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0주기에 되돌아보는 세기의 인간…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4년 7월8일은 이북의 김일성 주석의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훌쩍 흘렀건만, 우리 사회의 김일성에 대한 인식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어릴 때부터 김일성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고 배워왔는데, 이미 그가 세상을 뜬 지 10년이 지났건만 통일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니 그가 적어도 통일의 걸림돌은 아니었다는 점은 확인된 것일까?

‘김일성 가짜설’이 고개 숙인 이유


△ 사진/ AP연합

1987년 6월항쟁 이후 여러 민족민주 운동단체들과 대학가에서는 한국 사회에 관한 이러저러한 교양강좌나 학교가 많이 개설됐다. 당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은 방송 프로그램도 없었기 때문에 현대사에 대한 욕구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모든 교양강좌나 민족민주 운동단체가 개설한 학교에는 현대사 강좌가 빠짐없이 들어가게 되었다. 나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업의 일환으로 청년학교를 개설하고 거기서 상근하게 되었는데, 현대사 강의 의뢰가 오면 ‘동업자’로서 의리 때문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여기저기 바쁘게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어디 가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박정희 얘기를 하든, 학생운동사를 강의하든, 해방 직후의 민중운동에 대해 얘기하든, 한국 군부의 형성사를 강의하든 상관없이- 첫 번째 나오는 질문은 신기하리만큼 일정했다. “김일성, 진짜예요, 가짜예요?”

1999년 미국에서 돌아와 처음 강단에 섰을 때만 해도 학생들은 모두 ‘가짜 김일성설’- <한겨레21> 381호의 역사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을 배우며, 그렇게 믿고 자란 세대였다. 그런데 2002년경부터 ‘가짜 김일성설’을 처음 들어본다는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올해에는 그 수가 절반이 넘는 것 같다. ‘김일성 가짜설’을 처음 들어보는 학생이 늘어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김일성 가짜설 같은 천박한 이야기를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일이 적어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구분단 세력 입장에서 볼 때 살아 있는 김일성에 비해 죽은 김일성은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황 히로히토(裕仁)가 죽었을 때 총리를 조문 사절로 보내는 것에는 아무 말이 없던 한국 사회는 1994년 7월8일 김일성의 죽음으로 ‘조문 파동’에 휩싸이고 말았다. 보름 정도 뒤면 김일성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있던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승계할 것이 이미 기정사실화된 지 오래인데, 김영삼이 정상회담을 계속 추진할 것이었다면 상주이기도 한 김정일을 만나 어떤 말로 첫인사를 하려 했을까? 정상회담을 하려던 상대방이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떴는데, 당시 한국 정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비상사태에 당황하지 말고 밟아야 할 조치를 규정해놓은 프로그램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유고시에 취할 조치를 규정해놓은 이 프로그램이 혹시 실미도 부대를 운영하던 시절에 만들어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남쪽의 특수부대가 북쪽의 최고지도자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북쪽이 군사적 보복을 취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이었다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전군 비상경계령에 이어 조문 파동이 일자, 북의 태도는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조문 파동이 있고 한 2년쯤 지나서 내가 공부하고 있던 워싱턴대학에도 이북 사람들이 방문하여 공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핵 문제와 조-미 관계를 중심으로 제기된 질문에 능란한 화술로 여유만만하게 답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남북 정상회담 개최 여부에 대해 묻자 갑자기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딱 한마디 했다. “우리 조선 옛말에 절대로 상종하지 못할 놈을 상갓집 앞에서 춤추는 놈이라 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은 김영삼이 물러나고 김대중이 새로이 대통령이 된 뒤에야 추진될 수 있었다.

김일성,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오죽하면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길이 없는 ‘가짜 김일성설’이 나왔겠는가? 갈라진 조국의 한쪽에선 그는 민족의 태양인 반면, 다른 한쪽에선 극악무도한 전범이었다. 한쪽에서는 그를 더 이상 떠받들 수 없을 만큼 떠받들었던 반면, 한쪽에서는 무슨 일만 있으면 화형식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김일성이란 이름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1930년대에 우리 민족은 분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때도 조선 사람임에도 김일성을 공비, 폭도로 매도하고 그를 토벌하러 다닌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갈린 것은 아니다.

그는 과연 ‘괴뢰’였는가


△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국경지대에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김일성 장군처럼 자라라” 하고 빌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쟁취하고자 했던 우리 겨레의 염원에 대해서 무한한 용기와 기대, 그리고 신념을 솟구쳐주는 원천이며 그 상징”이었다. 이런 평가가 사실이라면 그런 인물에게 ‘민족의 태양’이라는 호칭은 과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이북의 김일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북의 김일성을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표인 이명영이 진짜 김일성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1970년대에는 술 한잔 걸치고 어릴 때 인민군에게 배운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흥얼대던 사람들은 죄다 ‘막걸리반공법’에 걸려 감옥에 가야 했다. 심지어 무허가 판잣집을 때려 부수는 철거반원을 향해 “야, 이 김일성보다 나쁜 놈아”라고 외쳤던 아저씨도 반공법의 고무찬양죄- 지금은 국가보안법 속에 버티고 있고, 말 많은 국가보안법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잡아들인 조항도 바로 이 조항이다- 로 걸려들었다.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란 말이 어떻게 고무찬양이 되냐고? 김일성은 인류가 출현한 이후 가장 나쁜 놈이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을 감히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라 하였으니 그만큼 김일성을 치켜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몰상식한 논리는 물론 좋은 학교 나와서- 영문법에서 최상급과 비교급을 같이 쓰면 안 된다는 것은 제대로 배웠음에 틀림없다- 고시에 합격한 엘리트 검사들이 만들어냈다. 다행히 이 사람은 1970년 8월 대법원에서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과장된 표현을 쓴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북괴의 활동을 고무하는 등 그를 이롭게 하려는 범의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기는 하였지만 유치장, 구치소 구경하며 치도곤을 당해야 했다. 이북에서 “김일성보다 나쁜 놈아”라고 욕을 했다면 감옥에 가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남쪽에서도 정반대의 이유로 무사하지 못했다. 이런 일을 과거의 코미디라 치부하며 웃어버리는 것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김일성은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한 상태에 놓여 있던 1937년 보천보전투를 통해 혜성같이 나타났지만,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에서는 민족의 태양에서 괴뢰집단의 괴수로 전락했다. 괴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꼭두각시란 뜻이다. 제 민족을 가리키는 말 중에서 가장 고약한 괴뢰란 말을 남과 북은 서로에게 마구 써먹었다. 지금도 수구언론은 ‘국방백서’가 ‘북괴’를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것을 트집잡고 있다. 김일성을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로 모는 것은 해방 직후에 남쪽에서 정권을 잡은 친일파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정권이 1950년대 중반부터 주체를 앞세우고, 자주노선을 추구했음에도 ‘괴뢰’란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이 ‘꼭두각시’는 소련의 해체로 자신을 조종할 배후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혼자서 춤을 추는 ‘괴뢰’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괴뢰였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의 웃기는 폄하

김일성은 참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항일무장 투쟁 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아니, 모든 조선 사람의- 소중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항일무장 투쟁 시절 이래 김일성의 꿈은 조선민족 누구나가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었다. 쌀밥에 고깃국은 김일성에게는 사회주의 건설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살아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심장이 고동을 멈춘 직후부터 그를 어버이로 섬기던 이북 주민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일치될 수 없다. 아니, 남쪽 사회 내부에서도 김일성을 놓고 평가가 일치할 수 없다. 그가 항일무장 투쟁의 영웅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해도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데, 그는 분단과 전쟁을 거쳐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첨예한 남북 대결의 주역이었다. 이북의 역사가들은 항일영웅 김일성의 업적을 너무나 과대포장했기에, 이북 밖의 학자들은 김일성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이북 학자들에 비하면 그를 깎아내린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또 그 주된 원인을 설사 미국 탓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김일성은 이북의 경제난과 인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남쪽 사회 내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깎아내리는 일만큼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단 하룻밤이라도 한데서 새어본 적이 없는 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단 한번도 발품을 팔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 영하 40도가 되는 추위 속의 밀림 속에서 밤을 지샌 투사들을 모욕하게 할 수는 없다. 항일투사 김일성에 대한 폄하는 곧 1930년대 후반 이래의 우리의 항일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폄하가 된다.

김일성을 한국전쟁의 ‘전범’으로 규탄하는 일은 친일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탈출구였다. 그들에게 모든 역사는 1950년 6월25일에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이전에 우리가 왜 분단됐는지,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일제의 압제하에서 누가 일제의 앞잡이였고, 누가 항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전쟁이 찾아왔는지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군대를 동원한 자가 모두 뒤집어쓰는 그런 게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사상자들, 특히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이 누구 손에 죽었는가도 상관이 없었다.

김일성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민족의 태양에서 소련의 괴뢰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온 전범으로 추락해갔다. 분단된 조국에서 그가 계속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가 북쪽에 있는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형제들의 수령,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평양은, 아니 전 이북이 흐느꼈다. 물론 박정희가 죽었을 때도 착한 백성들은 연도에 나가 슬피 울었다. 그러나 그 강도가 똑같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 독재자들의 세뇌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거대한 가족국가의 가부장이었던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의사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


△ 김일성 주석이 10년 전 세상을 떠났을 때 전 이북이 흐느꼈다.


△ 남한 언론은 조문논쟁을 일으키며 남북관계를 냉전시대로 되돌려놓았다.

귀족영웅 아닌 자수성가형 민족영웅

김정일의 출생을 두고는 이북의 이데올로기들이 백두산에 샛별이 솟았다느니 하면서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을 늘어놓지만, 김일성의 출생은 그렇게 미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영웅이었지, 출생부터 신비스럽게 미화돼야 할 귀족영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제 동원이 극심해지던 때 사람들은 김일성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으로 가버렸고, 그의 활동을 공비의 살인·방화·약탈 만행으로 폄하하면서도 전해주었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두 신문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던 차에 해방이 되고 김일성이 나타났다. 그것은 죽은 줄 알았던 홍길동이나 홍경래, 또는 로빈 후드의 귀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어 그의 이름으로 땅을 나누어주고, 각종 조직을 만들어 주민들을 참여시켰다.

김일성이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처음 내린 정령은 연필 생산에 관한 것이었다. 배우지 못한 한을 품은 사람들을 김일성은 감동시킬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실시된 개혁을 통해 수백년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봐도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된 땅을 갖게 되었고, 인민위원회다 농민동맹이다 여성동맹이다 하는 각종 조직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 석자를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는 비록 이북의 역사가들이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일본군을 삼대 쓸 듯 물리치며 군사적 해방을 쟁취한 짜릿한 순간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세계사에서 이 수준의 혁명을 달성한 지도자는 몇 안 된다- 분명히 혁명의 창건자로서 위치를 누릴 수 있었다. 혁명의 창건자, 이는 스탈린이나 덩샤오핑도 넘볼 수 없는, 한 나라에서 오직 한명의 혁명가만이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 덩샤오핑과 만나는 모습.(사진/ AP연합)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였지만, 또한 민족주의자였다. 1920년대나 1930년대에 소련인이 아니라면,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소련의 권위는 소련이 잘해서 생겼다기보다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대의에 자발적으로 복종한 각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제기하자, 국제주의자를 표방하는 각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소련을 보위하는 것이 되었다.

민족주의자, 그리고 실용주의자

민족주의자의 아들로 태어나 만주 땅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김일성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과 갈등, 특히 조선인 항일투사가 최소 500명 이상 희생된 민생단 사건을 통해 남다른 민족주의를 체득할 수 있었다. 전후의 공산국가 지도자로서는 특이하게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감옥을 모두 체험한 김일성은 약소 공산국의 지도자 수업을 온몸으로 단단히 치렀다. 원래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부르주아지의 전유물로 보면서 비판해왔고, 이북도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민족주의에 대한 이북의 평가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전복’이라 부를 만큼 달라졌다. 종래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동일시하면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이북은 1999년에 간행된 조선대백과사전에서 민족주의는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상으로 긍정적으로 보았다.

민족주의에 대한 사전상의 정의의 변화는 김일성 자신이 민족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86년 김정일의 ‘조선민족제일주의론의’ 제기나 1990년대에 들어와 단군릉을 거대하게 지은 것도 다 민족주의자로서 김일성의 색깔이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아예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 앞에도 ‘진정한’이란 수식어를 붙였지만, 공산주의 앞에도 역시 ‘진정한’이란 수식어를 붙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국가 단위로 진행되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하에서 식민지 나라들에서의 진정한 민족주의와 진정한 공산주의 사이에는 사실상 깊은 심연도 차이도 없다. … 진정한 공산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이며 또 진정한 민족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라고 보는 것은 나의 변함없는 신조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공산주의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다.”


△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 상상도.

김일성은 1992년 자신의 80살 생일을 맞이하여 <세기와 더불어>라는 이름의 회고록을 펴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회고록은 1945년 항일투쟁 시기를 다루는 8권에서 중단됐다. 그는 책 제목과 관련하여 “20세기와 더불어 흘러온 나의 한생은 그대로 우리 조국과 민족이 걸어온 역사의 축도”라고 말했다. 이 회고록의 1권과 2권은 민족주의자라고 커밍아웃을 한 김일성이 자신의 선배이자, 자기 아버지의 친구이자 후배들이었던 민족주의자들에게 바치는 따뜻하며 가슴 에이는 헌사였다.

<세기와 더불어>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김일성은 20세기의 인간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덩샤오핑은 쥐를 잘 잡는다면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떻냐는 흑묘백묘론을 설파하여 유명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이 그보다 25년 전에 밥만 잘 먹을 수 있으면 되었지 왼손으로 먹건 오른 손으로 먹건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작은 나라 이북에서 그의 말은 법이 되고 그의 경험은 철학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와 권력을 누렸고, 유례가 없는 권력승계를 이루었다. 나도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부자간의 권력승계가 탐탁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비난만 하다 보면, 정치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다는 상식을 깨고 20년가량 북을 다스린 사실을 잊게 된다.


△ 평양의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사진/ 연합)

레닌이나 호치민이 되기에는…

어버이 수령이라는 봉건적으로 보이는 권위로 무장한 그는 분명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유형의 지도자는 아니다. 대통령 씹는 것이 일상화된 남쪽의 시각으로는 장군님의 사진이 비 맞고 있다고 금방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이북 사람들이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북 사람들이 보기에 저기 멀리 있는 대통령은 잘근잘근 잘도 씹어대면서 사장님은 고사하고 부장님, 과장님 앞에만 가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하며 얌전히 <애모> 노래만 불러대는 우리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김일성, 그는 레닌이 되기에는 너무 오래 집권했고, 호치민이 되기에는 일가친척이 너무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역사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나중에 비록 왜곡됐을지언정, 그가 세운 나라에는 분명 동학농민군의 꿈과, 의병과 독립군의 꿈과, 항일 빨치산의 꿈이 담겨 있었다. 어린 누이가 빚에 팔려 첩살이 가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당 간부가 되고, 장군이 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그런 나라였다. 소수의 빨치산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 건국 반세기 이후에 한국전쟁 때보다 더 힘들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던 나라의 지도자 김일성. 10년이란 세월은 아직 형제들의 수령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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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7-20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양의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 I can understand it(the relation). But is it right?

balmas 2004-07-2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 만에 로쟈 님이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그런데 질문이 좀 감이 잘 안 잡히는군요.
조금만 더 분명히 표현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

로쟈 2004-07-2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orry.^^ I think the relation is pathological (and religious). "소수의 빨치산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 건국 반세기 이후에 한국전쟁 때보다 더 힘들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던 나라의 지도자 김일성. 10년이란 세월은 아직 형제들의 수령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것일까?" is overestimation. He was one of the dictators in 20th century (as Park). Han's view is disappointing to me...

balmas 2004-07-23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저는 한홍구 교수의 글을 이렇게 읽었는데요.

"김일성 주석에 대한 그간의 평가, 특히 남한의 평가는 대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틀 위에서 조성된 맹목적인 반공주의적 시각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제 김일성 주석에 대한 평가는 좀더 내재적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김일성 주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그는 공산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매우 실용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던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였다. 둘째, 김일성 주석에 대한 평가는 50년간 초강대국인 미국과 맞서 싸워온(하지만 동시에 중국이나 소련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북한 역사, 고난에 찬 그 역사에 대한 평가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홍구 교수의 평가는 매우 온건하고 현실주의적인 입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온건하다는 것은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적 관점 어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고, 현실주의적이라는 것은 통일의 관점, 그것도 통일을 실행할 행위자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저는 한 교수의 이야기에 대해 크게 시비할 만한 점은 없다고 봅니다.

김일성 주석을 독재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북한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인식론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실천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이런 분류법에는 좀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독재"나 "전체주의" 같은 용어들이 매우 애매하고 모호한 통념들이어서 이론적 조건들을 매우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은 가운데 사용하기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실천적 관점, 다시 말해 통일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분류법들은 국내외 수구반동세력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쉽게 활용당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김일성 주석이나 북한의 정치적 지향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북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참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좀더 엄밀하게 평가할 만한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조사 없이는 발언권도 없다고 하지요), 최소한 이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것 뿐입니다. 


로쟈 2004-07-23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저는 한 교수의 이야기에 대해 크게 시비할 만한 점은 없다고 봅니다." "이런 분류법들은 국내외 수구반동세력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쉽게 활용당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Is it your tolerance or political sense?...

balmas 2004-07-23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로쟈님의 질문은 때로는 선문답처럼 느껴져서 당혹스럽군요.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저는 처음부터 한홍구 교수의 글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않았는데, 로쟈님은 뭔가 마땅찮은 게 있는 듯하니, 로쟈님이 한 교수의 글에 대한 생각을 한번 써보시죠. 거기에 대해 내가 무언가 답변할 만한 게 있다면, 답변을 해보죠.
 

 

미 ‘수정헌법 1조’ 힘의 뿌리

“의회는 발언의 자유, 언론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 권리, 불만을 시정하기 위해 정부에 청원하는 권리를 박탈하는 입법을 할 수 없다.”

유명한 미 수정헌법 제1조의 일부다. 건국 초기 헌법을 만들 때 시민의 기본권이 빠져있는 걸 발견한 시민 대표자들은 10개의 조항을 헌법에 새로 추가했다. 그 첫번째가 바로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이 조항이다.

20세기 들어 수많은 대법원 판례를 거치면서 이 조항은 미국 정치, 사회, 문화 발전의 한 상징이 됐다.

최근에도 이 조항에 근거한 연방대법원 판결이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어린이를 인터넷 포르노로부터 보호하려는 ‘어린이온라인보호법안’에 관한 판결이다. 대법원은 이 법이 위헌이라고 판시하진 않았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으니, 정부와 의회는 다른 방식의 규제방안을 찾아보라고 권고했다.

어린이들이 인터넷 유해사이트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건 미국에서도 큰 사회문제다. 당연히 이걸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의회는 위헌 논란을 피하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인터넷 포르노사이트를 무조건 폐쇄하는 게 아니라, 신용카드번호 입력 등 성인인증을 철저히 하도록 강제하자는 게 이 법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수정헌법 제1조를 비켜가지 못했다.

새 법의 위헌소송을 제기한 이는 포르노업계가 아니었다. 영향력 있는 인권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맹이다. 시민자유연맹이 옹호한 건 포르노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였다. 판결은 5대 4 한표 차이로 갈렸다.

찬성 또는 반대한 대법원 판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9명의 연방대법원 판사 중 진보 성향은 4명, 보수 성향은 5명으로 분류된다. 가장 왼쪽(진보)에 존 폴 스티븐스 판사가 있고, 가장 오른쪽(보수)에 클래런스 토마스 판사가 서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서 시민자유연맹의 손을 들어준 사람은 진보 쪽의 세명과 중도보수인 앤소니 케네디 판사, 그리고 가장 보수적이라는 토마스 판사였다.

사상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한국에도 없다. 그러나 그걸 지키려는 철저함에서 미국은 한국보다 저만치 앞서 가 있는 것 같다.

연방대법원 판결은 결과적으로 인터넷 포르노를 더 활개치게 할 수 있다. 판결이 옳은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는 있다. ‘표현의 자유’란 때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혼란을 용인하면서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다. 그중 일부분만 떼내 강조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요즘 한국에서 논란이 되는 많은 사안들이 그런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싶다. 지금의 미국을 있게 한 힘의 근원이 바로 수정헌법 제1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찬수 워싱턴 특파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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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헌법개정” 목소리 번진다


△ 2004년은 헌법이 우리 정치·경제·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학계의 관심은 이제 현행 헌법이 ‘국민주권’의 원리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1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탄핵심판 사건 결정 선고를 내리는 모습(위)과 17대 총선 직후인 4월17일 서울 광화문 앞에 모여든 시민들이 탄핵무효를 외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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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사회학자들 문제제기 나서

    2004년을 대표하는 으뜸말은 헌법이다. 대통령 탄핵을 발의한 야당과 이들을 규탄하며 거리로 나온 국민들 모두 그 근거를 헌법에서 찾았다. 헌정문란·파괴 행위로부터 헌법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라크 파병, 행정수도 이전, 송두율 교수, 양심적 병역거부 등도 그 뿌리를 헌법에 두고 사회적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바야흐로 “모든 사회적 문제가 헌법적 문제로 귀결되는”(조국 서울대 법학과 교수) 시기가 온 것이다. 그것은 “헌법을 정략적·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던 과거에 비해서는 분명한 진전”(김종철 연세대 법학과 교수)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헌법을 헌법재판소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데 있다. 1987년 10월 개정 이후 16년 이상 외면당했던 헌법이 갑자기 만인의 화두로 떠오른 지금, “사회적 갈등이 깊을수록 더욱 의존해야 하는 헌법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라도 진지한 헌법 개정의 담론이 필요하다”(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제안이 조금씩 번지고 있는 것이다.

    헌법 개정을 말하는 학자들의 문제의식에는 “현행 헌법은 ‘이행기 헌법’일 뿐, 온전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헌법이 아니다”(박명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판단이 깔려 있다. 21세기적 상황은 물론 80~90년대조차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현행 헌법의 균열과 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조국 교수는 “다음 대선이 오기 전에 정치권이 권력구조와 관련한 개헌 문제를 제기할 것이 분명한데, 그 이전에 전반적인 헌법 개정의 틀을 학계와 시민사회가 함께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소수 정치집단의 협약으로 점철된 헌법 개정사에 마침표를 찍고 ‘국민주권적 합의’로서의 헌법을 마련해 “민주주의 발전에 조응하는 국가 정체와 국가 개조의 전망을 온전히 담아낸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헌법은 이행기 헌법일 뿐
    민주주의 보장하는 헌법 아니다”

    당연히 학계의 관심은 기본권의 확장에 집중된다. 정해구 교수(성공회대·사회과학부)는 “헌법 제·개정 과정에서 국민적 토론과 합의를 거친 적이 한번도 없었던 탓에 과거 헌법 개정은 권력구조 개편에만 치중했다”며 “이제는 헌법상 기본권 조항을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광범위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헌법 개정의 필요성에 원칙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당면 과제’로 현행 헌법의 실질적 구현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87년 헌법체제’가 드러낸 여러 정치·사회적 갈등은 “헌법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헌법 구현의 문제”(김종철 연세대 법학과 교수)라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행 헌법의 ‘급진적·민주적 해석’”(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이라는 지적도 비슷한 맥락이다.

    헌법을 둘러싼 이런 논의는 학술지나 심포지엄을 통한 공개적 발표나 논쟁보다 소규모 연구그룹 등을 통해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 논의가 품고 있는 파괴력을 감안하더라도, 아직 그 연구성과는 부족하고 관련 학계의 발언도 조심스럽다. “사회적 논란을 헌법적 고민으로 승화시킬 연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김종철 교수)한 학계의 상황도 여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87년 헌법체제’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헌법학의 영역을 넘어 확산되고 있고, 오히려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관련 논의를 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헌정체제의 ‘민주화’를 헌법에 더욱 또렷이 새겨넣으려는 인문사회과학계의 거대한 기획이 건국 헌법 제정 56년 만에 그 첫걸음을 떼고 있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현행 헌법  어디가 문제인데?

     

    “1987년 밀실협상‥국민참여 생략”주장에
    “나름대로 합리성‥선진국에 안뒤져”반론

    헌법을 둘러싼 학계 연구는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방대한 영역에 걸친 첨예한 논쟁 대부분이 잠복해 있는 가운데, 현단계 학계의 접점은 일단 ‘87년 헌법 체제’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장영수 교수(고려대 법학과)는 87년 헌법의 긍정성을 지적하며, “섣부른 개헌논의 대신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행 헌법은 “건국 이후 10개의 헌법 가운데 16년 이상 안정성을 유지해온 ‘최장수 헌법’”이고 “그만큼 국민적 합의의 기초가 높고 나름의 합리성을 갖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헌론자들이 비판하는 현행 기본권 조항의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37조 1항)고 규정하는 등 사회변화에 따라 새로운 기본권이 인정될 수 있는 근거를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및 사회국가 원리에 관련한 현행 조항도 선진국 헌법에 뒤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장 교수는 “현행 헌법 구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과제를 제쳐놓고 이것저것 다 집어넣고 보겠다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87년 헌법성립의 ‘역사적 과정’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그 과도적 성격으로부터 개헌의 필요성을 이끌어낸다. 김종엽 교수(한신대 사회학과)는 “87년 헌법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권력구조의 큰 틀은 수용했지만, 그밖의 구체적 내용들은 당시 여야의 밀실협상을 통해 이뤄졌다”며 “국민적 참여와 이에 따른 학습과정이 생략된 헌법에 대한 사회적 존중은 확고한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이는 헌법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기본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묘한 시각 차이의 이면에는 ‘대의민주제’와 ‘국민주권’의 원리를 어떻게 혼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다. 헌법 개정을 주장하는 박명림 교수(연세대 국제학대학원)는 “탄핵정국을 통해 드러난 대통령과 의회의 충돌, 의회와 시민사회의 충돌 등은 본질적으로 현행 헌법이 내포한 주권 충돌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며 “국민 주권의 원칙 아래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실질적인 노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공동체의 의지와 시대정신이 반영되는 헌법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행 헌법의 어떤 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흡한지는 분명치 않다”(김종철 연세대 법학과 교수)는 지적은 헌법 개정론자들에겐 뼈아프다. 개헌의 ‘당위’는 있는데 개정헌법의 ‘구체’에 이르는 길은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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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lmas 2004-07-18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 판결이 나오던 날, MBC 9시 뉴스의 앵커는 "당연한 결정"이라는 촌평을 하더군요. 내참 어이가 없어서 ... 대법원이 보수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도 존중하지 못하는 대법원의 존재이유는 도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결정입니다.
    헌법에 관한 학계의 관심이 얼마나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지 좀 회의적이지만, 일단 지켜볼 수밖에 ...
     

    전국철학자네트워크(PEN Corea. Philosophical Engagement Network Corea)

    수신: 대한민국 정부 법무부 강금실 장관
          대한민국 국회 국회의원 제위


    송두율 교수 무죄 석방과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탄원함


    ■ 탄원자: 전국철학자네트워크(PEN Corea) 서명 철학자 259인

    ■ 일  시: 2004년 7월 15일

    ■ 탄원건 연락처:

       김상봉 (문예아카데미 교장)/대표연락처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280-4 건국1호빌딩 5층 Tel.02)739-6854~6 oudeis@hanmail.net
       김양현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300 전남대학교    Tel. 062) 530-3221 yhkim2@chonnam.ac.kr
       홍윤기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시 중구 필동 3가 26 동국대학교       Tel. 02) 2260-3181/8838  hyg57@chol.com

    ■ 첨부: 총 7쪽 중
        1. 송두율 교수의 무죄석방과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전국철학자 259인 성명 및
            탄원 기자회견 ‘이제 국가의 품격을 찾을 때다’ 전문
         1. 위 성명서 서명자 257인 명부

    강금실 법무부 장관 및 대한민국 국회의원 여러분,


    국사에 다망하신 여러분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4년 7월 15일 오늘, 전국철학자네트워크(PEN Corea. Philosophical Engagement Network Corea)를 통해 ‘송두율 교수 무죄석방과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전국 철학자 257인 기자회견’을 열었던 저희 철학자 259인은 바로 이 기자회견 안건을 위해 작성했던 성명서 ‘이제는 국가의 품격을 찾을 때다’를 동일 목적의 탄원서로 전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성명서 본문에서 분명히 표현하였지만 저희는 재독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송두율 교수를 둘러싼 사건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여러분께 전달하고 합니다.


    첫째, 현행 국가보안법의 근본 취지에 비추어 보더라도 송두율 교수는 무죄석방되어야 합니다.

    둘째, 송두율 교수를 당장 무죄 석방할 용기가 없다면 현임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논의가 일정 논점으로 수렴될 때까지 송 교수를 불구속 재판하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셋째, 이제 그 법적 항상성과 공정성, 현실적 적합성, 무엇보다 반헌법적인 국가보안법을 완전 철폐하는 데 노력해 주십시오.


    이런 취지로 진행된 기자회견의 성명서와 서명자 명부를 첨부하오니 깊은 배려 있기를 간구합니다.

    2004년 7월 15일

    송두율 교수 무죄석방과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탄원하는
    전국 철학자 259인 일동
    송두율 교수의 무죄석방과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전국 철학자 259인 성명 및 탄원

    이제 국가의 품격을 찾을 때다

    송두율 교수 사건을 재판하는 서울 고등법원 항소심 판사 제위 귀하,
    송두율 교수 기소 업무를 최종 주관하는 강금실 법무장관 및 송광수 검찰총장 귀하,
    송두율 교수 사건을 지켜보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및 시민사회의 시민 여러분,

    우리 한국 철학인들은 재독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뮌스터 대학 송두율 교수가 작년 2003년 9월, 37년의 망명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국한 이래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말없이 주시해 왔습니다.

    이런 긴 방관은 그가 당한 불행하고도 부당한 고난에 비추어보면 참으로 무책임하고도 부적절한 처신입니다. 무엇보다 송 교수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한국 철학?전체를 망라하는 2003년 한민족 철학자 연합대회의 공식 초청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한국 철학계가 무관심 속에서 그의 고통을 방관했다고 지탄받아 마땅한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국 초기 관계 당국의 조사 과정에서, 그의 지인들조차 몰랐던 과거 행적이 알려지면서 한국 지식인들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 도덕적 실망감과 책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 때 우리 철학계는 송두율 교수와 더불어 사회적 견책을 함께 받는 심정으로 그 광적인 비방과 중상을 감내했습니다. 한 인간의 도덕적 실책에 편승하여 실정법의 이름으로 권력의 폭압을 가하라는 수구 언론의 비열한 선동주의를 통해서나마 도덕적 실망이 달래지길 바랬던 것입니다. 그것은 송두율 교수 개인이 감내해야 했던 윤리적 책임의 몫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 국가의 법 기구가 나서서 냉철한 이성으로 송두율 교수의 삶과 그의 인간적, 학문적 성과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민주화된 우리 국가의 품에 포용하는 조치를 취해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여러 국제적 인권 기구, 국제연합(UN) 그리고 무엇보다 전세계에 산재한 우리 철학계의 외국 지성인 동료들이 한국 관계 당국에 간곡한 구원 요청을 제출하면서 우리 철학계의 침묵을 질책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인내성을 갖고 대한민국 시민과 법기구의 민주적 양식(良識)을 우선적으로 존중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4년 3월 30일, 송 교수를 겨울 냉기가 몰아치는 독방에 5개월 넘게 감금하고 난 뒤 나온 1심 판결은 단지 송 교수의 신체와 그의 정신적 정체성을 위협에 빠트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그렇게 단죄하도록 방조한 이 국가의 품격을 심각하게 실추시켰습니다. 우리의 철학적 양식으로 볼 때 대한민국 국가는 송두율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낙인찍음으로써 스스로 자기 품격을 훼손시키는 과오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어느 면에서 송두율 교수 개인보다 이 대한민국 국가의 품격과 우리 자신의 인격이 위기에 빠지는 것을 구하기 위해 다시 한번 궐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1심 재판 결과에 대해 강력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1. 우리는 1심 재판부가 송두율 교수의 제반 활동과 관련하여 양심과 사상의 문제에 관한 법적 판단에서 가장 중시해야 하는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을 입증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고 마치 송두율 교수의 행적이나 사상 ’때문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북한으로부터 우리 국가에 위협이 오는 것처럼 단정한 그 무분별한 판단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각 개인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외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제한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해 가장 적절한 규정을 담았다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요하네스버그 원칙>에 따르면, 한 국가의 체제를 가장 극렬하게 비판하고 부정하는 사상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경우가 아니면 절대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즉 그런 사상이 1)‘급박한’imminent 폭력의 사용을 선동하려고 의도한 경우, 2)그로 인해 ‘실제로’practical 폭력이 유발되리라고 판단되는 경우, 3) 이런 사상이 그와 같은 폭력이 발생했거나 발생할 조짐이 있다는 사실과 ‘직접적인’immediate 관련이 있는 경우에 한해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두율 교수의 사상이나 학문, 또는 기타 북한을 드나든 행적이 급박한 폭력의 사용을 의도한 것이거나, 그런 폭력을 실제로 유발하였거나 유발할 조짐이 있던가, 아니면 북한에서 유발했다고 믿어지는 폭력 사태와 즉각적인 관계가 있다고 입증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송 교수의 행적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 체제 또는 그와 관련된 국가 활동이 명백하게 저해받을 정도로 위협받았던 경우가 현존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현행 <국가보안법>은 그 제1조 제1항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 대상으로 삼으며, 특정 활동을 이런 반국가활동으로 해석함에 있어서 엄격한 해석을 의무시하고(제1조 2항)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에서 있는 대로 추적해 드러낸 송두율 교수의 37년 망명 생활을 샅샅이 훑어보더라도, 그가 노동당에 가입한 것까지 포함한 그 어떤 활동도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유신과 제5공화국에 걸쳐, 그의 귀국으로 인해 새로 드러난 북한과의 접촉 사실까지 감안하더라도, 북한의 사회주의나 주체사상체제보다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복원시키는 데 유익하게 작용했던 활동을 더 많이 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2. 무엇보다 우리는 학문하는 철학자들로서 1심 재판부가 학문적 활동의 비판적 전문성과 학문공동체 내에서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진리 확정의 상호주관적 절차를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송두율 교수의 집필활동을 놓고 “순수한 학문활동의 일환으로 이러한 저술을 하였다고 볼 수 없고, 북한과의 의사 연락 하에 북한의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김일성, 김정일 체제를 선전할 목적으로 이와 같은 저술활동을 한 것으로” 단정한 점에 관해 경악을 넘어 허탈함을 느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판결은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이 “북한 사회의 결과물을 경험적으로 치우침이 없이 올바르게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북한사회, 김일성, 김정일을 미화, 찬양”하려는 의도에서 “분석, 평가대상에 대한 심한 편파성의 결과”로 나왔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재적 방법론은 남한의 ‘북한바로알기운동’을 겨냥하여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유포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채택된 선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정은 일단 학문적 논증 및 비판의 공동체 안에서 방법론이라고 고지되고 나면 그 방법론이 어떤 검증 과정을 거치는지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나온, 그야말로 음모론적으로 굴곡된 피상적 추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1심 재판부의 피상적 이해와는 달리 학문세계에서 ‘방법론’은 연구 대상 전체를 샅샅이 보려는 관점에서 제시되지 않습니다. 방법론은 항상 그 방법을 통해 보고자 하는 대상의 특정 측면, 즉 특정한 학문적 문제 의식에 답을 줄 수 있는 부분을 보고자 해서 고안됩니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은 외재적이거나 선험적 방법으로 볼 수 없었던 북한 사회의 부분, 그것도 중요한 부분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지, 북한 사회 전체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학문적 방법론의 숙명입니다. 따라서 어떤 연구 대상이든 한 가지 방법론만으로는 그 대상의 모든 측면을 볼 수 없습니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은 북한 사회를 이해할 때 결여되어 있었던 그 사회 내의 행위 주체들의 동기연관, 그것도 그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동기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북한 지도층을 근접 관찰하고 그들과 비교적 솔직히 대담했던 결과적 정보들을 국내의 언론 및 학술 매체들을 통해 그야말로 친북적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아주 정직하게, 학문적 성과의 공개 원칙에 입각하여, 국내 독자들과 연구자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한국 학계에 찬반 양론의 담론장을 형성했습니다. 다시 말해 송두율 교수는 민주 사회에서 보장되는 학문적 검증 절차를 합리적으로 밟아나가고 있었고, 당연히 그 과정을 통해 내재적 방법론의 적용상의 문제점에서 그 자체의 문제점까지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지는 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송두율 교수가 북한에 관해 공개한 정보들은 상당한 정확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면서도, 다른 그 어떤 방법론도 그렇지만, 완벽한 것으로 공인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불완전성을 법적 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그것도 7년이나 징역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3. 우리는 송두율 교수의 저작물이 국내 주사파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때문에 한국 사회가 상당히 위기에 빠진 듯한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재판부의 판결을 보면서 한국 사법부의 일부 판사들이 얼마나 한국 사회의 흐름과 차단되어 사회적 무감각 상태에 매몰되어 있는지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학생운동 및 변혁 운동에서 주사파는 80년대 초 5공 군부독재체제의 폭압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주사파 발생과 확산의 가장 결정적 계기는 폭력적 억압을 일상화시킨 결과 당시 대학생들로 하여금 자유민주주의가 짓밟힌 대한민국의 현실에 절망하게 만들었던 전두환 정권의 공포정치였습니다.

    4. 우리는 송두율 교수가 자성적 성찰문을 발표한 작년 10월 2일부터 그 엄혹한 추위를 지낸 현재까지 일관되게 대한민국 헌법과 자유민주주의에의 충실성에 입각하여 모든 담론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재판부가 전혀 주목하지 않는 그 냉혹한 무신경에 분노합니다. 자존심을 가진 지식인이 공중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도 파괴되지 않은 자기 모습을 보여 주려고 분투하는 정경은, 이 순간 우리 사회가 누리기에는 과분한, 인간 정신력의 또 다른 성과라는 점을, 바로 이런 점에 항상 유의하는 우리 철학인들이 주목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송두율 교수의 범죄구성행위라고 하는 것들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분단체제 아래서 남한의 독재정권들이 북한보다는 남한의 국민들을 억압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을 일상적으로 드나들며 통상적인 교류 활동을 한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일상적 활동 범주들이 국가보안법에 반국가단체구성(3조), 잠입․탈출(6조), 회합․통신(8조) 등의 거창한 법률개념으로 채색되어 범죄구성요건으로 적시되어 있는 한 재판부는 그런 활동이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1조 1항)에 아무 지장이 없는데도 그런 활동을 범죄행위로 분류하는 거창한 재판 절차를 소모적으로 진행시켜야 할 것입니다.

    백번을 양보하여 현행 국가보안법을 글자 그대로 해석, 적용하더라도 송두율 교수의 범죄라고 되어 있는 모든 활동을 범법 행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이런 우매한 법이 계속 존속되는 한 우리 국가의 시민의식은 계속 위축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 행위가 언제든지 범죄화될 수 있는 여지가 강하게 남습니다. 이런 법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우리 국가의 언행은 세계시민사회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국가가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고 우리가 우중(愚衆)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국가가 그 품격을 찾을 때입니다.

    이에 우리 철학인들은 항소심 재판부, 법무장관, 검찰총장, 그리고 대한민국 국회와 시민사회의 시민들께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탄원합니다.

    첫째, 재판부는 현행 국가보안법으로라도 송두율 교수를 무죄 석방하라.
    둘째, 송두율 교수를 무죄 석방할 용기가 없다면 국가보안법의 유효성에 대한 국회의 토론 과정이 끝날 때까지 불구속 재판하라.
    셋째, 한국 사법기구로 하여금 계속 무의미하고 우매한 판결을 하도록 강요하는 국가보안법을 전면 폐지하라.

    2004. 7. 15.

    송두율 교수의 무죄석방과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전국 철학자 257인

    강성화(서울대) 강중기(서울대) 강지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지은(건국대) 강철웅(서울대) 구미숙(부산대) 권광호(부산대) 권서용(부산대) 권순홍(군산대) 권인호(대진대) 김기현(전북대) 김광수(한신대) 김남두(서울대) 김대오(한신대) 김도종(원광대) 김동기(한국철학사상연구회) 김동규(부산대) 김동규(연세대) 김명석(경북대) 김명주(부산대) 김민영(경북대) 김방룡(원광대) 김병환(부산대) 김상득(전북대) 김상봉(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김상현(서울대) 김상희(부산대) 김석수(경북대) 김선욱(숭실대) 김성관(원광대) 김성민(건국대) 김성우(상지대) 김세서리아(성균관대) 김세정(충남대) 김승태(한남대) 김시천(숭실대) 김원열(한국기술교육대) 김양현(전남대) 김영례(전북대) 김영배(경성대) 김영희(부산대) 김옥경(연세대) 김용섭(영남대) 김우철(한철연) 김인곤(서울대) 김인석(숭실대) 김의수(전북대) 김인순(동국대) 김재홍(가톨릭대) 김재희(서울대) 김정옥(부산대) 김종국(고려대) 김종식(부산대) 김주연(서울대) 김주일(성균관대) 김준수(부산대) 김준호(부산대) 김재기(경성대) 김재홍(가톨릭대) 김진근(교원대) 김진석(인하대) 김창준(부산대) 김치완(부산대) 김태완(숭실대) 김학권(원광대) 김학근(목포대) 김현돈(제주대) 김홍경(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남순예(충남대) 노성숙(이화여대) 노양진(전남대) 노호진(서울대) 노희천(순천대) 류근성(전남대) 류시열(신라대) 류종열(한철연) 맹주만(중앙대) 문동규(전남대) 문성원(부산대) 문현병(신라대) 문창옥(연세대) 민영현(부산대) 박구용(전남대) 박대원(경북대) 박만준(동의대) 박민미(동국대) 박병기(전남대) 박병기(전주교대) 박병섭(전북대) 박상환(성균관대) 박성규(서울대) 박승찬(가톨릭대) 박완규(충북대) 박영균(건국대) 박영욱(건국대) 박용주(부산대) 박유정(부산대) 박은미(건국대) 박정하(세종대) 박정훈(한철연) 박종식(부산대) 박준건(부산대) 박진(동의대) 박채옥(전북대) 박치완(한국외대) 박필배(성균관대) 박해용(울산대) 반성택(서경대) 배용균(충남대) 배식한(세종대) 백금서(전남대) 백승영(서울대) 백영제(동명정보대) 백은기(전남대) 백훈승(전북대) 변순용(전남대) 서상복(서강대) 서영화(상지대) 서유석(호원대) 서정국(경북대) 선우 현(청주교대) 선재순(전남대) 설헌영(조선대) 성진기(전남대) 송명철(조선대) 송영배(서울대) 송인창(대전대) 신승환(가톨릭대) 신원봉(영산대) 신은화(경북대) 신응철(전남대) 신정근(성균관대) 신종섭(원광대) 신하령(숭실대) 심혜련(건국대) 안동교(전남대) 안상헌(충북대) 안옥선(순천대) 안현수(부산대) 양선이(서울대) 양승호(전북대) 양재혁(성균관대) 양해림(충남대) 여현석(방송통신대) 연효숙(연세대) 염수균(조선대) 우환식(충북대) 원승룡(전남대) 위상복(전남대) 유현상(상지대) 유초하(충북대) 윤선구(서울대) 윤용택(제주대) 윤종갑(부산대) 이강서(전남대) 이강화(대구대) 이기백(성균관대) 이명기(연세대) 이명훈(한남대) 이병옥(연세대) 이병창(동아대) 이봉규(인하대) 이봉재(서울산업대) 이삼열(숭실대) 이상곤(원광대) 이상봉(경북대) 이상용(부산대) 이상인(연세대) 이상화(이화여대) 이상환(경북대) 이상훈(대진대) 이성백(서울시립대) 이성훈(경성대) 이승환(고려대) 이안나(부산대) 이엽(청주대) 이영철(부산대) 이유달(서울대) 이유진(동국대) 이윤일(관동대) 이재봉(부산외대) 이재성(계명대) 이정은(연세대) 이정호(방송통신대) 이종철(연세대) 이중원(서울시립대) 이중표(전남대) 이철승(성균관대) 이찬훈(인제대) 이창구(전북대) 이창재(성공회대)  이충진(한성대) 이하배(성균관대) 이한홍(부산대) 이향준(전남대) 이혜경(서울대) 임정아(전북대) 임재진(조선대) 임채광(한남대) 임형석(부산대) 장복동(전남대) 장원태(서울대) 장춘익(한림대) 장은주(영산대) 장정욱(경북대) 전영길(호언대) 전재원(경북대) 정낙림(경북대) 정대성(연세대) 정대현(이화여대) 정미라(전남대) 정륜(전북대) 정세근(충북대) 정용수(부산대) 정원규(서울대) 정원섭(서울대) 정원재(서울대) 정윤승(충남대) 정은해(서울대) 정종환(원광대) 정준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정호근(서울대) 정호영(충북대) 정희승(조선대) 전호근(한국철학사상연구회) 조광제(철학아카데미) 조대호(연세대) 조민환(춘천교대) 조윤호(전남대) 조은평(건국대) 조준호(조선대) 조항구(경북대) 조홍길(부산대) 진태원(서울대) 최대우(전남대) 최성식(전남대) 최소인(영남대) 최유진(경남대) 최윤수(성균관대) 최종덕(상지대) 최종천(순천대) 최한빈(천안대) 하상필(부산대) 하영미(부산대) 하용삼(부산대) 하주영(영산대) 한대희(호언대) 한수선(부산대) 허우성(경희대) 허재훈(경북대) 홍원식(계명대) 홍윤기(동국대) 홍일희(전남대) 황갑연(순천대) 황병윤(부산대) 황수영(서울대) 황지윤(부산대) 황희경(영산대)

    전국 철학자 총 259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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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남석(강릉대 인문학연구소) 임순광(경북대 비정규직 교수, 사회학) 조영준(카셀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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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한미 동맹 국익론은 변형된 숭미, 사대주의"

    [인터뷰] '파병재검토 결의안' 앞장선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

     


    ▲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
    ⓒ2004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무현 대통령을 무조건 지원해줘야 한다면 박정희 유신체제와 뭐가 다르냐. 한미동맹은 노무현 후보보다 이회창 후보가 더 잘할 수 있다. 그렇게 하라고 국민들이 열린우리당을 찍어준 것은 아니지 않느냐. 신기남 의장의 '한미동맹 강화론'은 변형된 숭미사대주의 논리다."

    '국군부대의 이라크 추가파견 중단 및 재검토 결의안'에 서명한 50명의 여야 의원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파병 반대 논리를 펴고있는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은 청와대와 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도 거침없었다.

    김 의원은 14일 오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파병 불가피론을 주장하거나 침묵하고 있는 젊은 개혁성향 의원들에 대해서도 "의원으로 재선, 삼선하는 것보다 일관성을 지키는 게 더 소중하다"며 일침을 가했다.

    특히 김 의원은 신기남 의장이 최근 방미 중에 한 '한미동맹 강화' 발언에 대해서도 "변형된 숭미사대논리이며, 분단국가 정치인으로서의 철학이 없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외국군대가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참전한 6.25 전쟁에 대해 '은혜'라는 발상은 이회창 후보와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국회 윤리특위 위원장인 김 의원은 '윤리특위가 지금까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해 "지금까지는 여야가 안건을 합의해서 상정해야만 하고, 3개월 지나면 자동 소멸되는 허점이 있었다"며 "바로 공청회를 열어 제도적인 보완을 통해 잠자는 윤리특위를 깨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 의원과의 인터뷰는 14일 오전 10시25분 국회 윤리특위 위원장실에서 1시간 가량 진행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미동맹? 노무현 후보보다 이회창 후보가 더 잘한다"

    ⓒ2004 오마이뉴스 이종호
    - 김원기 국회의장에게 "15일 본회의에서 파병재검토 결의안을 직권상정해달라"고 요청했다는데.
    "어제(13일) 개회 직전에 김 의장을 만나서 이야기했다. 국회법을 보면, 국회의장이 시한을 정해서 상임위에 검토하라고 얘기하거나 안건을 바로 본회의에 직권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작동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파병 재검토 지지자들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문제제기 하는 것이다. (파병 재검토 지지자들을 늘리는데 있어서) 한나라당은 친미적 속성상 힘들고, 열린우리당은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오늘(14일) 기존의 파병재검토 결의안과는 별도로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 보고서에서 밝혀진 잘못된 이라크 전쟁 중단 촉구 결의안'을 만들어 본회의장에서 서명을 받을 예정이다. 국군 파병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은 없기 때문에 더 많은 의원들이 동참할 것으로 본다. 일단 이런 결의안이 통과되면 결정적으로 (파병에) 제동을 걸 수 있다고 본다."

    - 김선일씨 피살 직후에는 70% 가까이가 파병반대 입장을 보였는데, 7월초 여론조사를 보면 파병찬성론이 다소 앞서는 것으로 나온다. 왜 그렇다고 보는가.
    "우리 근현대사가 갖고 있는 수난의 역사 때문이다. 옳은 게 꼭 이기는 것은 아니고 이긴 자에게 빌붙는 것도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패배주의가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가 오히려 기득권이 되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다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그걸 보면서 역사적 패배의식, 역사적 허무주의 같은 것이 생긴 것 같다."

    -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파병 재검토 불가 입장이 확고하다. 당 전체 분위기 놓고봐도 파병 불가피론이 우세한 것 같은데.
    "아직도 우리 정치인들이 낡은 권위주의 정치문화, 정당문화에 찌들어있는 것 같다. 당청 관계보다 근본적인 것은 국회와 정부와의 관계다.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무조건 추종하는 게 아니라 견제해야 하는데 이것을 착각하고 있다. 대통령을 무조건 지원해줘야 한다면 박정희 유신체제와 뭐가 다르냐."

    - 특히 젊은 개혁성향 의원들 가운데 적지않은 사람들이 파병 불가피론을 주장하거나 침묵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국회의원이 재선, 삼선을 하고 입각하는 것보다 자기 삶을 부정하지 않는 일관성을 지키는 게 더 소중하다고 본다. 자꾸 한미동맹을 강조하는데, 한미동맹은 노무현 후보보다 이회창 후보가 더 잘한다. 김용갑 의원이 미국 집권세력으로부터 더 신뢰를 받는다. 그것을 하려고 국민들이 열린우리당을 찍어준 게 아니지 않느냐. 이는 대선과 총선의 민의에 어긋나고, 어떻게 보면 자기 배반의 역사로 거침없이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기남 의장의 변형된 숭미사대 논리, 분단국가 정치인으로서 철학 없다"

    ⓒ2004 오마이뉴스 이종호
    - 신기남 의장의 논리 가운데 하나가 '미국은 우리나라의 혈맹이자 유일한 동맹국이다', '국익을 지키는 것이 자주인데, 지금 한미동맹 강화만큼 우선하는 국익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결국 변형된 숭미사대 논리다. 중공군도 세계전략 일환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 이후 북한에게 '도와줬으니 말 잘 들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고, (강요했다 하더라도) 북한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청일전쟁 당시에도 일본이 '조선왕조를 지켜줬다'고 했는데 그게 우리나라를 지켜준 것이라고 이해해도 되나. 외국군은 어디까지나 외국군인데,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간다. 그런 발상의 뿌리가, 우리가 집권하면 안된다고 했던 이회창씨의 논리와 차이가 없다고 본다."

    - 신기남 의장은 국내에 와서도 '대외용 발언이라고 자꾸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데 국내에서도 말을 바꾸지 않겠다'고 못박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방미 중에) 가족사를 얘기하면서 부친이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다고 했는데, 그게 분단국가 정치인에게 자랑거리인가. 토벌한 사람이나 토벌 당한 사람이나 모두 가슴 아픈 역사의 희생자라고 생각해야지, (부친이) 토벌대장을 했다는 게 무슨 자랑이냐. 분단국가 정치인으로서의 철학 없이…. 납득이 안 간다."

    - 개혁당을 같이 했고, 개혁 성향 인사 1순위로 꼽혔던 유시민 의원이 추가 파병에 침묵하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유 의원과 직접 얘기를 해봤는데 적극적 찬성도 아니고 고뇌를 하더라. '전략적 모호성'인 것 같은데, 나처럼 적극적으로 반대에 나서지 않아 오해를 받는 것 같다. 유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 정책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를 하고있지 않나. 사실 노 대통령의 개혁과제가 걸림돌 없이 나가면 '경호할 사람 많이 있으니까, 유 의원은 2선에서 머무르라'고 하고 싶다. 그런데 요즘 행정수도 이전 문제나 언론개혁 등 개혁과제들이 저항을 받고있지 않나. 그런 면에서 유 의원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의원들이 정부쪽 입장을 엄호하면서 파병찬성 쪽으로 먼저 기울었는데.
    "노 대통령이 청와대 만찬에서 의원들에게 '각자 역할에 따라 책임의 무게가 다르다, 이해해달라'고 했는데, 그 표현 안에 대통령의 고뇌가 녹아있다고 본다. 내가 저 위치에 있을 때 지금의 입장을 계속할 수 있는지, 나에게도 반문해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분명히 국회의원이고, 노 대통령하고 아무리 친해도 어쨌든 입장이 틀리지 않나. 나는 국회의원으로서 내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입장을 정리한 것 뿐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은 전 당원 표결로 결정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대통령도 결과를 수용하고 열린우리당 소속 전체 의원도 그걸 수용할 수 있지 않느냐. 지금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의 절대 다수가 파병 반대론을 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게 국제적으로도 '윈-윈'이라고 본다. 대통령이 (투표) 과정에서 파병찬성 입장 표명하고, 당원들은 이를 '노'하는 긴장감 있는 그런 절차를 거치면 누가 그런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겠나."

    "이라크 파병 찬반은 전당원 투표로 당론을 결정해야"

    ⓒ2004 오마이뉴스 이종호
    - 최근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한나라당보다 뒤쳐졌다. 열린우리당의 위기의 원인을 어떻게 보나.
    "국민들과 괴리를 갖고있는 당의 노선 때문이다. 국민들이 '니들 배불렀구나, 배에 기름기 꼈다, 기득권 편입 유혹에 들어가는구나' 그런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리 보수노선을 걸어도 영남권에서 박정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하겠나. 절대 그렇지 않다. 반대로 우리 지지 기반은 열린우리당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지금 흩어진 지지 기반이 다시 돌아오겠는가 하는 걱정이 든다."

    - 미국의 국익이 우리나라의 국익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보나.
    "미국의 국익과 우리나라의 국익이 다를 수 있다. 동북아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의 틀이 생겼지 않나. '동북아 중심국가론'도 북한을 빼놓고는 불가능하다. 대륙간 실크로드나 시베리아 가스 수송을 하더라도 북한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반대로)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을 자신의 안보전략 틀에 예속시키고 동북아에서 영향력 발휘하려고 한다. 미국은 통일 한반도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불안해 한다."

    - 그동안 국회에 윤리특위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16대 국회에서도 윤리특위가 제 기능을 발휘했다면 방탄국회라는 비판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원론적으로는 윤리특위는 의원들의 자격심사, 윤리심사, 징계권을 갖는데 한번도 제대로 작동이 안됐다. 문제는 여야가 합의해서 안건을 상정해야만 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3개월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소멸한다. 이 부분에 대해 국회법을 손질해야 한다.

    이번에 (박창달 의원) 체포동의안도 윤리특위에 자동 상정돼 논의된 결과를 국회에 본회의 보고하는 절차를 거쳤다면 이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일본, 유럽은 의회의 윤리특위가 막강해서 자정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국회 윤리특위의 활성화 방안이 국회개혁, 정치개혁과 직결되기 때문에 정개특위와 개혁경쟁을 할 것이다. 공청회를 열어 제도적 보완을 하고 잠자는 윤리특위를 깨워내겠다."

    ⓒ2004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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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lmas 2004-07-1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웅 의원의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가 왜 이렇게 참신하게 들리나?
    평화개혁당 운운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