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저고리

우리의 전통적인 의식주 용품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의장을 보여주는 것은 여인의 한복임에 틀림없다. 몸매를 감싸듯 품어 부드러운 볼륨을 담으면서도 동적인 곡선을 짓는 흐름, 옅은 색의 저고리 빛깔과 대비하여 짙은 색 치마와의 색 조화, 그리고 넉넉한 여유를 보이면서도 몸이 드러나는 데에는 조붓이 여며지는 형태의 맵시가 외관상의 미감을 더해주는 것같다.

한복으로서 여인의 옷은 크게 속옷과 겉옷으로 대별된다. 속옷은 상의에 속적삼, 속저고리, 겨드랑이 및 가슴 가리개용 허리띠가 있고, 하의로는 단속곳, 고쟁이, 다리속곳, 어깨허리의 속치마 등 그 종류가 많은데 반하여 겉옷은 저고리와 치마뿐이다.

양단동다리 치마 저고리

여기에 두루마기를 덧입거나 장옷을 덮어쓰면 성장(盛裝)한 여인의 복식이 다 갖추어진다. 여인들이 나들이할 때에는 내외를 하기 위해 장옷 외에도 너울, 전모, 처네, 쓰개치마 따위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는데, 다만 서민들은 이런 데 구애받지 않고 맨머리로 나다니는 수가 있었다.

이 땅의 전통복식은 우리 겨레가 직조한 옷을 상용하기 시작한 이래 오래도록 기다란 웃저고리와 통 넓은 치마를 받쳐입는 방식으로 일관되어왔다(고구려벽화에 나오는 여인상을 떠올려볼 일이다.). 그때는 저고리 곧은 깃에 앞을 외로 여몄으며, 두루마기 따위 포(袍)는 예외없이 가는 허리띠를 둘러 묶음질했다.

그러다가 고려 충렬왕 이후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의상에서도 몽고풍이 많이 가미되어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저고리, 두루마기같이 여며야 할 곳에는 고름을 다는 습속이 정착되었다. 이런 경로로 띠를 대신한 고름이 생겨나서 닫혀야 할 부분에 포인트를 주며 단조로운 형태에 변화를 일으키는 효과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근세조선기를 통해서 여인의 저고리는 깃과 부리에 끝동을 단 반회장(半回裝)과 겨드랑 및 배래기로 끝동과 같은 색을 두른 삼회장(三回裝) 저고리를 애용했다. 이러한 호사도 양가집에만 허용되어졌을 뿐 서민층에선 저고리에 회장을 넣을 수 없었으니 신분계급의 표시가 엄격했음은 이로써도 짐작된다.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저고리 빛깔은 노란색, 연두색, 옥색 따위의 옅은색이었는데 고름은 유달리 자주색을 많이 써서 액센트가 될만했다. 게다가 고름은 필요한 치수 이상으로 길게 늘여져 움직일 적마다 고름자락이 흔들림으로써 치마의 동선(動線)에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삼화장저고리(조선후기)>

조선시대 후기의 삼회장저고리이다. 깃은 당코깃이고, 길은 녹색 국화문단이고 옷깃과 수구, 견마기는 자주색의 무문단으로 되어 있다.

저고리는 물색 고운 바탕색에다 하얀 동정 그리고 깃과 고름의 선명한 자주색이 한층 돋보일 수 밖에 없었겠다. 비록 의도적이었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하얀 동정은 목덜미로 시선을 끌게 하고 고름은 도톰하게 솟은 앞가슴의 매력을 암시하는 구실을 부수적으로 수행했던 게 아닐까.

치마는 대개 부드러운 감으로 만들기에 선이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몸에 흘러붙어서 내려뜨려진 건 퍽 관능적인 미감을 북돋고, 풀을 먹여 풍성하게 공간을 짓는 것은 우아한 품위를 더해준다. 또 녹색 저고리에 꽃자주 치마, 노란 저고리에 청색 치마는 염염(艶艶)해서 꽃답고, 하얀 모시 치마 저고리는 한 떨기 난초같이 청초한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햇쑥이 돋고 할미꽃이 피는 봄언덕에 치마 저고리 차림으로 나들이를 나온 처녀, 단오날을 맞아 그네 타러 몰려든 부인네들의 한복 물결은 화들짝 핀 진달래보다도, 황홀하게 여울지는 복사꽃보다도 더욱 눈 시리게 한 정경이었다.

그러나 이 가난했던 나라에는 이를 충족치 못해 마음에 멍울이 들고 가슴에 못을 박았던 여인들이 얼마나 되었을 것인가. 작가 정비석의 데뷔작인 단편 '성황당'에는 가난한 아낙네가 새옷을 해 입고 숨가빠했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분홍 항라적삼과 수박색 목메린스 치마를 떨쳐 입고, 흰고무신까지 받쳐 신고 나서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발을 옮겨놓을 때마다 걸음걸이에 치마폭 너풀거리는 것이 보기에도 무지개보다도 고왔다.>

이처럼 마음이 가난했던 사람들, 조그만 선물에 이토록 크게 기뻐하고 감사했던 사람들에게 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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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여염집 여인은 베갯모, 향낭, 노리개 따위에 수를 놓으면서 모란, 국화, 나비, 꾀꼬리를 그려 넣고 <부귀다남(富貴多男)>을 새긴다. 어느 것 하나 이쁘고 곱지 않은 게 없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집안의 단란과 복을 기원한 결과였다. 가슴속에서 안개처럼 뿌옇게 어리는 바램이나 샘물처럼 용솟음치는 격정을 바늘뜸에 용해시켜 저렇듯 아기자기한 무늬로 형상화한 그 마음씨가 참으로 갸륵하다.

병풍이나 족자 따위 큰 작품을 만들 양이면 으레 십장생이 수놓아졌다. 피안세계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신앙을 갖지 못했던 우리 겨레는 현세적인 데 연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승에서의 최고 기대치와 간망(懇望)은 장생불사여서 그를 상징하는 열 가지 물상, 즉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을 가까이 두고자 했다. 이밖에 목숨수(壽)자를 즐겨 새겼던 소이도 여기에 근거한다.

우리 민족에게서 자수는 서화와 각종 공예와 더불어 훌륭한 예술의 한 장르였음이 분명하다. 회화와 수공예의 속성이 어우러져 이룩한 종합예술인 것이다. 그러나 거기 담긴 마음과 뜻으로 볼라치면 수신(修身)이요 신앙이었다.

화조와 산수를 재현함으로써 아름답고 명랑한 이상향을, 용과 호랑이와 가상적 동물을 통해 재앙을 물리치며, 뜻이 맛깔스런 문자를 새겨 복을 구했다. 더구나 십장생도까지 추구했으니 이야말로 기복신앙이라 함직하지 않은가?

바늘집과 바늘방석(왼쪽) / 침선상자(오른쪽)

우리의 자수는 길쌈과 염색의 발달과 더불어 불교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고려조에는 부처님 공양에 쓰이던 불교자수가 주류를 이루다가 근세조선에 넘어와 궁중문화가 개화함으로써 크게 발전되었다. 특히 왕의 예복이나 궁중 혼례복에 화려하게 화조와 산수, 동물 등을 실물형상대로 수놓아 치장했던 것이 차츰 관복에도 상용되어 서민의 일상용품에까지 파급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부처의 공양물과 궁중의 복식 치장으로 성행했던 자수는 서민에게 일반화된 조선왕조 중기에 접어들어서 오늘날 말하는 한국적 전통자수로 정착되었다.

시집가는 처녀는 자수액자를 두어 점 마련하지 않는 이가 없었던 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관되었던 이 나라 풍습이었다. 하얀 명주천에 소나무 가지를 넣고 흰 학을 멋스럽게 올려 앉혔는가 하면 빨간 비단에 연록색으로 솔잎을 매달고 미색으로 학을 수놓은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밥상보, 손수건, 방석, 주머니 등 자잘한 소용품 하나에도 정성과 애교를 담아 바닥 통째, 또는 한귀퉁이에 꽃수를 놓았다. 이럴진대 <생활 있는 곳에 수예가 있다>라는 말이 어찌 함축성있는 말이라 하지 않겠는가

수틀을 들면 누구나 유정(有情)한 법이어서 남녀 모두 W.B.예이츠의 '하늘의 옷감'같은 시를 마음속으로 지어냈을 성싶다.

금빛 은빛 빛을 넣어 짜 늘인/ 수놓인 하늘옷감 내게 있다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푸르고 검고/ 새까만 옷감들이 내게 있다면/ 그대 발길 아래 깔아주련만./ 나는 가난한지라 꿈이 있을 뿐/ 그대 발길 아래 꿈을 폈노라/ 사뿐히 밟고 오라, 꿈에 오는 이.

자수 호표흉배 (조선시대 무관 1,2품의 흉배)

자수는 용포(用布)와 수실이 주재료이다. 수를 놓기 위한 용구로는 바늘과 수틀, 가위가 기본이고 그밖에 골무나 오늘날 쓰는 초크 페이퍼와 초크 페일이 이용된다. 자수를 하는 천으로는 바늘이 잘 통하고 실이 끊기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목면, 실크, 모직물이 두루 통용되는데 옛것을 보면 귀한 것은 대개 명주와 공단이 바탕이 되었다.

수실은 부드럽고 광택이 나는 것이 적당하고, 한국자수(朝鮮繡)는 대개 색실자수에 속한다.

조선수에 쓰는 바늘은 일반적으로 짧고 가는 바늘이다. 조선조 순조 연간에 유씨 부인이 지은 수필 '조침문(弔針文)에 의하면, 자기가 쓰던 바늘을 부러뜨리고난 후 애통해하는 심정을 읊고 있어 당시에 바늘을 귀애해했던 사정을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가위, 골무 같은 것이 필요하나 중요한 용구는 아니고, 도안과 옮기는 법도 유의해야 하지만, 문제는 자수에 담긴 미감과 그걸 표현한 사람의 마음이다. 여인의 얼굴에는 분기가 있고 귀밑머리카락이 있어서 매혹을 더한다. 의상 어느 모서리에는 수가 놓여져서 어여쁨과 감미로움이 보태어짐도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거기에 색실로 수를 놓아 장식한 그 마음이 더 꽃답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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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개

노리개는 이 나라 옛 여인들이 소지했던 패물이나 몸치장에 썼던 장신구 가운데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이것은 귀중품인 동시에 예술품이었고, 또 금은보석이 있는데다 매듭과 수실이 한데 어울려서 가장 여인 취향적인 요소가 많음에 틀림없다. 모양이나 색상 어느 것 하나 이쁘지 않은 게 없다.

노리개의 종류는 주체의 크기와 수량에 따라 다음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 주체가 큰 것이 셋 달린 것을 대삼작(大三作)이라 하는바, 주로 궁중에서 대례복을 입을 때 찼던 것이다. 두 번째로, 작은 주체가 셋 달린 것을 소삼작(小三作)이라 하며 궁중의 소례복 또는 대가집에서 경사때 패용했다. 세 번째로, 주체가 하나인 단작은 상류사회 부인들이 일상 차고 있거나 혹은 중류, 하류계층에서 즐겨 사용할 수 있었던 간소한 노리개이다.

낙지발 술이 기품있게 죽죽 뻗은 대삼작노리개

노리개의 명칭은 대체로 주체의 형상이나 재료의 이름에 따라 붙여진다. <산호단작노리개>는 주체가 산호로 된 단작을 말함이며, <은파란바늘집단작노리개>는 은에다 파란을 입혀서 바늘집을 만든 주체로 단작인 경우를 지칭한다. 또 <투호소삼작노리개>는 주체가 작은 투호(投壺) 셋을 단 노리개를 가리키며, <보석대삼작노리개>라면 큰 보석으로 세 개의 주체를 만들어 넣은 대형 노리개를 일컫는다.

주체의 재료가 되는 귀금속도 다양해서, 우선 금속류로는 금, 은, 구리와 금에 칠보를 입힌 것, 은에 파란을 장식한 것이 첨가된다. 보옥류(寶玉類)로는 홍옥, 백옥, 비취, 자마노, 청강석, 금강석, 공작석, 산호, 수정, 진주 등이 주체가 되고 특히 밀화가 많이 쓰인다.

이런 재료로서 형태는 주로 길상(吉祥)을 나타내는 동, 식물의 형용을 빚었다. 자라, 박쥐, 거북, 원앙, 나비, 해태, 매미는 동물을, 포도, 고추, 호도, 천도, 연꽃은 식물을, 호리병, 북, 장구, 자물쇠, 버선, 방울은 물체를, 그리고 동자(童子), 신선, 보살, 귀면(鬼面)을 조형한 것 등이 골고루 눈에 띈다. 번식력이 강한 것은 다남(多男)을, 귀한 것은 부귀를, 혹은 장수, 강녕의 뜻이 깃들든지 하여 한결같이 복을 빌고 액을 물리치며 부부금실이 좋은 것을 염원한 것이다.

노리개는 주체가 되는 패물 외에 띠돈(帶金), 끈목(多繪), 매듭, 술의 다섯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띠돈은 상단부의 고리로서 노리개를 고름에 걸기 위한 방편이다. 이외에 끈목과 매듭, 술은 명주실을 꼬아 만든 실로 엮어진 것이다.

노리개는 삼국시대때의 요대(腰帶)에서 밑으로 치렁치렁 매달린 요패(腰佩)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출현하지 않았나 하는 짐작이 든다. 그 후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귀부인들이 허리띠에 채색 끈으로써 금방울을 달고, 비단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찼다는 기록이 있다. 이 향낭이 차츰 노리개로 발전했을 터이다.

노리개장식

노리개의 색조는 3색에서 12색에 이르기까지 형형색색인데, 그 중 삼작노리개는 색깔도 선명한 붉은색, 남색, 노랑색이 기본을 이루었고, 간혹 자주, 분홍, 연두, 보라, 옥색 따위를 쓰기도 했다.

'사절복색자장요람'에 의하면, 봄, 여름에는 옥이나 구슬제품으로서 색이 엷은 단작노리개, 가을에는 옥이나 구슬제품으로 된 삼작노리개, 겨울에는 자마노, 밀화 등의 삼작노리개를 패용하였다. 옷 색깔에 따라서도 다르다. 오월 단오날부터 흰옷일 때는 옥 또는 비취노리개, 옥장도와 같은 단작노리개, 8월 보름 이후 색옷을 입을 때는 각기 색깔이 다른 삼작노리개를 찼다. _____전완길의 "韓國化粧文化史"에서

그런가 하면 연약한 부녀자들이 노리개를 패용함으로써 요기를 물리치는 벽사( 邪)에 유의했음도 주목해볼 일이다. 이를테면 도끼노리개, 장도노리개는 실제적인 무기를, 범발톱노리개, 해태노리개, 괴불노리개는 귀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표방하여 재액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방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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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 시작하다}-성미정

옛날에 월튼네 사람들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1900년대 초 미국의 어느 시골을 배경으로 대가족이 훈훈하게 살아가는 드라마였다 가족 수가 11명쯤 되었던 것 같은데 그 드라마는 언제나 마지막 장면이 좋았다 그 큰 집에 창문마다 하나씩 불이 꺼지면서 서로 good night 인사를 했다 그렇게 불이 꺼지면 나는 그 집 큰아들 소설가 지망생 존 보이처럼 내 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우리 식구들도 월튼네 가족처럼 자기 전에 good night 인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일기를 썼던 것 같다 여섯 식구 밖에 되지 않는데 어째서 good night 인사 하나 제대로 하지 않을까 의문이 담긴 글을 썼던 것 같다 (중략) 언젠가는 good night 인사가 없는 우리 집은 집도 아니라고 썼다 언제나 마지막에는 good night 인사를 꼭 했으면 좋겠다고 good night 인사가 없는 불면의 밤 글을 쓰기 시작했다


...........................................................................................................
*'박가분'이라는 화장품.향수 전문 쇼핑몰을 운영하며 세상살이 영 시들하여 선하품이나 하고 있던 어느 밤이었다.
소비자가 올린 게시판 글을 읽던 중 딱딱한 주문서와 함께 색한지에 프린트 된 시 한 편에 참 좋은 느낌을 받았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진작에 시를 보내는 일은 접은지 오래되었건만, 예전에 보낸, 시 하나에 잔잔한 기쁨(?)을 느끼는 아니 그런 사실을 기억하는 소비자가 있다는 게 내겐 정작 마음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참 오래 잊고 살아온 시가 아직도 잔잔한 감동 같은 것을 줄 수 있다니...
그 밤 늦도록 진작 아무렇게나 처박아 둔 박용래의 시선집 '먼 바다'를 읽으면서
내 대학시절 마종기와 김영태와 황동규의 3인 공동시집 "평균율"을 읽던 그 우중충하던 낡은 도서관도 떠올리고,
쓸려간 인파는 외면하고
누이여 사랑은 이다지도 작은 것이었구나...를 되뇌던 사금파리 눈부셔 현기증나는,
먼지 폴폴 날리던 교정도 추억하곤 했다.

........
........

詩를 올리기 시작했다.
안부없는 이 심심한 짓거리,
good morning 인사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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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3-2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님의 시 한구절 한구절....
감동하며 희구하며 잔잔한 감동을 누려볼까 합니다.
 

규중칠우

여인의 바느질하는 모습은 다듬이질과 더불어 우리 겨레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되는 정경 중의 하나이다. 호롱불을 밝혀두고 긴 겨울밤을 그림처럼 조용한 자태로 앉아 깁고 살을 펴는 일에 몰두하는 광경이 장지문에 음영을 드리운 걸 상상해보라. 여인의 미덕인 다소곳함, 조심스럽고 조용한 동작, 부지런함, 땀땀이 아로새겨지는 솜씨가 바로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하겠다.

옷감의 길이를 재는 <자>는 쇠나 나무로 된 것도 있지만 절대다수가 대나무를 재료로 한 것이다. 한쪽으로 금을 넣어 치를 표시하고, 열 치에 한자 표시를 했다. 두 자 길이면 이즘의 도령형으로 60.6센티미터가 되니 사용하기에 알맞춤하다. 때로는 소용 외에, 자식을 훈도하거나 집안에 부리는 아이를 꾸중할 때 종아리 매질로 쓰기도 해서 대쪽이 갈라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바늘, 골무, 인두, 다리미, 실, 자, 가위

가위는 오늘날과 같은 스테인리스가 없던 시대에 무쇠 벼름질로 만든 것이어서 꺼멓고 투박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집에선 크고 작은 종류를 갖추어서 알맞춤하게 사용하나 대개는 한 개로 두루 썼다. 때문에 이가 쉬 무디어져 자주 숫돌에 날을 갈고는 했다.

바늘은 가장 미세한 것인 데다가 쓰임이 잦아 여인네의 총애를 많이 받으며 일상 몸 어디엔가 붙어다녔다. 저고리 고름에 꽂아놓기도 하고 더러는 뒷머리 쪽에 질러 꽂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바느질을 하다가 매끄럽지 못하다 싶으면 바늘끝을 머리카락에 몇차례 그어 머릿기름을 묻게 했던 동작도 낯익은 기억이다.

바늘이 사랑을 받았던 만큼 바늘을 꽂아 간수해두는 물건인 <바늘겨레>란 것도 생겨났다. 흔히 비단으로 만들어 수를 놓은 호사스런 것을 대할 수가 있는데, 그 속에 솜이나 머리카락을 넣어서 바늘이 꽂혀지도록 배려했다. 또 바늘 스물네 개를 납지로 싼 것을 <바늘쌈>이라 하는바 크기가 다른 바늘쌈을 몇낱 갖는 건 지복에 속하는 일이다.

<실>은 고치, 솜, 삼 따위를 가늘고 길게 자아내어선 꼰 것이다. 이것은 명주실, 무명실, 삼실별로 실감개에 감아서 반짇고리에 넣어두고 썼는데, 실감개는 <실패>란 말로 불린다. 바늘귀 구멍이 좁아서 실이 쉽게 꿰이지 않으면 할머니들이 실 끝에 침을 발라 손가락끝으로 문질러서 가까스로 꿰곤 했던 모습은 누구에게나 생생히 환기될 터이다.

골무는 바느질할 때 상하기 쉬운 손부리를 보호하고, 바늘을 눌러 밀기좋도록 손가락 끝에 끼는 물건이다. 가죽조각이나 헝겊을 여러 겹으로 배접하여 만들었다. 바느질할 때엔 금세 눈에 띄었다가는 찾을 땐 잘 나타나지 않은 탓도 있겠으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일감을 많이 안긴 연유에서 <골무는 시어머니 죽은 넋이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빼놓은 골무는 자칫 눈 밖을 벗어나므로 일어서거나 일감을 쳐들어 보아야 나타난다는 뜻에서 비롯된 속담이다.

반짇고리

규방에 없어서는 안 될 반짇그릇, 자, 가위, 색실, 바늘겨레, 실패 등이 어여쁘게 담겨있다.

인두는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이 화로 재 속에 찔려 있었다. 동정을 달거나 깃이나 섶의 주름살을 펼 땐 인두의 좁은 면으로 다린다. 온도가 알맞은가를 가늠하기 위해 인두를 볼 가까이 대어보거나 손바닥에 슬쩍 문질러보는 동작은 거의 무의식적인 관행이었다.

다리미는 숯불을 담은 쇠그릇에 나무막대기를 단 재래식 다리미가 통용되었다. 숯불로 매끄러운 바닥이 달아올라서 이로써 힘주어 누르면서 밀면 무명의 억센 구김질이 가까스로 펴졌다.

근세조선 후기에 씌어져 수필문학의 정채를 띠게 한 '규중칠우쟁론기'를 인용해 보면.......

......척 부인(자)이 가늘고 가는 허리를 빨리 재면서 하는 말이 '내란 몸은 길며 짧으며 좁으며 넓으며 이런 것을 눈치있게 자세히 살피어서 그릇됨이 없게 하니 내 공이 으뜸이로다' 교두각시(가위) 청파(聽罷)에 성을 내어 긴 입을 일긋거리면서 '내 입이 가야 모양과 격식이 나나니, 그대의 일하여 염량(念量)한 공이 나로 말미암아 나타나나니 내 공이 으뜸......' 세요각시(바늘) 변색하여 이르되 '내 몸이 가야 무슨 일이든지 이뤄지나니, 그대들이 아무리 염량과 모양 제도를 한들 한가지나 이뤄낼쏘냐? 그러므로......' 청홍각시(실) 대소 왈 '속담에 이르기를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하였으니 내 몸이 아니 가고야 허다한 일이 한 가지나 될쏘냐? 나보다 더한......' 감투할미(골무) 웃어 가로되 '대저 노소 없이 손가락 아픈 데를 눈치있게 가리어 무슨 일이든지 쉬 이뤄내게 하고 전장에 방패 앞서듯 하나니 이 늙은이 없고는......' 인화낭자(인두) 노기등등하여 '내 발이 한번 지나매 굽은 것이 반듯하여지고 비뚤어진 것이 바로 되어 너희 낯나는 일은 내가 다 펴주니, 내가 아니면......' 울낭자(다리미) 탄식 왈 '인화는 소임이 나와 같은지라, 우리 둘 곧 아니면 어찌 공을 일컬으리오......?'

이 글은 규중칠우가 모여 서로 생색을 내며 다투는 것에 빗대어 세상사람의 처세를 비꼰, 해학과 재치가 넘치는 규방문학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느질하는 모습에서의 근면과 정숙한 아름다움, 바늘쌈과 바늘겨레에서 애틋함과 자잘한 이쁨을 감지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조그마한 일로 앙앙불락하거나 공치사를 늘어놓는 한국 여인의 소졸(疏拙)한 성정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규중칠우는 저마다 모두 한국 여인의 초상을 나타내면서 쟁론기(爭論記)는 또한 그 마음의 소슬한 그림자를 각인하고 있다해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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