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중앙일보 '정운영'을 애도함

[손석춘 칼럼] 과연 진보는 부패했는가

 


▲ 중앙일보 7월28일자 중앙일보 27면 '중앙시평'.
ⓒ2004 중앙일보 PDF

정운영. 현재 <중앙일보> 논설위원이다. 하지만 1990년대 그는 대표적인 '진보논객'이었다. 적잖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사로잡기도 했다. 기실 그렇게 된 데에는 <한겨레>의 '기여'가 컸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에게 고정칼럼을 '제공'했던가.

정 위원이 <한겨레>에 불쾌감을 드러낸다는 말도 더러 들리지만, 기실 1988년 창간한 <한겨레>의 16년 동안 정 위원에 견줄만한 '특혜'를 받은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가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좋은 글을 쓰길 기대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따금 예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의 칼럼은 대부분 뒤틀려 있었다. 딴은 <한겨레>에 고정칼럼을 연재할 때도, 그의 현학적인 뒤틀림이 사내 일각에서 문제로 제기되기도 했었다.

정 위원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온 까닭

그럼에도 정 위원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던 까닭은 적어도 그의 '몫'이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28일자 <중앙일보>에 쓴 "반동의 반동은 반동을 부른다"를 읽으며, 더 참는 것은 논객 '정운영'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보수 못잖은 진보의 부패"라는 작은 제목이 붙은 글에서 정 위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과거에는 정권이 간첩을 만들어내고 전향을 않는다는 이유로 교도소에서 장기수를 때려죽이는 천인공노의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공권력에 의한 살인을 인정하고 추후의 피해 배상으로는 모자라서 민주화 유공자라는 월계관까지 씌워야 하는가.

과거에는 공안 기관이 반정부 인사를 죽이고 증거를 없애버리는 인면수심의 패악을 부리기도 했다. 엄히 다스려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간첩 혐의 복역자가 조사하지 않으면 의문사 조사가 불가능한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과거의 군사 독재 정권들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법적으로 문제없음을 사회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개혁이 새로운 반동의 빌미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정 위원에 따르면 '반동의 빌미'를 진보세력이 주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반동의 빌미를 주고 있는 것은 지금 정 위원이 몸담고 있는 <중앙일보>다. 아니 반동을 부추기고 있다.

보라. 비전향 장기수가 엄연한 민주공화국에서 고문으로 살해당했는데도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에 대한 분노는 찾아보기 어렵다. 피해배상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민주화유공자라는 월계관'까지 씌워야 하느냐고 정 위원은 개탄한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일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의 일까지 구분 못할 만큼, 그의 정신이 벌써부터 혼미해진 것일까.

'애도'를 그는 '매도'라고 읽을지 모르겠지만

간첩혐의 복역자가 꼭 조사해야 하느냐며 다그치는 대목에선 과연 이 글을 쓴 사람이 '정운영'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수구신문의 마녀사냥에 맞선 의문사위의 해명을 거두절미해 인용한 뒤 언죽번죽 말한다. "과거 군사 독재 정권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 위원은 진보가 부패했다고 비난한다. "학창에서 진보를 외치던 누가 지금 고관이 되어 리무진을 타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진보의 부패가 보수의 부패 못지 않다는 사실만은 보도를 통해 보아왔다. 지식인 얘기도, 판사 얘기도, 위원회와 기금 얘기도, 노조 얘기도 심심찮게 듣고 있다."

물론, 나도 '리무진 탄 진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진보를 대표하지 않는다. 오늘 한국의 진보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무더위 아래 노동자들과 학생 그리고 진보정당이 단식을 해도 여론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바로 중앙일보를 비롯한 부자신문들의 외면 탓이다. 게다가 수구세력은 터무니없이 국가정체성 논란을 벌이고 있다. 저들의 작태를 비판하기는커녕 그 소동을 일으키는 신문에 글을 쓰며 진보를 부패했다고 몰아치는 정 위원의 모습은 섬뜩하다. 하물며 반동의 빌미를 준단다. 그래서다. 정 위원에 묻고싶다. 참으로 '부패한 진보'는 누구인가. 혹 자신이 아닌가.

오늘 정 위원을 '애도'―그는 '매도'라고 읽을지 모르겠지만―하는 마음은 쓸쓸하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타락할 때 그 잘못을 지적해줄 후배를 '각오'하고 있다. 그때 후배의 지적이 일리가 있다면, 미련 없이 절필할 것을 약속드린다.
다음은 28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정운영 논설위원의 '중앙시평' 칼럼 전문이다....편집자 주


[중앙 시평] 반동의 반동은 반동을 부른다


대학 시절 신문을 같이 만들던 선후배들이 한해에 서너 번 만나는 모임이 있다. 과거사 한담이 무료하던 차에 누가 불쑥 정치 문답성 재치 문답을 시작했다. 좌우를 각각 10단계로 나눌 때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 있으며, 현 정권의 임기가 끝나는 4년 뒤에는 어디쯤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거의 만장 일치로 지금 좌경화 3~4단계에 들어섰다고 했으며, 임기 동안 좌경이 1~2단계 심화되리라는 전망이 현상 유지나 완화 전망보다 앞섰다.

*** "좌경 심화될 것" 전망이 앞서

내 차례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별 생각없이 현재는 우경화 3단계 이상이고, 정권 말에는 5단계쯤 될 것이라고 했더니 씨익 웃지들 않는가. 누구한테 어깃장을 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평소 느낀 대로 털어놓았을 뿐이다. 촛불시위로 좌파와 우파가 갈리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보낸 쌀로 연명하는 상대가 두려워 군비를 증강하는 판에 좌경이라니 참말로 턱도 없는 소리다. 이런 소신의(?) 나한테 위의 '여론 조사' 결과는 정말 의외였다.

근래의 '좌경 협심증'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로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래 좌경 기준이 자유로워졌다. 소련이라는 사탄이 사라졌으므로 다른 적을 '만들어' 악역을 맡기려는 것이다. 악한 조작은 극우와 극좌가 익힌 생존 원리의 하나이기도 하다. 클린턴 행정부가 좌파 정권 명부에 오르고, 영국 노동당이 미국 민주당의 진보성을(!) 공부한다니 개그로 치면 세계 토픽감이다. 국내에도 이런 바람이 불어서 소도 웃을 일에다 마구 좌파 상표를 갖다 붙인다. 아파트 분양 원가를 공개하는 문제를 놓고 진보와 보수를 꺼내는 판국이니.

둘째로 최초의 충격에 대한 과잉 반응이 있다. 민노당 원내 진출이니, 의문사 조사니, 해외 파병 반대니, 미군 기지 반환이니 이런 일들은 전례가 없어서 합리적인 대응 이전에 덥석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이다. 전교조를 빨갱이라고 여기던 극우파가 여전히 귀찮고 짜증나지만 그래도 함께 살 수밖에 없다고-들어보니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더라고-생각을 돌리는 중이라면 미지의 사태에서 느끼는 공포와 걱정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셋째로 좌파의-좌파로 불리는 세력의-미숙한 처신이다. '미국의 좌파와 우파'(살림.2003)라는 책에서 이주영 교수는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던 68세대 '신좌파'가 고위 공직에 앉아서는 "좌파처럼 생각하고 우파처럼 생활하는" 리무진 진보주의자(limousine liberals)로 변신했다고 썼다. 지식인은 베트남에서 죽은 병사들을 비웃고, 판사는 유죄 입증이 어렵다며 범법자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리고, 정부는 문화진흥기금으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전위 예술가를 지원하고, 노조 간부는 '노동 귀족'이 되어 조합비를 낭비했다. 당연히 반격을 불렀다. '신우파'는 포퓰리즘 운동을 펼치고 '극우파'는 무기를 들었다.

학창에서 진보를 외치던 누가 지금 고관이 되어 리무진을 타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진보의 부패가 보수의 부패 못지않다는 사실만은 보도를 통해 보아왔다. 지식인 얘기도, 판사 얘기도, 위원회와 기금 얘기도, 노조 얘기도 심심찮게 듣고 있다. 우파에 대한 반동으로 신좌파가 나오고 그 반동으로 다시 극우파가 나온다면, 즉 반동을 반동으로 막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에의 한풀이일 뿐 개혁이 아니다. 그 반동의 고리는 우파든 좌파든 현재의 집권 세력이 끊어야 한다.

*** 보수 못잖은 진보의 부패

과거에는 정권이 간첩을 만들어내고 전향을 않는다는 이유로 교도소에서 장기수를 때려죽이는 천인공노의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공권력에 의한 살인을 인정하고 추후의 피해 배상으로는 모자라서 민주화 유공자라는 월계관까지 씌워야 하는가. 과거에는 공안 기관이 반정부 인사를 죽이고 증거를 없애버리는 인면수심의 패악을 부리기도 했다. 엄히 다스려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간첩 혐의 복역자가 조사하지 않으면 의문사 조사가 불가능한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과거의 군사 독재 정권들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법적으로 문제없음을 사회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개혁이 새로운 반동의 빌미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정운영 논설위원

2004/07/28 오전 11:57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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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8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운영 씨 같은 분의 행보가 "모두 헛것이다!"라는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것 같아요.

superfrog 2004-07-2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다닐 때 무슨 소린지 어려워 죽겠는데도 정운영씨의 여름방학 한양대 경제학 특강을 들으며 기분 좋아하던 때가 있었어요.. 퍼가서 다시 곱씹어 잘 읽어봐야 겠습니다..

balmas 2004-07-2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운영 선생의 합리성을 믿는 편인데, 이 칼럼은 무슨 뜻으로 쓴 건지 잘 납득이 안가는군요. 뭔가 대응이 있겠죠. 한번 기다려보는 수밖에 ...
 

오늘자 한겨레 기사입니다
아 벌써부터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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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폐인’생긴다‥하루 17시간씩 일주일
[한겨레 2004-07-25 17:58]
[한겨레] 교육방송 ‘1회 국제 다큐페스티벌’
출품작 종일방송

텔레비전에서 하루평균 17시간씩 1주일간 다큐멘터리만 방영한다면 그것도 케이블 등 유료방송의 다큐전문채널이 아니라 지상파에서 시도한다면 무모하지 않다면, 무언가 대단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교육방송이 8월30일부터 9월5일까지 1주일간 기존편성을 아예 무시하고 ‘다큐방송’으로 끝장보기를 선언했다. 교육방송은 이 기간중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캔 번스(미국) 베르너 헤어조그(독일) 등 세계적으로 유명감독 작품 등 국내외 30여개국 130여편의 다큐멘터리가 참가하는 ‘제1회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출품작 대부분을 방송한다는 것이다. 교육방송쪽은 아침 7시30분~10시30분 어린이 시간대를 제외하고 아침 6시부터 새벽 1시 너머까지 일주일간 최대 7200분 다큐방송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교육방송은 한국방송 문화방송 등 다른 지상파 방송사에도 출품작을 방송하기 위해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8월 30일~9월 5일 30여국 130작품 출품‥
지상파로는 세계적 유례없어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 등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축제가 여럿 있지만 지상파 방송사가 행사를 주최하고 참가작을 일주일간이나 대대적으로 방송하는 다큐멘터리축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고석만 교육방송 사장은 밝혔다. 그렇다면 교육방송은 왜 정규방송을 포기하면서까지 영화에 비해 상품성이 떨어지는 다큐멘터리에 목을 매는가 고 사장은 이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북방한계선 문제, 김선일씨 피살사건의 실체 등 오늘날 한국사회는 어느때보다 진실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사실속에 진실을 찾는 작업인 다큐멘터리 정신은 커뮤니케션이 필요한 한국사회에서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방송은 오락일변도 아닌가 교육방송은 이번 행사를 통해 우리의 방송 풍토에 일대 경종을 울리고 싶다. 다큐멘터리는 공영성의 상징이자 실체라면 교육방송은 공영성의 향도 노릇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행사는 ‘변혁하는 아시아’란 주제 아래 다큐단체로부터 추천받아 참신성과 혁신성이 돋보이는 12편을 선정해 경쟁부분에 올려 대상(1만5천달러 수상) 최우수상 2편(각 1만달러) 등 수상작을 가릴 예정이다.

참가가 확정된 해외 유명 다큐멘터리스트로는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보다 더 존경을 받는 미국의 캔 버스를 비롯해 독일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이자 1972년 <아귀레, 신의 분노>로 전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베르너 헤어조그, <내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등으로 국내에서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이란의 국민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이다. 교육방송은 애초 <화씨 911>을 개막작으로 하기로 하고 마이클 무어와 협상에 들어갔으나 지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몸값이 10배 이상 올라 결국 초청을 포기했다고 한다.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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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커밍아웃 이야기
     
로맨티스트 소람

 황보신 기자
 2004-07-18 21:18:17


“레즈비언으로서 커밍아웃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는 인터뷰 요청에 그녀는 흔쾌히 응해 주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소람님의 아파트를 찾았다. 인터뷰를 시작하려는데, 담배 피워도 되는지 묻는다. 담배를 피우면 이야기를 더 잘 한다면서. 그녀는 담배 한 개피를 태우면서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최초로 커밍아웃한 것은 언제였나요?

“대학 때라고 봐야 될 것 같거든요. 제가 89학번이니까 그때만 해도 동성애자 모임이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여자대학을 다녔는데 주변에 동성애자들이 굉장히 눈에 많이 보였어요. (중략) 대학교 4학년 때 총학생회 선거에 많이 관여하면서 알게 된 친한 후배가 있어요. 그 후배가 저한테 동성애자 조직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더라구요. (중략) 성사되지는 않았어요.”

“사회 생활하면서 제 자신이 갑갑해서 살 수가 없더라구요.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여기저기서 했었는데 그 속에서 굉장히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확실한 이성애자이지만 인간으로서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어요. 직장동료들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들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집안 식구들이 다 눈치를 채죠. 하지만 알면서 모른 척 했죠.”

-집엔 커밍아웃을 언제 하셨어요?

“사실은 저는 집안에서는 ‘아웃팅’이 먼저였다고 생각을 해요. 대학을 졸업하고 한 학번 선배를 한 4년 정도 만났었어요. 그 선배가 저한테 보냈던 편지가 어머니 눈에 띄었어요. 엄마는 워낙 제가 중고등학교 때 여자친구랑 친했기 때문에 감을 잡고 있었어요. 그 선배 같은 경우는 우리 집에 굉장히 자주 왔었고 당시 선배가 대학원생이면서 자취를 하고 있어서 제가 그 집에서 자고 했기 때문에 엄마가 거의 감을 잡고 있지만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데 그 날은 결정적인 물증이 나왔기 때문에 엄마랑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그 선배를 부르더라구요. 야단을 칠 줄 알았는데…. 그때 선배와 저는 워낙 떨어지면 살 수 없는 상태였어요. (엄마를) 만나자마자 언니가 그냥 울어버렸어요. 엄마가 마음이 약하신 관계로 ‘그냥 딸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할테니까 잘 지내라. 그런데 다른 가족들은 몰랐으면 좋겠다. 엄마는 모른척하겠다. 그런데 너희 어머니는 성격이 보통이 아니신 것 같으니까 너희 어머니가 아시면 양쪽 집안이 풍지박산 날 것 같으니까 절대 모르시게 해라’ 정도(말씀하셨죠).”

-온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때는?

“4년 전이었어요. 어머니, 아버지, 동생에게 다 얘기했죠. 그 이야기가 길고 복잡한데. (중략) 2000년 1월에 최초로 한 이반동호회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는데, 저보다 늦게 들어온 회원과 가까워졌어요. 당시 그 사람은 기혼자였어요.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걸리게 되잖아요? 그 친구의 남편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에요. 남들 보기에도 그림 같은 부부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가정을 깨는 것은 저도 원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원하지 않았어요. 저는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었고. (중략)”

“그런데 남편이 알게 되었고 그 사람이 자기는 나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저를 선택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돈을 구해서 방을 몰래 얻었고 친구를 이사시켰죠. 이사 준비가 다 끝난 상태에서 내일 나가야 하는데 오늘 이야기를 한 거죠. 난리가 났죠. 엄마랑 둘이 껴안고 울다가 아빠가 퇴근하신 다음에 얘기를 했고, 퇴근한 남동생에게도 이야기를 했죠. (중략) 밤에 짐을 싸놓고 자는 척하고 누워 있는데 엄마가 들어오시더니 이불을 덮어주고 나가시더라구요. 진짜 그때 가슴 아팠어요. 그렇게 해서 집을 나왔죠.”

-그때 독립한 후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떠세요?

“그 이후에도 집에 자주 갔어요. 제가 집안에서 장녀이자 장남이에요. 소위 말하는 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는 아세요.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집안의 큰 일을 처리하는 범주가 다르니까. 엄마는 ‘아들 장가 보낼 때보다 네가 나간 것이 더 서운했다’고 지금도 말씀하세요. 어머니는 지금도 갈등하세요. 절반은 인정, 절반은 부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시죠.”

“아버지는 굉장히 말수가 적으세요. 하루는 (자가용차 플라스틱 열쇠고리를) 당신 것이랑 동생 것을 해오셨는데 너도 해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니 친구 번호는 뭐고 색깔은 무슨 색이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제가 그 친구 차는 빨간색이고 차 번호는 뭐다라고 했더니 나중에 만들어가지고 저희 집에 가지고 오셨더라구요. 아버지 나름의 인정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백 마디 말보다 더 고마웠죠.”

“제 동생 같은 경우에는 전형적이고 보수적이고 성실한 한국의 가장인데 우리 누나는 좀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누나만 행복하면 된다. 누나가 혼자 살면서 피폐해지는 것이 보기 싫었다.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며 동생이 가장 인정해 주는 편이죠. 인간은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데 가장 동의해 주죠. 어머니, 아버지는 다들 동의하죠. 하지만 당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복하길 바라죠. 한국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깊이깊이 치열하게 사랑하지만 방식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도 다른 집의 딸들과 달랐다고 말씀하셨는데?

“엄마와 최초로 투쟁한 것이 5살 때였는데 동생이 3살 때이었어요. 엄마와 먼 데를 다녀왔는데 소변이 마려웠어요. 버스를 내리자마자 맨홀 뚜껑이 있는 데로 가서 제 남동생은 바지를 내리고 바로 쉬를 누게 했어요. ‘나도’ 그랬더니, ‘여자가 어디서 엉덩이를 까느냐?’는 거예요. 거기서 집까지 걸어가다가 바지에다 오줌을 쌌어요. 이 일이 기억나는 것은 오줌 샀다는 것도 창피하지만 그것보다도 ‘여자기 때문에 나는 밖에서 쉬를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에요. 지금도 저는 그 일을 확대해서 나는 5살 때 내가 여성인 것을 알았다고 하지요.(웃음)”

“그게 최초였고 그 다음에는…. 엄마가 나를 이쁜 딸로 키우고 싶으니까, 한번은 내게 마론 인형을 사주고 남동생에겐 짚차를 사다줬어요. 그런데 마론 인형은 너무 수동적인 장난감이잖아요. 짚차는 굴러가잖아요. 지금도 움직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해요. 바퀴 달리는 것을 다 잘 타거든요. 그때 짚차 때문에 남동생이랑 엄청 싸웠어요. 아빠는 지금도 그 때 제가 말한 것을 기억하신대요. ‘아빠 선물은 굉장히 감사한데 마음은 받겠지만 다음에는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 주세요. 이 인형은 너무 재미없어. 이렇게 생긴 애가 어딨어. 나는 이렇게 안 생겼는데.’”

“또 치마 입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저는 운동장에서 공도 차고 야구도 해야 하는데 치마는 걸리적거리니까 불편해서 싫었어요. (중략) 어쩔 수 없이 입었던 고등학교 2년을 제외하고는 치마를 입은 적이 없어요. 물론 학교가면 체육복으로 갈아입었죠. 어렸을 때는 불편해서 치마를 거부했지만 크니까 소변사건과 마찬가지로 강요된다는 것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좀 더 머리가 커지면서는 여성에게 치마가 강요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각을 하게 된 거죠.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사실 치마가 편한 점도 있더라구요. 여름에 시원하고. (웃음) 그래도 지금 저는 치마를 안 입을 뿐만 아니라 정장도 안 입어요.”

-여자를 좋아한다고 느꼈던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초등학교 5학년때였어요. 또래 남학생한테 전혀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유치하고 지저분하고. (웃음) 내가 누구랑 지내는 것이 편한가 생각해 보니까 예쁜 또래 여학생들과 있을 때 기분이 좋더라구요. 남자애들이랑 권투하고 공차고 노는 그 느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대화가 되는 또래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유일하게 대화가 되는 여학생이 한 명 있었어요. (중략) 그 친구랑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랑은 애정은 아니었던 것 같고 처음으로 우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남학생들과는 심지어 우정도 못 느끼겠더라구.”

“반마다 공주 같은 애들 한 명씩 있지요? 남자애들이 그런 애들 놀리면 막아주고 울면 집에다 데려주면서 기쁨을 느끼면서 그때 생각했죠.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잘나서 남자를 못 사귀는구나’ 생각을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남학생들에 대한 열등감이었던 것 같아요. 그 애들이 XY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지점이 다르잖아요. 그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어렸을 때는 ‘그 남자애들이 남자로 하는 것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게 컸어요.”

“그리고 제 성향 자체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해서 탐미적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을 거울을 통해서 봐도 아름답다고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모든 면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또래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고 동경하게 되고. 그러나 나는 한국 사회가 강요하는 그런 여성이 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남성도 될 수 없다는 말이에요. 거기서 느끼는 제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었죠. 남자애들은 적이고, 남자애들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게다가 내가 가질 수 없는 여성성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을 여자친구들을 보호해 주고 그 곁에 있으면서 누린다고 할까요, 어렸을 때는.”

-동성애자라는 것이 고통이 되었던 적이 있나요? 호모포비아를 느낀 적은?

“초등학교 때 상당히 혼란스러웠죠.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 나오는 연애라는 것은 모두 이성애자의 연애죠. 원래 성격이 로맨틱한데 왜 나 같은 형태의 연애는 없는 것이냐는 고민에 빠졌었죠. 중학교 때는 동성애자라는 인식이 생겼는데, 저는 확신하는 게 있었어요. ‘사람이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 문제이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살아가는 방식과 정체성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제 자신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 존재를 어떻게 하던지 스스로 제 안에서 긍정하려고 애썼죠. 사실이 이 긍정이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염세 속에서 오랫동안 헤매야지 나오는 거죠.”

“첫 연애는 중학교 때 했던 것 같아요. 연애라고 해 봤자 손잡고 떡볶기 먹으러 가고 팔짱 끼고, 그게 다였지만. 누구 때문에 잠 못 자고 편지를 수없이 썼던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한 도서관 청소년 독서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어요. 처음에는 사이가 나빴죠. 토론만 하면 서로 공격하고 싸우다가 나중에는 서로를 인정하고 굉장히 가까워지고 온갖 이야기를 다하게 되었죠. (중략) 당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오토바이도 타고 그랬는데. 그 집에서 알게 됐어요. 그 집 어머니는 우리 딸은 천사같이 착한데 못된 것을 만나가지고 (중략) 망쳤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사탄취급을 하고 ‘악의 화신’이라 했어요. 중 3때 집에 전화해서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처음 호모포비아를 느꼈어요.”

“그리고 대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두 학번 위인 선배인데 굉장히 유명한 선배였어요. 이 선배는 학교에서 공인한 동성애자였거든요. 다들 욕을 해요. 나도 그 선배의 정치적 입장이나 태도는 굉장히 싫어했지만 그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이 사생활이나 성적 정체성이라는 것에 굉장히 공포를 느꼈죠. 나도 커밍아웃하면 저렇게 된다고.”

“직장에서 동성애자라는 것을 고객에게는 숨기지요. 삶의 근거를 잃게 되기 때문에. 하지만 직장에서 인간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요즘 만나는 남자 어때?’라는 질문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거든요. 직장이 돈 버는 곳만이 아니라 삶을 같이 나누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존재를 알리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알려요. 저는 커밍아웃 때문에 사람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한 인간으로서 바로 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보다 더한 설득력은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것은 아쉽죠. 처음에는 ‘너니까 봐주겠다, 너니까 괜찮다’죠. 그러나 이야기를 많이 듣기 시작하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요. 정치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 되기도 해요.”

-동성애자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능하다면 하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 혼인신고가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어요. 만나는 친구가 있는데, 자기가 취업을 하면 같이 결혼하자더라구요. 하지만 결혼제도가 인정이 되더라도 제도적 인정이지 범사회적 인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경제적인 기반을 무시할 수 없는데. 워낙 가난하게 살아가지고 그 부분을 잘 알거든요. 그 부분에 대한 안정적인 장치 없이는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해요. 저는 적어도 40에서 50까지 완전히 어느 정도 (경제적인) 틀을 만들어야겠다고, 그때는 대사회적인 커밍아웃과 함께 전투적인 활동을 하겠다고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해요. (중략)”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생각해요. 다른 가치보다. 그런데 (두 사람의) 행복이라는 게 각자가 자기 생을 살면서 서로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약간의 교집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중략) 그런데 이게 왜 꼭 이성애자 가족에서만 가능해야 해요? 이런 폭력이 어디 있습니까? 용납이 안됩니다. 정말. 확대가족이라는 것은 서로 인정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연애라는 것이 에로스적인 것이기 때문에 배타적인 것이지만 아가페적인 것, 휴머니즘적인 것이 들어가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또 의식주를 반드시 같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파트너를 원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이성애자 틀에 있었다면 벌써 결혼을 했을 테고 굉장히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했을 거예요. 저의 수많은 연애편력은 한국사회에서 동성애자라는 특수성 때문이에요. 그토록 많은 연애, 실연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을 버린 적은 한 번 밖에 없었다는 거죠. 상대방이 확실하게 동성애자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제가 설득을 해 볼 수는 있지만 강요하고 끌고 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작년에는 너무 힘이 들었어요. 너무 좌절했고. 두 달 동안 살이 20kg나 빠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자신에 갖고 있는 자신감은 내가 아직도 사람을 믿고 사랑한다는 거죠. 사실 저는 담배하고 연애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웃음)”


연애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몇 바퀴나 돌아왔지만 현재는 인생의 반려자가 있어 행복하다는 그녀,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데 이것만은 꼭 좀 써 달란다.

“제가 생각하는 커밍아웃이라는 것은 내가 동성애자라는 성명서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에 대한 이해, 동조, 공감대를 끌어내는 것이 커밍아웃이죠. 저는 제가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아웃팅’이었지만 ‘커밍아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 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어머니와 끊임없이 대화하려고 노력했고 완전한 성공은 아니지만 절반의 성공 정도는 했고, 앞으로는 완전한 성공으로 갈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도 제가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그런 과정을 거쳐요. 너니까 괜찮아, 너를 좋아하니까. 그러다가 그들 스스로가 동성애 문제를 아주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고 같이 고민하게끔 만들었다는 것, 제가 생각하는 커밍아웃은 이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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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법, 조선시대로 회귀하나
     
도덕적 규범을 법제화하면 곤란해

 김혜숙 기자
 2004-07-25 23:48:53

<필자 김혜숙 교수는 이화여대 철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편집자 주>


우리 사회의 변화의 속도는 매우 빠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 빠른 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런데 또 어떤 부문에서는 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으로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는 전통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전통의 현대화라는 이름 하에 변화에 대해 적응을 꾀하기도 한다. 그러한 경우 대부분 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의 의식은 혼돈 상태에 놓이게 된다.

‘효도법’은 국가의 문제회피

한나라당이 마련해 입법 추진을 계획하고 있는 소위 ‘효도특별법 제정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의식을 혼돈 속에 빠뜨리는 한 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노부모 부양자에 대한 사회적 안정감 부여 및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현대적 개념의 효 문화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 방안의 핵심은 가족윤리로서의 효라는 전통 도덕적 가치를 제도적 차원에서 함양시키기 위해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에 있다.

사회복지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 개인은 자신의 복지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가족 관계의 망이 잘 짜여진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자신의 안녕과 복지를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보장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미미한 가족관계의 망을 가진 개인은 그렇지 않은 개인에 비해 복지에 관한 한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더구나 가족제도가 변화하고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정의 작업이 활발한 현대사회에선 가족이 개인의 복지를 책임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어린이, 청소년, 여성, 노인, 장애인, 극빈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안전장치의 마련을 국가적 차원에서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개인의 안녕과 복지를 보살필 가족이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는데도 불구하고, 국가가 가족에게로 다시 부양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가족관계의 심각한 문제로 가출한 청소년을 찾아내서 다시 그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문제를 해결한 것 같은 가상만을 만들어내어 문제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를 보지도 못하게 된다.

효도특별법의 또 다른 문제는 효도라는 도덕적 가치를 법적 강제로 부과한다는 데 있다. 법은 넓은 의미로 도덕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법과 도덕은 그 외연에 있어서 같지 않다. 합법적인 것이 도덕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예컨대 투표행위가 도덕적 행위는 아닐 것이다)이거나 심지어는 부도덕한 것(남성전용 휴게방 개업은 합법적이지만 부도덕한 것일 수 있다 )일 수도 있다. ). 또한 도덕적인 것이 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내 스스로에 대한 정직성이나 성실성의 문제는 합법, 불법의 문제가 아니다)이거나 비합법적인 것(2차대전 당시 유태인을 도왔던 독일인이 당시 나치법을 어긴 것일 수 있다)이 될 수도 있다.

도덕을 법으로 강제하면 위선만 늘어나

오늘날 법치를 지향하는 시민사회는 도덕을 사적 차원의 문제로 두는 경향이 강하며 도덕주의적 사회를 지향하기보다는 최소 도덕주의를 지향한다. 조선 사회는 최대한의 도덕주의를 지향했던 사회로 예치를 이상으로 삼음으로써 법과 도덕의 외연을 거의 같게 두고자 했다. 이것은 공자가 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법에 의한 처벌을 받으면 될 뿐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참으로 부끄러운 줄을 모르게 되지만, 예가 지배하는 사회는 내면으로부터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저절로 교화가 된다고 했던 데서 비롯된 정치적 이상이었다.

예치는 도덕적 규범을 법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도덕적 가치의 강제성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언뜻 보면 인간다운 세상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인 듯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본다면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관여하려 한다는 점에서 좀더 철저하게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법과 달리 도덕은 전 인격을 관여시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훨씬 강력하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게 한다. 효도법의 제정은 예치와 같이 겉보기의 그럴듯한 명분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사적 영역까지 법의 지배 하에 두고자 하는 무리를 범하는 것이며, 많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한 예로, 회사생활을 무난히 하기 위해 회사 규칙을 잘 지키고 사장의 지시를 잘 수행하면 되는 것이지, 회사를 나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사장을 인격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할 필요는 없다. 만약 사장을 한 인간으로 좋아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강제조항이 된다면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사장을 좋아하고 친밀하게 따르는 사람에게 월급을 더 주거나 보너스를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면을 쓰고 사장을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들이 느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작 사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사람들의 그 마음도 의미를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인센티브는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존경심이나 애정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도덕을 법적으로 강제하고서, 인센티브 제도까지 도입하는 경우 많은 위선적 행위들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위선을 해서라도 효도국가를 세워야겠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이 경우 우리는 무엇을 위한 효도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법이 도덕의 영역을 넓게 지배하면 할수록 우리의 자율성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고 우리의 삶은 그만큼 숨막히게 된다. 도덕은 자율과 자유의지의 영역이다. 법은 물론 법에 대한 존경심과 존중, 자발적 준수가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좀더 현실적으로는 강제와 유인과 처벌의 문제이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많은 행위들이 합법과 불법의 문제로 주어진다면 이 삶은 무척 답답하고 무기력한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효자와 효부라는 개념이 함축하는 남성중심적 가치의 사회, 자식이 없을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의 다양성이 부정되는 사회, 중요한 가치들이 양적 가치로 환산되는 사회, 이런 사회 안에서 우리의 삶은 매우 황량한 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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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법 제정 막아야
     
한나라당 효도특별법 제정안 발표

 조순경 기자
 2004-07-25 23:44:25


한나라당 정책개발특별위원회(위원장 이한구)는 지난 5월 ‘효도특별법 제정안’(이하 효도특별법)을 발표했다. 고령화 사회에 대비한 정책의 일환으로 발표된 이 제정안은 지난 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의 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아직 구체적인 법 조문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소요 예산도 얼마가 될지 정확히 나와있지 않은 상태지만, 올 9월 정기 국회에 상정할 것이라고 한나라당 관계자는 전한다.

“노부모 부양에 대한 가족, 사회, 국가의 공조체제 구축 및 국가의 효 분담 확대”라는 취지로 구상된 효도특별법은 노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며, 농경 봉건사회의 ‘효’ 윤리를 현대 사회에 법적으로 강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전근대적이고, 여성들에게 그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성차별적인 법안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가족에게 국가부담 전가하려는 전근대적 발상

효도특별법의 주요 골자 가운데 하나는 “부모 부양이 가능한 상황임에도 회피 시에는 부양명령 등 강제조치”를 신설하고, “부양 명령자에 대한 명단을 공개”히겠다는 것, 그리고 “자녀의 민사상의 부양의무에 대한 특별 규정을 제정하고, 부모 대상 범죄행위(상해, 학대, 유기, 폭행, 협박, 감금 등)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지자체별로 ‘효자효부상 선정위원회’를 설치하고 효자효부상 수상자에게 상금을 지급(시도: 1천만원, 시군구: 5백만원)하며, 효자효부증을 교부하여 이들이 공원, 문화공연 등 이용 시 할인혜택을 주겠다고 한다. 이 같은 발상은 이혼 증가를 막기 위해 ‘열녀문’을 세우고, ‘열녀 정표’를 주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부모 부양을 ‘효’의 이름으로 강제하고 ‘효도 교통카드제’를 도입하고 노부모 부양자에게 효도여행 휴가권을 주고, 효자효부상, 효자효부증을 교부하는 등의 방안은 결국 국가가 개입해 ‘효’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강화하여 노인복지의 주 부담을 가족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OECD와 우리 나라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1998년 현재 GDP에서 노인복지 서비스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 나라의 경우 0.08%로, 영국 0.50%, 덴마크 1.82%, 스웨덴, 2.49%, 스페인 0.18%, 일본 0.27%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낮은 복지 수준에서 ‘효’와 같은 유교윤리와 유교적 언어로 케인즈주의적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요구를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효도하는지 학대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우리 사회에서 ‘효’라는 유교윤리는 아직까지 뿌리깊게 남아있다. 효와 불효에 대한 가치는 위계화되어 있다. “왜 효도를 해야 하는가, 효라는 가치를 왜 붙들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낯설기만 할 정도로 그 가치에 대해 맹목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부모를 모시고, 부양할 상황에 있는 자녀들은 대부분 부모를 부양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를 부양하지 않거나 함께 살지 않는 자녀는 상당부분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2년 현재 자녀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65세 이상 고령자는 전체의 49%정도다. 절반 이상의 노령층이 자녀와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 부모가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아서 일수도 있고, 자녀가 부양할 여건을 갖추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부모 자녀가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어긋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같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자녀를 둔 60세 이상 가운데 48%가 ‘자녀와 같이 살고 싶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70대의 경우 39%가, 그리고 신체적 의존도가 높은 80세 이상 노인의 경우에도 22%가 자녀와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혼자 사는 게 편하다”는 한 노인은 “평생 아이들 키운 것으로 족하지 손자 손녀까지 키우고 싶지 않다”고 한다. “손자 손녀한테서까지 무시당하는 것 같다”는 또 다른 노인은 “그런 저런 눈치보고 사느니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방에서 못 일어나 굶어 죽더라도 나가서 따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경제적 인센티브를 주고, 법적 강제를 하면서 노부모를 부양하도록 하는 효도특별법은 가족 내에서의 노인학대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녀들과 함께 살고 싶어하지 않는 노인들의 욕구에도 관심이 없다. 강제로 부모를 모시게 함으로써 더 많은 노인학대가 발생할 수 있다는 현실도 파악하고 있지 않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1999년도 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 노인의 8.2%가 자녀 및 가족으로부터 학대 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절반 정도는 거의 매일 학대를 받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학대의 주 가해자는 아들과 며느리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 가운데 38% 정도가 언어적, 신체적, 정서적, 경제적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은 것으로 나타났고, 지속적이며 중층적인 학대 경험이 있는 경우도 11.6%나 됐다. 이 경우도 주 가해자로 아들과 맏며느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학대를 당한 노인의 대부분은 “가족이기 때문에 그냥 참는” 것으로 별다른 대응을 하고 있지 않으며, 다시 학대를 당하더라도 신고하지 않겠다고 한 비율은 77.9%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존속 상해, 존속 유기, 존속 학대 자녀의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효도특별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보여준다. 겉으로는 부모를 부양하며 효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학대가 일어나도 과연 누가 알 수 있을까. 한 여성노인의 말처럼 우리 사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해 거짓 자랑을 하고 산다.” 자식으로부터 방치되고, 유기당하고, 학대 받은 부모 가운데 몇 명이나 자식이 처벌 받고 범죄자가 되게 할 증언을 할 것인가. 효도특별법이 아니라 노인학대방지특별법을 만들어 노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일이다.

부부간의 관계를 더 이상 지속시키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이혼을 선택한다. 부모 자녀 간의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효도특별법은 더 이상 함께 하기 어려운 관계를 억지로 함께 하라고 요구한다는 점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효의 이름으로 여성 희생 강요 말아야

노인 부양과 효도를 위해서는 돈과 시간, 그리고 노동력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의 노인 부양은 과거 근대 이전 농경사회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 특히 신체적, 정서적 의존도가 높은 노인일수록 노동집약적인 노동과 고도의 감정노동을 필요로 한다. 단순한 의식주 해결뿐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주고, 불편한 몸의 거동을 돕고, 병수발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그 모든 노동을 누가 할 것인가. 지금과 같이 성별 분업이 뚜렷한 혈연 중심의 핵가족에서 그 노동은 거의 대부분 여성들에게 떠넘겨진다.

얼마나 모순인가. 한나라당은 한편으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리는 데 관심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여성들로 하여금 노인 부양에 필요한 노동을 하라고 유인하고 강요한다. 부모 부양이 가능한 상황임에도 회피할 경우 부양명령을 내릴 것이고, 부양명령을 받은 자들의 명단도 공개하고, 부모유기를 부모에 대한 범죄행위로 규정, 법적 처벌을 하겠다는 전근대적인 법안을 자랑스럽게 제안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2년 현재 60세 이상 가구주의 절반 정도(49%)가 노후준비가 없으며, 준비가 있는 경우에도 공적 연금을 제외하면 33% 정도만이 개인적으로 노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의 경우 경제적 어려움은 남성의 2배에 가깝다. 이러한 노령인구의 경제적 상황의 성별 차이는 가족 내에서의 성별 분업과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에 직접적으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육아 부담이 여성 취업의 장애가 되기 때문에 육아의 사회화를 해야 한다면 여성의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노인 부양노동 또한 사회화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노인을 돌보는 데 필요한 휴직이나 휴가제도 조차 없는 상황에서, 효도특별법은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입을 막고 이로 인해 노후 준비를 더욱 어렵게 하여 타인에의 경제적, 심리적 의존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하는 성차별적 법안이다.

지금의 현실에서 국가는 혈연에 기초한 효를 법적으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 노인을 포함한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동등한 대우, 연령차별주의의 극복, 그리고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한나라당이 제안한 효도특별법은 효라는 가치와 그를 행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효도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부모 부양을 위해서는 경제적, 시간적, 인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부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불효녀 혹은 불효자로 낙인 찍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 이 법안을 구상하고 발표한 한나라당은 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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