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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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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라는 말만큼 저에게 난해하고 어렵고, 그리고 협박 비슷하게 울리는 말은 없었습니다.-16쪽

만일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25쪽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27쪽

그렇지만 저는 다케이치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그림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을 다케이치한테서 전수받은 저는 예의 여자 손님들 몰래 조금씩 자화상 제작에 착수했습니다.-41쪽

"어디 좀 보여줘 봐요."
죽어도 안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면 아이 싫어, 어머나 싫어요 하면서 좋아하는 꼴이라니. 정말 역겹고 흥이 깨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심부름이라도 시키자고 생각하게 됩니다. -57쪽

그럴 때마다 제 뇌리에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중학교 시절에 그렸던, 다케이치가 '도깨비 그림'이라고 했던 몇 장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상실된 걸작. 여러 번 이사 다니는 사이에 없어져버렸지만 분명히 뛰어난 그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이것저것 그려봤지만 그 기억 속의 걸작에는 미치지 못했고 저는 언제나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느른한 상실감에 괴로워해 왔던 것입니다.
마시다 만 한 잔의 압생트.
저는 그 영원히 보상받지 못할 것 같은 상실감을 혼자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88쪽

저는 하느님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90쪽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93쪽

그리하여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된다.
즉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앞길을 막는 방해꾼 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

우에다 빈 번역의 기 샤를 크로인가 하는 사람의 이런 시구를 발견했을 때 저는 혼자 얼굴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뻘게졌습니다.-95쪽

결혼하자. 그 때문에 나중에 아무리 큰 비애가 닥친다 해도 상관없다. 난폭할 만큼 큰 기쁨이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상관없다.-105쪽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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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부터 혼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었다. 아마도 스무살부터 그런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처지들이 늘어가면서, 혼자있는 시간에 익숙해져야겠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고는 했었다. 그래서 부러 혼자 영화를 보았고, 사람이 많은 식당의 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곤했다. 나름대로는 '혼자'라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훈련을 해둔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일곱 살 때부터 혼자 집을 지키고는 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고독감을 모르던 때부터의 일이라 두렵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세상을 조금 더 알게되고 고독의 다른 형태들을 하나 하나 경험해갈수록 사는 것이 점점 두려워진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게 된 것이었다. 나의 연습은 두려움을 선험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던 일종의 계산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연습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 않아도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간다고 생각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아오야마 나나에의 <혼자 있기 좋은 날>을 읽고 나서 내가 진정으로 혼자가 되기 위해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았던 사람들과 끊임없이 헤어지고 또 다시 새로운-그러나 영원하지 않을-관계를 맺고, 결국 자기 자신만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어지러운 삶. 치즈짱은 그런 삶 속에서 누구에게 칭얼대거나 위로받으려 하지 않고 현실 속으로 계속 발을 내디딘다. 치즈짱의 무심한 듯한 그 용기에 새삼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평범한 치즈짱들은 그렇게 묵묵하고강하게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 피부는 덧없고 유약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 나도 치즈짱과 같은 경험이 있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라고 쓸 수 없는 것이 한심했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여자다. 나는 그저 그런 여자를 유심히 바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녀들이 나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다. 나는 책을 읽고 있으니, 한결 낫지 않을까, 그런 오만은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안도 밖도 없다. 그건 하나다. 라고 말한 일흔 한 살의 할머니처럼.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다. '삶'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록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피상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걸 보면, 그 때보다 지금 삶에 밀착해있어 가뿐한 마음이다. 피상성 안에서 사는 사람의 얼굴은 세상 사람같지 않게 붕 떠있거나, 어두운 기색이 농후하지 않던가. 이렇게 책을 읽는다는 것이 지금보다 내 발을 땅에 디딜 수 있게 해준다면 좋겠다. 내가 섭취하고 읽은 것을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말이다.

  어쩐지 커다란 위로를 받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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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2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도 혼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데, 이 책 제목부터 끌리네요. 서평보고 리스트에 담아요. 왠지 모를 짠~함이 있을 것 같다는...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

김토끼 2010-04-24 23:0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당시에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왔는데 댓글이 달려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이렇게 많은 댓글에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 이년 반이 지나버렸네요. 디드님 감사합니다.^^ 지금쯤 이 책을 읽으셨을지..ㅎ

한잔의여유 2007-08-2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아집이 있어서 직접 책을 보지않고 서평만 읽고 책을 읽고싶다는 생각은 안드는데 이 서평은 그러한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솔직함이 있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김토끼 2010-04-24 23:06   좋아요 0 | URL
당시에 제가 상당히 솔직하게 서평을 쓴 것 같아요. 지금도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쓰다보면 뭔가 거창해지려고 허둥지둥하는 자신을 발견해요. 늦은 댓글이지만, 로토님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7-09-1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은 그렇다면.. 피상적인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님의 서평을 읽고 나니까 왠지 눈물이 나네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잘 읽고 가요~

김토끼 2010-04-24 23:08   좋아요 0 | URL
눈물이 나셨다니! 그 말에 저도 눈물이 날랑말랑. 조제님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댓글을 너무 심하게 늦게 달아서 죄송해요.

모로나 2007-09-13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화님 축하드립니다...참 읽고 싶었던 책인데 담화님의 서평과 함께 만나보았네요... ^ ^

김토끼 2010-04-24 23:09   좋아요 0 | URL
읽으셨을지 궁금하네요^^ 저는 최근에 도서관에서 아오야마 나나에의 '이웃집 남자'를 빌려놓고 한 장도 못읽고 갔다줬어요. 아무래도 독서 취향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벌써 이 년 전이네요 ㅎ 모로나님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07-09-1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김토끼 2010-04-24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감사드립니다^^ 이년 전 축하 댓글이지만 지금봐도 기분이 좋네요^^
 

 

      돈벼락
   -C.부코우스키


돈 때문에 난 정말이지

지지리 고생해 봤지.

한번은 어떤 작업장에서 일했는데

거기 사람들은

급료 지불일 삼 일 전부터는

구내식당에서

핫도그하고 감자칩만

먹고 일했어.

난 스테이크가 먹고 싶었지.

그래서 주방장에게 가서

스테이크를 좀 차려 달라고 했더니

거절하더군

 

급료 받는 날을 난 자주 잊어버렸어.

항상 잘못 알곤 했는데,

바로 오늘이라잖아, 모두들

그 얘기만 하니 말이야.

'오늘이라구?' 난 말했지. '제기랄

오늘이 돈 받는 날이란 말이지? 난 아직

지난번 돈도 못 챙긴 것

같은데 ... ... '

'뻥 좀 치지 마라.'

 

벌떡 일어나서 경리에게 뛰어가 보면

정말로 지난번 내 돈이

아직 거기 있었어. 그걸 가지고

다시 돌아와 보여 주었지.

 

'이런 세상에, 이걸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실은

그들을 화나게 했어. 그러다가 경리 담당이

왔지. 이제 난 돈 봉투가

두 개야. '신난다, 돈이

두 배다!' 난 소리 질렀지. 그러면 그들은

모두 분통을 터뜨려, 거기 사람들은

한 가지 직업으론 살 수 없어서

부업까지 하고 있었어.

 

비가 심하게 오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터졌어.

난 방수 코트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낡아 빠진 헌 외투를 입고

일하러 갔지. 그 옷은 몇 달 동안이나

입은 적이 없었어. 난 좀

늦었지.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하고 있더군.

외투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으려는데

5달러 지폐가

나오지 뭐야.

'야, 이것 봐라.' 난 기분이 좋았어. '지금

5달러를 찾았네. 이거

까맣게 잊어버렸던 건데! 갖고 있는 줄도 몰랐어.

웃기지 않냐.'

'야, 헛소리 당장

집어치워라!'

 

'정말이야, 정말이라니까. 진짜로

이전에 술 마시고 돌아다닐 때

이 옷 입었던 것 같아.

 

싹 털려서 빈털터리가 된 적이 하도 많으니

이젠 겁이 나네. 차라리

돈을 지갑에다 두지 말고

각 주머니에 나누어서 넣어 두어야겠어.'

 

'찌그러져서

일이나 해!'

 

난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뭔가 찾아냈어.

'이봐, 여기 20달러가 있네!

하느님, 20달러예요! 정말

꿈에도 몰랐네, 이런 돈이 있을 줄은!

나는 이제

부자야!'

'웃기라고 하는 얘기냐,

이 망할 놈아.'

 

'이런, 하느님, 20달러가

또 하나 더 있어요!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돼. 그날 밤 내가

가진 돈 싸그리 다 털려 버리지 않았다니,

믿어지지 않구만.

껍데기 홀라당 벗긴 줄 알았더니만.'

 

나는 외투 주머니를

더 뒤져 봤어. '아이구, 10달러가 또 나오네

거기다 이건 다시 5달러! 하느님 아버지시여.'

 

'그만두지 못해?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너 주저앉아서 입 다물어!......'

 

'하느님, 이제 나는 부자예요. 이따위 일자리는

당장 때려치워도 된다구요......'

'이 미친놈아, 가서 좀 앉으라니까......'

 

자리에 가서 앉은 다음에도

난 10달러짜리를 하나 더 발견했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증오의 물결이 나를 향해서 밀려오는 것을 느꼈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들은 내가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들을 기분 잡치게 하려고 말이지.

내가 왜 그러고 싶겠어. 그들은

급료 받기 삼 일 전부터

핫도그하고 감자칩만 먹고 살면서

이미 충분히

기분 잡치고 있는데 말이야.

 

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일하기 시작했어.

 

밖에는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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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stle 2011-07-1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실은

그들을 화나게 했어.
 
일요일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1월
구판절판


20대 초반에 비하면, 하는 일 없이 그냥저냥 흘려보내는 하루가 무료함이 아닌, 불안함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직 '찾아보면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 밑바닥에 남은 희망을 손가락으로 끄집어내 깨작깨작 핥다보면 날이 저물고, 야구중계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TV앞에 늘어져 있다 보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아주 멀게만 느껴졌던 내일로 간단히 넘어간다.
백수의 나날이 길어지면 요일 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어제, 오늘, 내일의 경계조차 흐지부지해진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해가 지면 내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어제가 반복 되는 듯한, 그런 아무 의욕없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때가 있다.
(일요일의 엘리베이터)-54쪽

지금, 자기가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경황없이 멀어지려 하는지, 도망치려 하고 있는지 자기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치카게한테 들은 이야기 때문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허둥지둥 방을 뛰쳐나온 것은 그것만이 원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방안에 혼자 있으면, 자기까지 무언가에 붙잡힐 것 같아 그것이 너무나 무서웠던 것이다.
(일요일의 피해자)-89쪽

마사카츠는 만원 버스나 전철을 타고 있으면 꼭 싸움에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싸움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고 있는, 그런 기분이 된다고 한다.
(일요일의 남자들)
-127 쪽

11월, 타워의 밑둥치를 불고 지나가는 바람은 차가웠지만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로 우뚝 솟은 붉은 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철탑은 아름다웠다.
"굉장하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사카츠의 목젖이 꼴깍 움직인다. 아버지를 따라서 게이고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쳐다보니 원근감이 흐트러져 푸른 바탕에 우뚝 서 있는 철탑 꼭대기를 손가락 끝으로 콕 집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일요일의 남자들)
-128쪽

세무사 사무소의 일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목수일처럼, 그날의 일을 끝냈다고 해서 속이 후련해지는 그런 업무가 아니다.
(일요일의 남자들)-134쪽

가엾다는 감정은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가여웠다는 과거형이 되고, 어느새 자기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일요일의 남자들)-150쪽

현관문을 닫자마자 게이고는 문득 책꽂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보통 누군가 이 방에 올 때는 꼭 엎어져 있는 마키 사진이, 똑바로 이쪽을 향해 있었다. 분명히 마사카츠가 뭔가 싶어 들춰보고는 그대로 세워든 것일 거다. 누가 본다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지만, 이미 몇 년 전에 죽은 여자친구의 사진을 여태 가지고 있는 걸 들키는 건 어찌 생각해도 역시나 껄끄럽다. 다만, 한 번 세워 놓은 걸 걷어치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게이고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마키를 잠시 바라본 다음, 다시 엎어놓을까 하다가 그냥 세워두기로 했다.
마키를 사고로 잃은 뒤 물론 다른 여자와 만난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집안에 들어올 때면 단순히 마키의 사진이 아니라 게이고의 마음 속에 감추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말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보고 몰래 다시 엎어놓은 다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 여자도 있었다. 그 어느쪽이든 게이고로서는 특별히 감출 의도도 없던 것을 마치 비밀처럼 들키고 나면, 아니 일방적으로 까발려지고 나면,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새 출발하라고 격려받기도 하고, 때론 질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면 눈 앞에서 마치 살아있는 몸으로 환생한 것 같은 그 여자가 너무 값싼 인간으로 보였다. 이렇게 아직도 사진을 올려두고 있는 것도 죽은 애인을 향한 마음이 한결 같아서가 아니라, 분명 언젠가는 잊어버릴 것을 알기에, 끝까지 치우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게이고는 무언가를 잊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그 무엇을 절대 잊고 싶지 않았다.
(일요일의 남자들)-156쪽

노리코는 가방을 안고 돌아 나왔다. 이 년이나 함께 살았다면서 김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가벼운 가방이었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서던 찰나, 교이치한테서 건네받은 열쇠를 그 여자에게 돌려준다는 걸 잊었다는 생각이 났다. 곧장 문 앞으로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려던 찰나, 그리 두껍지 않은 문 너머에서, 안으로 꾸역꾸역 삼키려 애쓰는 여자의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문 바로 뒤에서 났다. 가방을 건네고 노리코가 문을 닫은 직후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마치 자기 몸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애끓는 울음소리였다. 도대체 무엇을 잃으면, 이런 소리로 울 수 있을 까, 그 소리는 문 앞에 멈춰선 노리코를 무척이나 두렵게 만들었다.
(일요일들)-175쪽

이 괴로움의 끝에 도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로 그 차이였다. 부조리한 괴로움은 내일을 기다려도 해결되지 않는다.
(일요일들)-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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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키이라 나이틀리, 라는 어려운 이름의 여배우가 주인공 '리즈 베넷'역을 맡았다. 영화 속에서 리즈는 처음에는 못나게 웃어 나를 실망시켰는데 결국 마지막에 나는 그녀에게 서서히 반해버리고 말았다. 다 큰 처녀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고 해야할까.

 가장 큰 축은 '러브스토리'인데 어긋나면서 더 갈망하게 되는 두 덩어리의 감정이 항상 러브스토리의 핵심이듯 두 사람은 운명을 가장한 우연으로 엇갈리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도대체 왜 갈등이 사랑의 기폭제가 되는 것인지 겪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으나, 영화는 그 알 수가 없는 낭만을 가슴에 콩콩 박아넣는다.

 영화는 너무나도 상큼하다. 요즘 괜찮다, 좋았다 하면서 본 영화들은 잔잔하거나 축축 쳐지거나 아프거나 그랬는데 살랑 바람이 부는 봄날처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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