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지금도 나는 그날 밤이 무섭다

며칠전 "푸른역사"에서 한 권의 신간을 냈다. "나의 천년 - 발칙한 후손의 내 역사 찾기"란 책인데, 이 책의 저자는 표정훈이란 사람이다. 표정훈은 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아직도 이 사람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인 사람에겐 그의 직업이 출판평론가라는 사실을 넌즈시 일러주어야 한다. 그제서야 아하, 하는 표정이라면 당신도 책을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낸 이 책을 지난 2004년 9월 3일자 "조선일보"에서 서평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를 쓴 이한우 기자는 최장집 교수의 제자라고 한다. 나는 이한우 기자 덕에 출판평론가 표정훈에 대해 좀더 자세한 가계를 알게 되었다. 물론 이제부터 내가 독후감을 올리고자 하는 표명렬 선생에 대해서도 함께 말이다.

"나의 천년"은 한 집안의 가계사를 추적해간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책이다. 그의 고랫적 선조 이야기는 빼고, 그를 기점으로 3대를 거슬러 이한우 기자의 서평 기사를 읽다보니 내용이 이랬다(알라딘에도 올라 있으미 참고하고 싶으시면 읽어보시라). 그의 할아버지 표문학은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다. 할아버지는 인촌의 친일 행적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를 비난하지 않았고, 중앙고보에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해준 인촌을 분명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말을 무척 아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표명렬 장군은 보도연맹원에 남로당 출신의 아버지를 둔 그는 육사출신이었지만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즐겨 읽던 '삐딱한' 군인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런 빛나는 가계를 둔 3대의 맨마지막 손자인 표정훈은 그런 가계 3대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대학에서 운동권 학생이 되지 못했고, 대신 플라톤을 즐겨읽는 문화주의자로 남았고 그런 당당한 관찰자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단다.

참 대단한 "조선일보"고 대단한 "조선일보" 서평이다. 최근 나는 "조중동"의 서평기사들을 읽으면서 묘하게 꼬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왜 꼭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참 치사한 글쓰기의 전형을 보는 듯해서 말이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쓴다. 나역시 종종 독후감을 빙자한 논설문을 작성하는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늘 안타깝지만, 최소한 내 의중을 교묘히 감추려고 하지는 않는데, 이 기사를 읽은 표정훈 씨와 표명렬 장군의 표정이 어떨지를 상상해보니 입맛이 더욱 씁쓸해진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아버지 표명렬 장군의 책에 대해서는 리뷰 기사를 올렸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표명렬 장군은 책을 발간한 뒤에 "한겨레"와 같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서 그럴까? 에이, 설마 그래서 그런 건 아닐 거다. 다른 좋은 책들을 서평하다 보니 빠뜨렸을 게다. 난 틀림없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

"세계 어느 선진군대도 '주적'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냉전수구세력이 주적 개념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지만, 이건 전쟁의 원리를 모르는 말입니다. 전쟁은 증오심이나 적개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정신으로 하는 겁니다. 수구세력은 국가보안법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는데, 이 법 때문에 국가안보가 유지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인권 탄압의 대명사인 이 악법을 지키고 있는 건 문명사회의 수치입니다."

이 책의 저자 표명렬 장군의 약력에는 이채로운 점이 많다. 우선 그가 전남 완도 출신이라는 것, 육군사관학교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우리나라 군인으로는 최초로 대만의 정치심리전학교를 수료한 최고의 심리전 전문가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베트남전에 전투 부대 제1진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그는 엘리트 장교가 걸어가는 길 대신에 정훈 병과를 택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엔 정치위원이라는 특수집단이 있다. 그들은 당원이고, 일반 병사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정훈병과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표 장군이 정훈병과를 택한 이유는 베트남전에서 목도한 우리 국군의 실상에 충격을 받은 탓에 우리 군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상은 이 책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의 필자 약력 소개에 따른 것이다.

군사학 혹은 전쟁사 관련 서적들을 들춰볼 때 종종 "그렇게 전쟁이 좋아?"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막막함이란... 평화네트워크의 활동가 정욱식 씨가 MD관련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게 전쟁이 좋아서 쓸리 없지 않은가. 우리 전체 국민의 3분의 1이 군대에 다녀온다. 그럼에도 이 나라에서는 그간 변변히 군대 문제를 다룬 책 한 권이 없다. 세계에서 몇 째가라면 서러운 출판대국에서 군사학 관련 코너는 물론 다른 분야를 다 뒤져봐도 우리 군에 대한 비판서적 한 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혹자는 "군에 가야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혹은 "원래 군대란 게 다 그렇다"고 치부해버린다.

어쩌다 신문에서 군대내 구타로 인한 사망, 자살사고, 혹은 성추행, 오발사고 거기에 최근 불거진 자이툰 부대에 지급된 철모, 방탄복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달이 멀다 하고, 이런저런 군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지만 이런 문제들은 그저 변죽만 울릴 뿐 기획 기사로 다뤄지는 법도 드문 것이 현실이다. 군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성역이자, 신성불가침이기 때문이다. 군만이 국가안보를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명예를 먹고 사는 직업군인들과 군 장성들의 자존심을 건드려선 안된다. 그 결과 주간 "미디어오늘"의 이번 주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엔 한국 특파원이 없다"는 기사가 나와도 할 말이 없어진다. 지난 7월초 KBS와 MBC가 외교통상부의 권유로 이라크에서 철수한 뒤 이라크 현지에는 한국 언론의 취재진은 단 한명도 없고, 다만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PD 한 명이 있을 뿐이다. 정부가 앞장 서 보도 자제를 요청했기 때문이란다.

구멍이 뻥뻥 뚫리는 철모와 방탄복을 입혀 자국 군대를 내보내고 이에 대해 우리 군의 안전을 위해 보도 자제를 요청하는 정부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철학이 있는 개혁이 아름답다'에서 그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이 웅장하게 서 있는 이 땅의 현실을 꼬집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마디로 철학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친일 청산, 과거 청산 문제는 다시금 나온다. 1987년 10월 29일 제장된 우리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으나 우리 육군사관학교는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지 못했고, 광복군이 우리 군의 주축을 이루지 못했다.

'2부 1950년에 멈춘 시계'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매우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주적논쟁, 4ㆍ3사건 등과 같이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 등 현재에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이다. 앞서 이한우 기자의 기사에도 드러나고 있듯, 이 책의 저자 표 장군이 진보주의자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표명렬 장군은 매우 민족적인 보수주의자이다. 문제는 그가 진짜 민족주의자이고, 진짜 보수주의자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비판조차 우리 사회 일각에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는 건 우리가 아직도 삐뚤어진 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대표적인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는 반대했지만, "미국의 독립"엔 찬성했다). 표 장군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간 우리 가 행했던 “무자비한 학살이라는 반인권,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에 반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냉전 수구 정치 세력들이 정치 군인들을 동원하여 저지른 특수한 역사적 사안에 대해 마치 군이 저지른 양, 군을 볼모로 하는 획책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표 장군은 우리에게 합리적인 보수와 냉전 수구 세력이 어디에서 작별을 고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총은 쏘라고 있는 것이고 총도 쏘지 못하는 군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면서 연평해전이나 서해교전 등에 그야말로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난리치는 수구 언론이야 말로 군과 국민 사이를 이간질하는 이적행위자들이라고 규정한다 .

'3부 개혁의 나침반은 언제나 양극을 가리킨다'에서 그는 “군에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이상한 충고에 반기를 든다. “군에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말은 “군 생활을 통해 불합리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해서 무조건 체념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습관화함으로써 비판력을 무디게 하는 소극성을 장점으로 둔갑시키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라는 거창한 말” 구호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도 정작 제복을 입은 국민인 병사들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얼차례나 일삼는 장교들의 리더십을 비판한다. '4부 우리 시대, 새로운 군대를 향하여'에서 표 장군은 '군대에는 인권이 없어도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모교이자 군의 미래를 건설할 육군사관학교의 개혁을 요구한다. 입으로는 늘 정의의 편에 선다고 말하면서도 현실 정치 속에서는 선후배 관계를 통해 늘 강자의 편에 서 왔던 선배 군인들과 동기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그는 12.12 쿠테타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김오랑 소령을 참 군인의 귀감으로 삼는 육사교육을 꿈꾸는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무렵의 나는 특수전사령부(일명 특전사)가 있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12월 12일에서 13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총성(종종, 야간사격 연습이 실시되곤 했지만)에 깨어났다. 그때의 내가 그 사건이 우리 현대사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날 밤이 무섭다. 그날 밤이 무섭기에 우리는 오늘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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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교육기관 특별법' 통과 관건…"양질 교육 의문"
분석 - 美 조지워싱턴대, 교육개방 신호탄 될까

2004년 08월 30일   김봉억 기자 

지난 16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이 제주도 및 남제주군과 함께 '제주-GWU캠퍼스타운'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함에 따라 교육개방이 본격화되는 첫 사례가 될지 주목을 받고 있다.

제주도 남제주군은 지난 24일 조지워싱턴대학 제주캠퍼스 조성을 위한 행정지원단을 구성해 본격 운영에 들어가 전폭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남제주군은 부군수 직속에 총괄지원팀과 투자지원팀을 두고 1백15만평의 군유지 무상임대 준비와 캠퍼스 후보지에 대한 투자진흥지구 지정 작업을 해나갈 계획이다.

캠퍼스 후보지로 선정된 대정읍 구억리 산1 일대 17필지의 군유지에 대해서는 유치확정시 까지 일체의 대부와 처분도 금지시켰다.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싱가폴분교의 모습. 최근 OECD가 교육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국경을 넘어서는 교육제도는 대학시스템의 협력부재로 내실이 결여돼 있으며 해외에 분교를 설립했던 일부 대학들이 교육의 질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홈페이지

제주도, '행정지원단'구성 전폭지원
지난 해 6월부터 지금까지 세차례나 제주도를 방문해 분교 설립 의사를 타진해 왔던 조지워싱턴대는 아시아지역의 학생들을 유치할 지역을 물색중이다.

조지워싱턴대가 최근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경제자유구역 및 제주국제 자유도시의 외국교육기관 설립·운영에 관한 특별법(이하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이 지난 6월 1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됨에 따라 제주도 쪽이 다양한 행·재정적 지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학교를 쉽게 설립할 수 있고, 이익금 송금도 가능해져 호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현행법상 국내에 외국교육기관을 설립할 수는 있지만 국내 교육기관과 동일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고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지만 이익금을 본교로 송금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직 외국대학 분교가 설립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하지만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이 제정되면 건물을 임차해 학교시설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이익금을 '결산 잉여금'명목으로 본교로 송금이 가능해 진다.

'외국교육기관 특별법' 통과여부가 관건
결국, 조지워싱턴대의 제주분교 설립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의 통과여부에 따라 실현 가능성을 따져 볼 수 있다.

전국교수노조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이 소속된 '교육개방 저지와 교육공공성 실현을 위한 범국민교육연대' 등 교육단체들은 '외국교육기관 특별법' 통과 저지를 비롯해 WTO·FTA 협상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 단체들이 '외국교육기관 특별법' 공청회 때부터 제기해 왔던 수익금의 해외송금, 내국인 입학허용, 학력인정 등 '3대 독소조항'에 대한 신중한 검토작업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이 외국교육기관의 영리추구 편의를 위해 구성돼 있다는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교육을 통한 '영리추구'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조지워싱턴대의 제주분교 설립이 계획대로 이뤄질 경우 다른 외국대학 유치도 잇따를 전망이다.

이미 무산 위기에 놓였던 제주도 남제주군의 스위스 DCT관광호텔대학교의 유치가 다시 추진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남제주군에 따르면 스위스 DCT관광호텔대학 제주분교 설립 및 레저단지 조성에 관심을 보였던 서울 이스턴개발(주)이 사업의향을 포기하자 (주)제주SMS가 대신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사업시행자 지정 신청서를 제주도에 제출한 것.

지난 해 6월 30일을 기준으로 해외 유학생수가 15만 명을 넘어서 한국 유학생 유치에 적극적인 미국, 호주 등 외국대학의 국내 진출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미 미국, 호주, 뉴질랜드, 중국, 대만 등의 나라는 지난 해 WTO 교육서비스 분야에 대학교육과 성인교육, 직업교육 등의 개방을 요구해 놓은 상태다.

"최근 아시아지역 기업형 외국대학 많아"
문제는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외국대학이 들어오겠냐는 것이다. 대학·교육의 질은 우수한 교수진에 달려 있는데 본교의 우수 교수진을 외국에 보낼지는 의문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수(교육학과)는 "백번양보해 교육개방이 이뤄진다손 치더라도 가장 중요한 건 교수진"이라면서 "본교에서 교수를 데려 올 경우 최소 1인당 15만 불로도 힘들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또 "지난 10년 동안 새로 설립된 아시아지역 대학 가운데 대부분이 기업형 대학"이라며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완결성 있는 대학의 면모를 갖추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재홍 영남대 교수(법학과)도 "공교육은 해당 국가가 책임지는 것인데 교육의 질을 높이는 일을 외국교육기관에 맡긴다면 엉망이 될 공산이 크다"고 진단했다.

"외국대학 분교, '유학생 유치 통로'될 것"
또 외국대학 분교가 유학생 유출을 막기 보다 오히려 외국대학 본교의 한국 유학생 유치 통로로 활용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제주도 쪽에서도 "조지워싱턴 대학이 우수학생 유치를 위해 1∼2년을 제주에서 마치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겠느냐"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외국대학 분교는 해외 유학의 준비단계로 여겨질 수 있다.

'인터내셔널 하이어 에듀케이션'은 2002년 가을호에서 호주 모나시대학 국제업무공무원 그랜트 맥버니씨도 "호주대학의 해외대학분교 사업은 재정적인 면과 수출산업으로서 교육 기업적인 측면을 함께 고려하다보니 무리한 학습왜곡이 있다"며 "국내환경과는 상당히 다른 관리체제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고 적절하게 통제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가 경고했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2004 Kyosu.net
Updated: 2004-08-3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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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한국의 출판기획자>(5)시인 최승호

출판코너를 채우기 위해 그간 나름대로 찾다보니 "문화일보"에서 괜찮은 기획을 진행했었더군요. 기획 제목은 "한국의 출판기획자를 찾아서"인데, 출판에 있어 기획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을 겁니다. 책을 구해 읽다보면 작게는 단행본 한 권의 기획, 크게는 총서나 전집과 같은 시리즈 기획물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편집을 "선택과 배제"의 원칙에 따른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편집자는 직접 글을 써서 자신의 의중을 전할 때도 있지만 이렇듯 "선택과 배제"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의중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 현대 출판 100여년의 역사에서 '기획'은 가장 뒤늦게 발견된 분야이기도 합니다. 70년대말에야 비로소 기획자란 이들이 등장한 셈이니까요. 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기획이 무엇인가 궁금해하면서도 정작 기획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이 시리즈를 읽다보면 저절로 문리가 트이지 않을까 하는 궁리를 하면서 새로운 시리즈의 퍼 나르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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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출판기획자>(5)시인 최승호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kr 
 
“편집자는 인연을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경우 어떤 기획을 할때 옆에서 도움을 준 좋은 인연이 참 많았어요. 내가 한 것은 시점의 선택 정도라고 할까요.”

시인 최승호(47)씨는 출판기획자로서 자신의 모든 공로를 함께 일한 선·후배 등 주변의 동료들에게 돌렸다. 출판계에서 이미 그의 기획으로 소문난 작품들에 대해서도 동료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자신이 이들에게서 받은 도움에 감사해할 뿐이었다. 반면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잘 듣고(이재룡 숭실대교수) 후배 편집자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켜준 ‘큰 스님’ 같은 분(함정임 전 세계사 편집장)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시인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편집자 최승호는 대단히 낯설게 보일 수 있다. 이는 최승호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가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한 것은 혼자 있는 명상의 시간과 시를 쓰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불안과 갈등 때문이었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편집자로서의 정체성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그러나 “시인보다 기획자쪽에 가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출판기획자로서 두드러진 족적을 남겼다”(정홍수 문학동네 편집장)는 평가를 받을 만큼 시대를 앞서간 탁월한 기획물을 많이 내놓았던 것이 또한 바로 그였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편집자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와 함께 일했던 후배 편집자들이 지금 우리 출판계를 이끌고 있는 전문편집자로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최승호씨가 출판기획자로서 가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영준 전 민음사 주간, 박상순 민음사 주간,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정홍수 문학동네 편집장, 함정임 전 세계사 편집장, 이상희 전 고려원 편집장 등 이른바 ‘최승호 사단’으로 불리는 면면을 보면 그로부터 비로소 현대적인 의미의 편집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출판계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춘천교대를 졸업하고 강원도 정선과 사북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던 최씨는 82년 4월19일 민음사가 공모한 제6회 ‘오늘의 작가상’에 ‘대설주의보’외 49편의 시를 응모한 뒤, 교직 의무연한이 끝나는 4월30일 사표를 던지고 서울로 올라온다. 그때부터 ‘전업 시인’인 동시에 출판기획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해 5월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씨가 직장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박맹호 민음사 사장과 심사위원이었던 김우창·유종호·최인훈 씨 등이 상의 끝에 홍성사에 소개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금성출판사에서 몇달간 아동학습백과 만드는 일을 하다가 춘천으로 내려갔던 그는 다시 서울에 올라와 1년 정도 KBS 출판부에서 단행본 교정을 맡기도 했다.

최씨가 기획편집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85년부터 3년반 남짓 고려원에서 편집주간을 맡으면서부터. 잡지 창간을 유달리 많이 했다는 그의 경력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춘천교대 시절 은사였던 이승훈 한양대교수와 함께 창간한 계간 ‘현대시사상’을 통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인들의 작품과 외국 시론 등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현대시사상’외에 세계사의 계간 ‘작가세계’와 민음사의 ‘민음동화’, 현재 일하고 있는 환경운동연합의 계간 ‘함께 사는 길’ 등이 그가 참여해 만든 대표적인 잡지들이다.

이중에서 88년 최씨가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만든 세계사에서 89년 창간한 ‘작가세계’는 매호 선정된 국내작가 1명을 특집으로 집중조명하는 방식을 통해 화제가 됐던 기획이다. 현재 거의 모든 문예지들이 이같은 포맷을 흉내내고 있을 정도다. 세계사의 경영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90년을 전후해 1년 정도 머물렀던 민음사에서 창간한 ‘민음동화’는 비록 단명에 그쳤지만 민음사의 자회사로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인 비룡소가 만들어진 배경이 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와 선(禪)의 대중화에 기여한 고려원의 ‘다르마 총서’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리즈로 평가받았다. 나중에 세계사의 ‘마음글방’시리즈로도 연결된 데서 알 수 있듯 시세계나 출판기획자로서의 최씨의 경우 불교를 떼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외모나 행동거지, 말투를 보면 가사만 안입었을 뿐 구도의 길을 걷는 선승(禪僧)을 생각나게 할 정도다.

75년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할 당시부터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시인에게 불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여러 출판사에서 불교 관련 총서를 출간하고 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신도가 아닌 일반대중의 욕구까지 충족시켜주는 기획물이란 전무했던 점에서 ‘마조어록’‘임제록’‘조론’‘장자’ 등 선사어록과 경전류를 한글세대가 친숙하게 읽을 수 있게 풀어낸 ‘다르마 총서’는 해인사 장경각에서 나온 ‘선림고경총서’등 이후 출간된 유사한 시리즈들의 전범이 됐다.

최씨는 당시 해인사 성철스님의 문도에게 불교책 출판의 중흥을 위해 종파를 초월한 큰 출판사를 만들어 같이 작업을 해보자고 제안할 정도로 이 분야에 애정이 컸다.

최씨의 기획은 당시 출판기업을 지향하고 있었던 고려원이 문학적 향기를 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작가 박영한·조성기·이윤기씨등의 작품이 최씨의 기획으로 고려원에서 활발하게 출간되었다. 기업적 풍토에 잘 적응못한다는 평가도 있으나 고려원 시절 홍성유의 장편소설 ‘인생극장’에 대한 반응이 신통치않자 ‘장군의 아들’로 제목을 바꿔 베스트셀러로 만든 일화가 출판계에서 회자될 정도로 대중적인 출판감각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출판기획의 본령은 세계사 시절 ‘세계사시인선’이나 프랑스·독일의 외국문학 번역을 통해 보여준 안목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해 100권을 돌파한 ‘세계사시인선’은 최씨가 기획을 맡았던 초창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인들의 작품을 출간하면서 창작과비평사·민음사·문학과지성사의 시인선들과 비교될 정도의 성가를 얻었다. 이연주·김언희·이수명·성미정·박상순 등이 ‘세계사시인선’을 통해 발굴된 대표적인 시인들이다. 불문학자인 이재룡 숭실대교수와 함께 르 클레지오, 장 필립 투생 등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프랑스 소설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것도 우리 문학계를 풍요롭게 한 기획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승호 사단으로 분류되는 후배 편집자들 가운데서도 박상순·정은숙씨는 최씨가 발굴하고 키운 대표적인 사람에 속한다.출판인으로서 양식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최씨는 작품이 좋으면 책이 안팔려도 출판해야 한다는 소신을 보여줬다. 박상순씨에게 북디자이너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데서 알 수 있듯 최씨는 작가나 작품을 보는 안목뿐 아니라 책의 디자인이나 장정, 광고카피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후배 편집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출판기획자로서 선·후배 작가를 예우하고 후배 편집자들을 격려하는데 언제나 한결같고 빈틈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현재 환경운동연합에서 스스로 자기 월급을 깎아가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선승(禪僧) 같은 그의 몸가짐이다.


출처: 문화일보 200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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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을산 > 마립간님께 - 2

마립간님,

주말 잘 보내셨는지요?
어제 오후는 다른 일로 차분히 글을 읽거나 쓸 수가 없어서 답글이 늦어졌습니다.

1. 우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저는 토론이라는 것은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상대방과 생각을 교류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거나 상대를 나의 생각과 같게 교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나 수학의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진위를 밝혀낸다는 것이 무척 어렵고, 그 주제가 ‘가치’와 관계될 때에는 하나의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생각을 언어라는 도구로 소통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구요.

2. 제가 지난 번 마립간님의 글에 답글을 단 이유는 ‘이타적인 행위’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이타적인 행위는, 즉 좀더 큰 ‘우리’를 위한 행위의 필요성에 의해 우리 본성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2.1 사회생물학

사회생물학 논쟁을 촉발시킨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보면, 윌슨은 ‘이타주의’에 책의 한 chapter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타적인 행위는 한 개체에는 불리하지만 인간이라는 공동체에는 이익이 되고, 이 때문에 실재로는 이타적인 것도 이기적인 본성의 발로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도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장과 주부가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 국가가 위기에 놓였을 때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현재에도 한 개체의 희생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확대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2.2 종교와 본성.

세계의 주요 종교들을 볼 때, 그 가르침에서 이른바 ‘원시 종교’와 다른 주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 그것도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입니다.

악의 퇴치와 기복의 차원을 넘어선,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 자신의 깨달음을 중생들과 나눈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류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런 이타적인 메시지는 작은 공동체보다 더 보편적인 인류 차원의 포용을 가르치는데, 이것이 인류 역사에 뿌리내렸다는 것은 이런 메시지에 공명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설사, 제국의 성립시기에 부족적인 기복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에 의해 선택된 종교라 하더라도, 그 메시지에는 분명 보편성이 있고, 우리에게는 그 메시지에 공명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3.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다른 문명을 이루게 된 주요 요인으로 - 불의 발견 이외에 - 농경의 시작과, 레비 스트로스가 지적했듯이 ‘근친결혼 금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의 공통된 특징이 미래를 위해 당장의 이익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립간님께서 예로 들으신 모아새 뿐 아니라 많은 생물들을 멸종하게 한 우를 범한 반면, 농경과 가축을 발명해 냈습니다. 즉, 식량이 되는 식물과 동물을 지금 베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잘 익을때까지 기다리는 것, 당장의 식량이 부족하더라도 내년의 농사를 위해 열매의 일부를 남겨 겨울을 나는 것은 인간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사회에 성적 도덕이 문란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배우자 이외의 대상에 대한 성적 욕망을 억제하고, 특히 가까운 친족간의 결혼을 금기로 하는 것은 어떤 미개한 부족사회를 가더라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간사회의 특징입니다. 이 역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당장의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회와 종족의 보존에 더 유리한 장치로 작용합니다.

숙제나 공부 같은것, 물론 밀리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현재의 노동력을 공부에 투자함으로써 미래의 더 큰 생산성을 바라보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미래의 이익을 위해 당장의 욕망 혹은 이익을 보류하는 인간의 특성에서 나오는 인간의 독특한 행위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두고 농경을 발전시킨 면을 볼 것인지, 동물들을 멸종시킨 면을 볼 것인지,
교육이라는 문화를 볼 것인지, 아니면 숙제와 공부를 미루는 심리를 볼 것인지,
결혼과 근친결혼 금기를 볼 것인지, 아니면 문란한 성도덕과 범죄행위를 볼것인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공중도덕의 존재를 중시할 것인지, 새치기 하는 사람의 존재를 중시할 것인지에는 각자의 시각차가 있겠습니다.

단, 앞부분의 특성을 무시했을 때, 인간이 인간으로서 현재와 같은 문명을 건설할 수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4. 인간의 도덕성은 더 강하게 진화가 될 것인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인간들이 현재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현재의 시스템으로 얼마나 더 문명을 지속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다고 봅니다.

4.1 의사 결정 과정의 문제

인간은 인간 역사의 90% 이상을 부족사회로 지내왔습니다. 부족 단위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의사 결정 과정이 비교적 공정하고, 빈부격차도 크지 않습니다. 집단 내의 동질성도 큽니다. 그런데 인류가 점점 큰 단위의 공동체와 국가를 이루어 살게 되면서 집단 내의 동질성도 떨어지고, 의사결정 과정이 상층부의 권력계층에 집중되게 됩니다.

이런 새로운 변화에 의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 사람들은 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대의제니, 대표 소환제, 지방자치제, 이익집단의 등장 등, 점차 정교한 사회 시스템을 고안해 왔습니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개인이나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대중’으로서의 의사결정이 매우 미숙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기적인 비젼을 제시하고 이끌 지도자는 키워지지 않고, 그때그때의 여론에 정치가 휩쓸리는, 그리고 그것을 잘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편, 의사 결정의 문제에서, 한 지역의 현안울 결정할 때 그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배재한 채, 중앙정부에서 밀어붙이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새만금 간척사업, 부안의 원전폐기물 저장소 건설 문제, 천성산 공사 문제 등은 그 사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당사자의 의견을 소외시켰기 때문에 부작용이 컸습니다. 필요한 일은 진행하되, NIMBY 현상을 배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아직 우리는 고안해내지 못했습니다.

4.2 인간의 얼굴을 한 시스템

부족시대에는 부족원들의 친족관계도 동질성이 있었고, 사회의 빈부격차가 있어도 한 공동체 내에서 소외되어 죽어가는데 한쪽에서는 그런 계층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채, 혹은 알더라도 무시한 채 지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가 ‘발전’했다고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이 없도록 시스템을 복원해야 합니다. 최소한 인간적인 삶과 죽음을 영유할 수 있는 사회는 그 수혜자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갈등과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도 줄일 수 있습니다.

계층간의 언어와 세계관과 가치관이 요즘처럼 갈라지고 갈등이 커지는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가 ‘발전’한다는데 이런 일이 오히려 심화되는 것은 시스템이 거대화 되어가면서 ‘인간적인’ 면을 잃어가기 때문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보지 않고 ‘자본가’와 ‘노동자'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사람으로, ’빨갱이‘와 ’보수 꼴통‘으로 보면 인간적인 면을 잃어가는 겁니다.

이제는 ‘발전’이라는 단어의 뜻을 ‘인간의 얼굴’을 찾아가는 것과 동의어로 바꾸었으면 합니다.

4.3 자본주의, 그 경쟁력!

이런 사회와 시스템의 물적 바탕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입니다.

금년 초(2월 9일)에 올린 페이퍼 “발자국 - 북방계와 남방계 - 오늘날은?” 에 설명한 대로, 현재의 경제사회체제는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체제라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가장 경쟁력이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분명히 과학기술의 발전과 시장경제가 인류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한 바가 크고,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주객이 전도된 듯 합니다. 인간의 생명보다도 자본의 이익과 특허권이 존중되고 있고, 수백 수천년 한 곳에서 살아온 부족이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 기업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납니다. 분명히 재생가능한 에너지체제가 실현 가능한데도, 석유/자동차 산업계와 원자력 산업의 로비가 더 먹혀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저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체제를 이루면서도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삼켜지지 않을 대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실천으로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한 개인이나 집단, 심지어 몇몇 국가의 힘으로도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국제연합이나 WTO 등의 초국적 시스템을 만들었던 인류이니만큼, 초국적 대안운동도 가능하기를 희망합니다.

5. 그간의 마립간님의 글에서 보수적 - 아버지의 원리 - 사고가 지배하는 것은 익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종교적으로 개신교이신 것과 일맥 상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신교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분들도 많습니다만.... )

분석적 사고는 타고난 것일 것이고, 종교는 어려서 주어진 것이든지, 본인의 선택이겠지요.

개신교에 따라 보수적 원리를 따른다기보다는 마립간님의 보수적인 성향이 개신교를 선택하게 했고, 개신교의 성향이 그 보수성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선택해 주셨다’고 하시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립간님의 과학적, 분석적 사고의 틀과 개신교는 어쩐지 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 아직 종교 - 개신교 - 가 마립간님의 분석적 사고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의외입니다.

6. 자발적 가난과 녹색당..... ^^ 먼 길을 돌고돌아 의외로 또 일치점이 생기는군요.

저도 지속가능한 인류의 문명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재화의 생산과 소비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가치관과 사회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정치적 성향도 - 원래 회색분자라 자처하지만 - 굳이 정당을 선택하자면 녹색당에 가깝습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서늘한 밤입니다. 평안하세요.


가을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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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서 쓰면 손가락질 당해…원서 사용 오히려 증가
진단_과학 교양교재 출판의 현황과 과제

2004년 08월 30일   권기호 과학칼럼니스트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물질세계는 양방향성을 강화해 가고 있으며, 이것은 삶의 모든 분야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상품화와 보편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정신세계나 지식세계의 한편에서는 양방향성이 약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다.
미셸 푸코의 말처럼 아는 것이 힘, 곧 권력이므로 먼저 많이 알고 독점하려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20세기에 들어서 과학?기술은 드디어 권력을 쥐게 되었고 세계는 치열한 과학기술 전쟁을 벌여 왔다. 권력에는 부와 명예가 따르므로 급격히 늘어난 과학기술자들은 무한 경쟁 속에서 선취권과 독점주의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젊은 교수들일수록 원서 의존도 높아

더구나 우리나라는 서구의 과학기술을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만 받아들여 ‘지식인’이 아닌 ‘전문가나 기술자’만 양산하고 그들을 이용하는 데 골몰해 왔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철학과 역사 같은 근본 문화가 없는 사상누각이며, 과학기술자들에게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동참하라고 하기도 어렵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은 그러한 근본 문화를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을뿐더러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할 의지도 시간도,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리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인문학자들의 ‘지적 사기’를 신랄하게 꼬집었지만, 사실 그러한 지적 사기를 야기한 데에는 자연과학자들의 잘못이 크다. 많은 자연과학자들은 발견하거나 발명한 사실을 책이나 강연을 통해 쉽게 설명하기보다 현학적 아우라를 씌워 고답적인 것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할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진정으로 정통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난해함은 단절과 오해와 왜곡을 낳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 과학 출판을 비롯한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침체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국가 정책이다. 과학기술을 이 시대 문명과 생활의 일부로서 인식하지 않고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한, 과학기술은 교과서와 실험실의 장벽을 허물고 세상과 소통할 수 없다. 편향된 교육 제도는 말할 것도 없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학문인데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주체인 인간을 빼고 나머지만 가르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과학기술이나 그 산물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하거나 사회와 문화를 해석하는 일 따위에 관심이 없다.
이제는 많은 교수와 학생이 그 못된 타성에 젖어 있다. 유학파 젊은 교수들일수록 원서와 외국어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며, 학생들은 마지못해 또는 환상에 젖은 채 따라가고 있다. 자연히 우리말로 된 교재나 교양서는 줄어들고, 범람하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이 번역되지 않은 채 고착화되는 현상도 폭증하고 있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 언어의 문제로 이어진다. 언어는 인식의 출발점이므로 언어 자체가 혼란스럽거나 난해할 경우 커뮤니케이션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 후손은 외국어에 대한 엄청난 부담을 안은 채 과학기술을 더 기피할지 모른다.

‘수준 낮은 독자’ VS ‘역량 부족 저자’

최근 과학 교양서 번역물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몇몇 소장파 과학 저자들이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해 왔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과학 교양서 시장의 성장을 논하기는 이르다. 우선 번역물의 경우, 교양서의 종수는 늘었지만 평균 판매 부수는 줄어들었고, 과학기술 발전의 기초가 되는 교재나 학술서도 원서 사용의 증가로 오히려 줄었다. 국내 저술의 경우도 초·중·고교생을 위한 에듀테인먼트 내지 부교재만 늘었지 대학생이나 일반인을 위한 고급 교양서는 여전히 드물다.
읽을 만한 과학책이 없어 못 읽는다는 독자와, 읽어 주는 독자가 없어 과학책을 못 내겠다는 저자나 출판사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야 한다면 지금은 독자의 편에 가깝다. 재미있고 쉽게 또는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쓸 만한 지식 인프라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저자나 출판사의 외침은 공허하다. 왜냐하면 저자나 출판사가 독자의 수준과 기호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책을 펴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준 낮은 독자’ 탓만 하는 저자가 있는가 하면 ‘역량 부족인 저자’ 비난만 하는 독자도 적잖다.
또한 교수나 전문가 집단에서 ‘대중을 위한 책’을 펴내는 것이 ‘딴전’을 부리는 것으로 낙인찍히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진지한 순문학 작가의 조금 경쾌한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 작가가 문학적 순수함을 잃은 것으로 내몰리듯, 대중을 위한 교양서를 쓰면 학문적 순수함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손가락질당하는 풍토는 과학 교양서 출판 활성화에 큰 걸림돌이다.
그렇다면 얼핏 대학출판부에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출판부는 대학 부설 편집·인쇄소나 다름없다. 대학출판부장이라는 자리도 대개 교수들이 번갈아 가며 임기만 채우기 때문에 눈여겨 볼만한 출판 콘텐츠가 별로 없다. 우리나라는 정부 지원 부족, 도서관 부족, 불법 교재 복제 같은 눈앞의 주요 장애가 먼저 해소되고 과학 교육이 혁신되어야만 과학 교양서 출판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권기호/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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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8-3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엿듣기로는 인문학 교수들은 오히려 교양서 써서 잘 팔리면 우쭐하는 분위기던데요^^

balmas 2004-08-30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교수들과 자연과학 교수들이 성향이 좀 다르겠죠.
그런데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네) 사실은 교양서 잘 쓸 수 있는 사람도
드문 편이죠.
그러니 우쭐해 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