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자유, 진도 안 나갑니까

자유를 요구하다 권력을 잡으면 관용을 용납지 않는 기독교의 이중성…강정구를 철없다고 매도하는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을 떠올리다

▣ 장정일/ 소설가

1914년 영국에서 출간된 존 B.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바오, 2005)가 우리나라에 초역된 것은 1958년(신양사 교양신서)이고, 같은 역본이 재간된 것은 1975년(박영사 박영문고)이다. 그런데 이 책을 다작·다역으로 소문난, 존경하는 아나키스트 법학자 한 분이 다시 번역했다. 뭐하러 역자는 출간된 지 한 세기나 되어가는 이 케케묵은 책을 새로 번역한단 말인가?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갖고 온 나라가 ‘개그 콘서트장’같이 되어버린 요 며칠간, 상기한 책과 복습 삼아 잡아든 조국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책세상, 2001)를 찾아놓고 나서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종교개혁이 자유를 성취했다고?


△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서구에서 벌어진 길고 험난했던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는 베리의 책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관용하고(313년)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이성이 속박되고 사상이 노예화되며 지식이 전혀 진보하지 못한 천년”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서양인의 고투는 절대성과 배타성에 기반한 기독교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으며, “진보의 이상과 사상의 자유, 그리고 교회권력의 쇠퇴”가 반비례한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기독교가 서구 사회를 장악하기 이전의 그리스·로마 시대는 인류 최초의 계몽시대였다. 그들에게는 성서나 성직제도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누린 자유의 표시이자 중요한 조건으로, 그리스·로마 양 시대는 온갖 종교에 관용적이었다. 두 나라의 눈부신 학문과 철학은 종교적 관용을 바탕으로 이성 능력과 토론의 자유가 마음껏 발휘된 경우였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종교적 관용 사회였던 로마에서 박해받았다.

“황제들이 기독교의 경우에 한해 자신들의 관용 정책에 예외를 두었다면, 그 목적은 관용을 수호하는 것이었다”는 간명한 설명은, 기독교가 사이좋게 공존해온 제국 내의 다른 종교에 대해 ‘인류의 적’이라는 공격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흥미로운 것은, 양심의 자유라는 원칙이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보다 우선했기에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던 기독교가 로마를 접수하고 나서는, 곧바로 이교는 물론이고 같은 기독교 교파에 대해서마저 불관용했다는 것이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중세의 암흑을 걷어내고 종교적인 자유와 개인적 판단의 권리를 확립하게 해준 일대 사건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견해다. 루터와 칼뱅을 위시한 숱한 종교개혁가들은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들어 교황과 통치자들에게 저항하고 탄원했지만, 개혁의 주류가 득세한 곳에서 숱한 프로테스탄트 분파의 자유는 문자 그대로 ‘불태워’지곤 했다. 종교개혁의 주체들은 자기 교파의 진리만 중요했지,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그리고 관용이라는 사회적 문제들을 한 번도 보편 의제로 고찰하지 않았다.

보안법을 방관하는 한국의 루터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 안에서는 자유를 요구하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은 곳에서는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곧 자신의 의무가 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공박은, 고문과 화형을 무기로 1천 년 넘게 다양한 ‘이성의 진보와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아온 서구의 기독교계에 대한 단죄이면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이 가진 이중성마저 폭로해준다.

4·19와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은 온 국민의 합작품임에도, ‘사상의 자유’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정체를 지킨다는 중도 보수세력의 전유물이다. 이 땅의 루터나 칼뱅 같은 개혁가들은 ‘학문·표현·양심’의 자유가 민주사회의 보루며, 국가보안법이 언어도단의 법이라고 절실히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강정구 같은 사람을 ‘민주화 세력을 분열시키고, 보수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철없는 사람’으로 매도하기 일쑤다. 베리가 묻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이 멈춰선 곳에 우리가 똑같이 멈춰서야 한단 말인가?” 진도는 나가지 않은 채, 죽어라 복습만 시키는 한국 사회가 바로 짜증의 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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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10-3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진도는 나가지 않은 채, 죽어라 복습만 시키는... 장정일 씨, 짱!
 

 

차라리 명분 없는 쇼가 건전하다

‘교육’ 앞세운 리얼리티쇼의 폭력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토요일-순정만화> <해피선데이-자유선언>도 포장된 건전함 쫓아

▣ 강명석/ 문화평론가

스스로 돈을 벌 때부터 일주일에 CD 몇 장쯤은 늘 샀던 필자에게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가 아니라, “그거 사서 뭐에 쓰려고? 니가 평론가라도 될 거냐?”(그럼요!) 조금이라도 돈이 드는 취미생활을 할라치면, 한국의 부모들은 당연하다는 듯 ‘뭐에 쓰려고’라는 말을 한두 번쯤은 던진다. 뭐에 쓰긴? 듣고 좋으려고 그러지. 하지만 한국에선 여전히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교양을 ‘쌓는’ 것이 되지만, 대중음악을 들으면 시간 ‘낭비’가 된다. 그러니까, 즐기려면 뭔가 생산적인 ‘명분’이 있어야 한단 얘기다. 그래서 평소에는 춤만 잘 춘다고 두들겨맞던 가수도 해외에서 성공하면 단숨에 ‘자동차 몇백 대’를 팔아도 못 벌 수익을 안겨준 ‘국민가수’가 된다. 당연히 TV에도 오락 프로그램에도 명분이 필요하다. 오락에 공익을 섞어 , 교육을 섞어 <스펀지>, 법지식을 섞어 <솔로몬의 선택>. 반면 멍청하게 명분조차 만들지 못한 노골적인 오락을 표방한 프로그램들은 쉽게 폐지되곤 한다.

그 아이들은 자라 무슨 충격을 받을까

특히 노골적인 오락의 정점에 있는 리얼리티 쇼가 그렇다. ‘몰래 카메라’류의 작품을 제외하면 ‘악동클럽’ 같은 스타 만들기나 ‘김종석 대학가다’ 같은 ‘트루먼 쇼’류의 작품들은 모두 방송가에서 사라졌다. 명분 없이 이렇게 사생활을 밝히는 프로그램들은 한국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 한계는 연예인들이 토크쇼에서 자기 사생활을 말하는 정도고, 그것도 요즘엔 <야심만만>이나 <상상플러스-OLD & NEW>처럼 ‘국민의 의식조사’나 ‘세대교감’ 같은 것들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래서 실제 연애 프로그램 대신 <실제상황 토요일> ‘리얼로망스 연애편지’처럼 누구도 진짜라고 믿지 않는 커플 프로그램은 있어도, <치터스>처럼 연인들끼리 서로의 불륜을 캐내는 프로그램은 꿈도 꿀 수 없다. 물론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오락 프로그램이 정말 선정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에선 <치터스>는 안 돼도,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은 인기리에 방영된다. 소재가 자극적이어도 끝에 부부의 사랑을 위해 노력하자는 말 한마디면 ‘명분’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젠 리얼리티 쇼도 드디어 명분을 찾아낸 것 같다.


△ 명분이 있다면 학대도 용서된다. 최근 어린이 학대 논란을 일으킨 <실제상황 토요일-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실제상황 토요일-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출연하는 아이들은 문제아동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수모를 당한다. 아이들은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폭로당하고, 교정이라는 이유로 심한 경우 해병대까지 가야 한다. 심지어 부모들조차 그 아이들이 혹시 자라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했을 때 어떤 충격을 받을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이렇게 출연자의 의사를 무시하는 리얼리티 쇼는 처음이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좋은’ 프로그램이란다. 아이가 ‘교육’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아이들의 사생활 침해를 통해 리얼리티 쇼만의 ‘충격 영상’을 보여주며 시선을 모으지만,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그것을 공익적으로 포장한다. 명분이 없을 때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지만, 명분이 생기면 근본적인 문제들마저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그 명분의 희생양은 대다수가 얻는 이익(오락적 즐거움)과 상관없는 가장 약한 존재(아이)들이다.


<토요일-순정만화>와 <해피선데이-자유선언> 같은 10대 중심의 리얼리티 쇼도 마찬가지다. ‘순정만화’나 ‘자유선언’은 프로그램 자체로는 흐뭇하다. 그동안 가려졌던 10대의 일상을 볼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특히 ‘순정만화’는 10대에게도 성인 이상의 현실적인 ‘사랑’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들도 ‘권태기’에 괴로워하고, 자신의 이성 친구에 대한 주변 친구들의 평판에 신경쓴다. 또 외국 오락 프로그램과의 표절 시비는 차치하고서라도, ‘자유선언’에서 10대들이 보여주는 인간관계의 모습들은 시트콤 이상의 재미와 드라마의 감동을 함께 준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나 일상은 온전히 그들의 진실한 문제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이되, ‘10대’의 사랑이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카피도 ‘10대들의’ 진짜 사랑이고, ‘10대들의’ 외침이다. 실질적으로 재미를 주는 건 가려졌던 그들의 사랑과 학창생활을 엿본다는 것이지만, 그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명분은 그것이 10대의 ‘건전한’ 모습을 다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정만화’의 커플들은 서로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화하지도 못한 채 MC의 주선에 따라 “앞으로 잘하겠다”는 ‘반성’ 뒤 서로의 ‘포옹’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행동해야 하고, ‘자유선언’에 등장하는 친구의 다툼 역시 모두가 쉽게 화해하고 박수칠 수 있을 만큼의 사연들만 골라 등장한다. 그래서 10대의 이야기는 계속 나오지만 정작 그들의 진지한 감정이 분출될 기회는 차단된다. 다만 그들은 시청자들이 바라보는 10대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그래야 10대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프로그램의 ‘명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폭력적 관음과 교육 사이

어린이와 10대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명분 안에서만 가치를 가지고, 그들은 자신의 의사와 별개로 ‘구경거리’가 된다. <치터스> 같은 프로그램은 차라리 시청자 자신이 ‘관음 중’임을 인정하게라도 하지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프로그램은 출연자가 동의하지 않은 관음을 저지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교육’이라고 과시한다. 명분은 중요하지만, 때론 그 명분은 정말 논의하고 지켜야 할 기본적인 룰마저 무시하게 된다. 혹시 지금의 한국 사회가 물의를 일으킨 인물에게 잔인할 정도의 사이버 테러를 가하는 것은, 그들이 정말 그 정도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이 아니라, ‘욕할 명분’이 생겼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명분일 바에야, 차라리 명분 없는 쾌락이 더 건전할지 모르겠다. 그건 누구에게 피해는 안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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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0-3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라주미힌님...

로드무비 2005-10-3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공감해요.

비로그인 2005-10-30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정말 뭣들 하려는 겐지..핑크 플로이드 뮤비처럼 소시지 찍어내는 공장,이 우리 사회, 맞당께요..

라주미힌 2005-10-3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복돌님의 댓글은 횟칼 같아요.. 스으으윽. ^^;

urblue 2005-10-30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정말 어이없는 프로그램이더군요.
 

<8뉴스><앵커> 중국산 김치 파동은 결국 서민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기고 있습니다.

국산 김치는 너무 비싸지고, 싼 수입 김치는 공급이 중단됐기 때문입니다.

한지연 기자입니다.

<기자> 복지관에서 보내주는 도시락으로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안유동 할머니. 김치 하나면 반찬 걱정이 없습니다.

[안유동(85)/서울 진관외동 : 곤란하지 뭐, 김차가 없으면.. 쌀보다 이게 더 중요한 거야. 이것 없으면 안되지.] 유독 김치를 좋아하는 할머니에게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복지관에서 김치공급을 줄이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배추값이 너무 올라 직접 담가 먹는건 꿈도 꾸기 어렵습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그 비싼 김치를 해 먹겠소. 빠듯하게 하는 사람이..] 하루 600명의 노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복지관.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고재욱/은평 노인 종합 복지관장 : 지역의 600세대를 가정 방문해 다 김장을 담가 가지고 다 드렸었는데
절반으로 줄여야 되지 않는냐, 왜냐하면 김장 가격이 3배에서 5배정도 오른다는데.] 급한대로 김치 대신
고추절임 200킬로그램을 담갔습니다.

후원 가정과 김장 김치를 나누는 프로그램도 계획했습니다.

금치가 돼 버린 김치, 긴 겨울 세끼 식사를 어떻게 때워야할 지 서민들은 벌써 걱정이 태산입니다.

[저작권자(c) SBS & SBSi All right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추운 겨울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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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0-30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또 마태님이 서럽다고... -_-;

가시장미 2005-10-30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으흐흐흐흐흐

마태우스 2005-10-3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깍두기가 더 좋아요

비로그인 2005-10-30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그냥 김치 먹는답니다..;;

릴케 현상 2005-10-30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치 안 먹음 되지=3=3
 

마이크로세계 신비의 순간3 - 췌관 스텐트 속 깊은 바다
제2회 전국 바이오현미경사진전 당선작
2005년 10월 28일 | 글 | 이상엽 기자ㆍnarciso@donga.com |
 


권중균·한양대 의대 전자현미경실 (바이오기술상)

반짝이는 산호초 사이를 누비는 신비로운 바다생물을 보는 듯하다. 수명이 2~3개월인 췌관 스텐트를 3년 만에 교체한 환자의 낡은 스텐트 속을 전자현미경 배율 3만배로 들여다봤다. 췌관 스텐트는 췌장염 환자의 막힌 췌관을 넓히기 위해 사용하는 의료기기다. 여기 관찰된 것들은 세균, 효모, 탄산칼슘, 옥살산칼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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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의 영화정보 프로그램들이 저점을 치고 있다.
  
  KBS MBC SBS 등 공중파 3사가 내보내고 있는 영화프로그램들이 시청률의 덫에 걸려 인기 연예인들을 앞세운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으로 둔갑한 지는 이미 오래. 그러나 최근 들어 그 같은 '찰라적' 경향이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예컨대 SBS TV <접속 무비월드>의 경우 최근 프로그램 구성을 메인MC 체제에서 코너별 진행으로 전면 개편하되 진행자들로 가수 옥주현을 비롯, 개그맨 등 인기 연예인을 기용해 기존 MC였던 영화배우 김서형이 나머지 녹화분의 출연을 거부하는 등 물의를 빚기도 했다.
  
  진행자 교체를 둘러싸고 벌어진 단순한 잡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작금의 영화정보 프로그램들이 방향타를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프로그램들이 시청률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정작 시청률은 점점 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KBS의 <토요 영화탐험>을 비롯, MBC의 <출발 비디오여행>, SBS의 <접속 무비월드> 등이 모두 시청률 4~5%선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은 평균 8~12%선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도 시청률의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유는 제작구조에서 나온다. 모두 외주 제작사들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제작사들이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 프로그램을 문화예술적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의 본사로부터 시시때때로 가해지는 계약 해지라는 위협을 감수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작금의 우리 방송 환경에서 그렇게 '간이 큰' 외주 제작사는 있을 수가 없다. 본사에서 끊임없이 시청률을 가지고 '달달 볶고' 있는 상황에서 외주제작사들은 좀 더 쉬운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곧 인기 연예인을 대거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또 확대발전한다. 전문성이 취약한 진행자들을 내세우다 보니 프로그램 내용도 보다 가볍고 쉽게 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들 공중파 프로그램들이 대동소이하게 개봉영화의 줄거리를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영화계 전문용어로 '스포일러(spoiler)'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애초부터 영화에 대한 단순 소개 외에는 저널비평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 프로그램이 종종 방송위원회로부터 간접광고라는 지적을 받게 되는 일까지 발생한다.
  
  '저널리즘'이 아니라 '너절리즘'을 추구하다
  
  지상파 본사로부터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수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청률이라는 토끼를 잡아야 하며, 시청률을 위해서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혹은 높다고 착각하는 연예인들을 대거 출연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작금의 영화 프로그램들을 질곡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에서 현재 저널이 갖추어야 할 공격적인 비평과 비판의식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중파 3사 영화 프로그램의 제작 모토는 거의 한결같다. 좋은 얘기는 많이 하되, 나쁜 얘기라면 아예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른바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비판한다'는 소극적 비평 기능만으로는 방송의 영화 저널리즘이 올바로 세워질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당연하게도 영화 프로그램들이 저널리즘의 원칙을 포기하면 할수록 거꾸로 영화사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영화 프로그램들이 저널의 기능성을 가지고 영화 문화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영화사가 영화 프로그램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지상파 TV 영화 프로그램에서 자사의 영화를 친절하고 상세하게 홍보해 주고 있는 마당에 100% 협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케이블TV나 위성TV의 영화 프로그램들에게까지 영화사들이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다. 그런 영화사들의 가장 큰 무기는 자료협조를 하지 않는 것이다. 방송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화 그림 자료들의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다. 영화사들의 이 같은 비협조적인 행태는 때에 따라 해당 영화에 대한 현장 취재나 감독이나 배우들에 대한 인물 인터뷰를 전면 통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영화에 대해 좋은 말만 하도록 강요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결국 자승자박의 결과다.
  
  이제 영화 프로그램에서 뉴스와 논평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영화 프로그램의 내용은 사전에 머릿속에서 기획된 것이지, 현장에서 벌어지는 뉴스를 뒤쫓아서 이에 대한 사실을 전달하고 논평을 추가하는 형식이 아니다. 산업이나 정책과 관련한 정보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영화 프로그램에서도 스크린 쿼터 문제나 영화 심의 문제, 투자 환경과 관련한 문제, 제작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 문제, 메이저급 배급사들의 전횡 문제 등등이 상세하게 거론되는 적이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딱딱하다, 재미없다, 시청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취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 프로그램 제작진 가운데 산업과 정책 분야에 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있는 인력들이 거의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연성화에 대해선 백번 양보할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소개되는 영화들조차 철저하게 상업영화 위주로만 짜여진다는 것은 국내 영화 문화의 장기적 발전을 놓고 볼 때 치명적인 요소가 될 가능성이 크다.
  
  비상업영화라고 불리는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 혹은 예술영화는 이들 영화 프로그램들이 관심을 가져 주면 그저 감지덕지할 뿐이다. 비상업영화관이라 불리는 <씨네 큐브>나 <하이퍼텍 나다>, <씨어터 2.0> 등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지상파 영화 프로그램에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영화 프로그램들은 국내 영화 산업의 독점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프로그램이 죽어야 영화 프로그램이 산다
  
  대다수의 영화 프로그램들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너절리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4년 사이에 영화 관련 프로그램들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들이 저널로서 올바로 기능하지 못함에 따라 영화문화는 여전히 하위문화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 매년 5월 칸 영화제가 열리면 TF1 등 각 방송사들이 영화제 소식을 헤드 뉴스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권을 대표한다고 해도 프라임 타임대 방송 뉴스에서 단신 정도로 처리되는 것이 고작이다. 그게 지금의 우리 영화 문화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찌 보면 지금의 영화 프로그램들이 그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 1대학 철학교수 이브 미쇼는 <예술의 위기>라는 저서에서, 현대 예술이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무의미한 형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이 죽어야 '진짜 예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브 미쇼의 말대로, 우리의 방송 영화 프로그램들은 현재, 무의미한 형식과 내용을 고집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프로그램'들이 죽어야 '진짜 영화 프로그램'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동진/프레시안 영화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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