줄밖에. 피난열차도 이 아이에게 읽어주기 위해 나도 일게 되었다.
조금 덜 다듬어진 듯, 다소 아마추어 냄새가 나는데 작가 탓인지 번역가 탓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번쯤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한국전쟁이야기였고, 역시 아이들은(이미 읽은 3학년짜리 큰애나 아무것도 모를 다섯살짜리 막내까지도) 빨려든다.
중간쯤 읽었을까, 작전을 개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부엌으로 내달렸다. 아이들은 원성이 자자해졌는데, 큰애는 이미 읽었다고 가버리고, 막내는 뭐 한글을 모르니 어쩔 수 없고... 내가 몰래 주목하고 있는 오늘의 목표 둘째는 뒷얘기가 궁금해서 할 수 없이 책을 들고 읽어나간다.
아이가 다 읽었을 때쯤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려웠던 한국전쟁 시절의 이야기, 그리고 이 책의 작가는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미국에 가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는 미국으로 입양되어갔다는 이야기...
자연스럽게 그림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림의 잘못된 부분 찾기를 했는데, 아이는 옷고름이 나비리본처럼 양쪽으로 묶였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전쟁 때 그렇게 호화스러운 밥상(상 가운데 신선로가 있는)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것, 기와집이 그렇게 가득한 마을은 아마 서울 북촌 즈음의 양반마을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림이 참 평화롭고 표정이 밝다는 것... 그런 얘기를 했다.
이야기는 해외 입양 문제까지 발전했고, 일러스트레이터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림을 그릴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도 얘기했다.
정말 오랜만에 딸과 엄마는 긴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그 동안은 일에 쫓겨, 형제자매에 쫓겨 엄마를 그렇게 오래 차지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이 책의 일러스트가 정확하지 못함에 다소 짜증이 났던 참이었는데, 아이는 이해했다. 직접 살아보지 않았으니 어떻게 알겠느냐고, 그래도 진짜 열심히 그린 티가 나지 않느냐고 나를 어른스럽게 달랬다.
전쟁중 주민들의 표정이 밝아보였던 것은, 어쩌면 일러스트레이터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선조들이 그렇게 밝고 건강했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