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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다 하지 못한 - 김광석 에세이
김광석 지음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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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되고 깨달은 것은, 서른이 됐을 때 누군가는 서른을 믿지만, 누군가는 서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물 아홉까지 멀쩡하다가 스물 아홉의 12월 31일이 지난 그 시점부터 어리광도 자학도 아닌, 약간의 죄책감을 동반한 푸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우리가 벌써 서른이야'라는 고조된 목소리는 그 이후 우리에게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새된 목소리로 짧은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 한숨을 쉬는 남자들이 있었고, 바쁜데 무슨 나이 타령이냐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스물 아홉부터 벌써 서른이라고 생각해서,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서른이라고 대답할 만큼, 체념할 대로 체념했다. 긍정적으로 보면 '서른'에 대한 면연력을 기르며, 막상 서른이 왔을 때는 아쉬운 것도 기대한 것도 하나 없는 상태였다. 누가 그랬던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그래, 그건 김광석이었지, 하고 문득 떠올린 순간, 그 서른 두 해의 짧은 삶이 뒤따라 머리 속을 스쳤다. 어쩌면 서른을 만든 것은 그가 아닌가. 이렇게 절실하게 만든 것은 그가 아닌가. '30'이라는 수치를 책임질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짊어져야 하는 서른을 만든 것은 김광석이 아닌가, 기타를 둘러 멘 젊은 그를 보면서 마음이 애잔한 한편, 마흔이 되면 할리 데이비슨을 사서 유럽 아가씨를 뒤에 태우고 달리겠다던, 수많은 메모 속에 '사랑'을 쓰고 금색 펜으로 '사랑'을 쓰면서 사랑을 금색으로 쓰니 사랑이 아닌 듯 하다고 말하던 그가 귀여웠다.

 

 

얼마 전 엄청난 메모광이던 김광석의 메모를 엮은 <미쳐 다 하지 못한>이 출간되었고, 조울증처럼 서른의 혼란과 평온을 격일로 반복하는 내게 그 책은 조용히 찾아왔다. 이 짓푸른(도저히 남색이라 할 수 없고 파랑이라 할 수도 없는) 색 하드커버에 둘러쌓인 메모들은, 유투브에서 찾아본 그의 수줍은 모습을 다시금 생각나게 했고, 특히 밤 중에 스탠드 아래서 페이지를 넘길 때면, 자조를 쏟아내게 하는 지난 날 내 부끄러운 모습이 돌연 떠올라, 함께 부끄러워지고, 그 와중 이상한 용기가 솟아 큭큭 웃게 했다. 그러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김광석의 메모를 당당히 훔쳐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이 주체할 수 없는 서른을 절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된다 다짐했다. 김광석은 미처 다 하지 못했지만, 나는 미쳐 다 하지 못한 거야, 또 한 번 키득거리며, 이 촌스러운 생각이 이불 위로 쏟아져 빛나는 것을 나는 막지 않았다.

 

 

나도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이십 대가 가졌던 기대나 가능성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없어지고, 삶에 대한 근본적인 허무가 몰려왔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서른은 인생의 전환점이자 처음으로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100)

 

 

어른다운 말도 하지만

 

 

어두운 밤이었나 보다

그냥 어둡기만 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하고 싶었는데

무척이나

그냥 밤은 깊어만 가고 있다

사실 내 속에 웃지도 울지도 못해 하고 있다.

사랑은 이렇듯 쉽게 왔다 쉽게 가고 있지만

남은 꿈들은 어렵게 조금씩 흐른다.

오늘도 혼자였던 나를 돌아보며 하루를 정리하는 양

촛불 앞에 앉았다.(132)

 

 

'무척이나' 할 때 무언가 하고 싶던 당시 열망이 안타깝게 피어나, 다시 스러진다. 어른 이면에 아이도 어른도 아닌 존재가 외다리로 서 있고, 한 발 더 땅에 붙이기 힘들어 휘청이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코 즐기지 않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고, 또 느끼려고 더 버둥거린다. 스무 살에 부정했던 이 흔들리는 삶이, 결국 삶이나 보다, 깨닫는 것도 아니고 체념하는 것도 아닌 채 서른이 되면서 그저 수긍하게 되었다. 깨닫을 시간도 체념할 시간도 없는 생활이 계속 되는 것이, 차리라 안심이 되는 날도 있다.

 

 

'움직임 당신의 움직임 당신이 불쌍해'(142)

 

 

어느 시인의 글귀를 적은 메모에서도, 그는 삶을 원하고, 향기를 원하고, 그것은 여지없이 또 '사랑'이라는 단어로 계속 계속 표현된다. 여느 발라드 가수의 소몰이 사랑 타령이 아니라, 아...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사랑'이라는 단어를 나직이 읊조린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그 유명한 가사만큼이나, 김광석은 사랑에 아파한다. 딸 서연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낄 때 괴로워하고, 그래도 사랑할 수 밖에 없고 사랑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해 쓴다. 병원에서 출근 전인 의사대신 딸을 받아낸 아빠이니만큼 딸에게 각별할 테고, 이미 사랑에 대해 각별할 대로 각별한 사람이니, 딸에 대한 사랑이 다른 사랑보다 깊게 느껴지는 것이 착각은 아니리라.

 

 

내 딸이 태어날 때 처음 본 얼굴은 의사가 아니라 나였다. 내가 딸을 직접 받아냈기 때문이다. 의사는 출근 전이었고 간호사는 무슨 준비 하러 간다고 나간 사이에 내가 아이를 받아냈다. 아주 놀라웠다. 아! 사람이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그 놀라운 광경은 괴기영화보다 더했다. 참 신기했다. 사람이 태어난다는 게.

 

놀라가지고 멍청하게 있다가 밖에 나갔는데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도 쉽게 안 보였다. 잘생겼건, 못생겼건, 있는 자건, 없는 자건, 다 그렇게들 태어나는구나. 좀 없는 사람이다 싶으면 슬쩍 무시하고 좀 있는 사람이다 싶으면 괜히 쩔쩔매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다 똑같구나, 모든 사람이 다 똑같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만든 노래가 <자유롭게>이다.(126)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다. 사람이 살면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일어나고, 김광석은 아파하면서도 덤덤하게, 단순하게, 또 한편으로는 유쾌하게 해석한다. 의외다. 철학적이지 않지만, 생각이 많고, 진하게 살아내려하지만 격렬하지 않다. 균형이 있고, 사랑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읽고 또 읽어도 지겹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유투브로 김광석을 찾아보면서 노래만큼이나, 풀어놓는 여담이 진실하게 느껴졌다.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기타에 몸을 기댄 채 말하는 모습에서 미소가 지어졌다. 가수가 자신이 부른 노래처럼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해서 한 동안 <거리에서>를 부르고 다니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도 관객도 천진하게 웃었다. 이상한 것은, 그 이후의 일들을 알고 있더라도, 그 순간에는 같이 웃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김광석세대도 아니고, 동시대의 아픔을 알 수 없어서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랑은 사랑이고 아픈 건 아픈 거고 웃는 건 웃는 것, 이렇게 생각하자. 

 

 

 

 

 

내가 의도함으로 뚫려버린 가슴속의 구멍은 그대로 두련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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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어 - 세상 사람들이 뽑은 가장 소중한 단어 50
정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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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설문으로 추린 '인생의 목적어' 50개는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가족, 사랑, 나, 엄마, 꿈, 친구, 행복, 우리, 돈, 여행. 작가는 이 평범한 단어들을 다시 곱씹는다. 카피라이터'답게' 간결하고 함축적이다. 독자는 편하고 아마, 작가는 치열했을 테다. 하지만 즐거웠던 것 같다. '치열'은 '고통'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즐겁고도 치열한 삶. 누군가 부러워야 한다면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책장을 가볍게 넘겨가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해질 때가 있었다. 특히 '밥' 이야기를 할 때, 울지는 않았지만 울컥한 순간이 있었다. 독서 중에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는 경우는 많지만, 훅, 하고 치고 들어온 적은 별로 없으니,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김밥 사세요!"
"김밥 사세요!"

그의 말은 쩌렁쩌렁 여의도를 흔든다. 사세요, 라고 말을 올리고 있지만 그건 선배사원이 신입사원에게 하는 존경심 없는 존댓말처럼 들린다..(중략)..

"천 원입니다!"
"천 원입니다!"

이 한 마디만 반복해서 외친다. 오랫동안 김밥을 팔아 와 가격만큼 경쟁력 있는 메시지가 없다는 것을 터득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 가격에도 사지 않으면 너희가 손해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이번에도, 다음에 사지요, 하며 그냥 지나친다. 할머니 바로 뒤엔 아주머니 한 분, 그녀는 아직 김밥 파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듯 수줍게 외친다.

"저희 집에서 방금 싼 김밥입니다."
"제 딸아이랑 금방 싼 김밥입니다."

달랐다. 다르게 들렸다. 분명 김밥 사세요!랑 같은 말인데 그 말을 들은 내 귀는 금세 따뜻해졌다.(209,210)

나는 몇 번인가, 이런 이야기에 감동받은 자신을 부끄러워 하는 일들이 생기곤 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에 대해 숨기는 경향이 있다. 왠지 감동받았어, 라고 말하면 겨우 그런 이야기에 감동하다니, 라는 뉘앙스의 침묵이 따라온다. 나 역시 침묵으로 대응하지만, 그렇다고 상처받지 않은 건 아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따져보면 이런 이야기에 언제나 귀를 열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아마 내가 이 에피소드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이 김밥 파는 아주머니가 수줍게 외친 목소리의 따뜻한 온도, 그런 것을 기대하고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이 책의 부작용이라 한다면 잊고 지내던 소중한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는 것이다. 부작용은 엄연히 말해, 부수적인 작용이지 다른 불순한 뜻이 아니라는 걸 먼저 말해야겠다.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을 떠올랐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이에 가까웠던 10년 전 부모님, 밤낮으로 주구장창 컴퓨터로 음악을 서치하던 스무 살, 헤어진 사람의 자상했던 순간들, 남자친구의 돌고래 같은 웃음소리, 오빠를 따라 하루 종일 게임에 빠져들었던 어린 시절, 오후 5시 쯤이었나 천사소녀 네티를 보다가 학원에 가야해서 아쉬워 하던 순간 같은 것이 계속 떠올랐다. 상을 받거나, 좋은 성적을 받거나, 비싼 선물을 받거나 하는 그럴 듯한 일들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누구나 거쳐가는 그런 종류의 기억들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독자는, 예민하건 그렇지 않건, 책을 통해 작가의 생활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파악하게 될 것 같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 걸어온 길에 대한 이야기, 주변 친구에 대한 이야기 등 모든 글은 작가의 삶에서 시작한다. 작가의 삶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다는 느낌도 없다. 하지만 그가 삶을 대하는 방식에서 아,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구나 싶은 팁들이 종종 보인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를 꼽으라면 나는 워너브라더스행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던 그 1년을 꼽는다. 지금도 그 1년은 내 경력에서 지워지고 없다. 그 회사에서 뭐 했어?라고 누가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어서다. 분명히 1년을 열심히 달렸는데 무엇을 했는지 나조차 설명할 수 없어서다. 기차는 내가 내린 후에도 조금 더 달렸다. 멈추지 못해 움직이는 그런 꼴이었다.(330)

나를 성토한 놈들 줄줄이 다 엮겠다는 복수열전 같은 생각이 글 하나를 낳았다. 물론 억지스러운 글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어제 하루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너무 거창한 생각만을 생각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내게 필요한 정보의 80%는 내 주위에 몰려 있다고 한다. 생각할 재료도 그렇다. 작은 것, 사소한 것, 가까운 것부터 생각한다면 생각의 빈곤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처음부터 노벨상을 가져오겠다는 생각이나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생각을 방해하는 짐이 된다.(341)


책을 읽기 전까지 저자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지금도 별 정보는 없지만 분명한 건 이 책 하나에 '정철'이라는 작가의 '글'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글'이란 참 솔직하다. 글쓴이의 이력은 중요치 않고, 쓰여있는 글만으로 마음에 들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까. 글에서는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한 순간이라도 얼마나 치열했느냐, 그것이 중요해진다. 좋은 작가들은 치열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글 쓰는 대상의 이면을 꿰뚫 수 없을 테니까. 그 뜨거운 관찰력이, 그들에게 반하고 또 반하는 까닭이다.

 

이 책을 읽었다면 한 번쯤은 물어볼 것 같다. 내 인생의 목적어는 무엇인지. 그리고 문득 깨달은 것은,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 질문이 어마무시하게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답이 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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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위하여 -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김형경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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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여자 동창과 수다 떨던 중에 유난히 허물없이 지낼 수 있으면서도, 단 둘이 있으면 묘하게 연애하는 느낌을 주는 남자아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각자 이야기하고 보니 그 대상이 같은 사람이었다. '역시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하는 약간의 실망감을 안긴 채 그 이야기는 어느덧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남자 동창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들끼리 수군대던 그 묘한 남자아이가 남자 동창들 사이에서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걔는 여자랑 있을 때만 인간인 척 해." 왜 그 한마디에 이유도 없이 '아!'하는 깨달음이 찾아왔을까.

 

 

그렇게 직관적으로 깨달음이 왔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어릴 적에는 다들 똑같이 순진한 얼굴로 시작했던 여자애들이 화장을 하고 스커트를 입으면서, 좋아하는 남자를 하나씩 찜해서(어쩜 그렇게 공평히 나눴는지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연애 작전에 돌입할 때, 나는 남자에 대한 아무런 도전의식도 느끼지 않았고, 남자나 여자나 같은 인간이라며 인류평등적으로 생각했으며, 나의 친구들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치장하고 돈을 쓰는 것이 헛된 소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이런 나야말로 연애가 거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별 건가, 인연이 되면 만나는 거야, 하는 무위자연 연애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나았던 점이 있다면 결코 남자의 '조건'을 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남자를 그저 개개의 인격으로 보았고, '남자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관념이 없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만난 적도, 나쁜 사람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남자는 인간이기에 앞서, 남자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말하자면, 연애에 목을 매는 여자 친구들이나, 초탈한 척 했던 나나 결국 만나는 것은, 만나고 싶은 것은 '남자'였다는 것.(단순히 말하더라도 일단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특별히 '남자'에 대한 책을 찾아 읽는 편이 아니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 하는 책은 '어딘지 간지러운'책이라고 낙인찍는 버릇이 있는지라 이번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성별을 구분 짓는, 그런 류의 책을 읽는 것은 내 생에 처음인 것 같았다.(냉정과 열정 사이를 로쏘와 블루로 나눠 읽었으니 처음은 아닌 건가?) 저자가 심리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몇몇 책을 훑어보면서 확인한 적 있었다. 이 책은 그런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상이 '남자'이고, 그들에 대한 '심리학'이 주 내용이었다. 아, 사실, 나는 심리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남성 심리학에 대해서는 뭔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있었다. 대학시절에 문학비평 수업 도중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상징적 개념으로 남근이 등장했다. 두 시간 수업 동안 그 단어는 이 사람 저 사람 입을 통해 약 오십 번 정도 반복되었던 것 같았다. 서슴없이 그 단어를 입에 담는 학생들이 경외스러웠다. 그 동안 내 안면은 홍조를 띈 채, 머릿 속으로는 '이건 학문 용어야'하며 주문을 외웠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시작된 그 상징적 개념은 그 후로, 중요한 거 같긴 한데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 아카데믹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내 인생의 언덕 너머로 던져버렸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책을 두 손에 부여잡고 그 땐 그랬지, 하며 쓸쓸한 회상에 젖어 들었다.

 

 

다행히 이 책에 그 직접적인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않았던 것 같다. 나왔다 하더라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잠깐이었던 건 틀림없다!) 오히려 이 책은 거부감 없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그렇지만 남성 심리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밋밋한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주요인이라는 건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저자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여자들이 생각하는 '남성다운 남성'의 근저를 이루는 심리적 성질을 조목조목 사례와 해설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라는 제목에 딱 어울리기도 하다. 만약 누구도 보여주지 않았던 남자의 밑바닥을 기대했다면, 그 기대치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는 여성들도 때로는 남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이지, 하고 투덜거릴 때 '이 모양'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라고 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을 오직 '남자'에 대한 심리로 보기에는 아까운 면이 있다. 책에서 심리학을 끌어들인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 대상이 남성이기에 해당되는 이야기라기보다, 자기애가 강한 인간이기에 나타나는 현상들처럼 보였다. 이 책을 통해, 사랑 받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여러 심리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거의 자명하다고 느껴질 즈음 여자들 역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착각하고, 남자들 못지 않게 코스매틱이나 패션에 대한 콜렉터를 자처하며, 섹시한 남자 연예인의 몸에 감탄하고, 부모에 대한 영향으로 자기 인생이 결정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건 너무 자연스러운, 그냥 인간의 삶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와의 애착관계에서 제대로 분리되지 못한 어른이 자기 정체성 정립의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어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한 인간이 얼마나 있는지 의심하게 했다. 특히 어려운 일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이직하는 젊은이들을 심리학적 시선으로 '자기 정체성' 결여로 판단내리는 것은 너무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사실 이 책이 종종 불편한 느낌을 주었다면 바로 그 '주관성'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타인에 대해 심리학적 잣대로 이야기하는 부류들이 한편으로는 인기가 좋고, 한편으로는 비판 당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삶이 천차만별, 그만큼 형성된 주관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내가 살아온 삶을, 가치관을, 저것이 사람의 마음에 대한 학문이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똑같은 모양으로 줄 세울 수 있는가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오직 '남자'에 대해서만 알고 싶은 여자들은, 어쩌면 남자에 대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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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시미즈 레이나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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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우, 어디를 가든 분위기를 중요시 한다. 카페나 식당은 말할 것 없고 지역 대학이나 도시의 공원도 고유의 분위기가 있는 곳을 선호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을 갈망하는 마음과 닿아있다. 아름다운 곳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서점에 대해서는 그곳이 꼭 아름다워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책이 있으면 그것으로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은 나에게 서점이 책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려줬다. 책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서점은 무한히 아름다울 수 있는 미지의 장소였다.

 

그리스 산토리니의 아틀란티스 북스와 프랑스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서점이면서 문학지망생들의 작가수업이 이루어지는 비밀 공간이다. 작가지망생들은 그곳에서 숙박하며 서점 일을 돌봐주는 시간에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서점들은 책을 판매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서점 직원들은 단지 계산대에서 바코드만 찍고 잔돈을 돌려주는 판매원이 아니다. 세심하게 책을 선별하는 지식을 갖춘 북러버들이다. 

 

"아름다운 서점이란 독자가 그 책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고 싶을 만큼 엄선한 책을 진열해야 해요. 열정과 지식을 겸비한 안내원들이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책과 독자와의 만남을 돕는,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 서점이죠."(108) 아메리칸 북 센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포르투갈 리스본의 레르 데바가르는 서점 이름이 '천천히 읽기'라는 뜻이다. 경영자는 '모든 좋은 것들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급할수록 천천히 해야겠죠'라고 말한다. 서점 천장에 하얀 자전거를 탄 소녀가 날아다니고, 서점 물품들은 이웃에게서 얻어왔다. 한밤중까지 영업하고, 주말에는 새벽 2시까지 문을 연다.  

 

미국 오하이의 바츠북스는 야외 서점이다. 비가 오면 책이 젖을 것을 걱정하는 방문객에게, 이곳의 비는 수직으로만 내리기 때문에 책이 젖지 않는다는 말이 돌아온다. 고양이가 계산대를 지키고 어떤 책이든 35센트에 가져갈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서점들은 한결 같이 돈을 벌기 위한 목적보다는, 그곳에 그저 '있기'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책과 사람을 더 사랑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그 방식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 곳에서 서점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확실히 책은 책 이상의 것을 만드는 힘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책으로 가는 문>을 읽으면서, 나는 세상에 두 가지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책으로 가는 문을 발견하고 들어간 사람, 아니면 그 문조차 발견하지 못한 사람. 책의 문으로 들어가본 사람은 이 아름다운 서점들에 반하지 않을까. 누군가 그저 아름다울 뿐이잖아,라고 핀잔을 놓아도 그 아름다움만이 전부인 것처럼 혼자 중얼 거리게 되는 것 같다. 산토리니에 가고 싶어. 런던에, 네덜란드에, 오하이에 가고 싶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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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3-12-3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었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리뷰를 쓰기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쓸 말도 많지 않은데 느낌만 과장되는 것 같고 말이죠. 저만 그런가요? 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김토끼 2014-01-21 18:14   좋아요 0 | URL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지요. 신간평가단을 한다는 건, 저한테 도전적일 때가 종종 있더라고요. ㅎ

행복한 한 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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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문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인생이 그렇게 풀렸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연락하는 동창들 사이에서 유행한 책이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스무 살 무렵이었나. 얼떨결에 휩쓸려 읽었다. 사실 조르바의 극단적인 자유주의가 꼭 동경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물레를 돌릴 때 새끼손가락이 거치적거려 절단한다는 건 다소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라는 문장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일 년에 한 번 책장의 책을 솎아내는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늘 책장에 남았다. 방에서 빈둥빈둥 책장에 꽂힌 책 이름을 읽는 것이 지금도 여일한 취미이니, 당시에 수없이 마주한 책등에서 '이윤기'라는 이름을 발견하는 것, 그 이름을 어느새 친숙하게 여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학 좀 한다는 사람들 중 故이윤기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생전 200여 권을 번역했다는 양적 압도만이 아니다. 움베르트 에코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만만치 않은 작가들이 그의 번역 목록을 다수 채우고, 스스로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어디에서건 그 이름 세 글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를 잘 안다고 말하기는 멈칫하게 된다. 그가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의 첫 에세이에서 말한대로 너무 익숙해서 막연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몇 세대를 한곳에서 붙박이로 살아온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에게 시골길을 물으면 가르쳐주는 내용이 지극히 막연하다. 그 시골 사람에게는, 객관화시키기 어려울 만큼 익숙한 풍경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쓴 작품도 비슷할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작가 자신에게 너무 낮익은 풍경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의 미의식은 편애의 산물일 가능성조차 있다.'(20)

 

 

익숙해서 막연한 존재가 편애의 산물이라면, 이윤기가 그렇다. 작고하신지 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건재하다. 잘 모르던 사람을 조금 알았을 때, 어쩌면 우리는 더 실망하게 된다. 나는 이윤기를 잘 몰랐고, 에세이집을 읽기 전에 어렴풋이 난독을 예상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어느 기자가 이윤기의 번역을 보고 조르바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무슨 외국인이 그러냐고 재미로 따져 물은 이야기에 다시 그리스인 조르바를 펼쳐보니 정말 그런 부분들이 보였다. 이윤기에게 이것은 조르바에게 '난폭한 입말'을 돌려주는 과정이었다. 만약 이윤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두목' 대신 '주인님'을 섬기는 다소 복종적인 조르바를 기억하게 됐을 지도 모르겠다.

 

 

조르바는 자유인이다. 타인을, 그것도 연하의 자본주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자유인 조르바에게는 일어날 수 없겠다 싶었다.(145)

 

 

신화와 문학, 외국어와 모국어를 종횡무진하는 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 역시 '껍진껍진한 입말'이다. 번역가답게, 말의 무게를 생각하는 그의 고뇌가 묻어났다. 유려한 문체보다, 펄떡이는 날 것의 변화를 추구하는 태도가 기계적 언어 변환이 아닌 번역 예술을 탄생시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더불어 그 변환이 꼭 언어에 가두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저 사람은 저 사람이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들게 된 화두이자, 나와 남이 지어내는 행위를 평론할 때 자주 써먹는 잣대이기도 합니다.(70)

 

 

책을 엮은 이가 그의 길을 따르는, 이다희 번역가인지라 딸 이야기도 종종 등장한다. 학생 시절 그 세대 친구들처럼 문법이 파괴된 해괴한 글을 종종 쓰던 딸을, 아버지는 잠깐 그러다 말겠거니 기다렸다. 언어를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자식의 뭉개진 언어를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윤기는 스스로 태연하게 서술한다. 오히려 환경단체의 소식지가 딸의 글을 게재해 자녀가 상처받은 경험을 우려한다. 그러면서 젊은 피가 기성 세대를 따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젊은 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파괴가 새로운 문법으로 고정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며 태연자약하다. 그 딸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고한 서문이 아주 인상적이다.

 

 

나는 (.....) 길을 따르지만 길에 갇히지 않는 말,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살아 펄떡이는 말에 대한 집착을 읽었다. 말에 대한 그와 같은 태도는 문학과 번역, 나아가 삶과 세상에 대한 이윤기의 철학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산문집에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우연일 리 없다. 이윤기의 글은 땀과 자유로 범벅이 되어 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의 태도가 이중적으로 보인다면 보는 사람의 잣대가 옹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길을 가거나 이 길을 가지 않는 방법, 그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혼란에 빠졌었던 나는 낯이 뜨거워졌다.(9)

 


유심히 관찰하는 의식과, 무심코 발화하는 무의식 두 세계에 주목하며 언어를, 그리고 그를 통해 사람의 본질에 더 다가서려했던 그는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추천사대로 '그보다 더 밀도 높은 공간을 소유한 정신을' 끝내 찾기 힘들게 할 것이다. 자신이 믿었던 대로 '사라진 과거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도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故이윤기 선생 스스로 증명한다. 우리 문학사에 이렇게 씩씩한 사람이 있었다니, 돌아보면 아쉽고 한편 크게 위안이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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