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국수]-김용락

비가 오는,
장마비가 미류나무 가지처럼 휘어져 내리는 날
퇴청마루에 앉아 먼산을 바라보듯
어머니는 손국수를 민다.
수대를 물려 내려온 나왕목 국수안반을 놓고
홍두께로 밀가루 반죽을 밀고 있는
어머니의 손놀림은
마치 줄넘기를 하는 듯 천진난만하고 경쾌하지만
연로한 어머니의 주름살은 밭이랑처럼
너무나 깊게 패어져 있다.
무엇을 생각하며 국수를 미는지
안반 위 밀가루 반죽의 한 귀퉁이가 엷게 뚫어지자
어머니는 재빨리 바가지 속의 밀가루 반죽을 떼어
습관처럼 뚫어진 곳을 다시 때운다.
저렇듯 무심한 어머니의 노동을 지켜보면서
나는 가난한 어머니의 평생을 반추해 본다.
열여섯 나이에
가난한 소작농의 맏며느리로 들어와 큰소리 한번 없이
육남매 키우시면서
숱한 우여곡절 굽이마다 눈물로 넘어
다리 한번 마음놓고 편히 쭉 뻗지 뫃하시는
농사꾼 어머니,
무엇이 그토록 어머니의 마음 졸이게 했을까.
자식들이라는 것이 고작
장마 끝물에 달린 개똥참외보다 나을 것이 없는
우리들의 삶이 저렇듯 손국수의 밀가루 반죽처럼
때론 어이없이 뚫어져버린 허술함으로 가득찰 때
어머니는 자신의 살점을 뜯어
우리들의 뚫어진 곳을 채워주며 살아오시지 않으셨던가.
사내 나이 이십대 후반이 다 지나가도록
여전히 나는 저 무심한 듯한 어머니의
노동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면서
비가 오는
장마비 속에서 뜨거운 손국수를 후루룩 먹으면
가슴속이 먼저 뜨거워지고 종내
아무 상관도 없는 듯한 눈시울마져 뜨거워지고,

.............................................................................................
*오늘 아침 어머니는 수전증으로 국그릇을 들고 심하게 떠셨다.
병원에서도 노인되면 으례 그러려니, 하고 넘겨야지 별다른 치료약이 없다고 한다.
의사 말을 핑계로 어쩔 수 없는 세월탓에 기대어 자위하는 내 무심함이여.
정말 자식이라는 건 가뭄 뒤끝 끝물 개똥참외 보다 하나도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건만, 어머니는 아직도 아침밥을 챙겨 먹이고 싶어 저리 안달이시다.

문득 장마비 내리는 날이 아니라도 뜨거운 손국수를 후루룩 먹고 싶다.
더러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양 어쩔 수 없이 비어져 나오는 눈물도 함께 닦아 내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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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4-2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어져 나오는 눈물 한번 소매로 쓰윽 훔치고 갑니다.
 

[체인 스모커]-한상훈

전화부스에 기대어 담배 피우면서
짝다리를 짚고 나는 몹시 폼을 잡고 싶었다
기침이 잦아지고 내 누런 침은 보도 블록을 적셨다
나는 계속 눈썹에 힘을 주고 담배를 바꿔 물었다
나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는데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러다가 누군가 나타나서 불쑥
나한테 팔짱을 낄지도 모르겠다, 는 요지의 생각을 했다
거리에 배기가스가 충만하였고
나는 가벼워지고 있었다

자동차 똥구멍처럼 연기를 뿜으면서도 또 나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 무얼 찾고 있는지
그대는 어디 숨었나요 보이지 않네요
우리 다시 한번 사랑해요 나른 붙잡아줘요-
줘요, 줘요 하면서 잠시 나는
진짜로 무얼 찾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젖었다
그 무언가 다가와서 나를 어루만질 것 같았다
나는 날아갈 듯이 다리를 떨었다
허공으로 연기가 날았다

나는 여전히 전화부스에 기대고 있었지만
연달아 줄담배를 피우는 동안 무아의 나는
강같이 거리를 떠다니고 있었다
연기 속에서 나는 숨 가빴다
길게 크락숀이 울리고
가로수가 넘어졌다
나는 주저앉았다

아무도 팔짱을 껴오지 않았다
묽고 누런 침이 구두 위에 떨어졌다
연기가 눈을 찔러 눈물이 매웠다

나는 그냥 엎어져 절하고 싶었다
나는 이 검은 아스팔트의 거리와
지치고 외로운 상점들과
흘러가는 모든 색색의 연기들을 , 콱
믿고 싶었다 나는 입맞추고 싶었다
연기가 앞을 가렸다

................................................................................................
*그 예전 나도 그랬다
무작정 떠나고 싶어서, 기약없는 누군가가 불쑥 불쑥 그리워서
한 쪽 다리 떨며 이빨 사이 침도 찍, 찍 갈기면서
잔뜩 폼 잡아 줄담배를 피워대곤 했었다.

때론 쇼펜하우어, 바슐레르, 장꼭토를 이해도 뫃하면서 읽다가 말다가 경기병서곡, 안단테칸타빌레,크리프리차드,태양은 가득히,그레고리 펙,천형의 시인 韓何雲,모딜리아니,하이델베르그 대학,古文眞寶,심지다방,며느리밑씻개...그런 단어들이 무작위로 떠오르고 그땐 그랬다.

그랬다. 누구는 군대를 가고, 취직을 하고, 유학을 떠나고, 막장을 캐는 광부가 되거나 외항선을 타러 간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아득한 세월 그 너머
어느듯 나는 담배도 끊고, 사라지는 담배연기 없이도
오늘 창밖엔 저리도 비 내리고
내 청춘의 빛나던 푸른 꿈과 희망 아직 잊지않고 있는데
......
문득 추억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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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씨를 생각함]-이시영

최명희 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노트를 든 최명희 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퉁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후 서울에서 한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까페였는데 고정희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 '이형, 요즈음 내가 한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원이야, 삼만원......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
*이시영 시인의 '산문시,를 통해 최명희의 인간적인 슬픔의 언저리를 슬쩍 엿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니 "혼불'을 쓰기 위해 온전히 바쳐진 17년 세월의 간난과 궁핍의 시절이 백일하에 드러난 듯한 느낌이다.
한 땀 한 땀 피를 찍어 쓴 듯한 그 '혼불'의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아, 작가란 대체 무엇이건데 이토록 가시밭 형극의 길을 스스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는 것일까.
경외감이 앞서 무슨 말로 사족을 달랴!

'마지막 분대장.을 쓰신 최후의 독립군이라는 연변의 조선족 '김학철,선생도 운명하셨다는 기사를 진작 신문에서 보았으며, 최명희와 함께 이제는 고인이 된 고정희 시인도(이십 수년 전 대구에 다니러 와 내 습작기의 시에 혹평을 한 인연이 있다.) 일생 장렬한 詩業의 길로 自盡하였거니, 세 분 뚜벅 뚜벅 걸어간 길 먼 훗날까지 그 이름 홀로 빛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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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
*아하, 질펀한 대낮에 뻔뻔하게도 참 즐겁다
그냥 저냥 마냥 푹 젖어 한 사나흘 봄볕을 껴안고 뒹굴고 싶어라
아니 봄날의 도피행각,
외딴 골짝 외딴 섬 찾아 그 탱탱한 잡년의 바람기 더불어
이 도저한 관능의 풍문따라 하루쯤 살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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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가 먹고 싶다]-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치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품앗이'로 하는 동기회 일을 맡고 있는 관계로 어제는 상가집에 갔다.
경산 지나 자인 가서 동곡쪽으로 못뚝에서 우측으로 가면 남산면노재지에서 송내리까지 1.5km, 거기 얕으막한 산을 등짐지고 기와집 몇 채 있었다.
함께 간 동료와 향 꽂고 절 하고 부친을 여윈 상주를 문상 하고 어지럽게 차일이 쳐진 마당 비닐 장판위에 앉아 상을 받았다.
소고기국에 밥 말아 후룩 후루룩 시장기를 달래며 어제 마신 소주를 탓하며 음주 단속을 핑계로 참 많이도 술먹는 걸 사양들 한다.
요즘은 잔뜩 취할 기회도 드물지만 너나없이 술을 꺼려 좀처럼 실수도 안하고 상가에서 밤을 샌다는 건 더더욱 보기 힘든 노릇이 되고 말았다.

동료의 재촉도 있었지만, 맨숭맨숭 뻔한 얼굴로 그렇고 그런 최근 경기 이야기와 허전한 동기들 모임을 화재로 삼다 그것도 시들하여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함께간 동료와 돌아오는 길.
며칠전 하관을 하며 상복 앞자락에 흙을 받아 관위에 뿌리던 친구 아들의 퉁퉁부은 눈을 생각했다. 주르르룩 學生豊川任公之柩 위로 쏟아져 내리던 '인제 가면 언제 오는데...' '당신 몇 밤 자고 올긴데.....' 친구 부인의 울부짖음을 떠올렸다.
나 보다는 몇 배나 더 친하게 지내며 고교시절 함께 산악부 활동을 했던 두 친구의 충혈된 눈과 들썩거리던 어깨를 쉬 지울 수 없었다.

죽기전 부도를 맞고 생수를 팔러 이 후배, 저 선배, 옛 동기들 찾아 다니며 마음에 없는 웃음 흘리며 잠시 비굴해졌을 옛 친구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도 어쩌다 함께했던 지난 술자리 등산이야기, 대통령배 우승한 이야기, 아들 자랑 이야기,빛나던 청춘 황홀한 고교시절의 추억담에 열을 내던 녀석의 호기를 생각했다.

송내리에서 남산소재지 지나 자인 거쳐 경산 나오면서,
'야, 니 운동해레이~ 임먀, 우리 나이가 인쟈 퍽퍽 쓰러지는 나이데이~
헬스로 다져진 팔 근육을 뽐내 보이던 또 다른 동기의 취기어린 주정으로 불콰해진 얼굴도 떠올렸다.

문득,
산다는 게 조금은 허전하여서
때론 이유없이 실컷 울고싶어서
좋은 친구와 국수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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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17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 잘 읽고 갑니다.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를 먹고 싶다...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잉크냄새 2004-04-2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
이 구절이 너무 아련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