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단편을 보는데 마이조 오타로가 생각이 나는 건 왜, 초딩 때 하던 프메 시리즈가 떠오르는 건 왜, 곰곰 생각하니 이거 취향저격인가, 아무래도 가상현실적인 현실이 나다운 걸지도 그게 내 꺼인지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4-12-02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취향저격이라니 새로운 단어 배워가요~~~~.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취향저격이라~~~.

김토끼 2014-12-02 19:31   좋아요 0 | URL
저도 황정은 단편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정말 저격당한것처럼 좀 충격적인 기분이 들 때가 있달까요 ㅎ 꼭 읽어보세요^^
 

요즘 편혜영 좋아요 단정하고 친절한 아가씨 같지만 차갑고 고요한 언니랄까, 프로필 사진도 예쁘고 분위기도 좋아, 결국 난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4-12-02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혜영작가의 글은 읽어 본 게 없어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한국 작가들 많이 읽어보지 못했어요~~~. 제목도 좋네요. (일단 제목이 중요한 일인;;;;ㅎㅎ)

김토끼 2014-12-02 19:32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작가들 단편은 정말 세계적인 수준인 것 같아요 특히 이승우!!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읽은 중에서는 역시 최고입니다!!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토요일은 약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의미했다. 토요일이면 피로에 찌든 몸이, 곧장 침대로 쓰러지거나, 허겁지겁 당분을 섭취하기에 바빴는데, 지난 토요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피곤을 예상하고 아무런 일정도 계획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는 이들에게 단체톡을 보냈지만 2시간 동안 누구도 답톡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 일일이 전화를 걸자,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쩐지 의도적으로 소외받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려던 순간, 다행히 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고, 연속해 답톡들이 달렸다. 그 순간 나는 불안감이 점차 고조될까 두려워, 아무데로나 가고 있었고, 그 아무데는 결국 물건이며 사람이며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운 대형마트였고, 대형마트에 들어서는 입구에서 갑자기 돌연 이래도 되나 싶게'무의미'해졌다. 나는 결국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생각에 휩싸여 그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 차로 돌아왔을 때, 뒷자리에는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벗어놓은 자켓 아래에 하얀 모서리를 내밀고 있었다. 띠지에는 쿤데라의 흑백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고, 어쩐지 나는 쿤데라를 그 어떤 작가의 얼굴보다 뚜렷하게 기억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같은 사진, 확대된 사진, 흑백 사진, 그리고 체코, 프라하, 여성, 섹스에 대한 그의 거침없는 글을 몇 번 본 것이 더욱 그를 잘 안다는 착각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잘 안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착각의 소지가 있었다.

 

 

라몽, 다르델로, 알랭(아마도 그럴 것이다, 읽고 바로 지인에게 빌려주었으므로 미처 인물 이름을 재확인할 겨를도 없었다)은 뤽상부르 공원을 각자의 사연으로 돌고 있다. 처음과 끝인 뤽상부르 공원, 이 장소는 상징적으로 재현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연극 무대를 위해 급조된 흔한 공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급히 설계된 배경은 무슨 역사성인가 띠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에 대한 역사인지 잘 알아보지 못하게끔 이중 설계되어 있어, 사실 읽는 이의 입장에서 그저 '무대'이상으로 보이지 않곤 했다. 그러니까 이 '무대'라는 느낌과 작중 인물들의 '대사'적인 대화는 소설을 '연극 대본' 혹은 '허구의 것'으로 의도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실제로 인물들은 자신들이 고안해낸 파키스탄어(라고 되어 있지만 결코 파키스탄어가 아닌 언어)로 이야기를 하고, 다르델로의 삶과 죽음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자신들만의 희한한 연극을 지속한다. 대체로 어이가 없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은 촌철살인을 나눈다. 우리가 무의미해져야 하는 이유를 열변한다. 우리의 보호막이 되어주곤하던 신비로움, 의미를 부여하는 장난스러운 행위들은 이제 그 장난의 행위자들에게도 지겹고 지루한 것이 되어버렸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의미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리고 그 쓸모없음의 기분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이다. 가만 보면 작가는 그 '쓸모없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수중에 책은 없지만 단 한 장 찍어놓은 페이지가 증거로 남아있다)

 

 

 

 

 

 

 

쿤데라는 종종 그랬듯이 이번에도 작가 그 자신으로 소설에 불쑥 등장하고, 이걸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변사'라고 할텐데, 좀 다른 면이 있다면 쿤데라는 자신의 서술을 반복하고, 자신의 이 반복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면서 능청을 떤다. 만약 쿤데라의 소설을 처음 보는 이라면 '당황'할 테고, 여러 번 보는 이라면 '친근'하고, 없으면 허전할 테다다. 서술에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그것이 장난 정도로 비춰지지 않고 '문학성'으로 인정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쿤데라는 다른 작가들과 좀 다른 위치에 놓이게 된다.(아마도 그 위치는 수직적이라기보다 수평적 범위에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의미의 축제>의 인물들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격이다. 너무 짧아서, 몇 안 되는 인물일지라도 너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칼리닌이다. 스탈린의 연민을 '회복'하는 존재. 잦은 요의로 초라해진 존재. 그러니까 왕족(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귀족)으로서 고귀한 위치에 놓여있어, 대중 앞에 곧잘 나서는 존재였다.(원하든 원치않든) 그가 대중 연설 같은 걸 하면 도중에 수 차례 화장실을 들락날락 해야 해서, 연단에 들고 날 때마다 대중의 만세 외침을 받아야 했다. 나중에는 그 주기가 짧아져 대중의 외침이 무슨 축제의 환호성처럼 들리며, 결국 대중들이 떠들썩한 흥분에 휩싸여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게 한, (요의를)참을 수 없는 존재였다.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44)

 

 

  예전처럼 모두 여기 있는데, 칼리닌만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끔찍한 요의에 쫓겨 크렘린 궁 복도들을 헤매고 다녀보지만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결국 밖으로 나가 거리를 달린다.(128)

 

 

 

150페이지, 여백이 많은 이 소설은 다음 날, 약속 시간이 미뤄져 혼자 남게 된 카페에서 다 읽었다. 사실 책을 좀 읽으려고 한 시간 일찍 나간 자리였는데 한 시간이 더 늦춰져, 두 시간을 혼자 보내야했다. 두 개의 서점을 돌고, 잡화점을 구경하고, 물을 사 먹고 요거트를 사먹고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있어도 시간은 남았다. 그리고 나는 몇 쪽 남지 않은 책을 찬찬히 다 읽었고, 돌아오는 길에 그 날 만난 사람들 중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을 건네줬다.(이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8년엔가 샀었고, 어제 다 읽었다. 몇 년 동안 이 책은 책장에 그냥 있기만 했다. 몇 번이고 책장을 정리할 때마다 이 책은 미처 다 읽지 못했다는 이유로, 또 역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 때문에, 아니면 문학전집 중 한 권을 빼버리는 건 어쩐지 이 빠진 잇몸 같아서 살아남았다. 별 다섯은 부족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번인가 읽으려 하다 못 읽은 작가들이 많다. 심지어 책을 사두고 몇 년씩 책장에 묵혀 둔 채 한 장도 넘기지 못한 작가들도 있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작가들 중에는 故최인호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읽지 못했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건 저러건 아무도 신경 안 쓸 일이라도, 생전에 읽지 않은 게으름이 한심했다. 언제부터인가 소설만 읽으면 몸이 아프고, 괜한 마음이 발동해 노트북 앞에 앉아 몇 자 쓰면, 또 몸이 아팠다. 그렇게 나는 아픈 것이 무서워서, 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않았고 그 주변을 지분거리기만 했다. 사실 알라딘 신간 평가단에 지원할 적마다 소설 분야에 지원했는데, 매번 떨어졌다. 그러다 마침 마음이 소설 바깥으로 기울어 갈 때 지원한 에세이 분야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쁘면서도 어쩌면 어떻게도 나는 소설과는 연이 안 닿는 것 같아 서운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이번 신간 평가단을 통해 소설가의 에세이를 많이 접했다. 마지막 책 역시 그랬다. 故최인호의 유고집인 <눈물>은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그의 신앙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신앙심이 없는 내게 그리 까탈스러운 독서가 아니었다. 늘 '주님'이라는 분을 생각하는 투병 중이 작가를 떠올리며 아픈 것이 무서워 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내가 하고자 한 것을 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는 동안, 누군가는 손톱이 빠진 자리에 골무를 끼워 글을 쓰며 하고자 하는 것을 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원해 그것을 하더라도, 이 작가의 열정에 비하면 진정도 없고 깊이도 없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2011년 네 번째 항암 치료를 끝으로 더 이상 항암 치료는 물론 CT, PET 그 어떤 검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받은 치료라면 목에 패인 상처에 안연고를 바르는 일이었습니다. 점점 끓어오르는 가래를 뱉을 힘이 없습니다. 서서도, 앉아서도 가래를 뱉을 수 없습니다. 바닥에 무뤂을 꿇고 엎드려 있는 힘을 다해 겨우 가래를 뱉으면 이미 내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됩니다. 가래 때문에 숨을 쉴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침이 나오지 않아 늘 물병을 달고 삽니다. 이제 먹는 것도 두렵습니다. 사레가 들려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새 영양실조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익숙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폐렴이 찾아오는 것도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눈을 뜨려고 해도 자꾸만 눈이 감깁니다.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참을 수 없는 절망감입니다. 하지만 나는 쓰고 싶습니다. 반드시 이 고통 속에서, 내게 주님을 찬양하는 글을 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성체가 너무나 고픕니다.(37)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다른 이들로부터 노골적인 평가를 자주 받는 편이었다. 너는 이러이러하다, 라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올 때 물론 의도는 그들이 느낀 나에 대한 호감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 중에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말은 감화가 잘 된다, 감수성이 좋다는, 그 말대로 좋다면 좋은 말들이었다. 특히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했고, 그런 성향이 남들과 다른 것을 포착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고, 거기서 묘한 우월감도 있었고, 그런 우월감에 젖은 사람들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사람 대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도 알게 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뭔가를 읽고, 또 구상하면, 당시에는 그것이 늘 좋지 않은 방향으로, 건강한 삶의 대척으로 향했고, 감수성이 좋은 나, 뭔가를 읽으면 읽은 대로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기분이 요동치던 나는 더 이상 쓰지도 읽지도 말자는 고민에 방점을 찍었다. 오히려 등단이나 그런 작가적인 명예를 쓰지 못한 것이 능력의 한계이자, 다행이 되어버렸다. 


최인호의 유고집이 주님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도, 쓴다는 것 앞에 무력해지는 한 사람으로서 이 글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썼다'는 자체로 이미 유의미하다. 제대로 써본 사람은, 쓰는 과정이 결코 1에서 10까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테다. 1에서 3을 쓰다가 2를 채우고 10으로 비약하고 다시 10을 지우고 8과 9의 무게를 재고 8을 위해 9를 희생하는 과정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쓴다는 것, 평생 쓴다는 것은 그 과정의 인내이기도 하지만 운명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조건이 악할수록 열망이 커지는 사람을 보는 건 소름돋는 일이다. 주보에 실렸다는 이 글들은 쓰고 싶다는 열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깨끗함마저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책이 끝날 즈음 나온 질문 하나가 故최인호 작가의 삶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열정은 삶에 대한 집착과는 어떻게 다른 겁니까?(340)


돌아보면 항상 부러운 이는 자기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더 부러운 건 그것을 조용하고 또 확실히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작가 최인호가 부러웠다. 누군가 이것이 올바른 감정이 아니라고 야단치더라도, 지금 내 안에서 쏟아지는 감정은 동경이나 존경이 아니라 부러움이다. 그리고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최인호 작가님, 마지막까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