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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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복도에서 놀고 있다. 그 애들은 조용히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떠들고 놀도록 해줘도 더 이상 시끄럽게 놀지 못한다.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 애들은 이제 마분지 상자를 끈으로 연결하고는 복도의 끝까지 닿는 기차를 만들어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다. 역을 만들고, 양철통과 나무토막을 싣고 다니고, 저녁 먹을 때까지 그렇게 놀 모양인 게 분명하다.-28쪽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던 탁자에서 눈을 떼자 싸구려 복제 그림이 걸려 있는 방의 벽이 눈에 들어온다. 르누아르의 감미로운 여인 얼굴이다. 그 그림은 낯설게 느껴지는데, 너무나 낯설게 느껴져서 30분 전에 어떻게 그 그림을 견뎌 낼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정도다.-34쪽

내가 느끼는 고통은 어떤 안도감, 두 아이가 삶으로부터 보호받았다는 안도감과 뒤섞여 있다.-53쪽

그리고 프레드의 얼굴이 보인다. 내 마음에 삶을 불어넣어 주는 사랑이 없다면 쓸모없을지도, 쓸모없었을지도 모르는, 사정없이 늙어가며 삶에 파먹힌 얼굴. 다른 남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모든 것을 일찍부터 무관심하게 여기는 남자의 얼굴. 그가 우리 곁을 떠나간 이후로 그의 모습이 자주, 정말 자주, 더욱 자주 보인다.-58쪽

나는 전화를 거는 데 드는 돈을 아끼기로 결심하고, 방을 찾기 위해 천천히 시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방을 구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대규모 축제 행렬을 보려고 외지인들이 시내에 와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그냥 관광차 시내를 찾은 사람들이 계속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각종 회의에 참석하느라 국내 지식인들이 시내로 들어왔다. 외과 의사들과 우표 수집가들, 카리타스회는 매년 관례처럼 성당의 그늘 아래 모이곤 했다. 그들로 인해 호텔이 붐볐고, 물건 가격이 올랐으며, 부대 비용이 낭비되었다.-66쪽

말끔하게 솔질한 그의 수단, 잘 손질된 그의 손, 깔끔하게 면도한 뺨, 이러한 것들이 초라한 우리 집을, 맛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 하얀 먼지처럼 우리가 10년 동안 들이마신 가난을 생각나게 했다.-68쪽

나는 아이들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애들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나는 내게 지워진 낯선 삶을 들여다보듯 내 삶의 그러한 일부분을 들여다보았다. 손에 초를 들고 천천히 엄숙하게 내 좁은 시야를 지나고 있는 내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알게 된 사실, 즉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74쪽

나는 아이들을 잊을 수 없었다. 두 눈을 감아도 아이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 아이들, 사내애는 벌써 열세 살, 여자애는 열한 살이다. 판에 박힌 일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창백한 두 아이.-77쪽

"애들한테 줄 초콜릿이 있어. 풍선도 사줄 거고, 아이스크림도 사줄 거야. 애들한테 줄 돈도 가져갈 거고. 애들한테 때려서 미안하다고 말해 줘.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는 말 못해요, 프레드."
"왜 못 해?"
"애들이 울 거예요."
"울면 어때서. 내가 미안해한다는 걸 애들이 알아야 해. 이건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이야. 제발 그 점을 잊지 말아 줘."-82,83쪽

"좀 꾸미고 다녀요." 주인 여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랑을 위해 꾸미도록해요."-87쪽

지금은 지독히도 우울한 일요일 오후의 몇 분, 무한히 긴 몇 분이다. 기진맥진한 숨소리와 담뱃불 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나서 시작되는 침묵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반죽을 식탁 위에 내리치고, 가능한 한 많은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굴리고 다시 그것을 두드린다. 나는 사랑을 나눌 공간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백만의 남녀들을 생각해 본다. 반죽을 넓게 펴고 가장자리를 높게 개고는 케이크 반죽 속에 과일들을 다져 넣는다.-89쪽

"가끔씩," 소녀가 입을 열었다. "얘가 무슨 경험을 할지, 어떻게 살지 상상해봐요."-119쪽

어떤 직업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려면 진지한 태도가 필요한 데 내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전쟁 전에 오랫동안 약방일을 했는데 지루해서 사진관으로 옮겼다가 곧 또 싫증을 냈다. 그다음에는 책 읽는 취미도 없으면서 사서가 되려고 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책을 좋아하는 캐테를 알게 되었다. 캐테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그곳에서 일했고, 우리는 얼마 안 있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132,133쪽

"내게 좋은 점이라곤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 밖에 없어."-155쪽

신은 이런 구역질 속에서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인 듯 했다.-166쪽

당신은 전쟁이 얼마나 지루한 지 모를 거야.-171쪽

이해해줘야 해.

당신이 정말 임신했다면 난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하지만 당신이 바라는 만큼 부드러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173쪽

그 집은 정말 크고, 휑하고 아름답고 운치있어.
난 그런 운치 있는 집이 싫어-183쪽

그녀가 자기 손을 쥐도록 놔둬서 기뻤다.-184쪽

이제는 그녀가 내 손을 찾아 꼭 쥐었다.-184쪽

"가끔 자기 아내랑 잠을 잔다고 해서 그 여자랑 결혼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전쟁 때 당신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군인으로 사느니 더러운 지하실에서 나랑 사는 게 더 낫겠다고요. 그런 편지를 썼을 때 당신은 청년이 아니라 이미 서른여섯이었어요. 가끔 전쟁이 당신을 이상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요. 전에는 당신도 달랐어요."
나는 정말 피곤했다. 그녀의 견해가 옮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이 나를 슬프게 했다.-187쪽

당신 마음을 감동시킨 여자들이 또 있어요?-191쪽

나는 그녀의 다리와 초록색 치마, 초라한 갈색 재킷, 초록색 모자를 보았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부드럽고 슬픈 옆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얼마 동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두 개의 유리벽 사이로 보이는 그녀는 옷을 바라보면서도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고, 그 여자의 옆모습을 계속 바라보았고, 불현듯 그녀가 캐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22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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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품절


90년대에는 이렇게 온갖 문화적 실험과 시도들이 시작되었다. 이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절대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된 뒤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었으며, 집단에 매몰되어 있던 개인성을 '문화'를 통해 구조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향유는 어느 정도 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67쪽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지식으로 부르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들을 신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농업, 어업, 임업, 중소기업, 특허, 근로, 교육, 문화 예술, 금융, 가정 (농어민, 경영인, 공무원, 자영업자, 기타 분야는 현재 폐지) 등의 분야에 걸쳐 총 3580명을 신지식인으로 선정하였다.
'신지식인 선정'과 '문화 산업 육성'은 지식과 문화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고자 했다는 면에서 같은 맥락이었다. 한국 사회의 지식과 문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상품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상품화될 수 있는 것들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뒤로 한다고 하더라도-지식과 문화를 기반으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매우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는 물론이고 '성과가 당장 눈에 띄지 않는' 영역들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책들은 당장의 '부가 가치'만을 고려했을 뿐, 문화의 기본적인 토대에 대한 성찰은 전무한 것들이었다. -172쪽

제2의 빌게이츠나 이찬진을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지만 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간다'는 이 시대의 명제를 따라 '한 우물만' 팠던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제야 '이제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의 시대'라며 인식을 전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애써 팠던 우물에서 기어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회는 그들에게 '젊으니까 괜찮아'라는 공허한 위로만 던졌다.
-181쪽

당신은 지금 마시멜로를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달콤한 위로,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면 언젠가 얻을 수 있다는 조언, 그것들의 진짜 의미는 사실 '그러니까 혼자 알아서 하세요'라는 냉정한 외면이다.-185쪽

열정 노동의 확산은, IMF사태라는 국내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창궐이라는 전 세계의 상황을 근간으로 한다. 국가와 자본은 사람들의 열정을 필요로 했다. 동시에 신자본주의는 '불안정함'이라는 운명을 새 시대에 부여했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거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요구되었다. 면접장에서도, 구직자가 열정을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인사 담당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널 대체할 사람은 많아'라고 이야기했다.-187쪽

'일도 많이 시키고, 돈도 안 주어도 되는'-착취에 최적화 된-상황이 펼쳐졌다-190쪽

영국의 문화 이론가 테리 이글턴은 "신기하게도 이 세계는, 구성원 대부분을 쫓아내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선택 가능한 항목은 단지 두 가지이다. 착취당하거나, 그조차도 당하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세계는 넓어졌으나 갈 곳은 없어진 역설적인 상황,-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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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구판절판


내 유년기 기억 중 하나는 부활절 때 어머니가 나를 양 위에 태우고 '스스로 재물이 된 어린양'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일요일마다 감자를 곁들여 양고기를 먹었다. -16쪽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16번, 카르파티아 산맥의 부줄 족이었다. 이들은 잘라서 버린 머리카락을 쥐가 가져다 둥지로 만들면 머리카락의 주인에게 두통이 생긴다고 믿는다. 그 둥지가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은 미칠 확률이 높아진다.-17쪽

맥시 볼은 큰 가게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집 옷은 쌌지만 오래 가지 않는 데다 산업용 접착제 냄새가 났다. 자포자기한 사람들, 조심성 없는 사람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토요일 아침마다 그 가게에 모여들어 서로 다투듯 물건을 집어 들고 가격을 깎느라 실랑이를 벌였다. -19쪽

두 사람은 함께 만화방을 했고, 수요일에 내가 만화책을 빌리러 가면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주기도 했다. 나는 두 사람을 무척 좋아해 어머니에게도 그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하루는 그 두 아주머니가 내게 바닷가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집으로 달려가서 그 얘기를 재잘거리며 새 부삽을 사려고 바삐 저금통을 비우는데 어머니가 단호하게, 여지없이 "안 돼."라고 말했다. 난 왜 안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어머니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갈 수 없다고 말하러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22쪽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내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할렐루야 거인'이었다. 키가 2미터가 넘어 괴물로 불렸던 남자가 독실한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1미터 90센티미터로 줄었다는 내용이었다.-23쪽

"여자 애들은 뭐든 미리 준비해야 하는 법이야."-37쪽

한편 내 공부는 계속됐다. 원예학, 민달팽이로 인한 정원의 해충 문제, 그리고 어머니가 갖고 있는 씨앗 목록에 대해 배웠고, 역사가 계시록에 나오는 에언대로 흐른다는 것과 어머니가 주마다 받아 보는 <명백한 진리>라는 잡지의 내용을 이해해 갔다.-39쪽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우체국으로 갔다. 그리고 펜을 들고 어린이 부양자 지원금 신청 용지 뒷면에다 이렇게 썼다.

주스버리 양,
저 하나도 안 들려요.
-50쪽

"한쪽을 이해하고 싶다면, 양쪽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거야."-62쪽

베티 아줌마가 나아지자 우리는 모두 해변으로 간증하러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습니다. 나는 탬버린을 쳤고 엘시 노리스는 자신의 아코디언을 켰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 아이가 우리를 향해 모래를 던졌고, 그때부터 아코디언에서 높은 바 음이 나오지 않게 됐습니다. 우리는 가을에 잡동사니 바자 세일을 열어 수익금을 아코디언 수선 비용에 쓸 것입니다.-71쪽

그날 이후로,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피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몹시 슬펐을 것이다.-80쪽

"단지 선생님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에요."-81쪽

"이 과일 케이크는 말이다."
엘시가 중간 중간 케이크 조각을 삼키며 흔들었다.
"먹을 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먹어 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84쪽

나는 당장 일에 착수했다. 그동안 어머니와 이다 그리고 메이는 경마 승자를 맞추는 용지를 작성하고 홀릭스를 마셨다. 난 일이 싫지 않았다. 잔에 침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더욱이 일하는 동안 생선 가게와 멜라니를 생각할 수 있었다.-143쪽

어머니는 예전에 고집이 센 아가씨였고, 파리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다. 당시로서는 아주 과감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셍 제르망 거리에 살며 크루아상을 즐겼고 청결하게 살았다. 그때는 주님과 함께하지 않았지만 수준 높은 삶이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날, 어머니는 강을 향해 걷다가 경고도 없이 피에르를 만났다. 아니, 차라리 피에르가 자전거에서 뛰어내려 양파를 건네면서 어머니를 그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렀다고 해야겠다.
"당연히 나는 우쭐해졌다."-151쪽

"가서 커피 좀 마시자.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는 거야."-178쪽

'만약 그들이 내 악마를 손에 넣고자 한다면 나부터 손에 넣어야 할걸.'-183쪽

멜라니는 평온했다. 소로 변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평온했다. 난 너무도 화가 나서 멜라니와 대화해 보려 했지만 그녀는 다른 곳에 머리를 두고 온 것 같았다. 그녀는 나에게 별일 없냐고 물을 뿐이었다.
"무슨 일?"
멜라니가 얼굴을 붉혔다.-209쪽

"이제 내가 너에게 경고를 하겠노라."
발로 땅을 구르며 여왕이 외쳤다.
"너와 너의 머리 둘 중에 하나는 제거되어야 한다."-213쪽

어머니는 하얀 장미에 빨간 칠을 하고 이제 장미가 빨갛게 자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나가야겠다. 난 내 집안에 마귀를 들일 수 없어."-228쪽

사실 나는 죽도록 두려웠다.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날 돌봐 주었던 선생님과 살까 했다. 지금껏 나는 토요일마다 아이스크림 차를 운전했다. 이제는 일요일에도 일할 것이고, 최대한 그 선생님에게 많은 돈을 드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곳은 음산했지만, 여기보다 음산하지는 않다. 나는 강아지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냥 책과 찻장에 있는 악기들, 그리고 그 위에 성경책을 얹어 가져왔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과일 가게에서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오렌지, 과즙이 풍부한 이스라엘 오렌지, 무르익은 세빌리아 오렌지.
"과일 가게 일은 하지 말자."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먼저 정육점 일을 할 거야."-229쪽

그녀는 배에 오르고 다른 쪽으로 항해할 것이다. 돛이 움직이고 태양이 떠오른다. 이제 그녀의 주위에는 물 외에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는 되돌아갈 수 없다.-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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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stle 2010-01-2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도서관에 앉아 몇장 읽어봤는데 재밌더라. 나오기 싫었다는..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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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라는 말만큼 저에게 난해하고 어렵고, 그리고 협박 비슷하게 울리는 말은 없었습니다.-16쪽

만일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25쪽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27쪽

그렇지만 저는 다케이치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그림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을 다케이치한테서 전수받은 저는 예의 여자 손님들 몰래 조금씩 자화상 제작에 착수했습니다.-41쪽

"어디 좀 보여줘 봐요."
죽어도 안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면 아이 싫어, 어머나 싫어요 하면서 좋아하는 꼴이라니. 정말 역겹고 흥이 깨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심부름이라도 시키자고 생각하게 됩니다. -57쪽

그럴 때마다 제 뇌리에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중학교 시절에 그렸던, 다케이치가 '도깨비 그림'이라고 했던 몇 장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상실된 걸작. 여러 번 이사 다니는 사이에 없어져버렸지만 분명히 뛰어난 그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이것저것 그려봤지만 그 기억 속의 걸작에는 미치지 못했고 저는 언제나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느른한 상실감에 괴로워해 왔던 것입니다.
마시다 만 한 잔의 압생트.
저는 그 영원히 보상받지 못할 것 같은 상실감을 혼자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88쪽

저는 하느님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90쪽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93쪽

그리하여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된다.
즉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앞길을 막는 방해꾼 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

우에다 빈 번역의 기 샤를 크로인가 하는 사람의 이런 시구를 발견했을 때 저는 혼자 얼굴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뻘게졌습니다.-95쪽

결혼하자. 그 때문에 나중에 아무리 큰 비애가 닥친다 해도 상관없다. 난폭할 만큼 큰 기쁨이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상관없다.-105쪽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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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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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비하면, 하는 일 없이 그냥저냥 흘려보내는 하루가 무료함이 아닌, 불안함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직 '찾아보면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 밑바닥에 남은 희망을 손가락으로 끄집어내 깨작깨작 핥다보면 날이 저물고, 야구중계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TV앞에 늘어져 있다 보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아주 멀게만 느껴졌던 내일로 간단히 넘어간다.
백수의 나날이 길어지면 요일 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어제, 오늘, 내일의 경계조차 흐지부지해진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해가 지면 내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어제가 반복 되는 듯한, 그런 아무 의욕없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때가 있다.
(일요일의 엘리베이터)-54쪽

지금, 자기가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경황없이 멀어지려 하는지, 도망치려 하고 있는지 자기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치카게한테 들은 이야기 때문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허둥지둥 방을 뛰쳐나온 것은 그것만이 원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방안에 혼자 있으면, 자기까지 무언가에 붙잡힐 것 같아 그것이 너무나 무서웠던 것이다.
(일요일의 피해자)-89쪽

마사카츠는 만원 버스나 전철을 타고 있으면 꼭 싸움에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싸움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고 있는, 그런 기분이 된다고 한다.
(일요일의 남자들)
-127 쪽

11월, 타워의 밑둥치를 불고 지나가는 바람은 차가웠지만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로 우뚝 솟은 붉은 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철탑은 아름다웠다.
"굉장하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사카츠의 목젖이 꼴깍 움직인다. 아버지를 따라서 게이고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쳐다보니 원근감이 흐트러져 푸른 바탕에 우뚝 서 있는 철탑 꼭대기를 손가락 끝으로 콕 집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일요일의 남자들)
-128쪽

세무사 사무소의 일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목수일처럼, 그날의 일을 끝냈다고 해서 속이 후련해지는 그런 업무가 아니다.
(일요일의 남자들)-134쪽

가엾다는 감정은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가여웠다는 과거형이 되고, 어느새 자기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일요일의 남자들)-150쪽

현관문을 닫자마자 게이고는 문득 책꽂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보통 누군가 이 방에 올 때는 꼭 엎어져 있는 마키 사진이, 똑바로 이쪽을 향해 있었다. 분명히 마사카츠가 뭔가 싶어 들춰보고는 그대로 세워든 것일 거다. 누가 본다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지만, 이미 몇 년 전에 죽은 여자친구의 사진을 여태 가지고 있는 걸 들키는 건 어찌 생각해도 역시나 껄끄럽다. 다만, 한 번 세워 놓은 걸 걷어치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게이고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마키를 잠시 바라본 다음, 다시 엎어놓을까 하다가 그냥 세워두기로 했다.
마키를 사고로 잃은 뒤 물론 다른 여자와 만난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집안에 들어올 때면 단순히 마키의 사진이 아니라 게이고의 마음 속에 감추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말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보고 몰래 다시 엎어놓은 다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 여자도 있었다. 그 어느쪽이든 게이고로서는 특별히 감출 의도도 없던 것을 마치 비밀처럼 들키고 나면, 아니 일방적으로 까발려지고 나면,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새 출발하라고 격려받기도 하고, 때론 질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면 눈 앞에서 마치 살아있는 몸으로 환생한 것 같은 그 여자가 너무 값싼 인간으로 보였다. 이렇게 아직도 사진을 올려두고 있는 것도 죽은 애인을 향한 마음이 한결 같아서가 아니라, 분명 언젠가는 잊어버릴 것을 알기에, 끝까지 치우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게이고는 무언가를 잊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그 무엇을 절대 잊고 싶지 않았다.
(일요일의 남자들)-156쪽

노리코는 가방을 안고 돌아 나왔다. 이 년이나 함께 살았다면서 김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가벼운 가방이었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서던 찰나, 교이치한테서 건네받은 열쇠를 그 여자에게 돌려준다는 걸 잊었다는 생각이 났다. 곧장 문 앞으로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려던 찰나, 그리 두껍지 않은 문 너머에서, 안으로 꾸역꾸역 삼키려 애쓰는 여자의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문 바로 뒤에서 났다. 가방을 건네고 노리코가 문을 닫은 직후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마치 자기 몸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애끓는 울음소리였다. 도대체 무엇을 잃으면, 이런 소리로 울 수 있을 까, 그 소리는 문 앞에 멈춰선 노리코를 무척이나 두렵게 만들었다.
(일요일들)-175쪽

이 괴로움의 끝에 도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로 그 차이였다. 부조리한 괴로움은 내일을 기다려도 해결되지 않는다.
(일요일들)-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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