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상처 속에 쟁여 둔 아름다움-이정록 관련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풋사과의 주름살>><<버드나무 껍질에 세들어 살고 싶다>> 이 세 권의 시집을 두고 우리는 90년대 적인 새로움을 얘기하기는 힘들다. 젊은 시인이 과히 새롭지 않다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소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정록이 전통적인 시쓰기의 양식을 지키며 관찰을 통찰로 바꿔나가는 과정을 통해 시읽기의 즐거움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정록의 시에 처음 주목한 것은 그렇게 문학사적인 이유나 보편적인 문학의 문제를 보는 시각 때문은 아니었다. 시를 보는 눈을 현혹시키는 수많은 시인들의 감수성의 광휘와 개성의 숲을 피해가다보니 평범한 사람의 눈높이에서 갈고 닦은 성실한 시가 어떻게 빛날 수 있는지를 밝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이정록의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시쓰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어 그의 기본기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세기말에도 변함 없는 목소리로 말해주는 시인의 목소리가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정록의 시들은 상처를 이야기한다. 그의 상처는 특별한 천재의 표식으로서의 상처가 아니다. 우리는 첫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의 '서시'를 통해 그가 말하는 상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서시> 전문

 

 

그는 자신의 몸에 상처가 적음을 반성한다. 상처란 인간 사회 속에 파고들 때 생기는 성실성의 증표다. 그는 상처 없이 해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상처란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이기에 그것을 온 몸에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의 상처에 대한 이해는 두 번째 시집 <<풋사과의 주름살>>의 첫 시 '자두나무'에서 다시 등장한다.

 

개망초 꺽으며 너에게 간다

짱짱, 햇살을 쟁이는 푸른 자두들

 

바닥에 때 이르게 물러 떨어진

열매들, 모두 벌레 먹은 녀석들이다.

 

벌레가 들자, 성한 놈 제쳐둔 채

온 몸으로 단물을 올려주고

씨알 여물게 해준 자두나무

 

낮술에 골아떨어진 호주에게

부채를 부쳐주던 여자가, 저 자두나무

그늘에 쪼그리고 있었다

 

늙은 몸통, 갈라진 홈마다

붉은 눈물 솔아 있다

 

땅바닥 쪽으로 쏠려 있는

한 여자의 오래된 눈길

 

<자두나무> 전문

 

위 시에서 시인은 벌레 든 자두에 먼저 단물을 올려주는 나무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늙은 몸통, 갈라진 홈마다/붉은 눈물 솔아' 있는 모습을 '오래된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다. 상처에 대한 이정록의 꾸준한 시선은 '풋사과의 주름살'에서 한 정점을 이루는 것 같다.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탑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 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낙과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놓는다

식탁에서 냉장고 위로, 다시

세탁기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어디로 갔나

몸 안을 비워 단물 쟁여났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내부로 가는 길이구나

연 살처럼, 내면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풋사과의 주름살>

 

노파와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의 주름살의 연결이 놀라울 정도로 평이한 진술 속에서 이루어져 있다. 풋사과의 쟁여놓은 '단물'이 노파의 '가마솥' '갱엿'이 되고 주름살이 '내부로 가는 길'이 되는 이 인식의 힘. 결국 '인간의 내면을 버팅켜주는 힘줄'이 주름살 혹은 상처인 것이다. 이 상처에 대한 시인의 오랜 시선은 결국 흔하지만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 번째 시집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에서 '눈사람의 상처'를 보자.

 

삽날에 잘린 눈사람을 어루만진다

살집 속에 결을 만들어놓은 흙 부스러기

때문에 삽날이 지나간 자리가 꽃등심처럼 곱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

저 흙길을 따라가면 서걱서걱 기저귀 얼어 있던 안마당

또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를 만날 것 같다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히는 눈송이들

왱이낫이 박힌 옹이 많은 옛길을 덮는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겹겹 붕대를 두른다

삽날이 지나간 눈사람, 그 흙밥의 나이테를 어루만진다

 

<눈사람의 상처>

 

'삽날에 잘린 눈사람'이 아름다우면서도 무섭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생각하는 어머니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가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힌다는 '눈송이'란 이 시인의 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세 권의 시집을 통해서 시인의 상처에 대한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 인식은 첫 시집의 상처 없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시작해서, 상처란 내면의 단물이며 버팅기는 힘이라는 인식으로 한 봉우리를 보여주고 , 다시 상처를 아름답고도 무서운 어머니의 기억으로 내면화시켜내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시인의 이러한 내면의 흐름을 사랑한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행복한 시읽기의 길이다. 이러한 서정성과 인식의 깊이를 함께 가진 시인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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