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전라도 광주. 그리고 시댁은 전라도 영암.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부터 추석(설날은 어차피 방학중이니까)날 고향에 가는 건 늘 하나의 프로젝트였다.

대학 1학년 때! 말로만 듣던 추석귀향열차표 예매를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까 고민했다. 난 기숙사에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제법 엄해서 열차표를 끊기 위해 서울역 앞에서 노숙한다고 하면 절대로! 외박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미팅. 미팅한 남자애(내가 미팅한 건 아니고, 나랑 한 방 쓰던 부산 출신 처자가 물어온)와 그 친구들에게 부탁했고, 스무살 남자아이들은 순수해서 흔쾌히 오케이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전날 오후부터 줄을 서서 제법 앞자리에 있던 걸 확인하고 돌아왔는데, 담날 새벽에 가 보니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뒤에서 밀어대면서 줄에서 튕겨나왔고, 튕겨나온 사이에 경찰이 와서 줄을 에워쌌다는... 황당한 얘기였다.

반면 경부선 쪽의 줄은 얌전했고(왜? 그쪽은 기차가 훠얼~씬 많아서 그렇게 밤샘까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난 눈물을 머금고 자체휴강하면서 버스로 왕복했다.

대학 2학년 때. 그 친구들은 한번 더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난 별로 믿지 않았고, 그 친구들은 또 밤샘을 하고서도 표를 구하지 못했다. 그때는 우리보다 학생복지를 훨씬 더 신경쓰던 S대 동기들의 도움으로 그 학교의 차를 타고 고향에 갔다.

우리학교도 3학년때부턴 귀성버스를 마련해주었고, 버스 안에서 총학에서 신경써 준 빵과 음료를 먹고 마시면서 비교적 편하게 고향을 향했다.

혼자 움직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대식구다. 게다가 귀향한 후 성묘가고 시장을 갈 차편도 필요하여 우린 드디어 길고 긴 차량행렬의 꼬리에 끼어들었다.

벌써 10년 전인데도 늘 기본이 12시간이었다. 언론에서 8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우린 10시간 이상이 걸렸고, 12시간 걸린다고 했던 1997년 추석엔... 가다가 대전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출발했다. 거의 피난가는 수준이었다. 물론 돌아올 때도 대전의 한 모텔에서 잤다. 젖먹이를 데리고 그렇게 다녔다. ㅠㅠ 주부들은 명절에 가서 일하는 게 스트레스라는데, 난 일하는 게 아니라 당장 오가는 게 큰 프로젝트였다.

최고의 프로젝트수행은 1997년 설이었는데, 그땐 남편이 작은 사무실의 대장노릇을 하던 때라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휴가는 본부의 허락을 받는 사항이라 못냈다. )

따라서! 조금쯤은 지각을 해도 좋다는 말. 연휴 후 출근 첫날 새벽 2시에 출발했는데, 와우, 그땐 평일 고속도로만큼도 막히지 않아서 정확히 4시간만에 집에 당도했다. 세상에 눈도 두어 시간 붙인 후 출근하고도 지각하지 않았다!

이번 추석. 어김없이 기차표에 도전했다. 인터넷으로 예약할 수 있다는 시간의 10분 전에 일어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아침6시 정각에 '예약하기'를 클릭했다. 처음엔 아직 아니라는 소리만 하더니, 나중엔 접속자가 너무 많단다. 때로는 페이지가 안 뜬다는 메시지도 나왔다. 한 시간을 열심히 클릭하다 입장도 못하고 우연히 잔여석을 봤더니 내가 가려고 했던 날 주변과 오려고 했던 날 주변은 이미 표가 없다. 매진이란다. 도대체 누가 들어가서 예약을 했을까. 그 사람 손가락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래 그럼 그렇지. 내가 그렇게 애용을 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철도청은 나와 친하지 않다.

흥, 그래도 난 이미 비행기 예약을 해두었다. 언제? 지난 설도 되기 전에. 사람들은 설날 티켓팅을 하는 줄 알지만 그때 벌써 추석 비행기 예약이다. 그리고 5월에는 결제도 했다. 물론 그것도 인터넷으로 시간 되어서 들어간 것이었지만,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는 최소한 철도청보다는 사정이 좀 낫다. 다만 문제는 우리 가족 왕복 비행기표가 50만원이 훨씬 넘는다는 것이지.

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이렇게 간다. 그렇게 고생해서 가는데, 며느리라고 도착하자마자 좀더 일찍 도착하지 못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며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부엌으로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 티켓 값이 그렇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시장도 좀 봐가야 하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려야 한다. 100만원은 우습게 든다.

결혼하고 10년쯤 되고 보니, 요즘은 그 돈으로 차라리 여행을 가서 좀 쉬고 싶은 생각이 물씬물씬 풍긴다. 그런 황금 연휴가 쉬운가 말이다. 그 돈이 빠듯한 가계부에서 쉬운가 말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열심히 철도청을 드나들다 결국 실패한 후의 짜증이 담긴 페이퍼이니 크게 마음에 담아둘 건 없다. 난 명절은커녕 여름휴가조차도 우리끼리 놀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6남매 맏며느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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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8-11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 경비로 정말 여행이나 한 번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을가요. 전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내니 신경은 안쓰지만 예전에 너무 힘들땐 정말 명절이 싫었습니다. (이제는 만성이 되어시리)
그런데 친정을 갈려고 하니 걱정입니다. 차로 달려 1시간에 도착하는 친정은 그날은 6시간 걸립니다. 이번엔 기차로 갈 생각입니다. 미리 예약하러 역으로 가야겠습니다. 혹시 늦었으면-..-

2004-08-11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녀 2004-08-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속삭여주신 님, 말씀만도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는 식구가 많습니다. 아시죠?
비행기 표 있으니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수께끼 2004-08-1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호랑녀님 말씀처럼 많은 알라디너분들을 위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잠시 알라딘을 잠시 더나있었는데...제 서재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네요...훌훌 털어내고 새롭게 정좌토록 해야겠습니다. 호랑녀님의 격려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숨은아이 2004-08-1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결혼하고 젤 싫었던 게 명절 교통체증이었어요~ (제 친정은 수원, 시댁은 전라도 광주.) 그래도 요새는 고속도로가 많이 뚫려(서해안고속도로도 있고 논산에서 공주 지나는 도로도...) 훨 나아졌어요.

호랑녀 2004-08-1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수께끼님 환영합니다. 서재청소해드릴께요 ^^

숨은아이님... 으... 교통체증... 진짜 젊었을 땐 어떻게 다녔는지 모르겠다니깐요 ^^

음 시댁이 광주시라구요? 무슨 동이실까... 호적조사 들어가야겠습니다. 호호
어제 우리학교 한 선생님과 수다를 떨다 보니, 글쎄 시숙님이 제 직장 선배님 아니겠습니까? 광주는 좁거든요.

조선인 2004-08-1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남매의 맏며느리!!! 나, 언니를 더욱 존경할래요.
아, 그리고 수수께끼님, 반가와요.

2004-08-11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녀 2004-08-1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따우님... 그 표가 어떤 푠데... 세상에...
조선인님... 그게 ... 맏며느리... 제가 골라서 된 것두 아니고, 그냥 이 남자가 큰아들이라고 결혼을 안 하는 것두 좀 우습고... 그래서 이리 되었답니다. 제가 존경받을 일은 아니구...^^;;
수수께끼님 반갑죠? 하하...

마냐 2004-08-1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6남매의 맏며느리! 시댁에 비행기 타고 가야하시는게...다행인지도...^^;;;

호랑녀 2004-08-11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따우님. 혹시 추석 때 날씨 안 좋으면 따우님 말 안 들어준 하느님을 원망해야겠습니다 ^^

마냐님, ㅠㅠ 6남매 맏이이지만, 우리집 재경부장관으로서... 가계부 상황도 점검해야 한다는...

숨은아이 2004-08-1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는 광주인데 시내가 아니라 농촌이랍니다. 예전에는 광산군 서창면이라는 동네였다지요. 명절에 고속버스 안에 갇혀 있을 때는 내가 결혼을 왜 해서 이 고생을 하나 하고 생각했다는... ^^

mira95 2004-08-12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서 전라도까지 가시려면 정말 힘드시겠네요.. 제친구는 지혼자 딸랑 서울에 있고, 집은 대군데, 그것도 힘들다고 잘 안 내려옵니다.. 그에 비하면 호랑녀님은 대단하세요^^

호랑녀 2004-08-12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서창... 제 외가는 평동이었지요.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시지만, 지금도 그곳을 지나가면 어릴 때 명절 때나 겨우 찾아가던 기억에 괜히 가슴이 설렙니다. 아마 그 기억 때문에 이렇게 기를 쓰고 고향을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애들에게도 그런 추억을 남겨주려고...^^
가끔은... 왜 광산김씨 조상님들의 제사를 광산김씨가 아닌 사람들의 준비로 모셔야 하나... 생각도 하지만, 큰일은 시어머님이 다 하시니 그냥 군소리 없이 합니다.

미라님... 나두 처녀적엔 뭘 굳이 저렇게 다니다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결혼하니 왜 그리 기를 쓰고 가는지. 그런데 고향에서 쓸쓸하게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조금 고달프더라도 가는 게 낫다 싶더군요.

숨은아이 2004-08-1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젠 1년에 몇 번이나 뵌다구... 하는 생각에, 이때라도 얼굴 봬드려야지... 하는 생각에, 군말 없이 갑니다. ^^

호랑녀 2004-08-1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숨은아이님...^^
애가 크면, 애가 중학교 다니고 고등학교다니면 점점 더 어려워진다더군요.

비로그인 2004-08-1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에서는 교통 대란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친척이라곤 하나도 없는대다가 고향마저 서울인 저는 명절 때마다 만날 사람 있고 찾을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ㅠ.ㅜ 실은, 아버지 어머니 모두 삼남매이시지만, 부모님 윗대 분들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지라 친척들이 전혀 안 모인다지요.;;; 뭐가 그리 급하셔서 그리도 일찍 돌아가셨는지... 돌아가신 나이가 지금 제 부모님 나이인지라, 가끔씩은 부모님께서 머지 않아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지요.(워낙에 단명하는 집안인지라 65세를 넘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_-)

호랑녀 2004-08-1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명절이... 외로우실 수도 있겠네요.
부모님 세대 일찍 돌아가신 거야, 요즘은 의약이 많이 발달해서 문제될 건 없을 것 같아요. 저희 조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지만, 저희 친정아버지는 75세이신데도 정정하시거든요.
명절 외로운 거야, 나중에 결혼하시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요. ^^
다만 명절마다 부모님 외롭지 않으시게 늘 신경쓰셔야겠네요.

로드무비 2004-08-2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이 싫어요. 미혼이던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
동그랑땡은 맛있지만...
호랑녀님, 맏며느리 자리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2004-08-20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녀 2004-08-20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드무비님... 애들은 좋아하잖아요. 맏며느리자리..첨엔 혹했답니다. 집에선 막내였는데, 결혼하니 시커먼 장정들이 형수님 형수님 하면서 떠받들어주잖아요 ^^ 그런데 갈수록 짐이네요. 아무도 귀찮게 않는데, 그냥 나 혼자 짐스러워요 ㅠㅠ
속삭여주신님... 술 사면 봐드리죠. ^^(근데 봐드려야 할 게 없는데... 에구에구...)

2004-08-21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oninara 2004-08-25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6남매 맏며느리인데...무늬만요^^
친정아빠가 8남매의 장남이라서 저도 귀향,귀성전쟁이 남의 일이었다가 전북 정읍으로 시집가서 명절마다 내려가려면..눈물이 앞을 가려요..쉬면서 내려가면 10시간은 기본이니깐요..
올해도 추석연휴가 앞으로 길던데..그럼 일찍 내려가야되서 더 싫은데...^^ 난 나쁜 며느리..

호랑녀 2004-08-2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 추석연휴가 길면... 싫구나. 나두 그래요.
그래서 전 비행기 끊을 때 가능한 한 시골에 있을 시간을 줄였어요(그래도 3박4일이네요 ^^) . 물론 친정에 있을 시간에 확 줄어들지만, 요즘 친정엔 고3 조카가 있어서 친정도 별로 편하지 않거든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두 와서 쉬어야 하니까...
아, 나두 나쁜 며느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