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상처 속에 쟁여 둔 아름다움-이정록 관련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풋사과의 주름살>><<버드나무 껍질에 세들어 살고 싶다>> 이 세 권의 시집을 두고 우리는 90년대 적인 새로움을 얘기하기는 힘들다. 젊은 시인이 과히 새롭지 않다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소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정록이 전통적인 시쓰기의 양식을 지키며 관찰을 통찰로 바꿔나가는 과정을 통해 시읽기의 즐거움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정록의 시에 처음 주목한 것은 그렇게 문학사적인 이유나 보편적인 문학의 문제를 보는 시각 때문은 아니었다. 시를 보는 눈을 현혹시키는 수많은 시인들의 감수성의 광휘와 개성의 숲을 피해가다보니 평범한 사람의 눈높이에서 갈고 닦은 성실한 시가 어떻게 빛날 수 있는지를 밝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이정록의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시쓰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어 그의 기본기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세기말에도 변함 없는 목소리로 말해주는 시인의 목소리가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정록의 시들은 상처를 이야기한다. 그의 상처는 특별한 천재의 표식으로서의 상처가 아니다. 우리는 첫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의 '서시'를 통해 그가 말하는 상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서시> 전문

 

 

그는 자신의 몸에 상처가 적음을 반성한다. 상처란 인간 사회 속에 파고들 때 생기는 성실성의 증표다. 그는 상처 없이 해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상처란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이기에 그것을 온 몸에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의 상처에 대한 이해는 두 번째 시집 <<풋사과의 주름살>>의 첫 시 '자두나무'에서 다시 등장한다.

 

개망초 꺽으며 너에게 간다

짱짱, 햇살을 쟁이는 푸른 자두들

 

바닥에 때 이르게 물러 떨어진

열매들, 모두 벌레 먹은 녀석들이다.

 

벌레가 들자, 성한 놈 제쳐둔 채

온 몸으로 단물을 올려주고

씨알 여물게 해준 자두나무

 

낮술에 골아떨어진 호주에게

부채를 부쳐주던 여자가, 저 자두나무

그늘에 쪼그리고 있었다

 

늙은 몸통, 갈라진 홈마다

붉은 눈물 솔아 있다

 

땅바닥 쪽으로 쏠려 있는

한 여자의 오래된 눈길

 

<자두나무> 전문

 

위 시에서 시인은 벌레 든 자두에 먼저 단물을 올려주는 나무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늙은 몸통, 갈라진 홈마다/붉은 눈물 솔아' 있는 모습을 '오래된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다. 상처에 대한 이정록의 꾸준한 시선은 '풋사과의 주름살'에서 한 정점을 이루는 것 같다.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탑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 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낙과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놓는다

식탁에서 냉장고 위로, 다시

세탁기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어디로 갔나

몸 안을 비워 단물 쟁여났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내부로 가는 길이구나

연 살처럼, 내면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풋사과의 주름살>

 

노파와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의 주름살의 연결이 놀라울 정도로 평이한 진술 속에서 이루어져 있다. 풋사과의 쟁여놓은 '단물'이 노파의 '가마솥' '갱엿'이 되고 주름살이 '내부로 가는 길'이 되는 이 인식의 힘. 결국 '인간의 내면을 버팅켜주는 힘줄'이 주름살 혹은 상처인 것이다. 이 상처에 대한 시인의 오랜 시선은 결국 흔하지만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 번째 시집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에서 '눈사람의 상처'를 보자.

 

삽날에 잘린 눈사람을 어루만진다

살집 속에 결을 만들어놓은 흙 부스러기

때문에 삽날이 지나간 자리가 꽃등심처럼 곱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

저 흙길을 따라가면 서걱서걱 기저귀 얼어 있던 안마당

또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를 만날 것 같다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히는 눈송이들

왱이낫이 박힌 옹이 많은 옛길을 덮는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겹겹 붕대를 두른다

삽날이 지나간 눈사람, 그 흙밥의 나이테를 어루만진다

 

<눈사람의 상처>

 

'삽날에 잘린 눈사람'이 아름다우면서도 무섭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생각하는 어머니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가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힌다는 '눈송이'란 이 시인의 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세 권의 시집을 통해서 시인의 상처에 대한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 인식은 첫 시집의 상처 없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시작해서, 상처란 내면의 단물이며 버팅기는 힘이라는 인식으로 한 봉우리를 보여주고 , 다시 상처를 아름답고도 무서운 어머니의 기억으로 내면화시켜내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시인의 이러한 내면의 흐름을 사랑한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행복한 시읽기의 길이다. 이러한 서정성과 인식의 깊이를 함께 가진 시인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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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 코엘료가 뜨는 이유
꿈을 향해 다가가는 '희망적' 동화, 그러나…

2004년 08월 26일   강성민 기자 

요즘 문화계의 최대 화제는 단연 파울로 코엘료다. 파란 우주를 향해 걸어가는 양치기 소년이 예쁘게 그려진 자그마한 양장본 소설 '연금술사'(문학동네 刊)가 올 여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그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 문화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먼저 주목할만한 현상은 코엘료 말고도 각기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랭크된 '다빈치코드'(댄 브라운 지음, 베텔스만 刊), '단테 클럽'(매튜 펄 지음, 황금가지 刊) 같은 인문스릴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늘 푸른 '나무'(열린책들 刊), 영화로 먼저 소개된 '냉정과 열정사이'(쓰지 히토나리 지음, 소담출판사 刊) 등이 모두 '외국소설'이란 점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刊)만이 17위에 올라 한국문학의 자존심을 간신히 지키고 있다. 이런 승승장구하는 외국소설과 침체일로에서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는 한국소설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새삼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코엘료의 책은 '연금술사' 말고도 '11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이상 문학동네 刊) 등 3권이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라있을 정도로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작가다. 그의 정신세계와 문학적 특징이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연금술사'는 우화라는 '낡은' 문학적 장치를 도입한 매우 전략적인 작품이다. 코엘료의 가장 큰 특징은 '동화적인 공간설정'이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어린왕자'를 떠올려보자. 설준규 한신대 교수(영문학)는 최근 나온 '창작과비평' 가을호에서 "'연금술사'가 '어린왕자'에 흥미로운 인물들을 삽입하고, 중간중간에 경구들을 박아넣은 아류작"이라고 평하며 "작품 스토리와의 긴밀한 관계가 없는 경구들은 군더더기라는 식으로 깎아내렸다. 하지만 이는 너무 인색한 평가이고 오해에 가까운 견해다.


'연금술사'는 그런 차원보다, 삶의 고통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쉽고 평이하고 간결한 구성으로도 본격적인 소설적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문학적인 것의 역류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생각해보자. '어린왕자'는 어린이와 그 부모들이 즐겨서 읽었다면, '연금술사'를 읽는 건 성인들이다. 그것도 경쟁이 치열한 기업사회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퍼지고, 선물용으로 증정되고 있다. 이것은 '독자층'의 변화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지표로 여겨진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외국문학의 주요 독자들은 논술을 앞둔 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중심추가 사회활동의 동맥이라 할 수 있는 30∼40대 성인들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이른바 386들인 셈인데, 그들이 젊었을 때 읽었던 책들은 현실을 고발하는 소설이나, 황석영, 조정래 류의 대하역사소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연금술사'를 선택했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추리해봐야 하지 않을까.


먼저 이 조그만 소설에 그려진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한 양치기 소년의 아름답고 회화적인 세계는 삶에 지친 이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우화'라는 낡은 틀은 전혀 식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윤기의 '그리스 신화'가 왜 요즘 인기를 끌겠는가. '신화'와 '우화'라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현실을 인식하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것의 세밀한 재현보다는 현실을 잘 다룰 수 있는 눈을 키워주는 게 필요하다. 그 마음의 눈이 바로 상상력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정신병원에 드나든 소년기, 히피문화에 심취했던 청소년기, 좌파잡지 활동으로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고통스러운 이력의 소유자다. 코엘료는 보통사람보다 '멍울'와 '그림자'가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엔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정신세계는 이미 현실을 따사롭게 껴안은 채 먼 곳의 어떤 유토피아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이후로 가장 순수한 백색의 세계로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은 '아사다 지로'가 야쿠자의 암흑세계에서 작가로 변신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진정한 밑바닥을 본 사람들이 창조해낼 수 있는 평화로운 표정이 아닐까. 이것이 아마도 동시대 모든 작가들과 코엘료가 갖는 차별점인지도 모른다.


'연금술사'와 '11분'은 상상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11분'은 한 여성이 창녀로서 직업적인 섹스를 통해 내면의 빛을 얻어나가는 과정을 그렸는데, 그 배경은 술집과 도서관, 호텔 같은 도시화된 공간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소설의 공간은 서로 닮아있다. 어떤 편안함으로 말이다. 그것은 코엘료가 일종의 중용적 자세를 지키기 때문인데, 삶에서 극단은 '특별한' 손님이다. 하지만 하루키에서 요시모토 바나나까지 이어진 일본 개인주의 소설과 현대 프랑스 소설들은 극단을 현실과 착각해왔다. 타인과 단절된 단자화된 개인들의 천국인 한국소설도 마찬가지다. 코엘료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청년기를 걸었던 한국의 386들은 이런 작가들의 '개인주의'에 대해 차디차게 고개를 돌리는 대신 뚜렷한 '목적'이 있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삶이 등장하는 코엘료의 소설에 '현실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사회변혁이라는 목적이 있었듯이, 진정한 자아라는 또 다른 목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소설들은 여전히 삶의 목적은 구 소련과 함께 무너졌다는 핑계를 대며 휴가철 아이쇼핑을 하듯이 현실을 보고 있다.


'11분'에서 창녀 마리아는 서로 부대끼면서 닮아가는 아름다운 타협의 정신을 배운다. 이것이 코엘료의 메시지다. 이것은 노동쟁의의 일방적 파업방식이 통하지 않는 요즘의 세태에 뭔가를 시사한다. 그것은 '11분'이라는 소설을 읽어보면 안다. 이 책을 읽은 내 친구는 "2프로가 부족해, 뭔가 애절한 절망감이 없어"라고 나한테 말했다. 나는 "왜 없다고 생각하냐. 작가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그것을 짐작하게 하지 않느냐"라고 대답해줬다. '11분'은 창녀의 삶을 그렸다기에는 너무 단아한 통찰과 군더더기 없이 제작된 고급 퍼니처처럼 꽉 짜여진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다. 설준규 교수는 코엘료의 소설이 "멜로드라마적 구성과 큰 차이가 없다"라고 지적한다. 그의 생각은 문학은 고민하게 만들어야지 고민을 풀어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지적은 빨갱이에게 딱지를 붙이는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 매우 편안하고도 이분법적이고, 또한 권위적인 비평태도가 아닐 수 없다. 문학이 바닥을 기는 요즘, '이념형'이나 '향수'로서 존재하는 본격문학을 기다리기보다는 멜로적 냄새가 다소 풍기더라도 겸손하게 그 가치를 먼저 찾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코엘료를 멜로와 본격의 경계에서 살피지 말았으면 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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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8-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엘료가 그렇게 인기인가?
트렌드에 무심한 것(또는 무심한 척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닌데 ...

starrysky 2004-08-27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엘료는 별 재미 없는 우화 소설 하나로 끝없는 고공비행을 하는 덕분에 다른 책들까지 덩달아 재간, 급발매되고 있지요. 물론 개중에 괜찮은 책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범작 수준이라고 보는데요.. 근데 저 기자분은 아무래도 제일 유명한 '연금술사'와 미친듯이 광고 때린 '11분'밖에 안 읽으셨나 봐요.

balmas 2004-08-27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별총총하늘님(^^) 오랜만이시네용.
'연금술사'와 '11분'은 괜찮은 책에 못끼는가 보죠?
그럼 어떤 게 괜찮은가요??

superfrog 2004-08-2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엘료는 출판계의 찜닭같은 존재죠. 다른 히트상품이 나와 주질 않으니 코엘료라도 계속 비굴한 명맥을 유지해 줘야 그나마 출판계에 어설픈 관심들이 생기니까요.. 저는 <연금술사>는 못 읽고(하도 요란스러워서요..;;) <11분>과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었는데 <베로니카, ..> 그중 낫다고 생각해요.. 흐, <11분>은 정말 지겹고 짜증났어요..

릴케 현상 2004-08-2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로니카가 젤 먼저 나왔다고 하던데, 주변에 읽은 사람은 정말 지루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연금술사 하나밖에 안 읽었지만 것도 지루하죠. 어찌보면 전에도 얘기했듯이 독자들이 소설을 읽어도 쉬우면서도 경제경영서적인 자기발전혹은 변화를 담고 있기를 바라는가 봐요. 어느정도는 바람몰이기도 하지만...
근데 표지 그림이 우주를 향해 가는 거였나요? 밤하늘을 등지고 있는 피라미드를 향해 가는 것 같은데. 소설 내용에 그대로 나오듯이...

balmas 2004-08-27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금붕어님,
표현이 재미있네요. "출판계의 찜닭"이라 ...
그런데 전 닭고기를 안먹어서 실감이 잘 안오는데용.^^
두 분 평가를 보면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이유가 없을 듯한데, 그것 참 이상한데요 ...^^

balmas 2004-08-3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답변 보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나네요.
(1) 베스트셀러도 읽는 사람,
(2) 베스트셀러만 읽는 사람,
(3) 베스트셀러도 안읽는 사람,
(4) 베스트셀러는 안읽는 사람,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요?^^
그런데 도대체 책은 왜 읽는 걸까요???

balmas 2004-08-3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1,2,3,4번을 다 ...
저는 "그냥" 읽습니다.^^

릴케 현상 2004-08-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2번과 4번은 도저히 한 배를 탈 수 없을 듯한데^^
 

 


2004년 08월 21일 (토)
제 2641 호
발행처 : 인권운동사랑방

 

[특별기고] "천성산 살리기는 천성산으로만 국한

되어서는 안된다"

 

21일로 지율 스님의 천성산 살리기 단식이 53일째를 맞고 있다. 53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단식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벌써 같은 사안으로 3번째 단식 투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만큼 지율 스님에게 천성산은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옆에서 함께 투쟁하고 있는 입장에서 지율 스님은 단지 천성산 지킴이가 아니라, 고속철도로 인해 파괴되기 직전의 천성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름다운 천성산에 고속철도로 인해 터널이 생긴다는 사실, 그 터널로 인해 단축되는 시간이 불과 22분에 불과하다는 사실, 꼬리치레 도롱뇽을 비롯하여 각종 희귀생물체들이 환경영향평가서에서 누락되었다는 사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도롱뇽 소송이 자연의 법적 권리를 옹호하는 국내 최초 소송이라는 사실 등 객관적으로 들어난 사실들만을 갖고 천성산과 지율 스님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미 투쟁이 천성산이라는 하나의 산을 지키는 문제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난도질당하는 산하 ‥ 70년대 개발독재 지금껏 이어져

70년 이후 개발과 파괴의 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 곳곳은 난도질당하지 않은 곳이 없다. 이는 90년대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게 이어졌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각종 토목공사들이다. 북한산 관통도로, 새만금 간척사업 등 굵직굵직한 토목공사는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행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개 기업이 아닌-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거대 토목공사라는 점이다.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문제 또한 이 국책사업의 연장선에 있다. 건설초기부터 많은 반대에 부딪혔고, 건설기간 내내 부실공사, 정치자금 뇌물수수로 얼룩진 고속철도였지만, 국가의 결정에 의해 진행된 토목공사였기에 모든 것이 용인될 수 있었다. 환경영향평가를 둘러싼 전문가들의 상반된 의견, 공사중단 추측보도가 나올 때마다 건설경기 침체 등을 운운하며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제 신문 등을 볼 때면, 이미 이 문제가 산과 자연을 보존하는 문제를 벗어나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와 맞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단지 건설업자가 무지하거나 환경 마인드가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사회구조가 그동안 생명을 죽이는 개발과 파괴에 얼마나 익숙해있는지를 천성산 문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사랑, 평화운동과 맞닿아

또한 천성산 살리기 운동은 생명사랑 운동이자, 평화운동이다. '천성산과 도롱뇽을 살리자'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 이 운동은 생명의 소중함을 잔잔하게 알리는 생명사랑운동이다. 이 운동을 함께 하고 있는 도롱뇽의 친구들이 "초록의 공명"이라 부르는 생명사랑 전파활동은 지금도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다. 게시판 글 퍼다 나르기와 거리 서명작업 등을 통해 천성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작업이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생명사랑의 근원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있음은 물론이다. 생태주의와 평화주의는 맞붙어 있다는 거창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그 동안 천성산 살리기 운동을 해온 이들은 모두 천성산과 자연의 평화를 기원해 왔다. 다른 이들의 것들을 빼앗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평화와 삶의 소중함을 조용히 전파하는 가운데 결국에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달되는 평화의 메시지는 생태계와 인간이 하나로 화합할 수 있다는 혹은 화합해 나가야 한다는 소중한 울림이다. 도롱뇽이 살 수 없는 산에서 결국은 인간도 살 수 없지 않은가?

이러한 의미에서 천성산 살리기 운동은 단지 천성산이라는 하나의 산만을 살리는 운동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또한 도롱뇽이라는 한가지 자연물만을 살리는 운동도 아니다. 천성산과 도롱뇽을 위해 25만 명이나 되는 이들이 도롱뇽 소송인단을 구성하고 있다. 이후 이들은 산과 들에 있는 많은 자연물을 위해 함께 싸워갈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의 법적 권리 담론 확산되길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스님의 단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청와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천성산 살리기 운동으로 이제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의 법적 권리에 대한 담론이 확산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율 스님은 묵언과 단식으로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단식을 통해 이 사회의 온갖 문제를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말없이 몸으로 보여주는 강한 비판. 이것은 건설공사를 둘러싼 각종 문제점과 이를 묵인해온 전문가들과 언론, 그리고 정부를 향한 비판이다. 또한 생태계와 인간이 공존하는 평화를 생각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비판이다. 아직은 끝나지 않은 이제 시작인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 문제는 이렇게 장기적인 차원에서 함께 생각하고 싸워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이헌석(청년환경센터 대표)]

** 천성산 살리기 도롱뇽 소송인단 모집을 http://cheonsung.com 에서 하고 있습니다. 많은 호응 부탁드립니다.

[이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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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8-24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따우님 서재에서 이 페이퍼를 보고 찾아왔습니다. 첫 방문입니다. 간결하고 뚜렷한 서재지붕이 인상 깊네요. 이 글 저도 퍼갈게요.

balmas 2004-08-2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죄송합니다.
처음 서재에 들르셨는데, 제가 다른 일 때문에 좀 바빠서 인사도 못드렸네요.
앞으로 종종 뵙게 되기를^^ ...
 

 

“우리에게 이방인”
     
민영순 전시회 'Xen-이주, 노동과 정체성'

 김윤은미 기자
 2004-08-15 19:48:47



벽에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붙여져 있다. “세계 인구 35명 중 하나는 이주민이다”, “다른 선진 산업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이주노동자들을 3D업종에 신축성 있는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방 한가운데 설치된 프로젝터가 돌아가면서 파란색 빛을 벽에 쏜다. “4년 이상 한국에 거주하고도 신고하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은 2003년 말까지 강제로 한국을 떠나도록 압박 받아왔으며, 이것은 마치 쓰고 나면 버리는 일회용 컵과 같은, 혹은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설명하는 압축적인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이 작업은 13일부터 9월 18일까지 쌈지스페이스에서 열리는 민영순의 전시 'Xen-이주, 노동과 정체성'으로, 2층 프로젝트 갤러리에 설치되어 있다.

‘이방인’으로 주변에 위치한 이들

전시 제목 ‘xen-’은 '손님,' '외국인,' '이방인,' '침입자'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그리스어 어근으로, 동양 종교철학 선 사상(禪) Zen과 동음이의어이기도 하다. 작가 민영순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방인(xen-)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명상(zen)하도록 유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민영순의 전시처럼 이주노동자와 이주민의 정체성을 다룬 전시는 흔치 않은데,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이자 미국인이라는 다중 정체성을 지녔기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지난 4월 추방된 이주노동자 단체의 리더 네팔인 사마 타파부터 군포에서 노동하는 방글라데시인들, 직장에서 사고로 손가락을 잃고도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 파키스탄인 등 30여명을 인터뷰해서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3층 메인 갤러리에 설치된 ‘현장/직업’ 작업에서 관련 인터뷰들을 볼 수 있다.

1층에 설치된 ‘3D 출구: 절망적인(Desperate), 일회용(Disposable), 추방된(Deported)’는 “사마 타파는 2004년 2월 15일 강제 연행된 후 추방되었다”라고 작가가 직접 기록한 작은 종이를 멀리서 카메라가 확대시켜 보여주는 작업이다. 관객들은 카메라를 통하지 않고서는 종이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작가는 이 같은 간접적인 전시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회단체들을 통해서만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주변적인 위치를 비유한다.

노동자들의 해외 이주는 서구 선진국가에서 유래된 것인데, 한국 역시 이주노동자들을 3D 업종의 ‘신축성 있는 자원’으로 활용해 왔다.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의 3D 직종을 마다 않는, 값싼 이주노동자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내 노동자들의 임금을 떨어뜨리는 타자들로 인식될 뿐, 경제성장에 기여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불법 체류 노동자가 증가한 것도 합법적인 체류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 4위 이산국가’ 한국의 정체성

이주노동자 문제는 한국 내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주는 각 개인의 정체성, 국가/민족의 정체성과도 관련 깊은 주제다. 해방되기 전인 1940년대에도 한국인구의 총 1/5이 모국을 떠나 살았으며, 한국은 현재 6백만 인구가 160여 개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추정되는 세계 제 4위 이산국가다.

민영순은 자기 회의적인 사회일수록 미래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이주민들이 사회 기준 틀에 변화를 가지고 오리라는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반면 정체성이 강하고 균형 있는 사회라면, 이주민에 의해 사회가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3층에 전시된 ‘우리에게 이방인Strangers to ourselves’는 국가, 민족, 이주, 정체성, 타자 문제와 관련된 여러 서적들이 물에 흘러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책이 흘러가듯 속에 담긴 아이디어들도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와 그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이주하며, 그 이주가 사회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을 수용해야만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에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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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 편집국 부국장 wtkim@kyunghyang.com〉

청와대 앞 단식 40일째. 지율스님은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다.
스님은 1인 시위라기보다는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눈은 맑고 표정은 밝았다.
그 맑고 밝음이 더 아팠다. 스님의 메마른 손을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천성산, 예쁘고 깊은 산. 원효가 그 품에서 용맹정진했고 남쪽의 소금강이라 불린 산.
그 산의 생명붙이들에게 너희들만은 꼭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도롱뇽을 내세워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양서류의 인간에 대한 권리요구’라는 호기심으로 쳐다봤다.

스님은 ‘천성산에 도롱뇽이 없다’는 학자의 증언은 역사가 꼭 기록할 것이라고 했다.
소송은 6개월 만에 기각되었다. 지금은 다시 항고심이 진행 중이다.


생각하면 울음이 나온다. 매일 산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스님은 내원사의 비구니로 산의 가르침을 받던 천성산의 딸이었다. 그러나 길이 뚫리면 길가 700m 안쪽의 생명붙이들이 겨울잠을 자지 못한다고 해서 절을 뛰쳐나왔다. 이제는 천성산 온갖 생명붙이들의 어미가 되었다.
하지만 저 천성산을 저승으로 가져가야 할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어-


함께 흐느끼던 비구니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시민단체들도 은근히 그만하면 됐다고 한다. 다들 떠나갔다. 청와대 사람들도 조계종단과 시민단체와 얘기가 잘되었는데 왜 그러느냐고 했다.
그러나, 그러나 아무것도 된 것이 없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기에 적당히 하라는 것인가.
스님은 고속철 터널구간공사를 중단하고 천성산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하라며 세번째 단식에 들었다. 산에 구멍을 뚫으면 산에서 물이 빠져나가고, 그러면 계곡이 마르고, 그러면 강물이 마르고, 그러면 심성(心性)이 마른다는 것을 다 안다. 그러면서도 산을 파괴하는 것은 천성산을 뚫는 6조원의 돈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천성산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고향의 정기를 끊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지 않겠다던 대통령 후보 노무현, 도지사 김혁규, 장관, 시장 그리고 지난해 단식기도 때 대통령의 뜻을 믿어달라며 손을 잡아주던 수석비서관 문재인. 그들은 왜 말이 없는가.


스님은 정부가 ‘지율 하나 정도는 죽어도 좋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했다. 일순 햇살이 뒤집히는 듯했다. 등골이 서늘했다. 이제 청와대에서 답을 얻기는 틀린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스님은 육신을 버리러 왔단 말인가. 절망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작금의 청와대의 침묵은 정녕 무엇인가.

지율스님이 딱 한가지 믿는 게 있다. 도롱뇽의 친구들이 늘어나 1백만 소송인단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권력도, 금력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천성산을 뚫으면 22분 빨리 간다고 한다. 그러나 22분이 늦더라도 예쁘게 보존된 천성산을 가리키며 전설 하나를 이야기해주는 훗날이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저 산을 지키기 위해 이름없는 비구니가 어느날 온 몸을 던졌단다. 그때는 개발논리가 마지막 기승을 부릴 때였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내놓은 거야. 그 용기와 정성이 온 나라에 녹색 공명을 일으켰지. 푸른 울림이 퍼져나갔다는 얘기다. 그리고 저 예쁜 산을 지켰단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현명한 일인지 모른단다. 산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릴 수 없거든.”

우리 모두의 무관심으로 정녕 지율을 죽일 작정인가? 지율을 향한 저 거대한 폭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세상은 모든 곳이 천성산인데 지율은 혼자이다.

-세상 모든곳이 천성산-

지율스님의 소망은 천성산 내원사의 바느질꾼이 되는 것이다. 그의 바느질 솜씨는 빼어나다. 스님들 옷을 뒤에서 짓는 일, 그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망이 이뤄지길 빈다. 지금 지율스님의 단식기도는 온갖 생명붙이들을 품고 있는, 천성산의 옷을 짓고 있는 것이다. 지율스님의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기도해 본다

 

환경문제는 그렇다 치고 무관심때문에 스님 한 분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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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2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balmas 2004-08-22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좀더 널리 알리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