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명분 없는 쇼가 건전하다

‘교육’ 앞세운 리얼리티쇼의 폭력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토요일-순정만화> <해피선데이-자유선언>도 포장된 건전함 쫓아

▣ 강명석/ 문화평론가

스스로 돈을 벌 때부터 일주일에 CD 몇 장쯤은 늘 샀던 필자에게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가 아니라, “그거 사서 뭐에 쓰려고? 니가 평론가라도 될 거냐?”(그럼요!) 조금이라도 돈이 드는 취미생활을 할라치면, 한국의 부모들은 당연하다는 듯 ‘뭐에 쓰려고’라는 말을 한두 번쯤은 던진다. 뭐에 쓰긴? 듣고 좋으려고 그러지. 하지만 한국에선 여전히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교양을 ‘쌓는’ 것이 되지만, 대중음악을 들으면 시간 ‘낭비’가 된다. 그러니까, 즐기려면 뭔가 생산적인 ‘명분’이 있어야 한단 얘기다. 그래서 평소에는 춤만 잘 춘다고 두들겨맞던 가수도 해외에서 성공하면 단숨에 ‘자동차 몇백 대’를 팔아도 못 벌 수익을 안겨준 ‘국민가수’가 된다. 당연히 TV에도 오락 프로그램에도 명분이 필요하다. 오락에 공익을 섞어 , 교육을 섞어 <스펀지>, 법지식을 섞어 <솔로몬의 선택>. 반면 멍청하게 명분조차 만들지 못한 노골적인 오락을 표방한 프로그램들은 쉽게 폐지되곤 한다.

그 아이들은 자라 무슨 충격을 받을까

특히 노골적인 오락의 정점에 있는 리얼리티 쇼가 그렇다. ‘몰래 카메라’류의 작품을 제외하면 ‘악동클럽’ 같은 스타 만들기나 ‘김종석 대학가다’ 같은 ‘트루먼 쇼’류의 작품들은 모두 방송가에서 사라졌다. 명분 없이 이렇게 사생활을 밝히는 프로그램들은 한국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 한계는 연예인들이 토크쇼에서 자기 사생활을 말하는 정도고, 그것도 요즘엔 <야심만만>이나 <상상플러스-OLD & NEW>처럼 ‘국민의 의식조사’나 ‘세대교감’ 같은 것들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래서 실제 연애 프로그램 대신 <실제상황 토요일> ‘리얼로망스 연애편지’처럼 누구도 진짜라고 믿지 않는 커플 프로그램은 있어도, <치터스>처럼 연인들끼리 서로의 불륜을 캐내는 프로그램은 꿈도 꿀 수 없다. 물론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오락 프로그램이 정말 선정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에선 <치터스>는 안 돼도,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은 인기리에 방영된다. 소재가 자극적이어도 끝에 부부의 사랑을 위해 노력하자는 말 한마디면 ‘명분’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젠 리얼리티 쇼도 드디어 명분을 찾아낸 것 같다.


△ 명분이 있다면 학대도 용서된다. 최근 어린이 학대 논란을 일으킨 <실제상황 토요일-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실제상황 토요일-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출연하는 아이들은 문제아동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수모를 당한다. 아이들은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폭로당하고, 교정이라는 이유로 심한 경우 해병대까지 가야 한다. 심지어 부모들조차 그 아이들이 혹시 자라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했을 때 어떤 충격을 받을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이렇게 출연자의 의사를 무시하는 리얼리티 쇼는 처음이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좋은’ 프로그램이란다. 아이가 ‘교육’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아이들의 사생활 침해를 통해 리얼리티 쇼만의 ‘충격 영상’을 보여주며 시선을 모으지만,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그것을 공익적으로 포장한다. 명분이 없을 때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지만, 명분이 생기면 근본적인 문제들마저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그 명분의 희생양은 대다수가 얻는 이익(오락적 즐거움)과 상관없는 가장 약한 존재(아이)들이다.


<토요일-순정만화>와 <해피선데이-자유선언> 같은 10대 중심의 리얼리티 쇼도 마찬가지다. ‘순정만화’나 ‘자유선언’은 프로그램 자체로는 흐뭇하다. 그동안 가려졌던 10대의 일상을 볼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특히 ‘순정만화’는 10대에게도 성인 이상의 현실적인 ‘사랑’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들도 ‘권태기’에 괴로워하고, 자신의 이성 친구에 대한 주변 친구들의 평판에 신경쓴다. 또 외국 오락 프로그램과의 표절 시비는 차치하고서라도, ‘자유선언’에서 10대들이 보여주는 인간관계의 모습들은 시트콤 이상의 재미와 드라마의 감동을 함께 준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나 일상은 온전히 그들의 진실한 문제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이되, ‘10대’의 사랑이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카피도 ‘10대들의’ 진짜 사랑이고, ‘10대들의’ 외침이다. 실질적으로 재미를 주는 건 가려졌던 그들의 사랑과 학창생활을 엿본다는 것이지만, 그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명분은 그것이 10대의 ‘건전한’ 모습을 다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정만화’의 커플들은 서로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화하지도 못한 채 MC의 주선에 따라 “앞으로 잘하겠다”는 ‘반성’ 뒤 서로의 ‘포옹’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행동해야 하고, ‘자유선언’에 등장하는 친구의 다툼 역시 모두가 쉽게 화해하고 박수칠 수 있을 만큼의 사연들만 골라 등장한다. 그래서 10대의 이야기는 계속 나오지만 정작 그들의 진지한 감정이 분출될 기회는 차단된다. 다만 그들은 시청자들이 바라보는 10대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그래야 10대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프로그램의 ‘명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폭력적 관음과 교육 사이

어린이와 10대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명분 안에서만 가치를 가지고, 그들은 자신의 의사와 별개로 ‘구경거리’가 된다. <치터스> 같은 프로그램은 차라리 시청자 자신이 ‘관음 중’임을 인정하게라도 하지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프로그램은 출연자가 동의하지 않은 관음을 저지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교육’이라고 과시한다. 명분은 중요하지만, 때론 그 명분은 정말 논의하고 지켜야 할 기본적인 룰마저 무시하게 된다. 혹시 지금의 한국 사회가 물의를 일으킨 인물에게 잔인할 정도의 사이버 테러를 가하는 것은, 그들이 정말 그 정도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이 아니라, ‘욕할 명분’이 생겼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명분일 바에야, 차라리 명분 없는 쾌락이 더 건전할지 모르겠다. 그건 누구에게 피해는 안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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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0-3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라주미힌님...

로드무비 2005-10-3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공감해요.

비로그인 2005-10-30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정말 뭣들 하려는 겐지..핑크 플로이드 뮤비처럼 소시지 찍어내는 공장,이 우리 사회, 맞당께요..

라주미힌 2005-10-3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복돌님의 댓글은 횟칼 같아요.. 스으으윽. ^^;

urblue 2005-10-30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정말 어이없는 프로그램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