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문화계의 최대 화제는 단연 파울로 코엘료다. 파란 우주를 향해 걸어가는 양치기 소년이 예쁘게 그려진 자그마한 양장본 소설 '연금술사'(문학동네 刊)가 올 여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그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 문화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먼저 주목할만한 현상은 코엘료 말고도 각기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랭크된 '다빈치코드'(댄 브라운 지음, 베텔스만 刊), '단테 클럽'(매튜 펄 지음, 황금가지 刊) 같은 인문스릴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늘 푸른 '나무'(열린책들 刊), 영화로 먼저 소개된 '냉정과 열정사이'(쓰지 히토나리 지음, 소담출판사 刊) 등이 모두 '외국소설'이란 점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刊)만이 17위에 올라 한국문학의 자존심을 간신히 지키고 있다. 이런 승승장구하는 외국소설과 침체일로에서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는 한국소설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새삼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코엘료의 책은 '연금술사' 말고도 '11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이상 문학동네 刊) 등 3권이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라있을 정도로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작가다. 그의 정신세계와 문학적 특징이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연금술사'는 우화라는 '낡은' 문학적 장치를 도입한 매우 전략적인 작품이다. 코엘료의 가장 큰 특징은 '동화적인 공간설정'이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어린왕자'를 떠올려보자. 설준규 한신대 교수(영문학)는 최근 나온 '창작과비평' 가을호에서 "'연금술사'가 '어린왕자'에 흥미로운 인물들을 삽입하고, 중간중간에 경구들을 박아넣은 아류작"이라고 평하며 "작품 스토리와의 긴밀한 관계가 없는 경구들은 군더더기라는 식으로 깎아내렸다. 하지만 이는 너무 인색한 평가이고 오해에 가까운 견해다.
'연금술사'는 그런 차원보다, 삶의 고통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쉽고 평이하고 간결한 구성으로도 본격적인 소설적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문학적인 것의 역류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생각해보자. '어린왕자'는 어린이와 그 부모들이 즐겨서 읽었다면, '연금술사'를 읽는 건 성인들이다. 그것도 경쟁이 치열한 기업사회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퍼지고, 선물용으로 증정되고 있다. 이것은 '독자층'의 변화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지표로 여겨진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외국문학의 주요 독자들은 논술을 앞둔 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중심추가 사회활동의 동맥이라 할 수 있는 30∼40대 성인들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이른바 386들인 셈인데, 그들이 젊었을 때 읽었던 책들은 현실을 고발하는 소설이나, 황석영, 조정래 류의 대하역사소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연금술사'를 선택했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추리해봐야 하지 않을까.
먼저 이 조그만 소설에 그려진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한 양치기 소년의 아름답고 회화적인 세계는 삶에 지친 이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우화'라는 낡은 틀은 전혀 식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윤기의 '그리스 신화'가 왜 요즘 인기를 끌겠는가. '신화'와 '우화'라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현실을 인식하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것의 세밀한 재현보다는 현실을 잘 다룰 수 있는 눈을 키워주는 게 필요하다. 그 마음의 눈이 바로 상상력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정신병원에 드나든 소년기, 히피문화에 심취했던 청소년기, 좌파잡지 활동으로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고통스러운 이력의 소유자다. 코엘료는 보통사람보다 '멍울'와 '그림자'가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엔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정신세계는 이미 현실을 따사롭게 껴안은 채 먼 곳의 어떤 유토피아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이후로 가장 순수한 백색의 세계로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은 '아사다 지로'가 야쿠자의 암흑세계에서 작가로 변신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진정한 밑바닥을 본 사람들이 창조해낼 수 있는 평화로운 표정이 아닐까. 이것이 아마도 동시대 모든 작가들과 코엘료가 갖는 차별점인지도 모른다.
'연금술사'와 '11분'은 상상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11분'은 한 여성이 창녀로서 직업적인 섹스를 통해 내면의 빛을 얻어나가는 과정을 그렸는데, 그 배경은 술집과 도서관, 호텔 같은 도시화된 공간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소설의 공간은 서로 닮아있다. 어떤 편안함으로 말이다. 그것은 코엘료가 일종의 중용적 자세를 지키기 때문인데, 삶에서 극단은 '특별한' 손님이다. 하지만 하루키에서 요시모토 바나나까지 이어진 일본 개인주의 소설과 현대 프랑스 소설들은 극단을 현실과 착각해왔다. 타인과 단절된 단자화된 개인들의 천국인 한국소설도 마찬가지다. 코엘료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청년기를 걸었던 한국의 386들은 이런 작가들의 '개인주의'에 대해 차디차게 고개를 돌리는 대신 뚜렷한 '목적'이 있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삶이 등장하는 코엘료의 소설에 '현실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사회변혁이라는 목적이 있었듯이, 진정한 자아라는 또 다른 목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소설들은 여전히 삶의 목적은 구 소련과 함께 무너졌다는 핑계를 대며 휴가철 아이쇼핑을 하듯이 현실을 보고 있다.
'11분'에서 창녀 마리아는 서로 부대끼면서 닮아가는 아름다운 타협의 정신을 배운다. 이것이 코엘료의 메시지다. 이것은 노동쟁의의 일방적 파업방식이 통하지 않는 요즘의 세태에 뭔가를 시사한다. 그것은 '11분'이라는 소설을 읽어보면 안다. 이 책을 읽은 내 친구는 "2프로가 부족해, 뭔가 애절한 절망감이 없어"라고 나한테 말했다. 나는 "왜 없다고 생각하냐. 작가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그것을 짐작하게 하지 않느냐"라고 대답해줬다. '11분'은 창녀의 삶을 그렸다기에는 너무 단아한 통찰과 군더더기 없이 제작된 고급 퍼니처처럼 꽉 짜여진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다. 설준규 교수는 코엘료의 소설이 "멜로드라마적 구성과 큰 차이가 없다"라고 지적한다. 그의 생각은 문학은 고민하게 만들어야지 고민을 풀어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지적은 빨갱이에게 딱지를 붙이는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 매우 편안하고도 이분법적이고, 또한 권위적인 비평태도가 아닐 수 없다. 문학이 바닥을 기는 요즘, '이념형'이나 '향수'로서 존재하는 본격문학을 기다리기보다는 멜로적 냄새가 다소 풍기더라도 겸손하게 그 가치를 먼저 찾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코엘료를 멜로와 본격의 경계에서 살피지 말았으면 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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