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기술, 꿈인가 악몽인가?       
나노기술의 위해성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

김명진

나노기술의 어두운 측면

 몇년 전부터 『네이처』(Nature) 지는 매년 연말마다 그 해의 주요 과학계 소식을 선정해 이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작년 연말에 나온 합본호에도 '2003 in context'라는 제목으로 2003년을 뒤흔들었던 과학계 소식 열 개를 선정해 특집기사로 실었다. 여기에는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 과학계에 미친 영향, 사스(SARS) 공포와 중국의 유인우주선 발사, 컬럼비아호의 공중폭발 사고, 기후변화 협약의 후퇴 등이 주요 소식으로 뽑혔는데, 나노기술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흥미로왔던 점은, 이 기사가 나노기술의 새로운 발전과 그것이 내포한 '혁명적 잠재력'에 주목하는, 우리 눈에 제법 익숙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기사는 나노기술의 위해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중적 우려의 증가, 그리고 이에 대한 과학계의 대응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우리의 미래를 바꿔놓을 21세기 첨단기술 중 하나로 상찬되곤 하는 나노기술이 사회와 환경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무척 생소한 얘기일 것이다. 게다가 바로 그런 내용이 2003년의 10대 뉴스 중 하나였다니, 작년에 갑자기 무슨 큰일이라도 났던 것인가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노기술의 발전이 내포한 '어두운' 측면에 대한 우려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 기술이 주목을 끌기 시작한 1980년대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3년은 관련 NGO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나노입자의 위해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구성과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러한 우려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해였다.

'회색 점액질'(grey goo) 시나리오

나노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처음 제기된 싯점은 나노기술에 대한 유토피아적-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뒤섞은 에릭 드렉슬러(Eric Drexler)의 책 『창조의 엔진』(Engines of creation)이 출간된 1986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오늘날 '나노기술의 전도사'로 통하는 드렉슬러는 이 책에서 '어쎔블러'(assembler)라고 불리는 초소형 나노머신이 원자나 분자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저렴하게 만들어내는 미래가 머지않아 도래할 거라는 장밋빛 예측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책은 나노기술이 빚어낼 수 있는 파국적 미래상도 아울러 제시했는데, 자기복제하는 '나노봇'(nanobot)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마치 꽃가루처럼 바람을 타고 이동하면서 주위 환경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워' 지구 생태계를 불과 며칠만에 회색 먼지 내지 '회색 점액질'(grey goo)로 바꿔버릴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드렉슬러의 전망은 2000년 4월에 발표되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빌 조이(Bill Joy)의 글 「미래에 왜 우리는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에서 보다 강력한 형태로 반복되었다. 썬 마이크로씨스템즈(Sun Microsystems)의 공동 설립자이자 수석 과학자였던 조이는 일명 'GNR 기술'(유전공학ㆍ나노기술ㆍ로봇공학)의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파국적 결과에 대해 경고하면서 드렉슬러의 주장을 되풀이했고 나노기술이 군사적으로(혹은 테러 행위를 위해) 이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드렉슬러와 조이의 경고는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나노기술에 대한 대중적 상상력의 영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과학계 내에서는 SF의 영역으로 치부되면서 별다른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저명한 화학자 리처드 스몰리(Richard Smalley)는 자기복제하는 나노머신 따위는 그 원리상 결코 만들어질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하면서 드렉슬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고, GNR 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한 조이의 글은 기술중심주의적 사고의 산물이자 미래에 대한 예단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드렉슬러와 스몰리는 최근까지도 논쟁을 이어가고 있고, 작년 말 썬 마이크로씨스템즈를 사임한 조이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문제제기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독성학 분야의 연구들

 이러한 상황에서 작년에 나노기술에 관한 논란에 불을 지핀 두 개의 사건이 있었다. 첫번째는 주로 생명공학 분야에서 활동해 온 캐나다의 NGO인 'ETC Group'이 작년 1월 'The Big Down'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나노기술 분야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ETC Group은 드렉슬러의 '회색 점액질' 시나리오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나노기술과 유전공학이 결합한 나노바이오기술 (nanobiotechnology)이 전례가 없는 새로운 위험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체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일명 '녹색 점액질(green goo)' 문제를 야기할지도 모른다고 역설했다. 또한 ETC Group은 나노기술의 군사적 이용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으며, 합성 나노입자가 인체에 유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ETC Group의 주장은 작년들어 화장품이나 전자공학 분야에서 쓰이고 있는 나노입자들이 피부 등을 통해 인체에 직접 침투해 위해성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독성학 분야의 연구성과들이 속속 보고되면서 구체적인 근거를 얻게 되었다. 작년 3월 NASA의 연구팀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장치 등에 응용되고 있는 신소재인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를 용액 형태로 쥐의 허파에 주입했을 때 폐조직을 손상시키는 등의 독성을 나타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프라이팬 표면 등에 사용되는 테플론(teflon) 입자를 나노미터(nm) 사이즈로 만들어 쥐에게 흡입하게 한 결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는 연구결과도 비슷한 시기에 보고되었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마이크로미터(μm) 이상의 크기에서는 별다른 독성을 보이지 않던 물질이 나노미터 크기로 작아지면 독성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충격을 주었다. 또한 나노입자가 지렁이의 피부를 통과해 체내로 흡수될 수 있음을 보여준 미발표 연구도 있었고, 올해 초에는 코로 흡입된 탄소나노튜브가 뇌로 들어갈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러한 독성학 분야의 연구들은 SF의 영역이거나 적어도 먼 미래에나 나타날 사회적 문제로 간주되곤 했던 나노기술에 대한 문제제기를 당장의 현실적 규제 문제로 탈바꿈시켰다. ETC Group이나 그린피스(Greenpeace)와 같은 NGO들은 현재 모든 나노기술 연구에 대한 모라토리엄(일시중지)과 전지구적 나노안전성의정서의 채택을 요구하고 있다.

구미 과학계의 발빠른 대응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에 대한 구미 과학계의 발빠른 대응이다. 많은 수의 나노과학자들은 드렉슬러나 ETC Group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로 인한 대중적 이미지의 악화를 크게 경계하면서 자발적인 규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네이처』같은 학술지 역시 나노과학자들이 나노기술에 대한 과장된 선전을 자제하고 대중의 우려에 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으며, 영국의 왕립학회 같은 독립적 과학자단체와 각국의 규제기구에서는 나노기술이 미칠 수 있는 악영향에 대한 연구에 이미 착수한 상태다.

이들이 이렇게 기민한 대응을 하게 된 배경에는 유럽에서 GM(유전자 변형)식품이 겪은 실패가 준 교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농업 생명공학 회사들과 과학자들이 GM식품에 대해 초기에 제기된 문제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중의 우려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했다가 불신을 자초해 결국 시장에서 전면 거부되었던 전례를 나노기술이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이는 생명공학이나 나노기술과 같은 첨단기술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개발 일변도로 치달아 최근 과학기술과 환경 간 갈등이 커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창비 웹매거진/2004/6]

※ 창비 웹매거진 내용의 일부 또는 전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주)창비 양측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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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선배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 특히 록이나 블루스, 재즈 이런 음악에 아주 미쳤는데, 어느 때부턴가는 전혀 이런 류의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기특한 사고의 전환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90년대 이후 대학가에 불어닥친 록음악 바람에 좀 심드렁한 기분이었고, 그것을 <진보>와 연관시키려는 심사도 잘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최근에는 또 재즈가 문화적인 아우라를 띠고 유행을 타는 것 같더군요. 아도르노처럼 독하게 비판할 만한 능력도, 생각도 없지만, 김규항 선배 글에는 얼마간 공감이 가서 퍼왔습니다.

 

 

한국 록에 관한 사적인 기억들

(며칠 전 컴퓨터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글. 2년 쯤 전에 지큐에 쓴 글인데 아직 날짜를 확인하지 못했다. 제목 그대로 기억나는 록 뮤지션들을 짤막짤막하게 메모한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내가 이렇게 생각했나?' 싶은 부분도 있다. 가슴 편집장 박준흠 씨가"재미있게 읽었다."는 소감을 준 걸 보면 못봐줄 정도는 아닌 듯.)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이른바 "록은 저항적인 음악"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에 대해 말이다. 한국에서 록은 대개 저항적이긴 커녕 저항적인 청년문화를 굳이 비껴가고 딴지 놓는 어떤 것이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록이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70년대 말은 유신 정권의 말기다. 그 세상에서 그 록들이 내뿜는 낭만성은 참으로 한심하다. 민주화의 기대를 짓밟은 군부 파시스트들이 광주에서 양민을 도살하고 10여 년 동안 손수 한국을 통치하는 동안 대체 록이 무슨 놈의 저항을 했던가. 90년대 들어 대중문화 영역에 대거 투신한 일군의 인텔리들이 지껄여 대기 시작한 "록은 저항적인 음악"이라는 말엔, 록의 영토를 '구라'로 지배하려는 그들의 음험한 욕망과, 자신의 활동 구역에 모종의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그들의 비린 허세가 담겨 있다. 록은 어떤 신령한 저항성이 담겨져 있는 음악이 아니라 단지 불량한 음악이며 그 불량함은 저항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장르의 대중음악이 그 사회적 함의가 거세된 채 수입되는(포크에서 이 즈음의 흑인음악들까지) 한국적 문화전통은 유구하고, 한국에서 록이 어떤 정신을 확보하는가는 두고 볼 문제이자 애써 볼 문제다.

좌파라는 이가 '록을 기억'한다 해서 모종의 비장한 록담론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일찌감치 다른 기사로 넘어가시는 편이 낫겠다. 이 글은 이 글의 제목 그대로 산울림에서부터 근래 발견한 몇몇 인디밴드들까지, 25년 여에 걸친 한국 록에 관한 내 사적인 기억들이다. 록의 불량함은 모든 불량한 이로 하여금 록에 대해 말하게 한다. 아유레디!

산울림 : 1977년 그들은 책이나 좋아하는 중학 3학년이던 나를 습격했다. 산울림은 내가 이른바 그룹사운드(이 시골이발소 풍의 이름은 이제 밴드로 개명되었다)에 이끌리게 된 계기였다. 카세트 테입 속 해설지엔, 그 앨범을 낸 음반사 사장인가 하는 사람이 데모 테입을 처음 들었을 때의 소감을 "AFKN에서나 들을 수 있는 사운드"라 적고 있었다. 배호 정도는 되어야 가수라 생각하는 기성 세대는 산울림을 '음치'라고 했으며 당시 기준으로 산울림은 분명히 음치였다. 하여튼 산울림은 완전한 새로움이었다. 나는 드럼이라는 악기에 본능적으로 이끌렸으며 산울림은 내게 드럼 선생이기도 했다. 두팔과 다리가 따로 노는 일은 처음엔 차력의 일종처럼 보였으나 이내 드럼 세트의 각 부분이 따로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기나긴 베이스 독주나 '불꽃놀이'의 장타령 풍 리듬이 매일 밤 나를 매혹했다. 막 배운 마스터베이션과 함께.

사랑과 평화 : 산울림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밴드였다. 최이철 김명곤을 중심으로 한 사랑과 평화는 요즘 말로 하면 전문 세션맨들의 밴드였다. 산울림이 캠퍼스적 아마추어리즘(제1회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나 어떡해' 는 산울림의 곡이다)을 바탕으로 했다면, 사랑과 평화는 원숙한 테크닉의 밴드였다. '장미'에서 보여주는 연주의 조직력과 드럼 필인은 지금 들어도 훌륭하다. 곧 도래한 디스코 시대에 그들의 펑키한 리듬감은 뇌가 없는 댄스곡처럼 밋밋해지고, 오늘 '최장수 밴드'로 지루하게 남았다. 2집(1979)의 '얘기할 수 없어요'는 김현식의 노래들과 함께 내 불변의 십팔번이다. 듣는 것보다는 불러야 맛이 나는 곡.

활주로(송골매) : 바야흐로 밴드의 시대였다.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 같은 밴드의 성공은 대학 밴드들의 활황과 맞물렸다. 그러나 밴드 체제로 유행가가 아닌 록을 하는 밴드는 항공대 밴드 활주로가 유일했다. 1978년 해변가요제에서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로 대학가요제에서 '탈춤'으로 입상한 활주로는 나원주/이응수라는 저작자와 배철수라는 텁텁한 보컬리스트의 조합으로 한국 록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한국적인 록을 구사했다. 활주로는 송골매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데 구창모가 보컬로 들어올 무렵 원래의 색깔을 잃는다. 신중현과 산울림을 재조명한 인탤리들이 이 밴드를 소흘히 넘어간 건 건 그들의 한심한 안목 덕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밴드는 활주로의 '세상만사'로 출발한다.

작은거인 : 밴드의 이름은 바로 밴드의 리더 김수철이다. 1979년, 작은 체구에 지미 핸드릭스처럼 기타줄을 물어뜯는 김수철의 '일곱색깔 무지개'는 한국 최초의 하드록 사운드였다. 작은거인 역시 대학 밴드(광운대)였지만, 노인들에게서도 '잘 논다'는 동의를 얻을 만큼 음악적 설득력이 뛰어났다. 김수철의 재능에 대한 사회적 공인은 이 유니크한 로커로 하여금 록의 검약한 본성(록은 독특한 것이어서 편성이 간략할수록 강력하기도 하다. 작은 거인은 산울림처럼 3인조였다.)를 망각하고 교향악단을 사용하는 대작을 좇거나 민족음악에의 어설픈 경도를 낳게 했다. 아시안게임 음악은 김수철에게 어떤 만족을 남겼을까.

신중현 : '미인'이 실린 앨범 신중현과엽전들(1974)은 분명 한국록의 명반이지만, 70년대 말에 대마초(한국에 연성마약을 허하라!) 복용 혐의로 활동 중지 상태였던 신중현은 록의 선배라기 보다는 잘나가던 가요 작곡가로 여겨지곤 했다. 어쨌거나 그는 1980년 신중현과 뮤직파워로 복귀했다. 엽전들이 3인조였음을 생각한다면 세명의 관악 파트에 두명의 여성 보컬을 포함 자그만치 9명으로 조직된 대편성 밴드인 뮤직파워는 신중현의 달라진 음악적 지향을 드러낸다. 신중현에 대한 이런저런 찬사들은 대개 맞거나 좋은 말이지만, '아름다운 강산'이 한국록 불후의 명곡이라는 주장과 '록의 아버지'가 된 90년대 이후 신중현 음악에 대한 아첨에는 동의를 못하겠다. 내 생각에 '아름다운 강산'은 그저 '불후의 대곡'일 뿐이며, 그의 근래 음악들은 '록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봐주기 민망한 것들이다.

마그마 : 1980년, 대학가요제 생방송을 보며 대체 그룹사운드는 언제 나오나 기다릴 때 마그마가 나왔다. "어둠 속에 묻혀있는 고운 해야. 아침을 기다리는 애띤 얼굴.." 여리고 느린 앞부분에 낙심하는 순간, 귀를 의심케 할 만한 강력한 사운드가 폭발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회자는 "세명이서 어떻게 저런 사운드를 만들어내는지 신기하다"고 감격했다. 마그마의 사운드는 80년대 중반 시나위에 가서나 등장할 헤비메탈 사운드를 구현한 선구적인 것이었다. 충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리더 조하문은 곱상한 얼굴을 들이민 채 '이밤을 다시 한번'을 애원하게 된다.

들국화 : 라이브만 하는 대단한 밴드가 등장했다는 풍문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행진' '그것만이 내세상' 같은 곡도 물론 좋지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는 곡자체로나 연주면에서나 가히 명곡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들국화만큼 보편적인 지지를 받은 밴드가 있었던가. 들국화는 재결합하여 새로운 히트곡이 없음에도 여전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다. 들국화에 대한 이런저런 피력들은 오히려 상투적일 뿐이다.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시나위 : 1986년 내가 입대하던 해 시나위가 등장했다. 아버지 신중현에게서 "테크닉 면에선 나보다 한수 위"라는 평가를 받던 기타리스트 신대철의 밴드였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강한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 리프와 솔로, 무겁고 단순한 드러밍이라는 헤비메탈 사운드의 전형이다. 헤비메탈이 록의 분방함을 벗어난 지나치게 양식화된 음악으로 보는 편인 나는, 나중에 김바다가 보컬을 맡던 시절 리메이크 된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더 좋아한다. 열린 하이해트 심벌이 촬촬거리는 소리는,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기분을 낳는다. 시나위는 말 그대로 한국 헤비메탈/하드록의 산 역사이며 근래 8집도 여전히 훌륭하다.

부활 : 내가 80년대의 대학생이거나 80년대의 청년이던 80년대 내내 나는 록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매판문화의 일환이었다. 나에게 3년 동안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원치 않던(난 평범한 군대 생활을 바랬다) 드러머 노릇을 하게 되면서다. 어느 날, 리드 기타를 치던 고참이 휴가길에 사온 테이프를 틀어놓곤 "기타가 죽이잖냐. 방위새낀데 존나게 노래 잘하지." 했다. 김태원의 둔중하면서 몽환적인 기타와 이승철의 끈적이는 보컬에 빠져드는 순간, 조인트를 세게 채였다. "개새끼가 고참 말에 대답도 안해."

한대수 :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히피 한대수는 감옥 같은 조국을 떠난다. 그가 1989년 14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앨범 무한대는 록이었다. 리메이크된 '하루 아침'의 가사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유일한 문명비판적 음악가의 세계관을 되새기게 한다.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하는 보컬에 이은 어쿠스틱 기타, 그 다음 "베이스 들오고" "기타 쫌 울고" "장구우 때려" 하는 한대수의 명령어에 베이스와 기타와 드럼이 차례로 들어오는 '고무신'은 한대수의 음악가로서의 위엄을 한껏 표현한다. 내 다섯 살짜리 아들 김건은 이 곡을 무척 좋아하는데, '고무신'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고 '장구때려'라 하면 얼른 알아듣는다. 그에게 한대수는 '장구때려 아저씨'다.

H2O : 내 기억으론, H2O는 재미교포 젊은이 몇몇이 만든 밴드였다. 멤버가 대부분 바뀐 H2O 3집(1993)은 음악평론 하는 후배의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말에 뒤늦게 들었다. 강기영 김민기 박현준의 연주야 당연히 훌륭하고 마크 코브린인가 하는 엔지니어까지 부른 사운드는 거의 완벽하다. '나를 돌아보게 해'는 가사도 깊고 반복해서 듣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이 앨범은 대중적으론 철저하게 실패했고 기억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크래쉬 : 나는 바하를 좋아하는 이유(구성의 명료함)와 같은 이유로 스래시 메탈을 좋아한다. 크래쉬는 대개 영어로 노래한다. 영어만이 메탈적이라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지만(덜 메탈적이더라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는 편이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크래쉬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식적 완성에 있고 나 역시 그런 차원에 한정해서 이 밴드를 존중한다.

노이즈 가든 : "저 친구 기타 정말 잘 치는군." 1996년, 노이즈 가든이 결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그들의 라이브를 구경했다. 기타리스트 윤병주는 블루스(알다시피 블루스는 록의 뿌리다)의 필을 짙게 깔면서도 강력한 사운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젊은 장인이었다. 레인보우의 대곡 '스타게이저'도 연주했는데 리치 블랙모어 정도는 오래 전에 구어 먹은 솜씨라 나는 얼마나 흐뭇했던가.

델리 스파이스 : 델리 스파이스의 보컬은 참으로 록답지 못하다.(물론 이런 말은 정당하지 않다) 특히 나는 장르를 불문하고 대중음악의 보컬리스트라면 일단 걸걸한 목소리여야 한다는 입장이다.(물론 이건 심각한 편견이다) 그런 내가 델리 스파이스의 연주에, 이를테면 '챠우챠우' 후반부에 어느덧 빠져드는 걸 보면 델리 스파이스는 만만치 않다.

허클베리핀 : 대중음악에서 지적 능력을 표현하는 결정적인 수단은 가사이며, 허클베리핀은 지적이다. 이 밴드의 특징은 여성 보컬리스트의 중성적 매력이다. 남상아(3호선 버터플라이으로 옮긴)가 그랬고 현재 이소영도 그렇다.얼마 전 나온 2집 '나를 닮은 사내'는 세련되었고 내가 운전할 때 가장 많이 듣고 다니는 음반이다.

풀린개 : 라이브를 한번 보고 나중에 가사를 얻어 본 풀린개는 말하자면 한국의 RATM이다. 이런 밴드가 있다는 건 단순한 문화적 다양성의 의미를 넘어 안도감을 준다. 음악이 아니라 메시지가 목표일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혁명 너희가 원하는 것은 시나리오/ 바꾸기를 원하는가 정말 원하는가/우리가 바랬는가 세상 뒤집는가/시나리오를 원하는가 개소리 떨지마라/그런 것 따윈 없어 너부터 바꿔봐라"

모든 록이 이런 식이라면 더도 덜도 아닌 스탈린의 세상이겠지만, 이런 록이 이렇게 없는 세상은 더욱 문제다. 세상이 불량하다는 사실엔 모두들 동의하면서, 불량한 음악 록은 왜 세상보다 덜 불량한 것일까.

Posted by gyuhang at 2004.05.23 12: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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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illjoy >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칸다하르]를 촬영하던 어느 날 밤을 잊지 못한다. 우리 팀은 손전등을 비추며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곳곳에 마치 사막에 버려진 양떼처럼 무리 지어 죽어 가는 난민이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콜레라로 죽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볼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그러나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아사하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면서 나는 자신이 무엇인가 먹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 .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와 관련해 UN에서 인도주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카말 호세인 박사가 2000년 여름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10년 동안을 계속에서 UN에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 말했다. . .

불법 이민자로 가득 찬 자볼 근처의 한 난민촌에 갔을 때였다. 그곳은 난민촌인지 감옥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기아를 피해서 혹은 탈레반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친 아프간 인은 다 수용되지 못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보내졌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모두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절차 같았다. 어떠한 이유는 불법 입국자로 입국이 거부당한 사람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기아로 죽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거기서 영화에 등장할 엑스트라를 골랐다. 난민촌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기에 예산이 충분치 않다고 했다. 사람들은 일 주일 동안이나 먹지 못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었다. 우리는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 왔으면 하고 바랐다.

한 달 된 아기부터 8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400명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대부분은 어린이들로 어머니의 품안에서 굶주림에 지쳐 기절해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우리는 울면서 빵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당국은 슬픔을 표시하면서도 예산이 승인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난민의 수는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것이 자신의 자연, 역사, 경제, 정치 그리고 이웃의 몰인정에 의해 파괴된 한 나라의 이야기이다.

이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된 한 아프간 시인은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난다.
저금통이 없는 나그네는 떠난다.
인형이 없는 아이도 떠난다.
나의 유랑에 걸린 주문도 오늘 밤 풀리겠지.
비어 있던 식탁은 접히겠지.
고통 속에서 나는 지평선을 방황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나는 놓아두고 떠난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날 것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칸다하르] 삼인 2002 (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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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5-0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 아프다고 말하기조차 힘들군요 ...
 

* [교수신문]에서 퍼왔습니다. 시의적절하고 좋은 지적을 담고 있는 기사입니다. [교수신문]의 존재 이유 중 하나를 잘 보여주는 기사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일부 출판사들과 재야, 대중적 지식인들, 언론매체들 사이에 맺어져 있는 유착관계를 적절하게 제어하고 교정하지 않는다면, 한국 지식사회는 더 큰 수렁에 빠져들 것입니다.

 

학문의 통언어적 실천 본격…빈약한 내용 돌파 관건
흐름 : 대중적 글쓰기 붐 어떻게 볼 것인가

2004년 04월 23일   강성민 기자 

학계의 지나친 전문주의와 엘리트주의는 삶과 학문을 결별시켜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왔다. 엘리트주의는 학문을 자율적인 영역으로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고 요긴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부에서 아무리 활발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듯한 ‘효과’를 내더라도, 현실의 제도와 삶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힘이 없다면 그 기득권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자율성의 함정’이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이른바 ‘지식의 대중화’가 목소리를 높여온 것은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이고 그것이 일각에서 ‘대세’로 인식되고 움직이면서 하나의 지류를 형성한 것은 2000년 이후다.

‘보편적 청중’ 확보해 학문위기 타파

지식대중화를 말할 때 지배적인 心象으로 떠올리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다. 대중적 글쓰기는 어려운 전문용어와 한자, 논리의 구조물을 해체해서 우리말 속에 생각이 잘 용해된 쉬운 글, 독특한 예시와 문체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쓰기를 의미한다. 이 대중적 글쓰기의 순기능은 학계의 전문지식과 대중의 접촉포인트를 대폭 늘려 학문적 성찰성과 깊이있는 지식의 토대 위에 우리의 삶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데 있고, 또한 철학·한문학 등 고사직전에 처한 순수학문의 위상을 되살려낸다는 데 있다.

이런 실용적인 측면 말고도 ‘대중적 글쓰기’가 원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중대한 기능은 따로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학문을 하는 목적이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근대적 학문이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특수한 보편성’이라는 형용모순에 기초해 있어, 횡단성과 1인2역이 중요시되는 오늘날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즉, 분과학문이 자신이 근거한 특수영역을 넘어설 때는 매우 ‘기형적인 것’ 아니면 ‘유아적인 것’이 돼버린다는 것에 대한 자각인 셈인데, 따라서 대상을 궁리하는 일 자체가 ‘보편적인 청중’을 염두에 두고 진행될 때에만 통언어적인 학문이 가능하다는 게 ‘대중적 글쓰기’의 실천개념에 들어있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지식 대중화’의 다양한 실천들은 ‘교양서적’의 범람에서 그 존재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일단 양적이고 외형적인 측면에서 학계의 엄숙주의, 전문가주의, 논문 중심주의를 경계하는 균형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오늘날 지식대중화 현상이 과연 앞에서 언급한 실용적이고 본질적인 역할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호에 가려 보이지 않는 허점과 이데올로기가 많은 것 같고, ‘대중’이라는 마술에 기대는 정도에 따라 리스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생긴다.


지식의 대중화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창조적 파괴’를 동반하는 매우 묵직한 과정이다. 그것은 생각하기와 말하기의 관행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이 고도의 추상화 작업으로 철학성과 깊이를 획득한다면, 반대로 ‘고도의 구상화 작업’으로 그 구체성의 세계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의 대중화에 이런 ‘구상화’가 담보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선 그 작업이 주제나 사유 차원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소재나 관점, 글쓰기 차원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미시사’와 ‘생활사’의 열풍이 그 일단을 엿보게 해준다.

‘고도의 구상화’ 없는 글쓰기의 迷夢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을 수용하면서 2년 전부터 본격적인 미시사 적용서들이 선보였는데, 백승종 서강대 교수(한국사)의 ‘그 나라의 역사와 말’(궁리 刊),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돌베개 刊)는 ‘개인’을 통해 역사전체를 새롭게 보려는 획기적인 시도로 주목을 받았지만 곧 비판에 부딪쳤다. 한 개인의 삶과 철학이 시대와 맺는 관련성 및 시대의 지형도를 새롭게 볼만한 요소를 내포하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는 별개로, 그의 작업은 일정한 의미망을 형성했다. 전자는 이찬갑이라는 평민지식인의 ‘일기’를 따라읽었고, 후자는 사상가인 하서 김인후와의 가상대담을 통해 그의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측면을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소재와 관점, 글쓰기 방법론이 독특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선비의 생활사를 다룬 책은 정창권 고려대 강사(국문학)의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사계절 刊), 허경진 연세대 교수(국문학)의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푸른역사 刊)등이 있지만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물론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刊)이나 고미숙 씨의 ‘열하일기, 그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그린비 刊)처럼 각각 5만부, 2만5천부의 판매고를 올린 경우도 없지 않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불황과 관계없이 콘텐츠만 확실하면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사례”라며 치켜올린다. 유재건 그린비 대표도 “과거의 마이너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고, 기존의 메이저들이 차지한 영역을 침투해 새로운 중심을 세울 것이다”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런 확신들은 앞의 책들이 기존에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와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신선한 시도”라는 데서 생겨나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글쓰기나 소재나 관점에서 뭔가 새로운 걸 끌어들이는 게 요즘 ‘대중적 글쓰기’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독자의 ‘인식’을 바꿔놓을 정도의 새로운 역사상이나 철학적 전언은 없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은 것이 아니라, 헌 술을 냉장고에 넣었다가 내놓는 격이라 첫맛은 시원하지만 끝 맛은 더욱 야릇하고 찝찝할 때가 많다.


문학평론가 김인호 씨는 “펼쳐 보다가 10쪽도 못읽고 덮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라는 개인체험을 전한다. 그는 “예전에는 10만부 판매를 너끈히 기록했을 책들이 요즘은 만부에 그치고 있다는 건 근래 책들이 대동소이한 소재와 문체, 고만고만한 이야기들로만 승부하려는 유행현상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현식 인천대 강사(국문학)도 비슷한 생각이다. “고미숙 씨의 옛날 책들은 지적 자극을 던져주는 책이었지만, ‘열하일기…’는 그분이 쓴 책인가 싶을 정도로 실망한 게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이 현재 광범위하게 동의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미시역사서를 둘러싼 출판계의 자화자찬은 ‘비판적 검증’을 겪지 않은 ‘시장판매’에 따른 추후적 해석과 자의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불만을 가지고 계속 ‘대중적 글쓰기’를 추궁하다 보면 지적 쏠림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사회의 독서가 비평적 잣대를 상실한 주류언론이 조성하는 지적 경향을 좇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수시로 정보를 주고받는 언론과 출판사 그리고 아카데미를 답답해하는 학자들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가 띄운 ‘읽을거리’가 ‘대중적 글쓰기’ 자체로 포장되다보니 본질이 가려지는 것이다.

지식대중화, ‘비판적 중계자’로 거듭나야

‘재야’라는 것의 이데올로기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의 재야는 민족주의 사학에 대한 강한 반감을 토양으로 성장해왔다. 이덕일, 이희근, 남경태를 거쳐서 최근의 강명관, 백승종, 김현식 등으로 이어지는 재야의 반열들은 기존 학계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해왔다. 예를 들어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刊)에서 조명되는 송시열은 예학의 선봉장이 아니라 숙청의 칼을 허리에 찬 당파의 냉혹한 우두머리로 조명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존학계의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이 비판대상자와의 최소한의 담론적 교집합 위에도 서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설령 송시열과 관련된 재야의 지적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담론의 교집합 속에서 반대담론과의 부딪힘과 융합없이, 순전히 바깥에서 담 안쪽을 향해 욕하는 식으로 비판이 이뤄져서는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송시열이라는 역사인물의 복합성이라는 주제 자체의 속성을 가지고 따져볼 때도 그렇다. 이런 진정성 획득의 실패는 주제를 다루는 배타성과 편협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고 또한 어느 정도의 ‘말초적 대중영합주의’의 산물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에 오면 상황이 더하다. 최근 역사학계의 ‘대중적 쓰기’는 이런 최소한의 비판적 역할마저도 팽개치고 있다. 이는 학계와 독서계를 연결해주는 ‘중간필자’ 지식인이 전반적으로 놓여있는 상황을 점검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중계자’의 역할, ‘앵커’가 되지 못하고 쉽게 풀어주는 ‘아나운서’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가장 눈에 걸린다. 견고한 것을 소프트하게 바꾸는 역할로 제한된다는 것은 학계의 역량을 量化시키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맛깔스럽다는 것은 글쓰기의 한 특성으로 국한돼야지, 그것이 책의 전체를 저울질하는 기준으로 적용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쉽다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이 분명하다. 그 이데올로기는 ‘전문성’의 이데올로기에 비해서는 인간적이지만, 그 부작용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대중적 글쓰기의 한계는 명백하다. 그것은 내용의 상한선을 명백하게 긋고 시작함으로써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이다. 쉬워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고 너무 깊게 들어갈 필요가 없고 예시를 많이 들어서 설명하자는 계율은 마치 허들경기와도 같이 정형화된 힘겨운 몸짓을 생산해낸다.


‘쉽게 쓰기’가 일말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까닭은 글쓰기의 권력이동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은 글쓰기의 주체가 지식인에서 대중에게로 이동된 시기다. 이것은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권위를 갖지 못하는 시대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의 대중적 글쓰기는 일종의 패러다임 변환에 종속되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대중의 감수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주류가 되기 위한 선택인데, 이렇게 볼 때 대중적 글쓰기는 글쓰기에 대한 정교한 자기성찰성을 기반으로 해서 생산된 흐름이라기보다는 외재적 환경에 의해 주어진 수동태인 것이다. 이런 대중적 글쓰기에 내재된 수동성에 주목할 때 우리는 그것이 쉽사리 ‘타협적이고 패턴화된 글쓰기’로 정형화될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요즘 학계의 인기저자들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피로감’도 이런 구조적 변수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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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4-25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balmas 2004-04-2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사가 시의적절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
 

왜 사회주의인가

'왜 사회주의인가'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미국 좌파잡지 ‘먼슬리 리뷰’ 창간호(1949년 5월)에 쓴 글이다. 매카시즘의 미친바람이 몰아치던 즈음, ‘천재’와 동의어이던(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과학자의 ‘사회주의 선동’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먼슬리 리뷰’는 지금도 창간 특집호를 꾸밀 때면 이 글을 다시 게재한다.

(아래, 리오 휴버먼은 1968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먼슬리 리뷰' 편집자였다. 그의 동료 폴 스위지는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알버트 아인슈타인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먼저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방법론상으로 천문학과 경제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두 분야의 학자들은 모두 많은 현상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현상들의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방법론 차이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에서 일반 법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로 떼어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경제 현상들에 종종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원인의 영향을 받았고 또 이것의 제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복 덕분에 존재했다. 정복하는 이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령지에서 특권층이 됐다. 그들은 땅 소유권을 독점했고 자기 계급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교육을 통제한 성직자들은 계급 구별을 영원한 제도로 정착시켰고 사람들이 사회행동을 할 때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가치체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의 이야기다. 토르스테인 베블린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또 여기서 추출한 법칙을 다른 단계에 적용할 수도 없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빛을 제시하기 어렵다.

둘째로,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군다나 못한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하는가 하고 자문할 때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정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게다가 지난 몇 세기동안 이룩한 기술적, 인류통계적 발전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노동과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생산 설비의 극단적인 분리는 전적으로 피할 수 없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자급자족할 수 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가 생산과 소비의 지구촌을 구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간략하게 지적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점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은 이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이며 유기적 연관이며 보호해주는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인 권리,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 게다가,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비록 이 의미가 짧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큰 생산자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노동의 과실을 강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확립된 규칙에 충실해서 빼앗아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산 수단 곧 추가적인 자본재 뿐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생산능력은 대부분 합법적으로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화를 위해 앞으로 나는 생산수단을 나눠 갖지 못한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르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사용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재산이 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실질 가치로 따진 상품과 임금의 관계다. 노동계약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실질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필요와 자본가의 노동력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 숫자와 관련된다. 이론적으로도 임금은 생산한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이해해야 한다. (자유 경쟁시장에서는 임금도 일반적인 상품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 번역자)

사적인 자본은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노동의 분리와 기술개발이 적은 비용으로도 더 많은 생산단위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의 결과는 사적 자본의 과두정치(독재정치)다. 이는 민주적인 정치사회에서조차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유권자를 입법부에서 분리시킨 사적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게 된 이래로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이 결과는 시민의 대표가 특권 없는 다수의 이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현재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피치 못하게 주요 정보원(언론, 라디오, 교육 등)을 직접,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시민 각자가 객관적인 결론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활용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자본의 사적인 소유에 기초한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로 생산수단(자본)을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소유자는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한다. 둘째로,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없다. 특히 오랜 힘겨운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금은 개선된 "자유 노동계약"을 특정한 노동자 집단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현재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은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이 있고 의사도 있는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는 장치는 없다. "실업자 군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노동자는 상시적으로 실업을 걱정한다.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는 이익을 내는 시장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곤궁이다. (물건을 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본가는 생산을 줄이고, 이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 번역자) 기술 진보는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업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연관된 이윤 동기야말로, 자본 축적과 활용의 불안정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원흉이다. 무한 경쟁은 노동의 엄청난 낭비를 유발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불구로 만든다.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계획 경제가 아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함으로써도 달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면 아주 극도로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란, 정치, 경제적 힘의 광범한 중앙집중화를 고려할 때, 관료들이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의 권력에 맞서는 민주적인 평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 - 신기섭)

Posted by gyuhang at 2004.04.03 11:36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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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4-04-1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의 글인데도 지금 읽어봐도 새롭네요.

balmas 2004-04-1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인슈타인이 정말 천재이긴 천재인가 봅니다. 아인슈타인의 글을 읽으면, 우리나라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정말 ...... 입니다(필화를 방지하기 위해 자진삭제-_-;;). 어제 철학과 교수들 90여명이 성명서를 발표했는데요, ... 참, ... 그래도 그나마 용기와 양심을 가진 분들입니다. 철학과 교수들, 아니 대학 교수들 중에는, 정말이지, 열우당 지지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열렬한 한나라당 지지자들인 대학교수들을 볼 때마다 가끔 <어떻게 저만큼 학식 있는 사람들이 저런 정치의식을 갖고 있을까>라고 해야 되는지, 아니면 <저런 정치의식을 갖고 저만큼 공부를 하고 점잖게 사는 게 그래도 참 놀랍다>라고 해야 되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이 후자의 의문은 일부에만 해당됩니다.

궁금이 2014-10-21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약 저자와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냥 현재 신자유주의 상황 하에서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고 착각할 것 같습니다.
역시 근본을 따지고 뭄는 것이 중요하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 있음을 알려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