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가 며느리로 맞은 이주여성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불만의 내용이 주로 며느리가 ‘불평없이 부지런히 일하고 아껴 쓰며 남편과 자녀를 돌봐야 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며느리의 미덕이란 순종, 공경, 알뜰함,
부지런함이라고 여기는 관점에서 질타와 훈계가 시작된다. 애써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온 유교 가부장제의 질서를, 이제 ‘한국의 예절‘이란 이름으로 이주여성을 통해 재생산하려는 것처럼보인다. - P38

오히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구호는 이 사회가 평등을 추구한다면 맞서고 해체해야 했을 가족질서가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간접적으로 일깨운다. 이 구호를 들으며 성소수자에 대해불편한 마음이 생긴다면, 먼저 며느리는 여자, 사위는 남자여야한다는 관념을 의심하고 질문해보면 좋겠다. 며느리의 역할을남자가 하면 왜 안 되며, 사위가 여자이면 무엇이 문제인가? 며느리와 사위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인가? 원치 않는 며느리나 사위를 반대할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불변의 가치인가? - P40

 지금도 사람들은 누군가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아이는 언제 낳을 거야?"라고 질문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에겐 "그럴거면 왜 결혼했냐?"고 반문한다. 그러니 동성커플 사이의 결혼은 어불성설처럼 들린다. 출산을 할 수 없는 동성끼리의 결혼이라니, 그럼 결혼이 더이상 결혼이 아닌 거다. 결혼은 출산의 기반이라는 이상을 지키려면,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가 없게 된다. - P46

부모가 결혼을 안 했는데도 그 자식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우한다면, 그래도 사람들이 지금처럼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 질서를 지킬까? 안타까워도 혼외출생자에게 불이익이 있어야 결혼이란 제도가 특별한 의미를 가질 테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차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의문이 들지 않는가. 이질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 P55

그러니 의문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위해 결혼제도를 수호하는가? 결혼 밖에서 사람이 태어나면 정말 안 되는 걸까? 출산이 결혼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정상이라는 관념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을 적법과 불법으로 구분하며 생애의 시작부터 불평등을 만들었다. 이런 불평등을 사회가 모르는 게 아니라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은 출산의 기반‘
이라는 이념이 무너지면 사회의 근간이 붕괴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차별을 정당화해왔다.  - P60

가족질서를 지키기 위해 (안타깝더라도 계속하여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일탈자‘를 탓할 것인가 아니면 이런 구분을 거부하며 평등을 위해 가족제도의 변화를 요구할 것인가?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이 질문은, 사회가 사람의 탄생을 수단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그 자체로 소중한 동료시민의 등장으로 여기는지의 관점과 연결된다. - P67

이상하게 가족제도는 예외였다. 가족에 관해서만큼은 평등보다는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민주주의이념이나 헌법 자체가 서구에서 기원한 것인데, 유독 가족에 대해서만은 한민족의 ‘미풍양속‘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양현아의 분석에 따르면, "가족법 (은) 서구법이 아닌 그 민족 고유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 자체가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수립된 것"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평등은전통적 가족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가족제도를 동결시키는 "절대적인 원리"가 되었다.  - P79

때때로 가장 강력한 차별은 온정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예고하는 염려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는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염려와경고를 보냄으로써, 세상의 차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 P90

것임을 기정사실화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출산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의도치 않게) ‘가담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어떤사람들을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뒤집어 생각하면, 아동의 인생을 생각해 부모가 출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사회가 변화를 도모하지는 않겠다는 변명일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출산에 대한 결정을 자유롭게 내릴 수있는 사회는 이미 아동에게도 좋은 사회일 것이다.  - P91

재생산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임신·출산에 관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여 출생하는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할 때에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는 일이 아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차별과 맞서기로 결정한다면 양육자의 권리가 곧 아동의 권리이고 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모든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된다. - P94

학교는 평등한 교육을 한다고 믿으면서 오랫동안 성별분업을 염두에 두고 교육을 실시했다. 그런데 사회가 이렇게 성별분업 이념을 유지하면서 고용상의 불평등만 해결하려 하면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여성에게 가사 책임을 맡기면서 동시에 임금노동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이중의 부담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런 이중의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할까? - P117

성차를 자연적이고 고정불변이라고 여기는 성별본질주의gender essentialism 의 관점이 교육의 이름으로 지속된다. 우리는 모두가 지구상에 평등하게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1" 라고 여길 만큼 성별에 따라 다른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는 모순된 메시지에 길들여진다. 성별본질주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지금 보이는 성차가 형성된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지워진다. 대신 가부장제를 위해 설계된 성역할을 ‘원래 그런 것‘ 혹은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된다. 왜 성별을 이유로 역할이 배정되어야 하는지 질문하기를잊게 된다. - P132

단순히 여성의 교육과 고용의 증진으로 가부장제가 간단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면 서툰 기대가 아닐까. 가부장제는 가족이 가족에게 행하는 성적인 통제와 잔인한 폭력을 통해서도 연명하고있다. - P140

현대사회의 계급 재생산은 외형적으로는 합법적이고 공정하다. 엘리트 계층이끼리끼리 만나 중산층을 형성하고, 축적된 부와 네트워크를 통해 고소득으로 진입하는 교육 기회를 독점하며, 이로써 자녀에게 계층을 세습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이 가족의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 P159

역사적으로 가족은 상이한 생활조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구성되어왔다." 한국에서도 가족이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가령 지금의 한국은 과거보다 결혼을 적게 하고 이혼을 많이 한다. 이 사실을 두고 가족의 ‘위기‘나 ‘해체‘라고 묘사하는것과, 가족의 ‘변화‘나 ‘다양성‘의 증가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위기‘와 ‘해체‘ 담론은 특정 가족 형태를 ‘옳다‘고 전제한 진단이다. 이에 대해 윤홍식은 이렇게 비판한다. "가족의특정 형태의 변화를 가족의 해체로 이해하는 것은 가족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변화했다는 다양성과역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 P188

 동성애, 그리고 동성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성과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한다는 메시지이고, 여성과 남성에게는 서로 다른 역할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성소수자 반대운동은 가족각본을절대적인 도덕률로 신앙화하는 작업이자, 가족각본에서 벗어난삶의 형태를 부정하고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핵심 담론이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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